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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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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정방은 수나라 말기부터 당나라 초기에 활약한 무장으로, 어린 시절부터 용감하고 담대했으며, 도적 토벌에 참여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630년에는 동돌궐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이후 서돌궐 정벌, 백제 정벌 등 굵직한 전투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 백제 정벌에서는 신라와 연합하여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고구려 정벌에서는 실패하고 철수했다. 말년에는 토번을 상대로 싸우다 7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후 좌효위대장군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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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소정방 (蘇定方)
본명소열 (蘇烈)
정방 (定方)
시호장 (莊)
출생과 사망
출생일592년
출생지기주 무읍
사망일667년 (76세)
사망 원인병사 (노환)
경력
주요 경력광도부 절충 → 좌무후중랑장 → 좌위중랑장 → 우둔위장군 → 좌효위대장군 → 좌무위대장군 → 좌효위대장군 겸 유주도독 (사후 추증)
최종 계급좌무위대장군
작호임청현공, 형국공
군사 활동
소속 국가수나라당나라
참전당나라-돌궐 전쟁
서돌궐과의 전쟁
사결과의 전쟁
신라의 백제 정벌
여당전쟁

2. 생애

소정방은 수나라 문제 치세인 591년에 태어났다. 수나라 말기 혼란기에 아버지 蘇邕|소옹중국어을 따라 반란군 토벌에 참여했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직접 부대를 이끌고 , 등 반란군 지도자들을 격파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1] 이후 두건덕, 유흑달 휘하에서 활동하다 그들이 당나라에 패망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나라 정관 연간(627년-649년)에 당 태종 이세민 아래에서 군관으로 복무하기 시작했다. 630년 명장 이정이 이끄는 동돌궐 원정에 참전하여 선봉에서 활약하며 힐리가한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좌무후중랑장(左武候中郎將)으로 승진했다.[1] 그러나 이후 당 고종 초기인 655년까지 비교적 낮은 관직에 머물렀다.

655년, 정명진과 함께 고구려 국경 지역을 공격하여 전공을 세우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으로 승진하며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656년에는 정지절 휘하에서 서돌궐 원정에 참여하여 선봉에서 활약했으나, 부총관 왕문도의 시기로 인해 작전이 원활히 진행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657년, 소정방은 이려도행군대총관(伊麗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되어 서돌궐 원정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1만여 명의 병력으로 아사나하로가 이끄는 10만 대군을 격파하고, 끈질긴 추격 끝에 아사나하로를 생포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 승리로 서돌궐은 사실상 멸망했으며, 당나라의 영향력은 중앙아시아까지 확장되었다. 소정방은 이 공으로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과 형국공(邢國公)에 봉해졌다.

659년에는 서돌궐의 잔존 세력인 사결(思結)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파미르고원 서쪽 지역까지 평정했다.

660년, 신라의 요청을 받아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總管)으로서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켰으며,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을 사로잡아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 공으로 많은 상을 받았으나, 정복 과정에서의 약탈 행위 등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백제 멸망 후 곧바로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이 되어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661년).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을 포위했으나, 보급 문제와 방효태 등 다른 부대의 패배, 혹독한 추위 등으로 인해 결국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662년 철수했다.

663년에는 토번의 침입을 받은 토욕혼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어 토번군과 싸웠다.

소정방은 동돌궐, 서돌궐, 백제 세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왕들을 사로잡는 등 당나라 초기의 영역 확장에 큰 공을 세운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군사 활동은 피정복민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다. 667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추증되고 장(莊)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구당서의 편찬자 유허는 그의 뛰어난 전공에 비해 봉토와 승진이 부족했음을 아쉬워하는 평가를 남겼다.

