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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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봉상시는 고려 시대부터 대한제국 시대까지 존재했던 국가 기구로, 국가 제례, 시호, 묘호 등을 관장했다. 고려 시대에는 태상시, 태상부, 봉상시, 전의시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원나라 간섭기에 봉상시로 개칭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의 관제를 따라 봉상시로 설치되어 제사, 시호, 적전, 둔전, 기공, 교악 등을 관장했다. 1895년 봉상사로 개칭되었으며, 1907년에 폐지되었다. 봉상시는 정3품 당상관인 정(正)을 최고 책임자로, 다양한 품계의 관원들로 구성되었다.
고려시대에 국가제례와 시호와 묘호를 관장하던 태상시(太常寺)가 목종대 이전부터 있었으며, 문종대에 병과권무관서(丙科權務官署)로 격하되어 태상부(太常府)라 하였다.
봉상시는 국가의 중요한 의례와 관련된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제사(祭祀)[1], 시호(諡號)[2], 적전(籍田)[3], 둔전(屯田)[4], 기공(記功)[5], 교악(敎樂)[6]을 관장하였다. 국가의 중요한 제사를 주관하고, 왕이나 공신 등의 사후에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시호를 의논하고 결정했다. 왕이 직접 농사를 시범 보이는 의례인 적전을 관장하고, 군량미 조달을 위해 설치된 둔전 관련 업무를 수행했다. 공을 세운 인물의 업적을 기록하고, 교육과 음악에 관한 일도 담당했다.
봉상시는 다양한 직급의 관원들로 구성되었다. 최고 책임자인 정(正)은 정3품 당상관이었다.[7] 정1품 도제조(都提調) 1명, 종1품 제조(提調) 1명도 있었다.[7] 종4품 첨정(僉正)부터 종6품 주부(主簿)까지는 구임관(久任官)이었다.[7]
2. 연혁
원나라 간섭기에 원나라의 관청인 태상례의원(太常禮儀院)을 피하여 충선왕대에 봉상시로 개칭되었다. 직제는 1298년에 경(卿) 2명, 소경(少卿) 1명, 승(丞) 1명, 박사(博士) 1명, 대축(大祝) 1명, 봉례랑(奉禮郞) 1명과 이속(吏屬)으로 기사(記事)와 서자(書者)가 있었다. 그 후 1308년(충렬왕 34) 다시 전의시(典儀寺)로 개칭되었다.
1356년(공민왕 5) 문종관제가 복구되면서 대상시(大常寺)로 고쳐지면서 폐지되었으나, 1362년에 곧 봉상시가 복치되었다. 1369년에 또 한번 대상시로 바뀌었다가 1372년에 다시 전의시가 두어졌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년)에 고려의 관제를 따라 봉상시로 개편·설치하였다. 관원으로 판사(判事) 2명, 경(卿) 2명, 소경(少卿) 1명, 승(丞) 1명, 박사(博士) 2명, 협률랑(協律郞) 2명, 대축(大祝) 2명, 녹사(錄事) 2명을 두었다. 1409년(태종 9년)에 전농시(典農寺)(혹은 전사시)로 개칭되었다가 1420년~1421년(세종 2년~3년)에 다시 봉상시로 복칭하면서 판사 이하의 모든 관원들은 모두 문관을 임명하도록하였다. 1466년(세조 12년)에 관제개편을 하였으며 그대로 《경국대전》에 기록되었다. 1895년(고종 32년)에 봉상사(奉常司)로 개칭하였으며 1907년(융희 1년)에 폐지되었다.
2. 1.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는 국가 제례와 시호, 묘호를 관장하던 태상시(太常寺)가 목종 대 이전부터 있었다. 문종 대에는 병과권무관서(丙科權務官署)로 격하되어 태상부(太常府)라 불렸다.
