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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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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모노세키 조약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강화 조약이다.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했으며,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일본이 대만을 식민 통치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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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조약
조약 정보
조약 명칭시모노세키 조약 (下關條約), 마관 조약 (馬關條約), 일청강화조약 (日淸媾和條約)
다른 이름하관 조약, 마관 조약
유형불평등 조약
서명일1895년 4월 17일
서명 장소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발효일1895년 5월 8일
조인국청나라
일본 제국
당사자이홍장, 이경방
이토 히로부미, 무쓰 무네미쓰
기탁자국립고궁박물원, 타이완
일본 국립공문서관
사용 언어중국어, 일본어
배경
관련 전쟁청일전쟁
조약 내용
주요 내용조선의 독립 인정
타이완, 랴오둥반도, 펑후 제도의 일본 할양
청나라의 일본에 대한 2억 테일의 배상금 지불
청나라 일부 도시와 항구 개방
최혜국 대우
추가 정보
관련 조약조일동맹조약
랴오둥반도 반환 조약
위키소스시모노세키 조약
링크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지도 정보
시모노세키 조약 일본어판

2. 배경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일본 역시 제물포 조약톈진 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출병했다. 청나라는 조선을 속방으로 여겨 파병을 통보했지만, 일본은 상인과 공관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다.[83][84][85][86] 이토 히로부미청일 전쟁을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에서 청군을 압도하기 위해 혼성여단을 파견했다.

무쓰 무네미쓰는 조선이 독립국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내정개혁을 요구했다. 이는 일본이 조선 내정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는 조선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오토리 게이스케가 조선을 '불기독립' 상태로 왜곡하는 모순을 드러냈다.[87][88] 경복궁 점령 이후, 일본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폐기를 강요하고, 잠정합동조관과 조일동맹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내정 개혁을 압박했다. 1895년 1월 7일, 고종홍범 14조를 반포하여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자주독립을 선언했다.[89]

청나라는 평양 전투 등에서 패배하며 일본에 항복했다.[90] 영국은 강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일본은 여순과 대련 할양을 요구하며 청나라 영토를 탐냈다. 1895년 4월 1일부터 시모노세키에서 강화 회담이 진행되었고, 일본은 청나라에 조공책봉체제 폐지와 성경성 남부 땅을 요구했다. 이홍장은 중립을 제안했지만 묵살당하고, 결국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의 봉건적 의무가 폐지되었다.[91]

한편, 러시아는 삼국간섭 이후 만주 철도 건설을 추진하며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노선을 단축하려 했다. 또한 뤼순 항구 시설을 개선하고 다롄을 건설하며 리아오둥 반도 임대를 체결했다. 러시아는 뤼순을 통해 해양 세력으로 성장하려 했지만, 이는 일본의 세력권과 충돌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은 러시아의 행위에 분노했고, 이는 러일 전쟁으로 이어져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2. 1. 동학농민운동과 청나라의 개입

19세기 말 조선의 사회 모순은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조선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고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1894년 5월 17일, 선혜당상 민영준은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원세개와 밀약을 맺고 고종에게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다음 날 새벽 어전회의에서 여러 대신들은 외국 군대를 불러 내란을 진압하는 것에 반대하며, '폐정개혁'과 부패한 관리 처벌을 통해 민심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종은 청나라 군대 파병은 어렵다고 하며 의론을 부결시켰다.[81][82]

그러나 5월 23일,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농민군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보고하며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5월 26일경 민영준은 원세개에게 재차 파병을 요청했다. 5월 30일경,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함락되자, 민영준은 원세개에게 다시 청나라 군대 파병을 요청하는 한편, 그날 밤 시원임대신회의에 청나라 군대 파병 논의를 상정했다. 대신들은 천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대와 함께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올 것을 우려하여 파병에 반대했다. 고종은 원세개가 조선군을 지휘할 것을 제안했으나, 6월 2일경 원세개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고종은 비밀리에 원세개와 상의하여 청나라 군대 파병을 결정했다.[81][82]

2. 2. 청일전쟁의 발발

19세기 말 조선의 사회 모순은 동학농민전쟁을 야기하였는데, 당시 조선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고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했다. 1894년 5월 17일, 선혜당상 민영준은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袁世凱) 원세개와 밀약을 맺고 고종에게 청군의 파병을 요청했다. 다음 날 새벽 어전회의에서 여러 대신들은 외병(外兵)을 불러 내란을 진압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우선 '폐정개혁'을 하고 부패한 수령 및 방백을 처벌하여 민심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고종은 청군 파병은 곤란하다고 하며 의론을 부결하였다. 그러나 5월 23일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농민군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보고하며 청군 파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5월 26일께 민영준은 원세개에게 상국(上國)과 소국(小國)이 통양일체(痛痒一體)임을 내세워 재차 파병을 요청했다. 5월 30일경,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함락되자, 이틀 뒤 민영준은 원세개에게 다시 청군 파병을 요청하는 한편, 그날 밤 시원임대신회의에 청군 파병 논의를 상정했다. 대신들은 천진조약에 따라 청군과 함께 일본군도 조선에 진입할 것이므로 파병에 반대하였다. 고종은 원세개가 조선군을 지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6월 2일경 원세개는 고종의 제의를 거절했다. 결국 고종은 시원임대신회의 대신 비밀리에 원세개와 상담하며 청군 파병을 결정하였다.[81][82]

일본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조선 조정이 결국 청군 파병 논의를 채택할 것이라 전망하고 일본 본국에 청군 파병에 대비할 것을 주문했다.[83] 일본 외무부는 신속하게 제물포 조약 제5항과 천진조약 3항을 근거로 조선에 출병할 것을 지시했다. 청 총리아문은 주청일본공사관과 주일청국공사관을 통해 일본 정부에 청군 파병을 “속방(屬邦, tributary state)을 보호(保護, protecting)하는 구례(舊例)”라고 통보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은 상인과 공관 보호를 위해 파병한다고 회답했다. 청 정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해 파병했지만 조선에서 소극적이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청일전쟁을 상정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조선에서 청군을 압도하기 위해 긴급하게 강력한 혼성여단을 조직해 청군보다 먼저 조선에 도착하여 한성으로 진입했다. 청군의 움직임을 빌미로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할 명분을 차단하고자 했던 청국은 조선은 자국의 반주지국(半主之國, Semi-Sovereign State)・속국(屬國, Dependent State)으로서 자립(自立)의 권리를 가지기 때문에 청국이 내정에 간섭하기 어려운데, 인방(隣邦)인 일본은 더욱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게다가 조선 정부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조병직(趙秉稷)으로 하여금 6월 12~22일 일본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일본은 대부분 무응답으로 일관하거나, 조선이 청국의 속방(屬邦, tributary state)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적이 없다고 회답했다.[84][85][86]

무쓰 무네미쓰는 조선이 “독립국(independence)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필수 요소 몇 가지가 결여(Government of that country is lacking in some of the elements which are essential to responsible independence)”되었기 때문에 내정개혁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은 자국이 독립국으로 상정한 국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출병을 단행해서 그들에게 독립국의 역할을 요구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는 조병직의 항의에 대해 오토리 게이스케가 청국 군주가 단 한 번도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 적이 없으므로 조선이 ‘불기독립(不覊獨立)’하다고 왜곡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87][88]

2. 3. 일본의 승리와 강화 협상

이토 히로부미가 이끄는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강화 협상에 돌입했다. 청나라는 1894년 11월에 이미 일본에 강화 의사를 전달했고, 조선의 독립과 전쟁 배상금 지불을 제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지속하려는 의지를 보였고, 무쓰 무네미쓰 외무상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92][93]

일본 내에서는 해군이 자원 확보와 남진의 거점을 위해 대만과 팽호열도 할양을, 육군은 요동반도 할양을 요구했다.[94][95] 대장성은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했으며,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고평은 10억 냥(테일)을 제시했다.[96][97][98] 니시 도쿠지로 주러시아 일본 공사는 영토 할양이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으므로 배상금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9] 반면, 아오키 슈조 주영 일본 공사는 성경성과 길림성, 직례성 일부를 할양받아 군사 거점을 건설하고, 배상금은 1억 파운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0]

1895년 2월, 히로시마 현청에서의 강화 교섭을 묘사한 쓰치야 고이쓰(土屋光逸)의 목판화 「청화사담판지도(請和使談判之図)」


1894년 12월, 청나라는 장음환과 소우렴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나가사키 회담을 제안했지만, 일본은 히로시마를 회담 장소로 통보했다. 1895년 1월 31일, 장음환과 소우렴은 히로시마에 도착했고,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무쓰 무네미쓰를 전권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청나라 전권대신의 지위가 일본 측보다 낮아 격식 문제가 제기되었다.[102][103]

무쓰 무네미쓰는 청나라 측 문서가 전권 위임장이 아니라고 지적하며, 1895년 2월 2일 협상을 중단했다.[104] 일본은 청나라 전권대신의 본국과의 연락을 방해했고, 결국 이홍장이나 공친왕이 전권대신으로 와야 한다고 요구했다.[105][106][107]

광서제와 주전파는 패전으로 전의를 상실했고, 1895년 2월 19일 청나라 정부는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했다. 이홍장은 영토 양여에 대한 국내 규정이 없음을 언급하며 협상에 임했고, 서태후로부터 영토 양여를 승인받았다.[108][109]

협상이 이뤄진 슌반로우 (2004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왕복할 때 거쳐갔던 시모노세키는 도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었다.