2. 1. 수말당초와 긴 무명기

수나라 문제 치세인 591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용맹하고 담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수 양제 치세 말기, 수나라 전역이 혼란에 빠지자 아버지 蘇邕|소옹중국어은 향리에서 수천 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소정방은 10대(혹은 15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며 자주 선봉에 서서 적진을 함락시켰다.[1]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그 부대를 이어받아 극현(冀縣)의 반란군 지도자 張金稱|장금칭중국어과 楊公卿|양공경중국어 등을 격파하고 20리 넘게 추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니, 반란군이 감히 경계를 넘보지 못했고 향리 사람들은 그에게 의지했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장금칭을 전투에서 격파했다고 한다.[1]

이후 또 다른 반란 지도자였던 두건덕 휘하로 들어가 하왕(夏王)을 섬겼다. 특히 두건덕의 주요 장수였던 高雅賢|고아현중국어의 눈에 들어 그의 양자가 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621년, 두건덕이 당나라의 진왕 이세민(훗날 당 태종)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히자, 하나라는 일시적으로 당에 점령되었다. 그러나 그해 말, 고아현을 비롯한 옛 하나라 장수들이 유흑달(劉黑闥)을 한동왕(漢東王)으로 추대하며 당에 맞서 봉기했고, 소정방 역시 이 저항에 참여하여 여러 전공을 세웠다. 622년 양부 고아현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623년에는 유흑달마저 당나라 황태자 이건성(이세민의 형)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하자, 소정방은 별다른 기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지냈다. 이 시기까지 그는 큰 명성을 얻지 못한 긴 무명기를 보냈다.

626년 이세민이 당 고조의 뒤를 이어 황제(당 태종)가 된 후, 소정방은 당나라 군대에 합류했다. 630년(정관 4년), 광도부 절충(匡道府折衝)의 직책으로 명장 이정의 휘하에 배속되어 동돌궐 원정에 참전했다. 이 원정의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에서 소정방은 이정의 선봉 부대를 이끌었다. 그는 200명의 기병과 함께 짙은 안개를 틈타 돌궐의 힐리가한(아사나 도비)의 본진 1 앞까지 몰래 접근했다. 안개가 걷히자마자 즉시 돌궐의 본진을 급습하여 100여 명을 죽이는 등 큰 혼란을 일으켰다. 이에 힐리가한과 그의 부인이자 수나라의 공주였던 의성공주(義成公主)는 병사들을 버리고 달아났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잔당들은 모두 항복했다. 이 전투는 힐리가한의 군대를 궤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630년 동돌궐에 대한 당나라의 원정


이 공적으로 소정방은 좌무후중랑장(左武候中郎將)으로 승진하며 중앙 군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영휘 연간(650년-655년)에는 좌위훈일부중랑장(左衛勳一府中郎將)으로 전임되었다.

2. 2. 노년에 온 기회

당 태종 사후 당 고종이 즉위한 655년까지도 소정방의 관직은 동돌궐 정벌 후 얻었던 것과 동일했다고 전해진다.[4] 오랜 기간 비교적 낮은 관직에 머물렀던 소정방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온 것은 655년이었다.

655년, 소정방은 장군 정명진(程名振)과 함께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요수를 건너 고구려의 국경 지역을 기습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당군을 얕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 역공을 시도했으나, 소정방은 분전하여 고구려군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주변 마을을 불태운 뒤 돌아왔다.[4] 이 공으로 소정방은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에 임명되고 임청현공(臨淸縣公)에 봉해졌다.

이듬해인 656년(현경 원년)[5]에는 총산도대총관(葱山道大總管) 정지절(程知節)이 이끄는 서돌궐 원정군에 선봉으로 참여했다. 당시 서돌궐의 가한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는 2만 명의 기병을 보내 응사천(鷹娑川)에서 당군을 막아섰고, 소해정(蘇海政)과 공방을 벌였다. 여기에 서돌궐 부족인 서니시(鼠尼施) 등 2만여 기병이 추가로 합류하고 있었다. 소정방은 잠시 휴식 중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기병 정예 500명을 이끌고 작은 고개를 넘어 기습 돌격하여 서돌궐군을 크게 무너뜨리고 1,500여 명을 살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이후 소정방이 서돌궐 정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3. 왕문도의 시샘

