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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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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산진성은 1407년 부산포 개항 이후 왜인을 감시하기 위해 부산진에 군사를 주둔하면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자성대왜성을 수리하여 후기 부산진성으로 삼았으며, 현재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부산진성은 후기 부산진성을 말한다. 임진왜란 첫 전투에서 정발 첨사를 비롯한 군사들이 부산진성을 지키다 함락되었고, 이후 일본군은 증산에 증산왜성을, 해안가에 자성대왜성을 쌓았다. 일제강점기 시기 성이 철거되었으나, 1974년 정화 복원 공사를 통해 동문, 서문, 장대가 복원되었다. 2020년 부산진지성에서 부산진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2023년 자성대공원이 부산진성공원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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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성
개요
2020년 자성대
2020년 자성대
유형왜성 (Waeseong)
위치부산광역시 동구
상세 정보
축조1593년
축조자모리 데루모토 (1593년)
사용 시기1593년–1895년
해체1910년, 일제에 의한 한국 내 성곽 철거 명령의 결과로 해체됨.
현재 상태재건축, 사적지로 활용 중
높이1.5-10m
재료돌, 나무, 회반죽 벽 (원래)
명칭
한국어 (한자)부산진성 (釜山鎭城)
한국어 (한글)부산진성
기타 명칭자성대
기타 명칭 (한자)子城臺
기타 명칭 (한글)자성대
일본어丸山城 (Maruyamajō)
일본어 (가나)まるやまじょう
일본어少西城 (Shōsaiseijō)

2. 유래

1407년(태종 7년) 조선은 부산포(釜山浦)를 개항하면서 왜인(倭人)을 감시하기 위해 부산진(釜山鎭)에 군사를 주둔했다.[3] 1490년(성종 21년) 부산진을 보호하기 위해 지금의 증산(甑山)공원 아래에 성을 쌓았다. 이 성을 '전기 부산진성'이라 부른다.[1][2]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을 지키던 정발 장군은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하였다.[1][2] 이후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허물고 증산 정상부에 증산왜성(倭城)을 쌓고, 해안가에 자성대(子城臺) 왜성(倭城)을 쌓았다.[1][2]

임진왜란 이후 1607년(선조 40년) 조선 수군은 자성대 왜성을 수리하여 '후기 부산진성'으로 삼았다.[1][2]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등록된 '부산진성'은 '후기 부산진성'을 말한다.[1][2]

'자성대'[1][2] 이름은 부산진성의 역사를 잘못 이해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당시 만들어진 일본성 증산왜성을 본성 또는 모성(母城)으로 삼고 자성대왜성을 지성 또는 자성(子城)으로 삼으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1][2]

3. 역사

1407년(태종 7년) 조선은 부산포(釜山浦)를 개항하면서 왜인(倭人)을 감시하기 위해 부산진(釜山鎭)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1490년(성종 21년) 부산진을 보호하기 위해 지금의 증산공원 아래에 성을 쌓았는데, 이를 '전기 부산진성'이라 부른다.[3]

임진왜란 이전 부산포(釜山浦)에는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있었다. 내성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에 있는 정공단 일대를 중심으로 뒷산인 증산(甑山)을 둘러싼 본성이었고, 자성대는 그 외성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수군은 자성대 왜성을 수리하여 '후기 부산진성'으로 삼았다.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등록된 '부산진성'은 이 '후기 부산진성'을 말한다.