이홍장은 1895년 3월 19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했고, 다음 날 슌반루(春帆楼)에서 회담이 시작되었다. 청나라는 휴전을 제안했지만, 일본은 팽호제도를 제압하여 대만 상륙 발판을 확보하려 했다. 3월 21일, 일본은 가혹한 휴전 조건을 제시하며 청나라를 압박했다.[110][111]

3월 24일, 이홍장은 자유당계 인물에게 저격당해 부상을 입었다.[112][113][114] 이 사건으로 일본은 불리한 입장에 놓였고, 이홍장은 이를 이용하려 했다.[115][116][117]

시모노세키 조약 협상 기간 촬영된 북양대신 이홍장.


이토 히로부미무쓰 무네미쓰는 이홍장을 위로하고, 일본 정부는 의료진을 파견했다. 쇼켄 황태후도 의사와 간호부를 보냈다.[118]

무쓰는 이 사건이 열강의 간섭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고 휴전을 주장했고, 이토도 동의했다. 군부는 반대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도 러시아군의 이동 첩보에 동의했다.[121][122] 3월 30일, 무조건적인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124]

4월 1일부터 강화 회담이 재개되었고, 일본은 청나라에 가혹한 요구를 했다. 이홍장은 영토 할양에 반대하며 열강의 중재를 요청했다.[127][128][129][130]

청나라는 일본 측에 재고를 요청했지만 묵살당했고, 일본은 최종안을 제시하며 압박했다. 이홍장은 일본의 요구가 과도하다고 호소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은 승자이고 청국은 패자"라며 협박했다.[134][135][136][137]

생애 후반기 이토 히로부미.


결국 청나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의 수용했고,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142][143]

3.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순판로(順判樓). 원래 건물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옆에 있는 일청강화기념관()은 이 조약 체결을 기념하여 1937년에 건립되었다.


일청강화기념관에 재건된 순판로 내부


나가토치 히데타(永地秀太)가 그린 시모노세키 회담 그림 (1929년), 메이지 기념 사진관


시모노세키 조약은 1895년 4월 17일,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과 패전국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강화 조약이다. 조약은 전 미국 국무장관 존 W. 포스터(John W. Foster)가 청나라를 자문하면서 작성되었으며, 일본 황제를 대표하여 이토 히로부미 백작과 무쓰 무네미쓰 남작이, 중국 황제를 대표하여 리훙장(李鴻章)과 리징팡(李經芳)이 서명하였다.

조약 체결에 앞서 1895년 3월 24일, 리훙장은 일본 우익 극단주의자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았고, 일시적인 휴전에 동의해야 했다. 회담은 4월 10일에 재개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5][16][17][18][19][20]

조항내용
제1조청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하고, 독립 자주를 해칠 만한 조선으로부터 청국에 대한 공납, 봉헌, 의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
제2조, 제3조청국은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 등 부속 도서의 주권 및 그 지역에 있는 성루, 병기 제조소 및 관유물을 영원히 일본에 할양한다.
제4조청국은 배상금 2억 냥을 일본에 지불한다.
제5조할양된 토지의 주민은 자유롭게 부동산을 매각하고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으며, 조약 비준 2년 후에도 할양지에 거주하는 주민은 일본의 사정에 따라 일본 국민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제6조청국은 사시, 중경, 소주, 항주를 일본에 개방한다. 일본 국민은 청국의 각 개시·개항장에서 자유롭게 제조업에 종사할 수 있다. 또한 청국은 일본에 최혜국 대우를 인정한다.
제7조일본은 3개월 이내에 청국 영토 내의 일본군을 철수한다.
제8조청국은 일본군에 의한 산둥 웨이하이웨이의 일시 점령을 인정한다. 배상금 지불에 차질이 있으면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는다.
제9조청국에 있는 일본 포로를 송환하며, 학대 또는 처형해서는 안 된다. 일본군에 협력한 청국인에게 어떠한 처형도 해서는 안 되며, 하게 해서도 안 된다.
제10조조약 비준일부터 전투를 정지한다.
제11조조약은 일본국 황제와 대청국 황제가 비준하며, 비준은 산둥성 지푸에서 메이지 28년 5월 8일, 즉 광서 21년 4월 14일에 교환된다.



이 조약으로 인해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고,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해야 했다. 또한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여러 항구를 개방하는 등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삼국간섭으로 인해 랴오둥 반도는 청에 반환되었다.

1896년 7월 21일 북경에서 청일통상항해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청나라에서 더 많은 이권을 획득하게 되었다.[12][34]

3. 1. 협상 과정

1894년 11월 22일, 청국은 주청미국공사를 통해 일본에 강화 의사를 타진했지만, 이토 히로부미 내각총리대신은 12월 4일 "위해위를 무찌르고 대만을 공략하기 위한 방책"을 대본영에 제출하는 등 일본군은 전쟁을 멈출 의사가 없었다.[92] 일본 내에서는 청 측의 제안에 따라 강화 조약을 논의하게 되었는데, 외상 무쓰 무네미쓰는 일본군의 연전연승 속에서 정부 내에서도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확보하려는 분위기가 강해 고심했다.[93]

일본 제국 해군은 자원 확보와 남진의 거점으로서 대만 전 섬 및 펑후 제도의 할양을, 육군은 청일전쟁의 격전지인 랴오둥 반도의 할양을 요구했다.[94][95] 대장성은 전후 재정 운영을 고려하여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했으며,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고평은 10억 냥(兩|량중국어)이라는 엄청난 배상액을 제시했다.[96][97][98] 주러시아 일본공사 니시 도쿠지로는 영토 할양은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으므로 배상금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보았고, 주영국 일본공사 아오키 슈조(青木周蔵)는 성경성 및 길림과 직례 양성의 일부를 할양받아 일본의 군사적 거점을 건설하고 배상금은 1억 영국 파운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9][100] 당시 외무성의 미국인 고문 헨리 W. 데니슨(Henry Willard Denison)이 제시한 배상금은 갑안이 3억 엔, 을안이 5억 엔이었다.[101]

1894년 12월 20일, 청국은 일본 측에 장음환(zh)과 소우렴을 강화회담 전권대신으로 나가사키에서 회동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은 히로시마를 회담 장소로 통고했다. 1895년 1월 31일, 장음환과 소우렴은 히로시마에 도착했고, 일본은 당일 이토 히로부미무쓰 무네미쓰를 전권대신으로 지명했다. 다음 날, 양국 전권대신들은 히로시마 현청에서 회합했는데, 일본 측 전권이 수상과 외상인 반면 중국 전권은 재무차관과 지방지사에 불과했기 때문에 청국의 체면을 잃게 만들었다.[102][103]

무쓰 무네미쓰는 청 측 문서가 강화 담판의 전권 위임장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 2월 2일, 일본 측은 청 측에 교섭 내용을 본국에 상주한 후 칙유를 얻고 나서 조인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은 강화 전권의 권한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담판을 중단했다.[104] 2월 7일, 나가사키로 돌아간 장음환과 소우렴은 청 정부로부터 다시 위임장을 받고자 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청 측 참사관 오정방에게 이홍장 혹은 공친왕이 전권대신으로 올 것을 희망한다고 밝혔다.[105][106] 2월 8일, 무쓰 무네미쓰는 주일미국공사 던(Edwin Dun)을 통해 정당한 전권위임장을 받은 ‘명망과 자질을 갖춘 전권위원’의 파견을 청국 측에 요구하였다.[107]

여순, 위해위에서의 패전과 히로시마에서의 강화 교섭 결렬로 광서제와 주전파는 모두 전의를 상실했다. 2월 10일, 광서제는 군기대신을 불러 패전에 낙담하며 제대신에게 대책을 자문했는데, 대신들의 일치된 견해로는 이홍장을 일본에 파견해 교섭을 맡게 하는 방도 외에는 없었다. 2월 19일, 청 정부는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지명하겠다는 뜻을 주청미국공사관을 통해 일본에 전달했다. 이홍장은 영토 양여에 대해서는 국내적인 규정도 갖추어지지 않아 처리도 어렵다고 굳이 알지 못한다는 견해를 표명했고, 옹동화도 이에 찬동했다. 그는 협상이 정리되지 않으면 귀국할 뿐이라는 결의를 나타내는 한편, 강화 교섭에 옹동화의 동행을 요구했다. 그러나 옹동화는 양무파도 아닌 본인이 외교에도 능통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동행을 사퇴하였고, 이홍장은 이를 빌미로 옹동화의 주전론을 봉쇄하고자 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주전론을 주창함으로써 영토 양여가 불가피하다는 여론을 끌어내어 3월 2일 영토 양여가 불가피하고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상주했고, 다음날 서태후와 총리아문으로부터 영토 양여를 승인받았다. 그는 이를 통해 이홍조옹동화 등 자신의 정적들로부터의 정치적 공격을 차단했다.[108][109]

일본 혼슈 최서단 시모노세키는 도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으로 조선통신사도 이곳을 통해 일본을 왕복했다.

