복건대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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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복건대만성은 1885년 청나라가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설치한 성으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에 할양되며 폐지되었다. 18세기부터 대만성 설치 논의가 있었으나, 청불전쟁 이후 대만순무가 설치되고, 1887년 정식으로 복건대만성이 설치되었다. 행정 구역은 타이베이부, 타이완부, 타이난부, 타이둥 직례주로 구성되었으며, 순무가 최고 책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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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건대만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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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일반 명칭 | 푸젠-타이완성 |
한자 표기 | 福建臺灣省 |
만주어 표기 | ᡶᡠᡤᡳᠶᠠᠨ ᡨᠠᡳ᠌ᠸᠠᠨ ᡤᠣᠯᠣ (fugiyan taiwan golo) |
성 (행정 구역) | 성 |
![]() | |
역사 | |
이전 | 타이완도 |
성 설치 명령 | 1885년 |
시작 연도 | 1887년 |
종료 연도 | 1895년 |
폐지 날짜 | 4월 17일 |
이후 | 일본 통치 시대의 타이완 |
행정 구역 | |
수도 | 타이완부(1887년 – 1894년) |
현재 |
2. 연혁
대만에 성(省) 설치를 처음 제안한 것은 1737년(건륭 2년) 5월 10일, 내각학사 겸 예부시랑 오금이었다.[1][3] 그러나 청 조정은 대만에 총병과 어사면 충분하고 행정 구역도 1부 4현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채택하지 않았다.[1]
1874년(동치 13년) 일본의 대만 출병(목단사사건) 이후, 청은 대만의 중요성을 인식했지만 대만 처리 방식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정일창 등은 요인 파견으로 충분하다고 했고, 원보항 등은 성 설치를 주장했다.[1] 이홍장이 성 설치에 반대하여 심보정은 "대만의 운영은 복건에 의존하고 있으며, 두 개로 나눌 수 없다"고 하며 성 설치를 반대했다.[1]
1884년 청불전쟁으로 프랑스군이 기륭과 단수이구 호미를 공격했다.[1] 종전 후, 흠차대신 좌종당은 원보항의 주장에 찬성하여 상주, "대만과 펑후에 관한 모든 업무를 대만순무가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1][3] 유명전도 복건순무 사임 후 대만 개발에 전념할 결심을 굳혔다.[1] 1885년(광서 11년) 6월, 정부는 민절총독 양창준이 복건순무 업무 겸임을 인정, 유명전에게 대만 통치를 명령했다.[1]
1885년 10월 12일, 서태후는 복건순무를 대만순무로 변경, 복건성 행정은 민절총독이 책임지도록 하는 조서를 공포했다.[1][3] 유명전은 독립된 성 설치는 어렵다고 보고, 11월 23일 상주했다.[1] 민절총독 양창준은 12월 25일 도가 아닌 봉건적 구역 설치가 필요하다고 상주했다. 1886년 1월 16일, 정부는 감숙 신강성의 예를 참고, 대만과 복건성을 통합하기로 결정했다.[1]
1886년 (광서 12년) 6월 13일, 유명전과 양창준은 회담, 장화현성을 성도로 예정했다. 또한 대만 행정 구역 세분화 필요성을 언급했다.[1][3] 1887년 (광서 13년) 3월 10일, 정부는 이부 요청에 따라 포정사 인원에 1명 결원을 두었다.[4][1] 9월 18일, 유명전은 복건대만순무 인장 발행을 요청했다. 10월 3일, 유명전과 양창준은 "대만의 군현 재편"을 회주했다.[5][1] 잠육영 제안에 따라 성도는 장화현 교자두로 변경, 대만성성을 건설하게 되었다.[1] 10월 24일, 정부 승인으로 대만 행정 구역은 3부 1직례주로 재편되었다.[1]
1888년 (광서 14년) 3월 1일, 유명전은 복건대만순무로 대만에 귀환, 3월 3일부터 공무를 시작했다.[1] 성성이 미완성이라 타이베이부에 주재했다. 1889년(광서 15년) 성성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유명전 사임 후 순무로 취임한 소우렴에 의해 1892년(광서 18년) 중지되었다. 1894년 (광서 20년) 4월 5일, 소우렴과 담종린은 성도 타이베이부로의 정식 이전을 보고했다.[1] 소우렴은 서학당, 번학당 등 유명전의 신정책을 폐지했다.[3]
1895년 (광서 21년) 4월 17일, 청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을 일본에 할양, 복건대만성은 폐지되었다.
