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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군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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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군팔기는 명나라 말기에 귀순하거나 포로로 잡힌 한인들을 중심으로 청나라가 편성한 군사 조직이다. 처음에는 만주 팔기에 예속되었으나, 청 태종 홍타이지 시기에 한군이 독립된 기적을 갖게 되었다. 한군은 대포를 다루는 중포병 부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청나라의 중원 정복과 녹영군 통제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청나라 중기에는 팔기 인구 증가에 따른 생계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군 출기 정책이 시행되었고, 이후 한군 팔기 후예들은 만주족으로 동화되었다. 한편, 내무부 한군(기고좌령)은 한군팔기와는 다른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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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군팔기
군대 정보
이름한군팔기(漢軍八旗)
활동 기간1642년-1928년
국가청나라
중화민국
만주국
종류보갑(步甲), 마갑(馬甲), 포갑(炮甲), 수사(水師) 등
역할알 수 없음
규모알 수 없음
지휘관각기한군도통(各旗漢軍都統)
본부경사(京師)
광주(廣州)
복주(福州)
서안(西安)
항주(杭州)
동북(東北) 등
별칭알 수 없음
의장알 수 없음
상징색알 수 없음
모토알 수 없음
장비알 수 없음
행진곡알 수 없음
후원자알 수 없음
유명 지휘관
전투
인식표
상삼기(上三旗)양황기(鑲黃旗)[[파일:Bordered Yellow Banner.svg|35px]]
정황기(正黃旗)[[파일:Plain Yellow Banner.svg|35px]]
정백기(正白旗)[[파일:Plain White Banner.svg|35px]]
하오기(下五旗)정홍기(正紅旗)[[파일:Plain Red Banner.svg|35px]]
양백기(鑲白旗)[[파일:Bordered White Banner.svg|35px]]
양홍기(鑲紅旗)[[파일:Bordered Red Banner.svg|35px]]
정람기(正藍旗)[[파일:Plain Blue Banner.svg|35px]]
양람기(鑲藍旗)[[파일:Bordered Blue Banner.svg|35px]]
군기(軍旗)알 수 없음

2. 역사

2. 1. 독립된 기로의 편제

홍이포


한군팔기의 주요 기원은 명말(明末)에 자발적으로 귀부하거나 이후 전쟁 중 후금과 청나라가 요동에서 포로로 붙잡은 한인들로,[9] 이들은 한화된 여진인과 이전에 명나라에 들어가 관료가 된 몽고인 등이었다.[10] 처음에 이들은 모두 만주팔기 아래에 예속되었다.[11] 청태조 누르하치 시기 한인에 대한 몇몇 가혹한 정치로 인해 당초 이들의 지위는 높지 않았다. 청태종 홍타이지는 즉위한 이후, 곧바로 이러한 상황을 바꾸고자 힘썼으며 한군의 설립은 그 결과 중 하나였다.[12]

천총(天聰) 5년(1631) 이전, 후금군은 아직 대포가 없었고 공성전에서 큰 차질을 겪었다. 이에 그해 홍타이지는 영평전투(永平之戰)에서 생포한 왕천상이 대포 제조를 할 수 있었기에 그에게 홍이포 제조를 명령하고 한군 1기(旗)를 처음 편제하였으며 깃발 색을 청색으로 하였다. 어푸 동양성이 이들 '중병(重兵)' 즉 만주어로는 '우전 초오하(ujen cooha)'를 거느렸다.[13] 한군이 '중병'이라 칭해진 것도 항복 한인이 대포를 주조하고 장관하면서 생긴 이름이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한군 창제 당시 이들은 팔기군대의 중포병부대 역할을 했다.[14][15] 화포가 후금군에 갖는 중요성도 한군 지위를 높였다.[16]

숭덕(崇德) 2년(1637) 음7월, 한군은 2기로 확장되었으나 깃발색은 그대로 청색이었다. 2년 후인 숭덕 4년(1639), 한군은 다시 4기로 늘어났고, 깃발은 순청양황(純靑鑲黃), 순청양백(純靑鑲白), 순청양홍(純靑鑲紅), 순청색(純靑色) 네 가지였다. 그러나 한군일기, 한군이기, 한군사기 시기에 상관없이 기하 소속 한인 본적은 모두 만주 기분(旗分)에 속하였으며, 당시 한군 기색은 병종(兵種)에 대한 구분에 불과하였다.[17] 숭덕 7년(1642) 음6월, 청이 송금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이 전투에서 항복한 사람들과 이전의 대릉하 전투에서 항복한 사람들이 좌령으로 편제되었고, 기존 한인좌령(漢人佐領)은 함께 한군팔기로 조직되었으며 기색은 만주팔기와 같았다. 이에 한군은 독립된 기적(旗籍)을 갖기 시작했다.[18]