이홍장은 3월 19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다음날 이홍장 등은 캇포여관(割烹旅館) 인근의 슌반루(春帆楼)에서 회합하여 위임장을 교환하고 교섭에 들어갔다. 청 측은 강화 회담 이전에 먼저 휴전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토 히로부미히시지마 요시테루 대령이 이끄는 보병 1개 혼성여단이 대만 서쪽의 펑후 제도를 제압해, 대만 상륙의 발판을 확보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월 21일, 일본 측은 대고(大沽), 천진(天津), 산해관의 성루를 보장 점령하고 청군이 이곳의 모든 군수물자를 일본군에게 넘길 것, 나아가 일본 군무관이 천진과 산해관 사이의 철도를 관할할 것, 휴전 기간 청국이 일본군의 군비를 부담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측은 휴전 없이 강화 회담에 들어가도 되고 휴전 후 강화를 논의해도 되지만 그 경우, 청국이 상기 4가지 조건을 수용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러나 이홍장은 어디까지나 영구(営口)・전장태(田荘台)의 보장 점령 정도를 염두에 두었을 뿐, 이것은 청 측의 예상에 크게 웃도는 가혹한 조건이었다.[110][111]

3월 24일 청 측은 휴전을 철회하고 강화 회담을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이경방만 회담에 남아서 무쓰 무네미쓰와 사무적인 현안을 처리하고 이홍장은 숙소로 돌아가게 되는데, 자유당계 장사(壯士) 오야마 도요타로(小山豊太郞)로부터 저격을 당했다. 2미터 거리에서 총탄으로 인해 안경이 깨져 왼쪽 뺨을 부상당한 이홍장은 급히 응급조치를 받고 숙소로 옮겨졌다. 오야마는 그의 생명을 끊는 것이 영원히 동아의 평화를 얻는 일이라고 밝혔다.[112][113][114] 일본 입장에서 이 담판은 전쟁을 계속하면서도 교섭할 수 있는 효율적인 회담이었으나 이홍장 저격 사건은 담판의 형세를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홍장은 자신에게 일어난 재해를 본국에 대한 이익으로 전환하려 하였고, 일본 정부는 그가 이 사건을 구실로 회담을 중단하고 귀국할까 봐 전전긍긍하였다.[115][116][117]

이토 히로부미무쓰 무네미쓰는 사건 직후 곧바로 이홍장의 숙소로 가서 그를 위로하였으며, 일본 정부는 야전위생장관인 이시구로 다다노리와 외과 전문의 육군군의총감 사토 스스무(佐藤進) 두 박사 등 유명한 전문의를 시모노세키로 보내고, 또 주일 프랑스 공사관에 있는 의사도 초대하였다. 아울러 당시 히로시마에 있던 메이지 천황황후는 직접 의사와 간호부를 이홍장에게 보내주었다. 한편 야마구치현 지사 하라 타로(原保太郎)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으며, 야마구치현 경찰부장 고토 마츠요시로(後藤松吉郎)는 해임되었다.[118] 각지의 시민들이 이홍장에게 전보나 우편을 보내거나 일본의 특산품을 보내면서 이홍장을 위로했으며 그의 숙소 앞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119]

무쓰 무네미쓰이홍장 저격 사건이 열강의 간섭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고 휴전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토 히로부미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히로시마의 대본영과 각료들은 휴전을 반대하고 있었고, 무쓰 무네미쓰는 2~3주간 휴전에 들어가고 그 후에 전투를 재개한다고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히로시마로 가서 무쓰 무네미쓰의 견해로 각료들을 설득하였으며, 3월 26일에는 문무중신회의에서도 “선후지책으로는 회담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즉시 무조건적인 휴전을 허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군부는 무조건적인 전쟁 중단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3월 27일, 천황으로부터 칙허를 확보했다. 한편 3만의 러시아군이 청국의 북변으로 이동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도 비로소 휴전에 동의했다.[121][122]

청 측은 시모노세키 항구에 기선을 정박하면서 언제든지 귀국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무쓰 무네미쓰는 협상 결렬의 위기에 분주히 움직였다. 무쓰 무네미쓰는 천황에 의한 휴전의 칙허를 조약문으로 개서하고 3월 28일 이홍장의 병상을 방문하여 그 초안을 제시했다.[123] 이로써 3월 30일 봉천성, 산동성, 길림성에서의 무조건적인 휴전에 합의하고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124] 중국은 협상의 진전과 더불어 작년 11월 서태후의 환갑을 축하하러 온 조선의 진하사의 귀국을 종용했다. 3월 말 조선 사행단은 회동관에서 쫒겨나 일행을 둘로 쪼개어 객잔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조치는 조선 사행단을 조공사로 대우하지 않겠다는, 즉 조공책봉체제의 와해를 의미했다.[125][126]

4월 1일부터 양국은 강화 회담에 돌입하는데 당시 일본은 청국이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할 것, 봉천성 남부・랴오둥 반도 동부 연안・대만 및 그 부속도서・펑후 제도를 할양하고, 배상금 은 3억 냥을 지불할 것, 일본에 최혜국 대우를 할 것, 북경소주항주중경 등을 일본에 개방할 것, 강화 조약 실행의 담보로 일본군이 봉천성위해위를 일시 점령할 것을 요구했다. 이홍장은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도모할 뿐, 청국의 토지를 거느리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대내외적으로 선언한 것이 아니었냐고 반문하였다.[127][128] 그는 원안의 내용을 총리아문에 극비로 타전시키고, 할양에 관한 조항을 북경 주재 영국·러시아·프랑스 공사에 누설하도록 하여 열강에 중재를 요구하고 협상의 연장하고자 했다. 이홍장은 통상권익에 관해서는 가능한 수용하되, 랴오둥 반도의 할양은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편 무쓰 무네미쓰는 반대로 할양의 건은 소극적으로, 통상권익에 관해서는 적극적으로 홍보할 것을 지시했다. 통상권익의 성문화는 열강 입장에서 반가운 귀결이기 때문이다.[129][130]

이홍장과 이경방은 4월 5일에 국내 사정을 들며 일본 측에 재고를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 청국 측은 중국이 이미 수개월 전에 조선을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외지국(獨立自主局外之國)으로 인정하기 원한다고 성명하였으니 이번 조약 체결에서 마땅히 이를 기재하고 일본 또한 그것을 인정하고 원안을 수정해야 할 것, 영토 할양은 전면 거부할 것, 배상금은 상당 수준 감액할 것을 요구했다. 다음날 일본 측은 원안에 대한 승낙 여부를 명백히 할 것을 압박했다. 4월 9일 청 측은 중국과 일본 양국이 조선을 중립국임을 공동으로 보장할 것, 배상금은 1억 냥으로 할 것, 영토 할양은 봉천성 안동현·관전현·봉황청(鳳凰廳)·펑후 제도로 한정할 것, 강화 조약의 실행 담보로서 위해위만 점령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이튿날 재수정안을 청국 측에 제안했는데, 4월 11일 이것이 최종안임을 통보했다. 조선에 관한 조항은 정정하지 않을 것, 영토 할양은 원안대로 대만과 펑후 제도 그리고 랴오둥 반도로, 봉천성은 대폭 축소할 것, 배상금은 2억 냥으로 감액할 것, 강화 조약 실행의 담보로서 위해위만 점령할 것을 통고했다.[131][132][133]

4월 12일, 청 측은 일본의 요구가 과도하다고 호소했다. 이홍장은 대만을 무력 점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측 요구를 수락할 수 없으며, 봉천성에 대해서도 영구의 제외를 주장했다. 그리고 배상금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감액을 요구했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청국 대표가 현재 상황을 깊게 이해하기를 바란다. 일본은 승자이고 청국은 패자라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담판이 결렬되면 북경의 안위는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히로시마에서는 출정 준비가 운송선 60척 규모로 진행되었고, 지난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도 20척이 간몬 해협을 통과했기 때문에 13일까지 수락 여부에 대해서만 응답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이홍장은 결국 14일 오후 4시를 기하여 회답하겠다고 답변했다.[134][135][136][137]

청 측은 거듭해 대만 제외와 배상금의 추가 감액을 요구했지만 일본 측은 이를 묵살했다. 아울러 이토 히로부미는 “전쟁이란 것은 어떻게 선행될 지 모르는 것이고, 현재의 강화 조건도 그대로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청국 측에 승낙을 유도했다.[138] 이토 히로부미는 군함 20여 척을 시모노세키 항구에서 대련으로 보내어 청 측을 위협했다. 이에 경악한 이홍장은 청 정부에 긴급 타전하여 조약을 체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139] 4월 14일, 이경방은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내일까지 최종 회답을 할 것을 통고하였고, 이튿날 최종 담판을 거쳐 일본 측이 요구한 최종안이 거의 그대로 수용되었다. 이 날 이홍장이토 히로부미가 이렇게 엄혹하고 집요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푸념했다.[140][141]