2. 1. 건성 논의
건성 논의는 18세기부터 시작되었다. 1737년(건륭 2년) 5월 10일, 내각학사 겸 예부시랑이었던 오금이 처음으로 대만성 설치를 제의했다.[1][3] 그러나 당시 청 조정은 대만에 총병(總兵)과 어사가 이미 충분하고, 행정 구역도 1부 4현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1874년(동치 13년) 목단사사건(牡丹社事件) 이후, 청 조정은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여 대만 문제를 두고 두 파로 나뉘었다.[1] 정일창 등은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 반면, 원보항 등은 건성(建省)을 건의하였다.[1] 이홍장은 건성이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주장했고,[1] 심보정 역시 대만 운영이 복건에 의존적이라며 건성에 반대하여 무산되었다.[1]
2. 2. 건성 과정
1884년 청불전쟁에서 프랑스군이 기륭과 호미 등을 공격하면서 대만 방어의 중요성이 커졌다.[1] 종전 후, 흠차대신 좌종당은 원보항의 건성 건의에 동의하며, 복건순무를 대만순무로 바꾸고 대만과 펑후 관련 업무를 모두 대만순무가 담당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3] 유명전 역시 복건순무 직을 사임하고 대만 개발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1]1885년 10월 12일, 서태후는 조서를 내려 복건순무를 대만순무로 바꾸고, 복건성 행정은 민절총독이 담당하도록 했다.[1][3] 유명전은 대만에 독립된 성을 설치할 여유가 없다고 보고, 11월 23일 "대만의 통치 조직 개편은 당분간 곤란하다"고 상주했다.[1] 민절총독 양창준은 12월 25일 "대만의 개편에 따른 번사의 증설"을 상주하며, 도 대신 봉건적 구역 설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886년 1월 16일, 청 조정은 감숙 신강성의 예를 참고하여 대만 건성은 계속 진행하되, 대만과 복건성을 통합하기로 결정했다.[1]
1886년 7월 14일, 유명전과 양창준은 회담을 통해 장화현성을 성도로 정하고, 대만 행정 구역 세분화 필요성을 제기했다.[1][3] 1887년 3월 10일, 정부는 이부의 요청에 따라 포정사의 인원에 1명의 결원을 두었다.[4][1] 9월 18일, 유명전은 복건대만순무의 인장 발행을 요청했고, 10월 3일 유명전과 양창준은 "대만의 군현 재편"을 회주했다.[5][1] 잠육영의 제안에 따라 성도는 장화현 교자두로 변경되었고, 대만성성 건설이 결정되었다.[1] 10월 24일, 정부 승인으로 대만 행정 구역은 3부 1직례주로 재편되었다.[1]
2. 3. 건성 이후
1888년 3월 1일, 유명전은 복건대만순무에 임명되었다.[1] 처음에는 성성(省城)이 아직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북(臺北)에 임시로 머물렀다.[1] 1889년 8월, 성성 건설이 시작되었으나,[1] 유명전의 사임 후 소우렴이 순무로 취임하면서 1892년 중단되었다.[1] 1894년 4월 5일, 소우렴은 민절총독 담종린과 함께 성도(省都)를 타이베이부로 정식 이전하는 것을 보고했다.[1] 소우렴은 경비 절감 및 인민의 휴양 등을 이유로 서학당, 번학당 등 유명전 시기에 추진된 신정책들을 폐지했다.[3]2. 4. 폐지