일제강점기 시가지 정비 계획으로 성이 철거되어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으나,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부산시의 정화 복원공사로 동문, 서문, 장대가 복원되었다.[3]

3. 1. 임진왜란과 왜성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허물고 증산 정상에 증산왜성(본성)을, 해안가에 자성대왜성(지성)을 쌓았다.[1][2] 증산왜성은 '마루야마 성(丸山城)'[5], '고니시 성(少西城)'[6]이라고도 불렸으며, 일본군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다. 자성대왜성은 본성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1593년(선조 26) 경상도 군정 책임자였던 모리 히데모토 부자가 부산진성의 내성인 본성과 함께 자성대왜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왜장 아사노 나가요시1598년(선조 31)에 수축 또는 증축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3. 2. 조선 후기 부산진성

1592년 임진왜란 때 증산에 있던 본래의 부산진성은 일본군에 의해 허물어져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에 1607년(선조 40년) 조선 수군은 부산왜성의 지성이던 자성대왜성을 부산진성으로 사용하면서 새롭게 수축하였다.[3]

부산진성은 좌도수군첨절제사의 숙소로 쓰였으며, 성내에는 객사인 공진관(拱辰館)과 부속 건물, 관아(官衙)를 비롯한 부속 건물 등 많은 관공서와 창고 건물이 있었다.[3] 성의 규모는 둘레 약 2.4㎞였고, 성벽 위 담장시설인 여첩(女堞) 483타(垜)가 있었다. 동서남북에는 성문 위에 세운 높은 집 또는 다락인 문루(門樓)를 두었는데, 각각 진동문(鎭東門), 금루관(金壘關), 진남문(鎭南門), 구장루(龜藏樓)라 불렀다.[3] 성내 정상에는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 만세덕을 추모하는 만공단(萬公壇)이 조성되었다.[3]

3. 3. 일제강점기와 복원

일제강점기 시가지 정비 계획에 따라 성이 철거되고 해면이 매축되어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3] 1974년 부산시의 정화 복원공사로 동문(건춘문(建春文), 원래 진동문(進東門)), 서문(금루관(金壘關)), 장대(將臺)인 진남대(鎭南臺)가 복원되었다.[3] 1975년 9월 동문 주변 성곽을 신축하였으며, 서문의 금루관은 높은 다락으로 좌우에는 南徼咽喉|남요인후중국어, 西門鎖鑰|서문쇄약중국어이라 새긴 돌기둥(우주석)이 각각 서있다.[9]

4. 구조

부산진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성은 현재 자성대라고 불리는 곳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부산진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내성은 현재 정공단이 있는 좌천동 뒷산 증산에, 외성은 현재 자성대에 위치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부산진성을 허물고 왜성을 쌓았는데, 이때 자성대는 외성 역할을 했다.[3]

성벽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높이는 최고 10m에서 최저 1.5m이다.[8] 바닷물을 끌어들여 너비 20m의 참호를 만들어 배가 성벽에 닿도록 설계되었다.[7]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정비 명목으로 성이 철거되고 자성대 일대 해면이 매립되면서 옛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7] 1974년 부산진성 정화 공사로 동문인 건춘문(구 진동문), 서문인 금루관, 장대인 진남대가 복원되었다.[3]

5. 명칭 변경 및 역사 바로 세우기

자성대[1][2]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식 성인 증산왜성을 본성 또는 모성(母城)으로 삼고 자성대왜성을 지성 또는 자성(子城)으로 삼으면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부산진성의 역사를 잘못 이해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당초 문화재 지정 명칭은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이었으나, 2020년 1월 15일 '''부산진성'''(釜山鎭城)으로 변경되었다.[11] 2021년 1월 29일부터 7월 6일까지 지역 주민 주도로 '부산진성 이름 찾기 100인 릴레이'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2021년 7월 7일 부산시는 이 캠페인에 호응하여 자성대공원 명칭 변경을 추진한다고 발표했고, 2023년 1월 4일 국가지명위원회는 '자성대공원'을 '부산진성공원'으로 공식 명칭 변경 고시하였다.

2022년 동문 현판은 '''진동문'''으로, 진남대 현판은 '''승가정'''으로 변경되었다.

5. 1. 부산진성 이름 찾기 100인 릴레이

래추고 도시재생주민협의체는 자성탐사대라는 주민모임을 만들어 부산진성의 역사를 탐구하던 중, 자성대가 잘못된 이름임을 알고 모임명을 부산진성탐사대로 바꾸고 부산진성 이름찾기 100인 릴레이를 시작했다.