3. 2. 이홍장 저격 사건



1895년 3월 24일, 청 측은 휴전을 철회하고 강화 회담을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이경방만 회담에 남아서 무쓰 무네미쓰와 사무적인 현안을 처리하고 이홍장은 숙소로 돌아가던 중, 자유당계 장사(壯士) 고야마 도요타로(小山豊太郞)에게 저격을 당했다.[112][113][114] 2미터 거리에서 총탄을 맞아 안경이 깨지고 왼쪽 뺨을 부상당한 이홍장은 급히 응급조치를 받고 숙소로 옮겨졌다. 오야마는 이홍장의 생명을 끊는 것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얻는 길이라고 주장했다.[112][113][114]

이홍장 저격 사건은 일본에게 매우 불리한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은 전쟁을 계속하면서도 교섭을 진행할 수 있었기에 유리한 입장이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협상 구도가 단번에 뒤집힐 수 있었다.[115][116][117] 이홍장은 이 사건을 통해 청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고자 했고, 일본 정부는 이홍장이 사건을 구실로 회담을 중단하고 귀국할 것을 우려했다.[115][116][117]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는 사건 직후 이홍장의 숙소를 방문하여 위로했다. 일본 정부는 야전위생장관 이시구로 다다노리와 육군군의총감 사토 스스무 등 유명 전문의를 시모노세키로 급파했고, 주일 프랑스 공사관 의사도 초빙했다. 메이지 천황쇼켄 황태후는 직접 의사와 간호사를 이홍장에게 보냈다. 야마구치현 지사 하라 타로는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야마구치현 경찰부장 고토 마츠요시로는 해임되었다.[118] 일본 각지의 시민들은 이홍장에게 위로 전보와 우편, 특산품을 보냈고, 숙소 앞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119]

무쓰는 이홍장 저격 사건이 열강의 간섭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휴전을 주장했고, 이토 히로부미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히로시마 대본영과 각료들은 휴전을 반대했다. 무쓰는 2~3주간 휴전 후 전투를 재개해도 문제없다는 논리로 설득했다. 이토는 히로시마로 가서 각료들을 설득하고, 3월 26일 문무중신회의에서 "회담을 계속하려면 즉시 무조건 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부는 무조건 휴전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이토는 3월 27일 천황의 칙허를 받아냈다. 3만 명의 러시아군이 청국 북쪽 국경으로 이동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도 휴전에 동의했다.[121][122]

3. 3. 조약 내용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확인하고, 이에 따라 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거나 의례를 행하는 것을 완전히 중단한다는 내용이다.[3] 이 조항으로 인해 이듬해 조선이 중국에 대한 종속을 인정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던 서울 밖의 영은문은 두 개의 돌기둥만 남기고 철거되었다.

일본 제국에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를 할양했다.[15][16][17][37] 그러나 삼국간섭으로 인해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외교적 개입으로 랴오둥 반도는 청에 반환되었다.

청은 일본에 2억 냥(テール)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16] 2억 냥은 일본 엔으로 환산하면 약 3억 1,100만 엔에 해당했다.

청은 사시, 중경, 소주, 항주를 일본에 개방하고, 최혜국 대우를 부여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5][16][17][18][19][20]

조항내용
제1조청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하고, 독립 자주를 해칠 만한 조선으로부터 청국에 대한 공납, 봉헌, 의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
제2조, 제3조청국은 랴오둥 반도(遼東半島), 타이완(台湾), 펑후 제도(澎湖諸島) 등 부속 도서의 주권 및 그 지역에 있는 성루, 병기 제조소 및 관유물을 영원히 일본에 할양한다.
제4조청국은 배상금 2억 냥(テール)을 일본에 지불한다.
제5조할양된 토지의 주민은 자유롭게 부동산을 매각하고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으며, 조약 비준 2년 후에도 할양지에 거주하는 주민은 일본의 사정에 따라 일본 국민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제6조청국은 사시(沙市), 중경(重慶), 소주(蘇州), 항주(杭州)를 일본에 개방한다. 일본 국민은 청국의 각 개시·개항장에서 자유롭게 제조업에 종사할 수 있다. 또한 청국은 일본에 최혜국 대우를 인정한다.
제7조일본은 3개월 이내에 청국 영토 내의 일본군을 철수한다.
제8조청국은 일본군에 의한 산둥(山東省) 웨이하이웨이(威海衛)의 일시 점령을 인정한다. 배상금 지불에 차질이 있으면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는다.
제9조청국에 있는 일본 포로를 송환하며, 학대 또는 처형해서는 안 된다. 일본군에 협력한 청국인에게 어떠한 처형도 해서는 안 되며, 하게 해서도 안 된다.
제10조조약 비준일부터 전투를 정지한다.
제11조조약은 일본국 황제와 대청국 황제가 비준하며, 비준은 산둥성 자오푸(芝罘)에서 메이지 28년 5월 8일, 즉 광서 21년 4월 14일에 교환된다.



1896년 7월 21일 베이징에서 청일통상항해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청나라에서 더 많은 이권을 획득하게 되었다.[12][34]

4. 조약의 영향

1895년 3월4월, 일본청나라 대표 간의 정상회담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수상과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 외무대신은 조선뿐만 아니라 타이완에서도 청나라의 영향력을 축소하려 했다. 무쓰는 남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일본의 군사력을 확장하기 위해 타이완의 중요성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당시 제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일본은 서구 열강의 행동을 모방하려 했고, 조선반도와 중국 본토에서 식민지와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일본 제국과 청나라 사이의 평화 회담에서 청나라 협상 대표인 리훙장(李鴻章)과 리징팡(李經方)은 타이완의 전략적 요충지를 인식했기에 애초에 타이완을 할양할 계획이 없었다. 1895년 3월 20일, 일본 시모노세키의 슌판로(春帆楼)에서 한 달간의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회담 전반부에서는 이토와 리가 주로 휴전 협정에 대해 논의했고, 후반부에는 평화 조약의 내용을 논의했다. 이토와 무쓰는 타이완의 완전한 주권 양도를 절대적인 조건으로 제시하고 리에게 펑후 제도와 랴오둥 반도 남단 동쪽 해역의 주권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리훙장은 청일전쟁에서 타이완이 전쟁터가 된 적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회담 말기, 리훙장은 펑후 제도와 랴오둥 반도 일부의 주권 이양에는 동의했지만, 여전히 타이완의 양도를 거부했다. 1885년부터 타이완이 성(省)이었던 점을 들어 "타이완은 이미 성으로서 다른 나라에 넘겨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결국 리는 타이완을 포기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제국과 청나라 사이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어 타이완 침공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타이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타이완의 병합에 대한 지역 저항에도 불구하고 200년간 지속된 청나라 지배가 일본의 손에 종식되었다. 따라서 타이완은 일본의 항복으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인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일본이 중국에 부과한 조건들은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6일 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삼국 간섭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일본이 요동반도에 대한 요구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는데, 뤼순이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니콜라이 2세와 그의 황실 고문들, 그리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러시아가 오랫동안 갈망해 온 '부동항'으로 이용할 수 있는 뤼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4]

1895년 11월 8일 요동반도 반환 협약


세 서구 열강의 전쟁 위협 속에, 1895년 11월, 아직 지역 강국으로조차 인식되지 않던 약소 신흥국 일본은 요동반도에 대한 사실상의(de jure) 주장을 철회하는 대신 중국으로부터 3000만위안의 전쟁 배상금을 더 받아냈다. 당시 유럽 열강들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다른 조항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서 얻은 자유로운 행동권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실수로 판명되었는데, 일본은 1905년까지 한국을 점령하고 러일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확장한 후,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산둥의 독일 항구를 침범했기 때문이다.[5]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한 지 몇 달 후, 러시아는 중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반도와 하얼빈으로 가는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결국 러시아는 중국 제국에 외교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로 합의했고(러시아 다롄 참조), 만주를 완전히 병합하는 대신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 해당 지역에 대한 상징적인 임대를 합의했다. 2년 만에 독일, 프랑스, 영국도 약화된 중국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기회를 이용하여(청나라 분할 참조) 각각 상당한 지역을 장악했다. 일본 또한 국제 사회가 강대국이 약소국을 대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식을 주목하고, 현대 산업 국가이자 군사 강국으로 자체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놀라운 조치를 계속했으며,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러일 전쟁에서 보여주었듯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6]

중국에서는 이 조약이 관료들에 의해 국치로 여겨졌고 청나라에 대한 지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그 이전 수십 년간의 자강 운동은 실패로 간주되었고, 중국의 정치·사회 시스템에 대한 더욱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지지가 커져 1898년에는 무술변법으로 이어졌다. 만주 귀족들의 저항으로 인해 후자의 운동이 실패하자 일련의 봉기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삼국 간섭은 많은 일본 역사가들에 의해 일본 외교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이 시점부터 민족주의적, 팽창주의적, 호전적인 요소들이 결합하여 일본을 주로 경제적 패권에 기반한 외교 정책에서 노골적인 제국주의로 이끌었다.