1895년 청과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로 복건대만성 전체가 일본에 할양되면서, 복건대만성은 약 10년간 존속하다가 소멸되었다.[1]3. 행정 구역
1887년 복건대만성 설치 당시 하부 행정 구획으로 타이베이부, 타이완부, 타이난부, 타이둥 직례주가 존재했다.[6]
3. 1. 타이베이부 (臺北府)
1875년 타이완부를 분할하여 설치되었다.- 하부 구획: 신주현 (1731년, 장화현을 분할하여 淡水厅|단수청중국어이 설치되어, 1875년에 신주현으로 개편), 이란현 (1810년, 噶瑪蘭廳|가마란청중국어이 설치되어, 1875년에 이란현으로 개편), 단수현 (1875년 설치), 지룽청 (1875년, 단수청을 분할하여 설치), 南雅厅|난야청중국어 (단수청을 분할하여 설치되었다고 여겨짐)
3. 2. 타이완부 (臺灣府)
1684년에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타이완현(1684년-1887년), 펑산현(청나라), 주뤄현만을 관할했다.하부 구획은 다음과 같다.
현/청 | 설치 시기 | 비고 |
---|---|---|
장화현(청나라) | 1723년 | 줄뤄현 분할 |
埔里社厅|푸리서청중국어 | 1875년 | 장화현 분할 |
타이완현(1887년-1895년) | 1887년 | 장화현 분할 |
윈린현(청나라) | 1887년 | 장화현 분할 |
먀오리현(청나라) | 1887년 | 신주현 분할 |
3. 3. 타이난부 (臺南府)
1887년 복건대만성 설치 당시 타이완부를 분할하여 설치되었다. 하부 구획으로는 자이현(1787년, 줄뤄현에서 개칭), 안핑현(1887년, 타이완현에서 개칭), 펑산현, 펑후청(1727년, 타이완현을 분할하여 설치), 헝춘현(1875년, 펑산현을 분할하여 설치)이 있었다.[6]3. 4. 타이둥 직례주 (臺東直隸州)
1888년 설치되었다.[6]하부 구획은 다음과 같다.
구획명 |
---|
난샹 |
광샹 |
신샹 |
펑샹 |
롄샹 |
4. 관제
순무는 정2품으로 복건대만성의 최고 책임자였다. 포정사(종2품)는 행정 및 재정을 담당하였고, 타이완도(정3품)는 감찰 업무를 담당하였다.[3]
참조
[1]
서적
《重修臺灣省通志》卷七·政治志(建置沿革篇)
台湾省文献委員会
1991-06-30
[2]
논문
〈從故宮檔案看清代臺灣行政區域的調整〉
1998-12
[3]
논문
〈臺灣建省演繹〉
1998-12
[4]
문서
1887年3月18日、[[邵友濂]]が初代福建台湾布政使に任命された。
[5]
문서
"{{仮リンク|台湾県 (1887年-1895年)|label=台湾県|zh|臺灣縣 (1887年-1895年)}}、{{仮リンク|雲林県 (清)|label=雲林県|zh|雲林縣 (清朝)}}、{{仮リンク|苗栗県 (清)|label=苗栗県|zh|苗栗縣 (清朝)}}、{{仮リンク|台東直隸州|zh|臺東直隸州}}を新設し、元の{{仮リンク|台湾県 (1684年-1887年)|label=台湾県|zh|臺灣縣 (1684年-1887年)}}を安平県に改称するとされた。"
[6]
웹사이트
臺東直隸州
http://nrch.culture.[...]
臺灣大百科全書
2015-10-31
[7]
논문
《評介林玉茹著《殖民地的邊區:東臺灣的政治經濟發展》》
중앙연구원臺灣史研究所
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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