2021년 1월 29일부터 7월 6일까지 진행된 릴레이의 첫 번째 주자는 박승지 주민협의체 회장이 맡았고, 2회차는 정순태 래추고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이 맡았다. 동구청장, 동구의회 의장, 부산시교육감, 서구동구 국회의원, 전 국회의장과 지역주민이 릴레이에 참여했다. 7월 6일 박형준 부산시장이 100번째 릴레이의 주자로 참여했다.

6. 역사 왜곡 논란

2023년 부산시는 부산진성의 고도 제한을 완화하면서 부산진성을 구릉성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축성한 왜성의 일부 구조물에 대해서만 유효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미 구릉에 쌓은 성과 더불어 해안가 주변으로 평지성을 축성했으며,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수군통제영이 부산진성에 주둔했다.[1]

조선 후기 부산진성 관아는 자성대라고 불리는 구릉성이 아니라 평지에 있었으며, 관아는 현 부산진성 금루관 앞에, 일본과 외교관계를 담당했던 부산객사는 현 부산진시장 주변에 있었다.[1]

따라서 조선 후기 부산진성은 평지성이었으며, 왜성의 일부를 근거로 구릉성으로 평가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비판이다.[1]

7. 영가대

1614년(광해군) 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부산진성 근처 해안가에 선착장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들었다. 1617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던 오윤겸이 이 정자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다음부터 통신사행은 이곳에서 해신제를 올리고 일본으로 갔다. 1624년(인조 2) 선위사 이민구가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되었다가 이 정자를 보고 권반의 고향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를 따서 ‘영가대’(永嘉臺)라고 이름지었다.[10]

원래 동구 범일동 성남초등학교 서쪽 경부선 철로변에 있었던 영가대는 1905년 경부선 개통으로 철거되어 일제강점기 때 일본 상인 오이카와(及川民次郞)의 별장인 능풍장으로 옮겨졌다가 사라졌는데, 2000년 부산광역시의 역사 유적지 표석 설치 계획에 따라 동구 좌천동 지하철역 부근의 도로공원에 “부산포왜관·영가대터” 표석을 세웠고, 2003년 9월 25일 동구청에서 자성대에 복원했다.[10]

8. 기타

현재 부산진성에는 임진왜란 때 참전했다가 귀화한 명나라 장군 천만리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와 동쪽 산 중턱에 남해안 일대를 노략질한 왜구를 소탕한 최영 장군 비각이 보존되어 있다.[7]

참조

[1] 웹사이트 부산일본성 증산왜성 1936년 고적61호등록 (부산진왜성.pdf 내용) https://cafe.naver.c[...]
[2] 웹사이트 부산진지성은 부산성이라고 조선왕조실록(인조22년) (부산진지성, 부산일본성) https://cafe.naver.c[...]
[3]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4] 문서 해설 인용
[5] 웹사이트 일본성의 모양을 보고서 그렇게 부른 이유. Untitled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http://www.gnchc.re.[...] 2018-12-22
[6] 문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곳에 주둔했기 때문에 고니시성 이라 불렀다.
[7] 웹인용 우리지역문화재 http://www.cha.go.kr[...] 문화재청 2012-09-17
[8] 웹인용 문화재현황 http://tour.busan.go[...] 부산광역시 2012-09-17
[9] 웹인용 지정문화재 http://tour.bsdonggu[...] 부산광역시 동구 2012-09-17
[10] 웹인용 비지정문화재 http://tour.bsdonggu[...] 동구 문화관광 2012-09-18
[11] 간행물 부산광역시 고시 제2020 - 8호, 《부산광역시 지정문화재 명칭변경 고시》 https://www.busan.go[...] 부산광역시장 2020-01-15
[12] 문서 원래는 갈마봉성이였으나 임진왜란에 석축을 헐어낸 후 일본식으로 재구축 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성북왜성 영토로 변했다.
[13] 간행물 당감동 성지 2차 발굴조사 https://museum.busan[...] 부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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