1895년 4월 20일, 메이지 천황은 강화조약을 비준(批准)했다.[15][17][37] 조약 비준은 원래 추밀원에 자문을 구한 후 천황이 재가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번에는 자문 절차가 생략되고 곧바로 재가되었다.[45] 4월 21일, 천황은 “평화 극복에 관한 칙서”를 발표하여 전후 계획을 설명하고, 그 안에서 일청의 선린우호를 역설했다.[45] 이날 일본 정부는 이토 미요지를 전권변리대신으로 임명하고, 5월 8일에 청국의 외교 도시인 옌타이시(芝罘)에서 열릴 예정인 비준서 교환을 위임하여 이토를 그곳으로 출발시켰다.[15][17][37][45][48]

한편, 리훙장 일행은 4월 20일천진에 도착했고, 우팅팡과 미국인 외교 고문 존 포스터북경으로 가서 총리각국사무아문에 조약서를 전달했다.[49]

일본에 할양된 대만에서는 한족(漢民族)에 의한 대만민주국 운동이 계속되었다.[58] 일본 정부는 1895년 5월 10일, 가바야마 스케노리를 초대 대만총독으로 임명했다.[59] 을미사변(대만 점령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6월 2일, 청나라 전권인 리징팡과 가바야마 스케노리 총독이 기륭항 외해에서 회담하여 대만 양도의 조인이 이루어졌다.[58][59] 6월 7일, 일본군은 타이베이를 점령하고, 당경숭은 중국 본토로 도망쳤지만, 대만 민중의 항일 활동은 이후 더욱 본격화되었다.[59] 그들은 유영복대만민주국의 신임 총통으로 선출하고, 저항 거점을 타이난으로 옮겼다.[59] 대만민주국은 열강의 간섭을 유도하고, 청나라의 지원을 기대하여 독립을 달성하려고 했지만, 열강도 청나라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냉담했고, 외부 지원은 전혀 없었다.[59]

배상금 2억 냥과 랴오둥 반환금 3,000만 냥은 대장성(大蔵省) 예금부에 들어왔다.[17][61] 배상금은 런던(London)의 은행에 예치하여 운용함으로써, 영국과 국제 금융 자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주는 동시에, 오랫동안의 숙원이었던 금본위제로의 복귀에 사용할 자금으로 했다.[17] 1897년, 제2차 마쓰카타 내각은 평가를 절반으로 낮춘 화폐법을 시행한 후 금본위제로의 이행을 완료했다.[62] 일본은 청나라에 대해 3년 분할로 금화 3,808만 영국 파운드(British Pound)로 지불받았다.[17][63] 배상금은 당시 일본 엔으로 환산하면 3억 6,407만 엔에 달했다.[63] 당시 일본의 국가 예산은 약 8,000만 엔 정도였으므로 세입(歳入)의 4년치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17][63]

배상금의 대부분은 군비에 충당되었다.[63] 한편, 일본의 경제는 이로 인해 면방직을 중심으로 한 산업 혁명의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17] 또한, 나중에 국내 철강업의 중심이 되는 관영 야하타 제철소 건설 자금의 일부에도 사용되었다.[65] 배상금은 또한 초등학교의 용지 취득이나 교사 건설비 보조 등 교육 진흥비로도 활용되었다.[17] 시모노세키 조약의 배상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 자본주의의 모습을 좌우했다.

일청전쟁 당시 청국의 외채는 약 4,000만 냥이었다.[66] 여기에 배상금 2억 냥과 요동 반환금 3,000만 냥을 더하면 청국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17][66][67] 일본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청국은 외국 은행으로부터 많은 차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68]

제조업 영업권은 최혜국 대우에 따라 일본과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 반면, 청국 내 상공업 발전을 압박했다.[19][68]

군사적으로는 아시아의 초강대국으로 “잠자는 사자”로 여겨져 온 청국이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그 약체성을 세계에 드러냈다.[15][71] 서구 열강은 중국 분할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그 선두에 선 것이 요동 반환을 권고했던 러시아, 독일, 프랑스였다.[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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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을 그린 만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프랑스의 상징인 마리안느, 그리고 일본을 상징하는 사무라이. 이에 비해 청국은 속수무책인 상태.]]

기존의 “유럽 정책”의 난관에 부딪혀 “세계 정책”으로 전환한 독일은 1895년 천진한구조계를 설정했다.[66]

러시아는 1896년 6월 러청밀약(리훙장-로바노프 협정)을 맺어 일본에 대한 공동 방위를 청국에 약속하고, 동시에 러청은행 설립과 동청철도 부설권을 얻었다.[66][71]

프랑스는 1895년 윈난성, 광둥성, 광서성의 광산 채굴 우선권과 안남 철도의 용주-곤명 연장을 획득했다.

한편 일본은 1898년 4월, 타이완의 맞은편인 푸젠성의 제3국에 대한 불할양을 청국에 약속받았다.[66][71]

기존에 “자유무역의 기수” 역할을 해온 영국은 당시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선진국이었고, 가장 오래전부터 청국에 기득권과 군사적 거점을 보유해 온 국가였기 때문에 이러한 “세력권”을 원래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52][71]

캉유웨이


청국 내부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잠식되는 위기적인 상황으로부터 기존의 양무운동의 한계가 드러나는 한편, 국가 의식과 민족 의식이 형성되었고, 또한 대외적인 위협에 대항하여 국제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청조의 지배 체제를 개혁하여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19][73] 그 중심에 캉유웨이, 량치차오, 탐사동 등에 의한 변법자강운동이 있었다.[19][73]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을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인정하고, 조선에 대한 종속 관계 폐지를 승인했다.[53][54] 1894년 12월 김홍집·박영효 연립정권은 내각제도 창설, 법원 설치(사법행정의 분리), 예산제도 채택, 환곡 폐지 등 재정·세제 개혁, 지방 제도 개혁(23부제), 군정 개혁 등 후세 “갑오개혁(제2기 개혁)”이라 일컫는 여러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55] 이 개혁은 대부분 1895년 4월에 시행되었으며, 책봉체제에서 벗어나 청나라로부터 독립함에 따라 왕과 왕비의 존칭을 “폐하”로 바꾸는 등 왕실의 위상이 청나라와 동등해졌다. 또한 청나라 칙사를 영접하기 위해 세워진 영은문도 철거되었다.[55] 한편, 삼국간섭 이후 궁정에서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세력도 등장하여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54]

시민 계층에 침투해 가던 개화 사상은 의병과는 다른 유형의 민족주의를 전개해 나갔다.[56] 1896년 7월, 미국 귀환파 서재필을 지도자로 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국가의 자주 독립과 국민의 자유 민권 사상을 고취했다. 영은문 터에는 독립협회의 노력으로 독립문이 건립되었다.[56] 독립협회는 러시아인 군사·재정 고문의 파면에 성공하고, 한성부에서 만민공동회(거리 집회·공개 연설회)를 열어 관민 공동 선출의 의회 설립을 조선 정부에 인정받았다.[56] 그러나 이러한 민권·국권을 함께 확립하려는 운동은 수도 주변에 확산이 국한되었고, 군주 측의 이해 부족으로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54]

이후 조선은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4. 1. 삼국 간섭

일본이 청나라에 부과한 조건들은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6일 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일본이 요동반도에 대한 요구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는데, 서구인들이 당시 아르투르 항으로 불렀던 뤼순이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니콜라이 2세와 그의 황실 고문들, 그리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러시아가 오랫동안 갈망해 온 '부동항'으로 이용할 수 있는 아르투르 항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4]

세 서구 열강의 전쟁 위협 속에, 1895년 11월, 아직 지역 강국으로조차 인식되지 않던 약소 신흥국 일본은 그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반환하고 요동반도에 대한 사실상의(de jure) 주장을 철회하는 대신 중국으로부터 3000만 냥의 전쟁 배상금을 더 받아냈다. 당시 유럽 열강들은 다른 조건들, 즉 시모노세키 조약의 다른 조항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서 얻은 자유로운 행동권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실수로 판명되었는데, 일본은 1905년까지 한국을 점령하고 러일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확장한 후,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산둥의 독일 항구를 침범했기 때문이다.[5]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한 지 몇 달 후, 러시아는 중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반도와 하얼빈으로 가는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결국 러시아는 중국 제국에 외교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로 합의했고(러시아 다롄 참조), 만주를 완전히 병합하는 대신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 해당 지역에 대한 상징적인 임대를 합의했다. 2년 만에 독일, 프랑스, 영국도 약화된 중국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기회를 이용하여(청나라 분할 참조) 각각 상당한 지역을 장악했다. 일본 또한 국제 사회가 강대국이 약소국을 대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식을 주목하고, 현대 산업 국가이자 군사 강국으로 자체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놀라운 조치를 계속했으며,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러일 전쟁에서 보여주었듯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6]

삼국 간섭은 많은 일본 역사가들에 의해 일본 외교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이 시점부터 민족주의적, 팽창주의적, 호전적인 요소들이 결합하여 일본을 주로 경제적 패권에 기반한 외교 정책에서 노골적인 제국주의로 이끌었다. 즉, '강압받은 자'가 점점 더 '강압하는 자'로 변하는 경우이다.

러시아는 삼국 간섭 이후 리아오둥 반도로 병력과 물자를 신속하게 이동시켜, 뤼순(Port Arthur)과 하얼빈 양쪽에서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이미 만주 북부를 가로지르는 철도 건설이 진행 중이었기에, 러시아의 주요 태평양 해군 기지인 블라디보스토크(매년 4개월 동안 결빙되는 항구)까지의 철도 노선을 단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또한 뤼순 항구 시설을 개선하고, 인근에 달리니(현재 다롄으로 뤼순구를 포함함)라는 상업 도시를 건설한 후 리아오둥 반도 임대를 체결했다.