657년경 새해 무렵, 정지절 휘하의 군은 서돌궐의 주력 부대와 마주쳤고, 소정방이 선봉을 이끈 초기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부대총관 왕문도는 소정방의 공을 시기하여 정지절에게 "비록 이번에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관군 역시 사상자가 많으니, 지금부터 방진(方陣)을 짜서 치중대는 안쪽에 배치하고 갑옷을 갖춰 입은 채 수비하고 있어야 적이 와도 바로 응할 수 있어 스스로 만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라고 건의하며 승세를 이어가려는 움직임을 막았다.

나아가 왕문도는 황제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 정지절이 자신의 용맹을 믿고 경솔하게 군사를 움직이니 왕문도로 하여금 이를 절제시키도록 했다고 속였다. 정지절은 이 말을 믿고 더는 깊이 행군하지 않았다. 소정방은 이러한 왕문도의 행동이 군대를 지치게 할 뿐이며, 황제의 명령 역시 위조된 것이 분명하니 즉시 왕문도를 체포하고 서돌궐과 교전해야 한다고 정지절에게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정지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군은 종일 말을 타고 임전 태세로 대기해야 했고, 말들은 지쳐 죽고 병사들은 피폐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소정방은 오히려 패하게 생겼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왕문도를 가두라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한편, 달독성(怛篤城)이 항복하자 왕문도는 재물을 탐내 "그들이 잠시 당군을 피하려는 것일 뿐 돌아가면 다시 적이 될 것이니, 모두 죽이고 재물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정방은 이는 스스로 적을 만드는 행위라며 어떻게 정벌에 성공할 수 있겠냐고 강하게 반대했지만, 왕문도는 이마저도 무시하고 항복한 이들을 살해한 뒤 재물을 약탈했다. 이후 약탈한 재물을 분배할 때, 소정방은 유일하게 한 푼도 취하지 않으며 자신의 원칙을 지켰다.

결국 당나라 군대는 별다른 추가 성과 없이 철수해야 했다. 수도로 귀환하자 왕문도가 황제의 명령을 위조한 죄가 밝혀졌지만, 그는 죽음을 면하고 서인으로 강등되는 데 그쳤다.

2. 4. 서돌궐 정벌

657년 소정방은 다시 서돌궐을 정벌하기 위한 이려도행군대총관(伊麗道行軍大總管)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당나라와 회흘(迴紇)의 혼성 부대를 이끌었으며, 임아상(任雅相)과 회흘의 파윤(婆潤)이 부총관을 맡았다. 당나라와 협력하던 돌궐 출신의 아사나 미사(阿史那彌射)와 아사나 부진(阿史那步眞)도 유사도안무대사(流沙道安撫大使)가 되어 남쪽에서 별도로 진군했다.[6]

수정방의 서돌궐 원정


소정방은 먼저 금산(金山) 북쪽의 처목곤(處木昆) 부락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그곳의 사근(俟斤) 난독록(嬾獨祿)이 만여 장(帳)을 이끌고 투항하자, 소정방은 이들을 위무하고 그중 정예 기병 1,000명을 선발하여 군대에 편입시킨 뒤 돌기시부(突騎施部)로 나아갔다.

서돌궐의 카간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는 10성 부락의 병력 10만 명(다른 기록에는 1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하여 예질하(曳咥河)에서 소정방 군과 맞섰다. 소정방의 군대는 1만여 명(다른 기록에는 2만 명)에 불과했기에 아사나하로는 이를 가볍게 여기고 포위를 시도했다. 소정방은 장창으로 무장한 보병을 언덕에 밀집대형으로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게 하고[7], 자신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그 북쪽에 진을 쳤다. 서돌궐 군이 세 차례 돌격했으나 당나라 보병의 방어 진형을 뚫지 못했다. 기회를 포착한 소정방이 기병으로 역습하여 서돌궐 군을 크게 격파하고 수만 명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다음 날, 소정방이 부대를 정비하고 다시 진격하자 서돌궐의 서부 5개 부족인 5노실필(弩失畢)의 지휘관 호록옥(胡祿屋) 등이 모두 항복했다. 나머지 동부 5개 부족인 5돌륙(咄陸)의 부락들도 이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진군하던 아사나부진에게 투항했다. 이로써 당나라는 서쪽 번(蕃) 지역을 평정하게 되었다.