2. 1. 1. 홍이포와 한군 중포병 부대



한군팔기의 주요 기원은 명말(明末)에 자발적으로 귀부하거나 이후 전쟁 중 후금과 청나라가 요동에서 포로로 붙잡은 한인이 중심이 되며, 또한 일부는 한화된 여진인과 이전에 명나라에 들어가 관료가 된 몽고인 등이었다.[10] 처음에 이들은 모두 만주팔기 아래에 예속되었다.[11] 청태조 누르하치 시기 한인에 대한 몇몇 가혹한 정치로 인해 당초 이들의 지위는 높지 않았다. 청태종 홍타이지는 즉위한 이후, 곧바로 이러한 상황을 바꾸고자 힘썼으며 한군의 설립은 그 결과중 하나였다.[12]

천총(天聰) 5년(1631) 이전, 후금군은 아직 대포가 없었고 공성전에서 큰 차질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그해 홍타이지는 영평전투(永平之戰)에서 생포한 왕천상(王天相)이 대포 제조를 할 수 있었기에 그에게 홍이포 제조를 명령하고 한군 1기(旗)를 처음 편제하였으며 깃발 색을 청색으로 하였던 바, 어푸 동양성이 이들 '중병(重兵)' 즉 만주어로는 '우전 초오하(ujen cooha)'를 거느렸다.[13] 한군이 '중병'이라 칭해진 것도 항복 한인이 대포를 주조하고 장관하면서 생긴 이름이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한군 창제 당시 이들은 팔기군대의 중포병부대 역할을 했다는 것,[14][15] 화포가 후금군에 갖는 중요성도 한군 지위를 높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16]

숭덕(崇德) 2년(1637) 음7월, 한군은 2기로 확장되었으나 깃발색은 그대로 청색이었다. 2년 후인 숭덕 4년(1639), 한군은 다시 4기로 늘어났고, 깃발은 순청양황(純靑鑲黃), 순청양백(純靑鑲白), 순청양홍(純靑鑲紅), 순청색(純靑色) 네 가지였다. 그러나 한군일기, 한군이기, 한군사기 시기에 상관없이 기하 소속 한인 본적은 모두 만주 기분(旗分)에 속하였으며, 당시 한군 기색은 병종(兵種)에 대한 구분에 불과하였다.[17] 숭덕 7년(1642) 음6월, 청이 송금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이 전투에서 항복한 사람들과 이전의 대릉하 전투에서 항복한 사람들이 좌령으로 편제되었고, 기존 한인좌령(漢人佐領)은 함께 한군팔기로 조직되었으며 기색은 만주팔기와 같았기에, 이에 한군은 독립된 기적(旗籍)을 갖기 시작했다.[18]

2. 1. 2. 한군 1기에서 한군팔기로



한군팔기의 주요 기원은 명말(明末)에 자발적으로 귀부하거나 이후 전쟁 중 후금과 청나라가 요동에서 포로로 붙잡은 한인들로,[9] 이들은 한화된 여진인과 이전에 명나라에 들어가 관료가 된 몽고인 등이었다.[10] 처음에 이들은 모두 만주팔기 아래에 예속되었다.[11] 청태조 누르하치 시기 한인에 대한 몇몇 가혹한 정치로 인해 당초 이들의 지위는 높지 않았다. 청태종 홍타이지는 즉위한 이후, 곧바로 이러한 상황을 바꾸고자 힘썼으며 한군의 설립은 그 결과중 하나였다.[12]

천총(天聰) 5년(1631) 이전, 후금군은 아직 대포가 없었고 공성전에서 큰 차질을 겪었다. 이에 그해 홍타이지는 영평전투(永平之戰)에서 생포한 왕천상이 대포 제조를 할 수 있었기에 그에게 홍이포 제조를 명령하고 한군 1기(旗)를 처음 편제하였으며 깃발 색을 청색으로 하였다. 어푸 동양성이 이들 '중병(重兵)' 즉 만주어로는 '우전 초오하(ujen cooha)'를 거느렸다.[13] 한군이 '중병'이라 칭해진 것도 항복 한인이 대포를 주조하고 장관하면서 생긴 이름이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한군 창제 당시 이들은 팔기군대의 중포병부대 역할을 했다.[14][15] 화포가 후금군에 갖는 중요성도 한군 지위를 높였다.[16]