뤼순과 리아오둥 반도의 사실상 통치권이 중국으로부터 러시아에 정식으로 부여되고, 러시아가 만주(특히 길림성흑룡강성)에서 얻은 다른 권리도 확대됨에 따라, 만주 철도의 550마일 남쪽 지선 건설이 더욱 활발해졌다. 러시아는 마침내 러시아 제국표트르 대제 시대부터 세계 강국이 되고자 했던 염원을 달성한 듯했다. 뤼순이라는 결빙되지 않는 천연 항구는 러시아를 최대 육상 강국일 뿐만 아니라 강력한 해양 세력으로 만들어 줄 것이었다. 러시아는 유럽의 세력 균형 정치(오스만 제국과 그 동맹국들이 반복적으로 러시아의 성장을 방해함)에 막혀 지쳐 있었기에 세계 강국 지위를 달성하기 위해 이러한 결빙되지 않는 항구가 필요했다.

그러나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이 한국과 대만에 대해 얻은 자유로운 행동을 무시한 지정학적 현실을 간과한 것은 러시아의 전략적 목표에 대한 근시안적인 판단이었다. 뤼순에서 강력한 거점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는 하얼빈까지 동만주(청나라의 봉천성, 현재의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수백 마일을 더 지배하고 통제해야 했다. 일본은 오랫동안 한국 국경과 평행한 지역을 자국의 전략적 세력권으로 간주해왔다. 리아오둥 임대와 철도 양허를 통해 러시아는 그 세력권을 일본의 세력권과 정면으로 충돌시켰다.

이는 서구 열강의 무례한 대우에 대한 일본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삼국 간섭의 직접적인 여파로, 러시아의 기만적인 행위와 외압에 굴복한 자국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일본 국민의 분노가 도쿄에서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 혼란은 정부를 거의 붕괴시킬 뻔했고, 일본 내 제국주의 및 팽창주의 세력을 강화시켰다. 러시아의 세력권 진출은 한국과 만주에서 러시아와의 패권 다툼을 초래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결국 1904년에서 1905년까지의 러일 전쟁으로 이어졌고, 쇄신된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 러시아에 큰 패배를 안겨주었으며,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의 시작을 알렸다.[8]

1895년 4월 20일, 메이지 천황은 강화조약을 비준(批准)했다.[15][17][37] 조약 비준은 원래 추밀원에 자문을 구한 후 천황이 재가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번에는 자문 절차가 생략되고 곧바로 재가되었다.[45] 도쿠다이지 시종장이 이에 앞서 19일에 히로시마 시내의 쿠로다 추밀원 의장을 방문했고, 19일과 20일 양일, 천황은 이토와 협의를 거듭했던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자문 절차의 생략 또는 연기 건에 관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45] 4월 21일, 천황은 “평화 극복에 관한 칙서(平和克復ニ関スル詔書)”를 발표하여 전후 계획을 설명하고, 그 안에서 청일의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역설했다.[45] 이날 일본 정부는 내각서기관장 이토 미요지를 전권변리대신(全権弁理大臣)으로 임명하고, 5월 8일에 청국의 외교 도시인 자보(현 산둥성 옌타이시)에서 열릴 예정인 비준서 교환을 위임하여 이토를 그곳으로 출발시켰다.[15][17][37][45][48] 이러한 일련의 신속함은 열강의 간섭의 틈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었지만, 무쓰 뭄미쓰가 자보로 향하는 이토 미요지에게 준 훈령도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어쨌든 조약을 체결하려는 강한 의지가 그곳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45]

한편, 리훙장 일행은 4월 20일에 톈진에 도착했고, 우팅팡과 미국인 외교 고문 존 포스터(John Foster)가 베이징으로 가서 총리아문에 조약서를 전달했다.[49] 포스터는 미국 국무장관을 역임한 거물 정치가로서 시모노세키에도 전권단 고문으로 동행했던 인물이며, 아마도 유럽 각국의 간섭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49] 일본 측은 포스터를 통해 간섭 동향이 청국 측에 전달되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포스터는 미국의 중재로 시작된 강화 회의를 결렬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리훙장에게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9]

4. 2. 조선의 상황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을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인정하고, 조선에 대한 종속 관계 폐지를 승인했다.[53][54] 1894년 12월 김홍집·박영효 연립정권은 내각제도 창설, 법원 설치(사법행정의 분리), 예산제도 채택, 환곡 폐지 등 재정·세제 개혁, 지방 제도 개혁(23부제), 군정 개혁 등 후세 “갑오개혁(제2기 개혁)”이라 일컫는 여러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55] 이 개혁은 대부분 1895년 4월에 시행되었으며, 책봉체제에서 벗어나 청나라로부터 독립함에 따라 왕과 왕비의 존칭을 “폐하”로 바꾸는 등 왕실의 위상이 청나라와 동등해졌다. 또한 청나라 칙사를 영접하기 위해 세워진 영은문도 철거되었다.[55] 한편, 삼국간섭 이후 궁정에서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세력도 등장하여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54]

시민 계층에 침투해 가던 개화 사상은 의병과는 다른 유형의 민족주의를 전개해 나갔다.[56] 1896년 7월, 미국 귀환파 서재필을 지도자로 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국가의 자주 독립과 국민의 자유 민권 사상을 고취했다. 영은문 터에는 독립협회의 노력으로 독립문이 건립되었다.[56] 독립협회는 러시아인 군사·재정 고문의 파면에 성공하고, 한성부에서 만민공동회(거리 집회·공개 연설회)를 열어 관민 공동 선출의 의회 설립을 조선 정부에 인정받았다.[56] 그러나 이러한 민권·국권을 함께 확립하려는 운동은 수도 주변에 확산이 국한되었고, 군주 측의 이해 부족으로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54]

이후 조선은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4. 2. 1. 을미사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 확정된 조선이었지만, 그로부터 반년 후, 일본 제국 정부 고관이자 조선 주재 특명 전권 공사였던 미우라 고로의 주도로 반일 성향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고종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속국으로서 군사적, 정치적 압력을 받았으며, 만국공법 체제, 즉 국가 시스템에 편입되었다.[53][54] 조약 체결 10년 후, 조선은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명실상부 일본의 속국이 되었고, 1910년에는 경술국치로 이어져 식민 통치 기구인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4. 2. 2. 아관파천

한성부(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세워진 독립문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을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인정하고, 조선에 대한 종속 관계 폐지를 승인했다.[53][54] 1894년 12월 성립된 김홍집·박영효 연립정권은 내각제도 창설, 법원 설치(사법행정의 분리), 예산제도 채택, 환곡 폐지 등 재정·세제 개혁, 지방 제도 개혁(23부제), 군정 개혁 등 후세 “갑오개혁(제2기 개혁)”이라 일컫는 여러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55] 대부분 1895년 4월 시행된 것으로, 책봉체제에서 벗어나 청나라로부터 독립함에 따라 왕과 왕비 모두 존칭을 “폐하”로 바꾸는 등 왕실 위상이 청나라와 동등해졌고, 청나라 칙사를 영접하기 위해 세워진 영은문도 철거되었다.[55] 삼국간섭 이후 궁정에서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세력도 등장하여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54]

한편, 시민 계층에 침투해 가던 개화 사상은 의병 등과는 다른 유형의 민족주의를 전개해 나갔다.[56] 1896년 7월, 미국 귀환파 서재필을 지도자로 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11월 기관지를 발행하여 국가의 자주 독립과 국민의 자유 민권 사상을 고취했으며, 영은문 터에는 독립협회의 노력으로 독립문이 건립되었다.[56] 독립협회는 또한 러시아인 군사·재정 고문의 파면에 성공하고, 한성부에서 만민공동회(거리 집회·공개 연설회)를 열어 관민 공동 선출의 의회 설립을 조선 정부에 인정받았다.[56] 그러나 이러한 민권·국권을 함께 확립하려는 운동은 확산이 수도 주변에 국한되었고, 군주 측의 이해 부족으로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54]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 형식적으로 확정된 조선이었지만, 그 반년 후에는 일본 제국 정부 고관이자 조선 주재 특명 전권 공사였던 미우라 고로의 주도로, 평소 반일적이었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고종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는 등, 사실상 속국으로서 일본으로부터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받게 되었고, 일원적인 만국공법 체제, 즉 국가 시스템에 편입되었다.[53][54]

4. 2. 3. 대한제국 선포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을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인정하고, 조선에 대한 종속 관계 폐지를 승인했다.[53][54] 1894년 12월 김홍집·박영효 연립정권은 내각제도 창설, 법원 설치(사법행정의 분리), 예산제도 채택, 환곡 폐지 등 재정·세제 개혁, 지방 제도 개혁(23부제), 군정 개혁 등 후세 “갑오개혁(제2기 개혁)”이라 일컫는 여러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했다.[55] 이 개혁은 대부분 1895년 4월에 시행되었으며, 책봉체제에서 벗어나 청나라로부터 독립함에 따라 왕과 왕비의 존칭을 “폐하”로 바꾸는 등 왕실의 위상이 청나라와 동등해졌다. 또한 청나라 칙사를 영접하기 위해 세워진 영은문도 철거되었다.[55] 한편, 삼국간섭 이후 궁정에서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세력도 등장하여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54]