소정방은 도주한 아사나하로를 계속 추격했다. 진군 중 눈보라를 만나자 부하 장수들이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멈추자고 건의했지만, 소정방은 오히려 적이 추격을 예상하지 못할 것이므로 기습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강행했다. 그는 아사나 미사, 아사나 부진의 군대와 합류하여 재정비 중이던 아사나하로를 기습 공격하여 다시 한번 격파하고 수만 명을 사살하거나 사로잡았다.

아사나하로는 서돌궐의 속국이었던 석국(石國, 현재의 타슈켄트)으로 도망쳤으나, 석국은 당나라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아사나하로를 체포해 소정방에게 넘겨주었다. 이로 인해 당의 세력권은 중앙아시아까지 넓어졌으며, 독립적인 서돌궐 카간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이후 당나라는 아사나 미사를 흥석망가한(興昔亡可汗, "파괴된 것을 일으키는 칸")으로, 아사나 부진을 계왕절가한(繼往絕可汗, "끝난 것을 이어갈 칸")으로 임명하여 서돌궐 지역을 통치하려 했으나, 아사나 미사가 아사나 부진의 모함으로 살해되고 아사나 부진도 곧 사망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소정방이 포로가 된 아사나하로를 수도로 압송하여 고종에게 바치자, 고종은 아사나하로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소정방은 이 공적으로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으로 승진하고 형국공(邢國公)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소경절(蘇慶節) 역시 무읍현공(武邑縣公)에 봉해졌다.

2. 5. 아사나하로 생포



현경 2년(657년) 봄, 당 고종은 다시 서돌궐 정벌을 명했고, 이번에는 소정방이 이려도행군대총관(伊麗道行軍大總管)을 맡아 총지휘하게 되었다. 임아상과 소사업(蕭嗣業)이 부대총관으로 그를 보좌했으며, 당나라의 동맹인 회흘의 병력과 아사나 미사(阿史那彌射), 아사나 부진(阿史那步真) 등 서돌궐 출신 장수들도 참전했다. 소정방은 먼저 알타이 산맥 북쪽으로 진군하여 서돌궐의 추목곤부(處木昆部)를 격파하고, 이어서 시근(俟斤) 부족의 란독록(懶獨祿)을 항복시켰다.

소정방은 휘하의 정예 기병 1천 명과 회흘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예질하(曳咥河)로 나아가 아사나하로의 주력군과 마주쳤다. 아사나하로는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소정방의 병력이 2만 명에 불과한 것을 보고 좌우로 병력을 펼쳐 포위하려 했다. 소정방은 보병을 고지대에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게 하고, 자신은 정예 기병을 이끌고 북쪽 평원에 진을 쳤다. 아사나하로의 군대는 세 차례나 당나라 보병 진지를 돌파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혼전 중에 소정방이 기병을 이끌고 30리를 돌며 치고 빠지자 아사나하로의 군대는 크게 무너져 궤주했다. 당군은 추격하여 수만 명의 인마를 사살하거나 사로잡았다.

다음 날, 소정방이 계속 진군하자 서돌궐 10개 부족 중 서쪽 5개 부족의 추장들이 호록옥(胡祿屋)을 포함하여 모두 항복했고, 동쪽 5개 부족의 추장들은 아사나 부진에게 항복했다. 아사나하로는 그의 장수 굴률(屈律)과 아들 아사나질운(阿史那咥運) 등 수백 기병만을 이끌고 서쪽으로 도주했다.