숭덕(崇德) 2년(1637) 음7월, 한군은 2기로 확장되었으나 깃발색은 그대로 청색이었다. 2년 후인 숭덕 4년(1639), 한군은 다시 4기로 늘어났고, 깃발은 순청양황(純靑鑲黃), 순청양백(純靑鑲白), 순청양홍(純靑鑲紅), 순청색(純靑色) 네 가지였다. 그러나 한군일기, 한군이기, 한군사기 시기에 상관없이 기하 소속 한인 본적은 모두 만주 기분(旗分)에 속하였으며, 당시 한군 기색은 병종(兵種)에 대한 구분에 불과하였다.[17] 숭덕 7년(1642) 음6월, 청이 송금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이 전투에서 항복한 사람들과 이전의 대릉하 전투에서 항복한 사람들이 좌령으로 편제되었고, 기존 한인좌령(漢人佐領)은 함께 한군팔기로 조직되었으며 기색은 만주팔기와 같았다. 이에 한군은 독립된 기적(旗籍)을 갖기 시작했다.[18]

2. 2. 종용입관(從龍入關)

원래 명(明)의 대학사(大學士)였던 병부상서(兵部尙書) 홍승주(洪承疇)는 청에 투항한 후 한군 양황기(漢軍鑲黃旗)에 예속되어 청의 중원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한군팔기는 청의 중원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청군 입관 이후 중원 지형과 적정에 대한 이해면에서 한군은 만주기인보다 더욱 익숙하였다.[19] 게다가 수백 만 항청 무장 세력을 직면하면서 한군은 만주팔기보다 더욱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였고, 이는 청조 입관 후 한군이 남정서토(南征西討)의 선봉이 되게 하였다. 특히 공성전과 산이 많은 남방 지대에서 만주 기병(騎兵)은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고, 한군은 청군이 이 지역을 정복하는데 있어 주력 부대가 되었다.[20]

한군은 새로 귀부한 한인으로 구성된 무장 세력인 녹영군(綠營軍)을 견제하였다.[21] 청군 입관 후, 민족 갈등이 극에 달하였다. 만주인이 직접 새로 귀부한 한인을 통제하려 하면 종종 실패하였고, 심지어 한인들이 투항 후에 다시 배반하는 경우도 있어, 청조 통치자나 파견 한군군관이 녹영을 통제하였다. 혹은 명에서 귀순한 군관을 한군에 편입하고 또한 원래 부대를 거느리고 참전하게 하였다.[22] 한군으로 녹영 통령을 유지하는 것이 실제로 통제 효과를 달성한데다 전투 공적을 거두기도 하였기에, 녹영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23]

한군팔기의 역할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한군 인재의 직접 임명보다 좋은 것이 없었다. 이들은 청군 남정 시기에 저항세력의 의지 와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항청세력에게는 청에 항복하는 것이 한군처럼 중용될 수 있을 것라고 기대하게 하였다.[24] 일례로, 명에서는 대학사(大學士)였다가 한군양황기(漢軍鑲黃旗)에 편입된 홍승주(洪承疇)는 화남(華南) 경략에서 교착 상태였던 서남 지구 전투가 점차 역전되게 하였다.[25] 이외에도 청군 칼끝이 남쪽으로 이어짐에 따라 만주팔기 군사는 점점 지쳐갔고 이에 한군도 주방팔기(駐防八旗)의 중요 부분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군은 관내(关内)에서 보통 만주팔기와 몽고팔기가 함께 혼합되어 주방하다가, 삼번의 난 진압 후에는 한군은 다시 복건(福建)과 광동(廣東) 등 연해 성(省)에 진주하였다.[26]