시민 계층에 침투해 가던 개화 사상은 의병과는 다른 유형의 민족주의를 전개해 나갔다.[56] 1896년 7월, 미국 귀환파 서재필을 지도자로 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국가의 자주 독립과 국민의 자유 민권 사상을 고취했다. 영은문 터에는 독립협회의 노력으로 독립문이 건립되었다.[56] 독립협회는 러시아인 군사·재정 고문의 파면에 성공하고, 한성부에서 만민공동회(거리 집회·공개 연설회)를 열어 관민 공동 선출의 의회 설립을 조선 정부에 인정받았다.[56] 그러나 이러한 민권·국권을 함께 확립하려는 운동은 수도 주변에 확산이 국한되었고, 군주 측의 이해 부족으로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54]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 형식적으로 확정된 조선이었지만, 반년 후 일본 제국 정부 고관이자 조선 주재 특명 전권 공사였던 미우라 고로의 주도로, 반일적이었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고종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사실상 속국으로서 일본으로부터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받게 되었고, 일원적인 만국공법 체제, 즉 국가 시스템에 편입되었다.[53][54]

4. 3. 청나라의 상황

1895년 3월과 4월, 일본과 청나라 대표 간의 정상회담에서 이토 히로부미 수상과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은 조선뿐만 아니라 타이완에서도 청나라의 영향력을 축소하려 했다. 당시 제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일본은 서구 열강의 행동을 모방하려 했고, 조선반도와 중국 본토에서 식민지와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일본과 청나라의 평화 회담에서 청나라 협상 대표인 리훙장과 리징팡은 타이완의 전략적 요충지를 인식했기에 애초에 타이완을 할양할 계획이 없었다. 19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에 패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황제는 1683년부터 시작된 타이완 지배를 유지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895년 3월 20일, 일본 시모노세키의 슌판로(春帆楼)에서 한 달간의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회담 전반부에서는 이토와 리가 주로 휴전 협정에 대해 논의했고, 후반부에는 평화 조약의 내용을 논의했다. 이토와 무쓰는 타이완의 완전한 주권 양도를 절대적인 조건으로 제시하고 리에게 펑후 제도와 랴오둥 반도 남단 동쪽 해역의 주권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리훙장은 타이완이 청일 전쟁에서 전쟁터가 된 적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회담 말기, 리홍장은 펑후 제도와 랴오둥 반도 일부의 주권 이양에는 동의했지만, 여전히 타이완의 양도를 거부했다. 1885년부터 타이완이 성(省)이었던 점을 들어 "타이완은 이미 성으로서 다른 나라에 넘겨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결국 리는 타이완을 포기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제국과 청나라 사이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6일 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 간섭이 발생했다. 이들은 일본이 랴오둥 반도에 대한 요구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는데, 뤼순이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차르 니콜라이 2세(러시아)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러시아가 오랫동안 갈망해 온 '결빙되지 않는 항구'로 이용할 수 있는 뤼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4]

세 서구 열강의 전쟁 위협 속에, 1895년 11월, 일본은 요동반도에 대한 주장을 철회하는 대신 중국으로부터 3000만위안의 전쟁 배상금을 더 받아냈다.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한 지 몇 달 후, 러시아는 중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반도와 하얼빈으로 가는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결국 러시아는 중국 제국에 외교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로 합의했고, 만주를 완전히 병합하는 대신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 해당 지역에 대한 상징적인 임대를 합의했다. 2년 만에 독일, 프랑스, 영국도 약화된 중국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기회를 이용하여(청나라 분할 참조) 각각 상당한 지역을 장악했다.

중국에서는 이 조약이 관료들에 의해 국치로 여겨졌고 청나라에 대한 지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그 이전 수십 년간의 자강 운동은 실패로 간주되었고, 중국의 정치·사회 시스템에 대한 더욱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지지가 커져 1898년에는 무술변법으로 이어졌다. 만주 귀족들의 저항으로 인해 후자의 운동이 실패하자 일련의 봉기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삼국 간섭은 많은 일본 역사가들에 의해 일본 외교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1895년 4월 20일, 메이지 천황은 강화조약을 비준(批准)했다.[15][17][37] 조약 비준은 원래 추밀원에 자문을 구한 후 천황이 재가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번에는 자문 절차가 생략되고 곧바로 재가되었다.[45] 4월 21일, 천황은 “평화 극복에 관한 칙서”를 발표하여 전후 계획을 설명하고, 그 안에서 일청(日清)의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역설했다.[45] 이날 일본 정부는 이토 미요지를 전권변리대신으로 임명하고, 5월 8일에 청국의 외교 도시인 옌타이시(芝罘)에서 열릴 예정인 비준서 교환을 위임하여 이토를 그곳으로 출발시켰다.[15][17][37][45][48]

한편, 리훙장 일행은 4월 20일에 천진에 도착했고, 우팅팡과 미국인 외교 고문 존 포스터북경으로 가서 총리각국사무아문에 조약서를 전달했다.[49]

일본에 할양된 대만에서는 한족(漢民族)에 의한 대만민주국 운동이 계속되었다.[58] 일본 정부는 1895년 5월 10일, 가바야마 스케노리를 초대 대만총독으로 임명했다.[59] 을미사변(대만 점령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6월 2일, 청나라 전권인 리징팡과 가바야마 스케노리 총독이 기륭항 외해에서 회담하여 대만 양도의 조인이 이루어졌다.[58][59] 6월 7일, 일본군은 타이베이를 점령하고, 당경숭은 중국 본토로 도망쳤지만, 대만 민중의 항일 활동은 이후 더욱 본격화되었다.[59] 그들은 유영복대만민주국의 신임 총통으로 선출하고, 저항 거점을 타이난으로 옮겼다.[59] 대만민주국은 열강의 간섭을 유도하고, 청나라의 지원을 기대하여 독립을 달성하려고 했지만, 열강도 청나라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냉담했고, 외부 지원은 전혀 없었다.[59]

배상금 2억 냥과 랴오둥 반환금 3,000만 냥은 대장성(大蔵省) 예금부에 들어왔다.[17][61] 배상금은 런던(London)의 은행에 예치하여 운용함으로써, 영국과 국제 금융 자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주는 동시에, 오랫동안의 숙원이었던 금본위제로의 복귀에 사용할 자금으로 했다.[17] 1897년, 제2차 마쓰카타 내각은 평가를 절반으로 낮춘 화폐법을 시행한 후 금본위제로의 이행을 완료했다.[62] 일본은 청나라에 대해 3년 분할로 금화 3,808만 영국 파운드(British Pound)로 지불받았다.[17][63] 배상금은 당시 일본 엔으로 환산하면 3억 6,407만 엔에 달했다.[63] 당시 일본의 국가 예산은 약 8,000만 엔 정도였으므로 세입(歳入)의 4년치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17][63]

배상금의 대부분은 군비에 충당되었다.[63] 한편, 일본의 경제는 이로 인해 면방직을 중심으로 한 산업 혁명의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17] 또한, 나중에 국내 철강업의 중심이 되는 관영 야하타 제철소 건설 자금의 일부에도 사용되었다.[65] 배상금은 또한 초등학교의 용지 취득이나 교사 건설비 보조 등 교육 진흥비로도 활용되었다.[17] 시모노세키 조약의 배상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 자본주의의 모습을 좌우했다.

일청전쟁 당시 청국의 외채는 약 4,000만 냥이었다.[66] 여기에 배상금 2억 냥과 요동 반환금 3,000만 냥을 더하면 청국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17][66][67] 일본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청국은 외국 은행으로부터 많은 차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68]

제조업 영업권은 최혜국 대우에 따라 일본과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 반면, 청국 내 상공업 발전을 압박했다.[19][68]

군사적으로는 아시아의 초강대국으로 “잠자는 사자”로 여겨져 온 청국이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그 약체성을 세계에 드러냈다.[15][71] 서구 열강은 중국 분할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그 선두에 선 것이 요동 반환을 권고했던 러시아, 독일, 프랑스였다.[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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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을 그린 만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프랑스의 상징인 마리안느, 그리고 일본을 상징하는 사무라이. 이에 비해 청국은 속수무책인 상태.]]

기존의 “유럽 정책”의 난관에 부딪혀 “세계 정책”으로 전환한 독일은 1895년 천진한구조계를 설정했다.[66]

러시아는 1896년 6월 러청밀약(이홍장-로바노프 협정)을 맺어 일본에 대한 공동 방위를 청국에 약속하고, 동시에 러청은행 설립과 동청철도 부설권을 얻었다.[66][71]

프랑스는 1895년 윈난성, 광둥성, 광서성의 광산 채굴 우선권과 안남 철도의 용주-곤명 연장을 획득했다.