소정방은 아사나하로를 끈질기게 추격했다. 도중에 많은 이 내리자 부하 장수들이 잠시 쉬어가기를 청했으나, 소정방은 "아사나하로 역시 눈 때문에 당군이 추격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방심할 것이다. 지금 쉬면 놓치게 된다"며 오히려 행군을 재촉했다. 군대를 이끌고 쌍하(雙河)에 이르러 아사나 미사, 아사나 부진의 군대와 합류한 뒤 금아산(金牙山)으로 접근했다. 이때 아사나하로는 당군이 오지 않을 것이라 방심하고 사냥을 하고 있었다. 소정방은 즉시 군사를 풀어 기습 공격하여 아사나하로의 군대를 다시 한번 크게 격파하고 수만 명을 사로잡았다.

아사나하로 부자는 남은 무리를 이끌고 이려수(伊麗水, 지금의 이리허)를 건너 서돌궐의 속국인 석국(石國, 지금의 타슈켄트)의 소돌성(蘇咄城)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석국은 당나라의 공격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성주 이열달간(伊涅達干)의 협조 아래[8] 아사나하로 부자를 체포하여 당군에 넘겼다. 소정방의 부장(副將) 소사업과 아사나 미사의 아들 아사나원상(阿史那元爽)이 마침내 그들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독립적인 서돌궐 카간국은 사실상 멸망하였다.

소정방은 점령지에 역참과 초소를 설치하고 길을 닦았으며, 주민들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시신을 수습하는 등 전후 처리에 힘썼다. 당 고종은 아사나하로를 장안으로 압송해 온 소정방의 공을 높이 사 아사나하로를 살려주는 한편, 소정방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으로 승진시키고 형국공(邢國公)에 봉했으며, 그의 아들 소경절(蘇慶節) 또한 무읍현공(武邑縣公)에 봉했다. 또한 서돌궐 지역에 (州縣)을 설치하여 안서도호부에 예속시킴으로써 당나라의 영향력은 중앙아시아까지 미치게 되었다.

2. 6. 사결 정벌

659년[9], 서돌궐의 속국이었던 사결(思結) 부족의 궐사근(闕俟斤) 도만(都曼)이 소륵(疏勒), 주구파(朱俱波), 갈반타(喝槃陀, 현재의 타스쿠얼간)[10] 등과 연합하여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당나라의 속국인 우전(于闐, 현재 호탄)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에 당 고종은 소정방을 안무대사로 임명하고 토벌을 명했다.

소정방은 군대를 이끌고 엽엽수(葉葉水)에 당도하자, 도만은 마두천(馬頭川)을 지키고 있었다. 소정방은 엄선한 병사 10,000명과 말 3,000필로 하루 만에 300리를 강행군하여 사결의 본거지 서쪽 10리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크게 놀란 도만이 급히 성문 밖에서 요격했으나 실패하고 마보성(馬保城)으로 퇴각했다.

이내 소정방의 후속 부대가 도착하여 성을 포위하자, 도만은 가망이 없음을 알고 항복했다.[9] 660년 봄, 소정방은 도만을 동도 낙양으로 압송하여 당 고종에게 바쳤다. 일부 관료들은 도만의 처형을 요청했지만, 소정방은 항복을 받기 전에 그의 목숨을 보장해주었다고 간청했다. 당 고종은 법률상 도만은 죽어야 마땅하나 소정방과의 약속을 존중하여 그를 살려주었다.[9]

이 정벌로 총령(蔥嶺) 서쪽 지역까지 모두 평정되었다. 소정방은 이 공으로 형주(邢州) 거록진읍(鉅鹿眞邑)의 식읍 500호[11]를 추가로 하사받고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에 올랐다.