2. 2. 1. 남방 정벌과 한군

|섬네일|원래 명(明)의 대학사(大學士)였던 병부상서(兵部尙書) 홍승주(洪承疇)는 청에 투항한 후 한군 양황기(漢軍鑲黃旗)에 예속되어 청의 중원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한군팔기는 청의 중원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청군 입관 이후 중원 지형과 적정에 대한 이해면에서 한군은 만주기인보다 더욱 익숙하였다.[19] 게다가 수백 만 항청 무장 세력을 직면하면서 한군은 만주팔기보다 더욱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였고, 이는 청조 입관 후 한군이 남정서토(南征西討)의 선봉이 되게 하였다. 공성전과 산이 많은 남방 지대에서 만주 기병(騎兵)은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고, 한군은 청군이 이 지역을 정복하는데 있어 주력 부대가 되었다.[20]

한군은 새로 귀부한 한인으로 구성된 무장 세력인 녹영군(綠營軍)을 견제하였다.[21] 청군 입관 후, 민족 갈등이 극에 달하였다. 만주인이 직접 새로 귀부한 한인을 통제하려 하면 종종 실패하였고, 심지어 한인들이 투항 후에 다시 배반하는 경우도 있어, 청조 통치자나 파견 한군군관이 녹영을 통제하였다. 혹은 명에서 귀순한 군관을 한군에 편입하고 또한 원래 부대를 거느리고 참전하게 하였다.[22] 한군으로 녹영 통령을 유지하는 것이 실제로 통제 효과를 달성한데다 전투 공적을 거두기도 하였기에, 녹영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23]

한군팔기의 역할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한군 인재의 직접 임명보다 좋은 것이 없었다. 이들은 청군 남정 시기에 저항세력의 의지 와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항청세력에게는 청에 항복하는 것이 한군처럼 중용될 수 있을 것라고 기대하게 하였다.[24] 일례로, 명에서는 대학사(大學士)였다가 한군양황기(漢軍鑲黃旗)에 편입된 홍승주(洪承疇)는 화남(華南) 경략에서 교착 상태였던 서남 지구 전투가 점차 역전되게 하였다.[25] 이외에도 청군 칼끝이 남쪽으로 이어짐에 따라 만주팔기 군사는 점점 지쳐갔고 이에 한군도 주방팔기(駐防八旗)의 중요 부분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군은 관내(关内)에서 보통 만주팔기와 몽고팔기가 함께 혼합되어 주방하다가, 삼번의 난 진압 후에는 한군은 다시 복건(福建)과 광동(廣東) 등 연해 성(省)에 진주하였다.[26]

2. 2. 2. 녹영군과 한군

한군은 새로 귀부한 한인으로 구성된 무장 세력인 녹영군(綠營軍)을 견제하였다.[21] 청군 입관 후, 민족 갈등이 극에 달하였다. 만주인이 직접 새로 귀부한 한인을 통제하려 하면 종종 실패하였고, 심지어 한인들이 투항 후에 다시 배반하는 경우도 있어, 청조 통치자나 파견 한군군관이 녹영을 통제하였다. 혹은 명에서 귀순한 군관을 한군에 편입하고 또한 원래 부대를 거느리고 참전하게 하였다.[22] 한군으로 녹영 통령을 유지하는 것이 실제로 통제 효과를 달성한데다 전투 공적을 거두기도 하였기에, 녹영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23]

한군팔기는 청의 중원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청군 입관 이후 중원 지형과 적정에 대한 이해면에서 한군은 만주기인보다 더욱 익숙하였다.[19] 게다가 수백 만 항청 무장 세력을 직면하면서 한군은 만주팔기보다 더욱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였고, 이는 청조 입관 후 한군이 남정서토(南征西討)의 선봉이 되게 하였다. 더욱이 공성전과 산이 많은 남방 지대에서 만주 기병(騎兵)은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고, 한군은 청군이 이 지역을 정복하는데 있어 주력 부대가 되었다.[20]

2. 2. 3. 한군 출신 주요 인물

|섬네일|원래 명(明)의 대학사(大學士)였던 병부상서(兵部尙書) 홍승주(洪承疇)는 청에 투항한 후 한군 양황기(漢軍鑲黃旗)에 예속되어 청의 중원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홍승주(洪承疇)는 화남(華南) 경략에서 교착 상태였던 서남 지구 전투가 점차 역전되게 하였다.[25]

범문정(范文程), 영완아(寧完我), 장존인(張存仁), 홍승주 등은 특별고문 신분으로 황제와 만주 귀족 대부분에 영향을 주었다.[28]

