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1. 개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 후기에 건립된 석탑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위치하며 대한민국의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얇은 기단, 배흘림 기법의 기둥, 얇고 넓은 지붕돌 등 목조 건축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준다. 석탑 1층에는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승전을 기념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 이름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
| 한글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 한자 |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
| 로마자 표기 | Buyeo Jeongnimsaji Ocheung Seoktap |
| 문화관광부 표기 | Puyŏ Chŏngnimsaji Och'ŭng Sŏkt'ap |
| 영어 이름 | Five-story Stone Pagoda at Jeongnimsa Temple Site, Buyeo |
| 국가 | 대한민국 |
|---|---|
| 유형 | 국보 |
| 지정 번호 | 9 |
|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
| 시대 | 백제 |
| 소유 | 국유 |
| 참고 | 부여 정림사지 |
| 문화재청 ID | 11,0009000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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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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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건립 시기
미술사학계에서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목탑을 충실히 재현했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그보다 더 소략하게 재현하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인식해 왔다. 그런데 정림사지 제2차·3차 발굴조사를 담당한 윤무병은 정림사가 사비 천도 시기인 6세기 중엽에 창건되었으며, 오층석탑 아래 판축토(단단하게 다진 땅)가 절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며, 석탑이 판축토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절 창건 당시인 6세기 중엽에 석탑이 건립된 것으로 보았다.
이 석탑 1층에는 백제의 평성탑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최근 이 사찰 터에서 '정림사'라는 사찰명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 유적지는 정림사지(定林寺址)로 명명되었다.
3. 형태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웠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놓았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 기법의 기둥 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는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세련되었다.
각 기단은 기둥돌로 고정되어 있다. 각 층의 탑신 각 모서리는 기둥의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기법을 사용하여 기둥돌을 받치고 있다. 얇고 넓은 지붕돌이 처마의 가장자리를 덮고 있어 고고한 우아함을 보여준다.
4. 가치
이 탑은 얇은 기단, 배흘림 기법을 사용한 기둥, 얇고 넓은 지붕돌 등 목조 건축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세련되고 창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또한, 이 탑은 백제 시대에 남아있는 두 개의 석탑 중 하나로서도 매우 가치가 높다.
5. 당평제비(대당평백제국비명)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 초층탑신에 새겨진 비문을 줄여서 당평제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혹은 백제를 정벌했던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의 공을 기록했다 하여 소정방비라고도 부른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의 8자를 2행으로 전서(篆書)로 쓰고, 그 아래에 ‘현경(顯慶) … 계미건(癸未建)’이라고 2행이 새겨져 있다. 능주장사(陵州長史) 판병조(判兵曹) 직의 하수량(賀遂亮)이 글을 짓고 하남(河南) 낙주(洛州) 권회소(權懷素)가 글씨를 썼다. 비문의 제목은 전서로 새겨져 있다. 비문에 따르면 의자왕(義慈王), 태자 부여융(扶餘隆), 부여효(扶餘孝), 부여연(扶餘演) 및 대신과 장군 88인, 백성 12,807명을 당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압송하였다고 한다.
석탑 표면에는 660년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의 승리를 기념하는 한자가 새겨져 있어, 백제에게 이곳이 상징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 보여준다. 이 비문은 백제-당 전쟁 당시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킨 당나라 장군이 직접 새긴 것이다. 당나라와 신라는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 특징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웠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놓았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 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는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세련되었다.
각 기단은 기둥돌로 고정되어 있다. 각 층의 탑신 각 모서리는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기법을 사용하여 기둥돌을 받치고 있다. 얇고 넓은 지붕돌이 처마의 가장자리를 덮고 있어 "고고한 우아함"을 보여준다.
석탑 표면에는 660년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의 승리를 기념하는 한자가 새겨져 있어, 백제에게 이곳이 상징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 보여준다. 이 비문은 백제-당 전쟁 당시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킨 당나라 장군이 직접 새긴 것이다. 당나라와 신라는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