한편 일본은 1898년 4월, 타이완의 맞은편인 푸젠성의 제3국에 대한 불할양을 청국에 약속받았다.[66][71]

기존에 “자유무역의 기수” 역할을 해온 영국은 당시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선진국이었고, 가장 오래전부터 청국에 기득권과 군사적 거점을 보유해 온 국가였기 때문에 이러한 “세력권”을 원래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52][71]

청국 내부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잠식되는 위기적인 상황으로부터 기존의 양무운동의 한계가 드러나는 한편, 국가 의식과 민족 의식이 형성되었고, 또한 대외적인 위협에 대항하여 국제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청조의 지배 체제를 개혁하여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19][73] 그 중심에 캉유웨이, 량치차오, 탐사동 등에 의한 변법자강운동이 있었다.[19][73]

4. 3. 1. 한청통상조약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일본제국 최초의 식민지가 된 일본통치시대의 대만에서는 1895년 이후 6년 반에 걸쳐 토지조사사업이 이루어져 근대적 토지 소유가 정착되었고, 이는 식민지 대만의 경제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59] 이후, 제4대 총독 고다마 겐타로와 민생국장 고토 신페이가 8년 반 이상 협력하여 기반 시설 정비와 농산물 전매 등 경제 진흥을 중심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59] 일본의 식민지 경영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은 대만이 유일했다고 알려져 있다.[35]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메이지 유신 이래 추구해 온 독립과 자주를 달성하고, 이후 국가 목표를 “주권선(主権線)” 유지에서 “이익선(利益線)”의 유지·확장으로 전환시켰다.[35][53]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인정받은 제조업 영업권과 개항 개시 규정은 유럽 열강의 이익과 일치했고, 랴오둥 반도 할양 문제를 제외하면 일본은 열강의 이익을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60] 일본은 청나라에 패전 조약을 강요하여 많은 배상금을 획득하고, 열강과 동등한 지위에 서서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17][60]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비약적으로 높이고, 그 이후의 진로를 결정지은 획기적인 조약이었다.[60]

4. 3. 2. 간도 문제

제공된 자료에는 시모노세키 조약과 간도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성이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이후 간도 문제가 발생했다는 내용은 이 섹션에 포함될 수 없다.

4. 4. 일본의 상황

1895년 3월과 4월, 일본과 청나라 대표 간의 정상회담에서 이토 히로부미 수상과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은 조선뿐만 아니라 타이완에서도 청나라의 영향력을 축소하려 했다. 무쓰는 남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일본의 군사력을 확장하기 위해 타이완의 중요성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당시 제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일본은 서구 열강의 행동을 모방하려 했다. 당시 서구 열강과의 경쟁을 위해 일본 제국은 조선반도와 중국 본토에서 식민지와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는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의 발전 속도와 서구 열강이 극동에서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방법이었다.

일본 제국과 청나라 사이의 평화 회담에서 청나라 협상 대표인 리훙장과 리징팡은 서구와의 무역을 위한 타이완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인식했기에 애초에 타이완을 할양할 계획이 없었다. 19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에 패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황제는 1683년부터 시작된 타이완 지배를 유지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895년 3월 20일, 일본 시모노세키의 슌판로(春帆楼)에서 한 달간의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회담 전반부에서는 이토와 리가 주로 휴전 협정에 대해 논의했고, 후반부에는 평화 조약의 내용을 논의했다. 이토와 무쓰는 타이완의 완전한 주권 양도를 절대적인 조건으로 제시하고 리에게 펑후 제도와 랴오둥 반도 남단 동쪽 해역의 주권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리훙장은 1894년부터 1895년까지의 청일전쟁에서 타이완이 전장이 된 적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회담 말기, 리훙장은 펑후 제도와 랴오둥 반도 일부의 주권 이양에는 동의했지만, 여전히 타이완의 양도를 거부했다. 1885년부터 타이완이 성(省)이었던 점을 들어 "타이완은 이미 성으로서 다른 나라에 넘겨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결국 리는 타이완을 포기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제국과 청나라 사이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어 타이완 침공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타이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타이완의 병합에 대한 지역 저항에도 불구하고 200년간 지속된 청나라 지배가 일본의 손에 종식되었다. 따라서 타이완은 일본의 항복으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인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일본이 중국에 부과한 조건들은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6일 후, 중국에서 활동하고 영토와 항구를 확보하고 있던 서구 열강인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일본이 요동반도에 대한 요구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는데, 당시 뤼순이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황실 고문들, 그리고 빌헬름 2세는 러시아가 오랫동안 갈망해 온 '결빙되지 않는 항구'로 이용할 수 있는 뤼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4]

세 서구 열강의 전쟁 위협 속에, 1895년 11월, 아직 지역 강국으로조차 인식되지 않던 약소 신흥국 일본은 그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반환하고 요동반도에 대한 사실상의 주장을 철회하는 대신 중국으로부터 의 전쟁 배상금을 더 받아냈다. 당시 유럽 열강들은 다른 조건들, 즉 시모노세키 조약의 다른 조항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서 얻은 자유로운 행동권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실수로 판명되었는데, 일본은 1905년까지 한국을 점령하고 러일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확장한 후,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산둥의 독일 항구를 침범했기 때문이다.[5]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한 지 몇 달 후, 러시아는 중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반도와 하얼빈으로 가는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결국 러시아는 중국 제국에 외교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로 합의했고, 만주를 완전히 병합하는 대신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 해당 지역에 대한 상징적인 임대를 합의했다. 2년 만에 독일, 프랑스, 영국도 약화된 중국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기회를 이용하여(청나라 분할 참조) 각각 상당한 지역을 장악했다. 일본 또한 국제 사회가 강대국이 약소국을 대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식을 주목하고, 현대 산업 국가이자 군사 강국으로 자체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놀라운 조치를 계속했으며,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러일 전쟁에서 보여주었듯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6]

삼국 간섭은 많은 일본 역사가들에 의해 일본 외교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이 시점부터 민족주의적, 팽창주의적, 호전적인 요소들이 결합하여 일본을 주로 경제적 패권에 기반한 외교 정책에서 노골적인 제국주의로 이끌었다.

1895년 4월 20일, 메이지 천황은 강화조약을 비준(批准)했다.[15][17][37] 조약 비준은 원래 추밀원에 자문을 구한 후 천황이 재가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번에는 자문 절차가 생략되고 곧바로 재가되었다.[45] 도쿠다이지 시종장이 이에 앞서 19일에 히로시마 시내의 쿠로다 추밀원 의장을 방문했고, 19일과 20일 양일, 천황은 이토와 협의를 거듭했던 점으로 미루어, 자문 절차의 생략 또는 연기 건에 관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45] 4월 21일, 천황은 “평화 극복에 관한 칙서”를 발표하여 전후 계획을 설명하고, 그 안에서 일청의 선린우호를 역설했다.[45] 이날 일본 정부는 이토 미요지를 전권변리대신으로 임명하고, 5월 8일에 청국의 외교 도시인 옌타이(芝罘, 현 산동성 옌타이시)에서 열릴 예정인 비준서 교환을 위임하여 이토를 그곳으로 출발시켰다.[15][17][37][45][48] 이러한 일련의 신속함은 열강의 간섭의 틈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었지만, 무쓰 무네미쓰가 옌타이로 향하는 이토 미요지에게 준 훈령도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어쨌든 조약을 체결하려는 강한 의지가 그곳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45]

1937년 6월, 조약 조인지인 시모노세키시 춘판루 부지 안에 "일청강화기념관"이 설치되었다.[74] 관내에는 강화회의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으며, 함리궁에서 하사되었다고 전해지는 의자와 회의에서 사용된 조도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74]

참고로, 춘판루와 청나라 사절 일행의 숙소였던 인접사를 잇는 도로는 "리훙장도"라고 통칭되고 있다.[75]

이토 히로부미와 리훙장의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토의 가나가와현 오이소정의 별장 "창랑각"(1896년 5월 준공)의 현판이 있다. 이 현판은 리훙장이 휘호한 것이었다. 창랑각은 나중에 이토의 본택이 되지만, 현판은 오랫동안 이토가의 현관에 장식되었다.[37]

4. 5.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

시모노세키 조약은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이어진 청일 전쟁의 결과로 나타난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 질서를 보여준다. 이 조약으로 일본 제국청나라로부터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열강을 모방하며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했다.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은 타이완을 남중국과 동남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인식하고 있었다. 청나라 협상 대표 리훙장은 타이완 할양을 반대했지만, 일본의 군사적 우위로 인해 결국 타이완을 넘겨주게 되었다.

조약 체결 직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삼국 간섭을 통해 일본에 압력을 가하여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러시아는 부동항인 뤼순을 확보하려 했고, 이는 일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은 랴오둥 반도 반환 대가로 더 많은 배상금을 받아냈지만, 서구 열강의 압력에 굴복한 것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컸다. 이는 일본 내에서 제국주의적 팽창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를 임대하고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지만, 이는 조선만주에서 일본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이러한 갈등은 1904년 러일 전쟁으로 이어졌고, 일본은 승리하여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한편, 메이지 천황은 조약 비준을 신속하게 처리하여 열강의 간섭을 최소화하려 했다.[15][17][37][45] 청나라에서는 오팅방과 미국인 외교 고문 존 포스터가 조약 내용을 전달했지만, 서구 열강의 간섭에 대한 정보는 리훙장에게 전달되지 않았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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