한군팔기에는 전공으로 인하여 유명해진 세가(世家)가 많다. 이영방(李永芳), 범문정(范文程), 동양성(佟養性), 석정주(石廷柱), 상가희(尙可喜), 경중명(耿仲明), 심지상(沈志祥), 장대유(張大猷), 포승선(鮑承先), 조대수(祖大壽), 마광원(馬光遠), 채사영(蔡士英), 손득공(孫得功), 왕세선(王世選), 좌몽경(左夢庚), 시랑(施琅) 등의 가문이 있다. 심지어 상(尙), 경(耿), 석(石), 이(李), 동(佟), 조(祖), 채(蔡), 왕(王) 여덟가문을 '한군팔대성(漢軍八大姓)'이라고 하였다.[34]

2. 3. 청 중기 출기

강희제(康熙帝) 연간(1662-1722) 말기, 팔기 인구가 늘면서 생계 문제가 발생하였다. 청 통치자들은 이에 대한 해결 방책 중 하나로서 자력(資歷)이 낮은 한군을 팔기에서 내보내는 것이었다.[38] 이들은 유래가 복잡하고 강령한 한인 풍속을 가지고 있었기에 청 통치자들은 줄곧 이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39] 건륭제(乾隆帝)는 건륭 7년(1742)에 정식으로 한군출기(漢軍出旗) 명령을 내렸다. 후금 시절부터 만주 정권에 복속하여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여 중원으로 들어온 '종용입관(從龍入關)'의 요동한군(遼東漢軍, 속칭 진한군陳漢軍)은 출기되지 않았지만, 입관 이후 귀순하거나 삼번(三藩)에 소속된 자와 같이 한군팔기 조직 중 나머지 부분은 모두 출기 대상이었다. 한군출기는 실제로 신한군(新漢軍)을 강제로 팔기에서 내보내는 조치였다.[40] 옹정제(雍正帝) 원년(1723), 한군과 한인가노(漢人家奴) 장정은 총 44만 여명이었으며 이는 당시 팔기 인정 총액의 72% 정도를 점하였다. 출기 이후 가경제(嘉慶帝) 원년(1796) 통계에서는 총 인구의 43%로 줄어들었다. 한군충기 규모가 거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41]

2. 3. 1. 출기 배경과 과정

강희(康熙) 연간(1662-1722) 말기, 팔기 인구가 늘면서 생계 문제가 발생하였다. 청 통치자들은 이에 대한 해결 방책 중 하나로서 자력(資歷)이 낮은 한군을 팔기에서 내보내는 것이었다.[38] 이들은 유래가 복잡하고 강령한 한인 풍속을 가지고 있었기에 청 통치자들은 줄곧 이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39] 건륭 7년(1742) 건륭제는 정식으로 한군출기 명령을 내렸다. 후금 시절부터 만주 정권에 복속하여 산해관을 돌파하여 중원으로 들어온 '종용입관(從龍入關)'의 요동한군(遼東漢軍, 속칭 진한군陳漢軍)은 출기되지 않았지만, 입관 이후 귀순하거나 삼번(三藩)에 소속된 자와 같이 한군팔기 조직 중 나머지 부분은 모두 출기 대상이었다. 한군출기는 실제로 신한군(新漢軍)을 강제로 팔기에서 내보내는 조치였다.[40] 옹정(雍正) 원년(1723), 한군과 한인가노(漢人家奴) 장정은 총 44만 여명이었으며 이는 당시 팔기 인정 총액의 72% 정도를 점하였다. 출기 이후 가경(嘉慶) 원년(1796) 통계에서는 총 인구의 43%로 줄어들었다. 한군충기 규모가 거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41]