2. 7. 백제 공략

660년 3월(음력),[12]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우이마한웅진(神丘嵎夷馬韓熊津) 등 14도 대총관[13]으로 임명하고, 신라의 무열왕이 백제의 공격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자[12]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해 6월(음력), 소정방은 1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산둥반도 성산(成山, 현재 산둥성 룽청 시)을 출발해 황해를 건너 덕물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신라의 태자 문무왕과 만나 작전을 세웠는데, 당나라는 해로로, 신라는 육로로 동시에 백제의 수도 사비로 진격하기로 합의했다.[14]

백제군이 금강 하구 기벌포[14]에서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소정방은 군대를 동쪽 해안 갯벌에 버드나무 가지로 엮은 자리를 깔아[15] 우회 상륙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상륙 후 산에 진을 치고 백제군과 격렬하게 싸웠으며,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크게 패하여 수천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흩어졌다. 때마침 밀물이 들어오자 당나라 함선들은 빠르게 강으로 진입했고, 육군도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함께 진격했다. 사비성에서 약 20리 떨어진 지점에서 백제군이 총력을 다해 맞섰으나, 이마저도 격파당하며 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소정방은 곧바로 추격하여 사비성의 외성까지 점령했다. 이에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은 북쪽의 웅진으로 피신했고, 소정방은 내성을 포위했다.

당나라-신라 동맹 대 백제-일본 동맹. 소정방은 당나라의 총사령관이었다.


의자왕이 도주한 사이, 그의 둘째 아들 부여태가 스스로 왕을 칭하며 농성했다. 그러나 의자왕의 손자 부여문사는 "왕과 태자가 성 밖에 계신데 숙부(부여태)가 임의로 왕위에 올랐으니, 당군이 물러나면 우리 부자(父子)는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많은 백성과 병사들이 그를 따르자 부여태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소정방이 병사들에게 명하여 성벽에 당나라 깃발을 꽂게 하자, 결국 부여태는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곧이어 백제 장군 예군(禰軍)과 예식(禰植) 형제가 웅진성으로 피신했던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을 사로잡아 당군에 넘겼고,[17] 다른 성주들도 모두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했다.

660년 겨울, 소정방은 의자왕, 부여융, 부여태를 비롯한 백제 왕족과 고위 관료 등 포로들을 뤄양으로 압송하여 당 고종에게 바쳤다. 고종은 의자왕과 다른 포로들을 사면했으나, 백제의 옛 땅에는 웅진도독부 등을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려 시도했다. 소정방은 백제를 멸망시킨 공으로 많은 상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소경절(蘇慶節)도 상련봉어(尙輦奉御)의 관직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 따르면, 소정방의 군대가 백제 정복 과정에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반감을 샀으며, 이는 이후 부여풍을 중심으로 한 백제 부흥운동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백제의 장수였던 흑치상지와 사택상여(沙吒相如) 등은 이러한 당군의 행태에 반발하여 저항하다 후에 당나라에 투항하여 장군이 되었다.

2. 8. 황혼

백제를 멸망시킨 후 660년 겨울, 당 고종은 소정방과 걸필하력, 유백영, 성민진 등 다른 장군들에게 백제의 동맹국인 고구려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18] 661년(용삭 원년) 소정방은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서 제2차 여당전쟁에 참전하여, 6개 부대 중 1개 부대를 이끌고 황해를 건너 곧장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향했다. 그해 8월(음력), 패강(浿江, 현 대동강) 하구의 위도(葦島)[19]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아 군영을 세운 뒤 평양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철륵의 반란으로 인해 당나라 군대 중 2개 부대가 철수하면서 전황은 어려워졌고 보급선도 끊겼다.[20]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워 패강이 얼어붙었고, 당군은 각종 공성 병기를 동원해 사방에서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1] 662년 2월(음력), 신라로부터 4,000섬과 22,000섬을 보급받았으나,[22] 다른 부대의 지휘관인 임아상방효태가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23] 많은 눈까지 내리면서 더 이상 작전을 지속하기 어려워 결국 철군했다.