원나라 간섭기에는 원나라의 관청인 태상례의원(太常禮儀院)을 피하여 충선왕 대에 봉상시로 개칭되었다. 1298년(충렬왕 24) 직제는 경(卿) 2명, 소경(少卿) 1명, 승(丞) 1명, 박사(博士) 1명, 대축(大祝) 1명, 봉례랑(奉禮郞) 1명과 이속(吏屬)으로 기사(記事)와 서자(書者)가 있었다. 1308년(충렬왕 34) 다시 전의시(典儀寺)로 개칭되었다.
1356년(공민왕 5) 문종 관제가 복구되면서 대상시(大常寺)로 고쳐졌으나, 1362년(공민왕 11)에 봉상시가 복치되었다. 1369년(공민왕 18)에 다시 대상시로 바뀌었다가 1372년(공민왕 21)에 전의시가 설치되었다.
2. 2. 조선 시대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년)에 고려의 관제를 따라 봉상시로 개편·설치되었다. 관원으로는 판사(判事) 2명, 경(卿) 2명, 소경(少卿) 1명, 승(丞) 1명, 박사(博士) 2명, 협률랑(協律郞) 2명, 대축(大祝) 2명, 녹사(錄事) 2명을 두었다. 1409년(태종 9년)에 전농시(典農寺)(혹은 전사시)로 개칭되었다가 1420년~1421년(세종 2년~3년)에 다시 봉상시로 복칭하면서 판사 이하의 모든 관원들은 모두 문관을 임명하도록하였다. 1466년(세조 12년)에 관제개편을 하였으며 그대로 《경국대전》에 기록되었다. 1895년(고종 32년)에 봉상사(奉常司)로 개칭하였으며 1907년(융희 1년)에 폐지되었다.
2. 3. 대한제국 시대
1895년(고종 32년)에 봉상사(奉常司)로 개칭되었으며, 1907년(융희 1년)에 폐지되었다.
3. 기능
4. 구성
품계 관직 정원 정1품 도제조(都提調) 1명 종1품 제조(提調) 1명 정3품(당상) 정(正) 1명 종3품 부정(副正) 1명 종4품 첨정(僉正) 2명 종5품 판관(判官) 2명 종6품 주부(主簿) 2명 종7품 직장(直長) 1명 종8품 봉사(奉事) 1명 정9품 부봉사(副奉事) 1명 종9품 참봉(參奉) 1명
4. 1. 관원 구성
봉상시의 최고 책임자인 정(正)은 정3품 당상관이었다.[7] 정1품 도제조(都提調) 1명, 종1품 제조(提調) 1명도 있었다.[7] 종4품 첨정(僉正)부터 종6품 주부(主簿)까지는 구임관(久任官)이었다.[7]
품계 | 관직 | 정원 |
---|---|---|
정3품(당상) | 정(正) | 1명 |
종3품 | 부정(副正) | 1명 |
종4품 | 첨정(僉正) | 2명 |
종5품 | 판관(判官) | 2명 |
종6품 | 주부(主簿) | 2명 |
종7품 | 직장(直長) | 1명 |
종8품 | 봉사(奉事) | 1명 |
종9품 | 부봉사(副奉事) | 1명 |
종9품 | 참봉(參奉) | 1명 |
4. 2. 품계별 관직
wikitable품계 | 관직 | 정원 | 비고 |
---|---|---|---|
정1품 | 도제조(都提調) | 1명 | |
종1품 | 제조(提調) | 1명 | |
정3품(당상) | 정(正) | 1명 | |
종3품 | 부정(副正) | 1명 | |
종4품 | 첨정(僉正) | 2명 | |
종5품 | 판관(判官) | 2명 | |
종6품 | 주부(主簿) | 2명 | |
종7품 | 직장(直長) | 1명 | |
종8품 | 봉사(奉事) | 1명 | |
정9품 | 부봉사(副奉事) | 1명 | |
종9품 | 참봉(參奉) | 1명 |
참조
[1]
문서
제사 의식
[2]
문서
추증하는 호
[3]
문서
신농씨,후직씨 제사 토지
[4]
문서
군량 충당 토지
[5]
문서
공로 기념
[6]
문서
음률 정비 및 악사 교육
[7]
문서
구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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