2. 3. 2. 출기 대상과 규모

강희(康熙) 연간(1662-1722) 말기, 팔기 인구가 늘면서 생계 문제가 발생하였다. 청 통치자들은 이에 대한 해결 방책 중 하나로서 자력(資歷)이 낮은 한군을 팔기에서 내보내는 것이었다.[38] 이들은 유래가 복잡하고 강령한 한인 풍속을 가지고 있었기에 청 통치자들은 줄곧 이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39] 건륭제(乾隆帝)는 건륭 7년(1742)에 정식으로 한군출기(漢軍出旗) 명령을 내렸다. 후금 시절부터 만주 정권에 복속하여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여 중원으로 들어온 '종용입관(從龍入關)'의 요동한군(遼東漢軍, 속칭 진한군陳漢軍)은 출기되지 않았지만, 입관 이후 귀순하거나 삼번(三藩)에 소속된 자와 같이 한군팔기 조직 중 나머지 부분은 모두 출기 대상이었다. 한군출기는 실제로 신한군(新漢軍)을 강제로 팔기에서 내보내는 조치였다.[40] 옹정(雍正) 원년(1723), 한군과 한인가노(漢人家奴) 장정은 총 44만 여명이었으며 이는 당시 팔기 인정 총액의 72% 정도를 점하였다. 출기 이후 가경(嘉慶) 원년(1796) 통계에서는 총 인구의 43%로 줄어들었다. 한군충기 규모가 거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41]

2. 3. 3. 진한군과 신한군

강희(康熙) 연간(1662-1722) 말기, 팔기 인구가 늘면서 생계 문제가 발생하였다. 청 통치자들은 이에 대한 해결 방책 중 하나로서 자력(資歷)이 낮은 한군을 팔기에서 내보내는 것이었다.[38] 이들은 유래가 복잡하고 강령한 한인 풍속을 가지고 있었기에 청 통치자들은 줄곧 이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39] 건륭 7년(1742) 건륭제는 정식으로 한군출기 명령을 내렸다. 후금 시절부터 만주 정권에 복속하여 산해관을 돌파하여 중원으로 들어온 '종용입관(從龍入關)'의 요동한군(遼東漢軍, 속칭 진한군陳漢軍)은 출기되지 않았지만, 입관 이후 귀순하거나 삼번(三藩)에 소속된 자와 같이 한군팔기 조직 중 나머지 부분은 모두 출기 대상이었다. 한군출기는 실제로 신한군(新漢軍)을 강제로 팔기에서 내보내는 조치였다.[40] 옹정(雍正) 원년(1723), 한군과 한인가노(漢人家奴) 장정은 총 44만 여명이었으며 이는 당시 팔기 인정 총액의 72% 정도를 점하였다. 출기 이후 가경(嘉慶) 원년(1796) 통계에서는 총 인구의 43%로 줄어들었다. 한군충기 규모가 거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41]

2. 4. 만주족으로의 융화

청나라 초기, 팔기에 남은 진한군(眞漢軍)의 후예들은 이미 만주족 문화에 동화되어, 만주어를 사용하고 만주족 풍속을 따랐다.[42] 프랑스 선교사 조아킴 부베(백진)는 이들을 '타타르화된 한인'이라고 칭했다.[42] 건륭제 시기에는 청나라에서 편찬한 『국사열전(國史列傳)』에서 한군 명인(名人)들을 『만명신전(滿名臣傳)』에 포함시켰다.[43] 청나라 말기에는 만주, 몽골, 한군팔기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기인(旗人) 집단은 공동체 의식을 형성했다.[44][45]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중화민국 시기 이후 한군팔기 후예들은 대부분 만주족 정체성을 선택했으며,[46] 한족들은 이들을 동포로 인정하지 않았다.[47] 조상이 한족이라고 해서 그 후예를 한족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당사자들에게는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48] 만주족 정체성을 가진 대표적인 한군 후예로는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가문이 있으며, 이들은 청나라 시대에 삭다(沙格達)라는 만주 성씨를 사용했다.[49] 현대 매체에서도 상씨 가문의 후예들이 스스로를 만주족이라고 밝히고 있다.[50] 이 외에도, 명나라 개국공신 상우춘(常遇春)의 9세손 상랑(常朗)의 후예들도 만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51]

3. 내무부 한군 (기고좌령)

팔기제도 중 포의 혹은 보오이(booi, 包衣) 조직의 기고좌령(旗鼓佐領)은 일부 문헌에서 한군(漢軍)이라 하였으며, 포의한군(包衣漢軍), 기고한군(旗鼓漢軍), 내무부한군(內務府漢軍) 등이 있었다.[52] 혹은 한군이라고 줄여 말하기도 하였으나, 실제 기고좌령은 만주 기분 아래의 포의 조직이며 한군팔기 일부분이 아니다.[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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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웹사이트 吉祥满族:汉军八旗八大姓氏简述 http://www.manchu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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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뉴스 吉林资讯:四平恋人举办满族婚礼 新娘是清朝王爷尚可喜后人(转自城市晚报) http://news.365ji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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