663년 여름, 소정방은 양주안집대사(涼州安集大使)로 임명되어 토욕혼을 도와 토번과 싸웠다.[24] 일부 자료에 따르면 소정방의 군대는 토번의 갈동찬열승과 전투를 벌여 토번군을 크게 격파했으며, 심지어 보복으로 당시 포탈라 궁전을 파괴했다는 주장도 있다.[3]

소정방은 세 나라(동돌궐, 서돌궐,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왕들을 모두 사로잡는 공을 세웠으며, 그로 인해 하사받은 진귀한 보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의 아들 소경절 역시 상련봉어(尙輦奉御)의 지위에 올랐다.

667년(건봉 2년) 소정방은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 고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좌효위대장군, 유주도독(幽州都督)의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장(莊)이라 내렸다.

《구당서》의 주 편집자인 유허는 소정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흥공은 신기한 전략을 구사하고, 강압적인 전술로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그의 경력의 시작부터 끝까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봉토와 승진은 너무 작았고, 제국의 제도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실수였다.

3. 여담


  • 소정방이 신라 상주에서 독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신라까지 침략하려 하자, 김유신이 이를 간파하고 당나라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독주를 먹여 몰살시킨 뒤 구덩이에 묻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의 다리를 당교(唐橋)라고 부른다는 내용이 삼국유사신라고기를 인용하여 기록되어 있다.

  • 소정방을 모시는 사당도 존재했는데,[25] 이는 나당전쟁 이후 당나라와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옛 백제 지역에 대한 안정적인 지배를 위한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26] 고려 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겨, 봄가을로 파견된 사신이 소정방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27]

  • 충청남도 부여군에는 소정방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는 조룡대(釣龍臺)가 있다.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당시, 백마를 미끼로 사용하여 비바람을 일으키는 을 낚아 날씨를 잠재웠다는 이야기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해당 강의 이름이 백마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28]

4. 가계


  • : 소옹(蘇邕)
  • * 본인: 소정방(蘇定方)
  • ** : 소경절(蘇慶節)


아버지 소옹(蘇邕)은 수나라 말기에 향리의 수천 명을 이끌고 반란을 토벌했던 인물이다. 소정방은 15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으며, 소옹이 사망한 후에는 그 부대를 이어받아 극현의 반란군인 장금칭, 양공경 등을 격파하는 등 활약했다.

아들 소경절(蘇慶節)은 소정방이 서돌궐의 아사나하로를 평정한 공으로 무읍현공에 봉해졌다. 이후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는 등 여러 공을 세우자 상련봉어의 지위가 더해졌다.

5. 소정방이 등장하는 작품

대한민국의 여러 드라마영화에서 나당전쟁 시기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5. 1. 드라마

wikitext


5. 2. 영화

참조

[1] 웹사이트 舊唐書 列傳 卷三一至四十 https://web.archive.[...] 2007-10-11
[2] 서적 敦煌古藏文文獻探索集 上海古籍出版社 2008
[3] 문서 如意宝树史
[4] 서적 자치통감
[5] 서적 구당서
[6] 서적 신당서
[7] 서적 구당서, 신당서
[8] 서적 구당서
[9] 서적 신당서
[10] 서적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11] 서적 신당서
[12] 서적 신당서
[13] 웹사이트 대당평백제국비 http://gsm.nricp.go.[...]
[14] 서적 삼국사기
[15] 서적 삼국사기
[16] 서적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대당평백제국비, 당유인원기공비, 삼국사기 http://gsm.nricp.go.[...]
[17] 논문 백제 유민 예씨일족 묘지명에 대한 단상 한국사학회 2012
[18] 서적 신당서
[19] 서적 구당서
[20] 서적 자치통감
[21] 서적 일본서기
[22] 서적 삼국사기
[23] 서적 자치통감
[24] 서적 자치통감
[25]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이상국집
[26] 논문 성황신 소정방과 대흥 호남사학회 2007
[27] 저널 대흥 소도독사와 읍치 성황사 http://baekjeyeongu.[...]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09
[28] 서적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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