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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리 (1985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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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사리 (1985년 영화)는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위해 쇠를 먹고 성장하는 괴물 불가사리가 왕권에 대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제작했으며, 김정일의 지원을 받아 일본 특수 촬영팀과 합작하여 제작되었다. 영화는 권력에 저항하는 민중의 힘을 보여주며, 핵무기 경쟁에 대한 경고와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1998년 일본에서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했으며, 2000년에는 대한민국에서 개봉되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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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리 (1985년 영화) - [영화]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뿔 달린 괴물이 불길 앞에 서 있는 그림
일본 VHS 광고지
원제불가사리
감독신상옥 (미표기)
정건조
제작신상옥 (미표기)
ja(미표기)
각본김세륜
음악서정건
촬영조명현
박승호
편집김련순
제작사조선예술영화촬영소
신필름
도호
zh
배급사트윈 (1995)
레이징 썬더 (1998)
개봉일1995년 1월 21일 (VHS), 1998년 7월 4일 (도쿄)
상영 시간95분
제작 국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중국
언어한국어
제작 비용()
출연
출연 배우장선희
함기섭
리종국
리인권
유경애
Kenpachiro Satsuma
제목 (일본어)
일본어 제목거대 괴수 불가사리 (大怪獣プルガサリ)
불가사리 전설의 대괴수 (プルガサリ 伝説の大怪獣)
스태프 (일본어판)
특수 촬영나카노 아키요시

2. 줄거리

고려 말기, 폭정을 일삼는 왕과 탐관오리들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기근과 고통 속에서 피폐해져 갔다. 왕은 심지어 농민들의 농기구마저 빼앗아 무기를 만들도록 강요했다. 이에 항의하던 대장장이 탁세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굶어 죽게 된다. 죽음을 앞둔 탁세는 감옥에서 자신이 먹던 밥풀을 뭉쳐 작은 괴수 형상을 만들며, 이 창조물이 억압받는 백성들을 지켜주기를 신들에게 간절히 기도한다.

탁세의 딸 아미는 아버지의 유품으로 이 밥풀 형상을 간직한다. 어느 날 아미가 바느질을 하다가 실수로 손가락을 베이고, 그 피가 형상에 닿자 밥풀 인형은 생명을 얻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미는 이 생명체에게 아버지가 언급했던 신화 속 괴물의 이름인 '불가사리'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불가사리는 바늘과 같은 작은 쇠붙이를 시작으로 온갖 종류의 쇠를 먹으며 점점 몸집을 키워나갔고, 아미와 특별한 교감을 나눈다.

한편, 아미의 약혼자이자 농민 봉기군 지도자인 인데는 탐관오리에게 맞서다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한다. 이때 불가사리가 나타나 형리의 칼을 먹어 치우고 인데를 구출한다. 이후 불가사리는 관아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들을 먹어 치우고 더욱 거대해져 산으로 사라진다. 인데를 중심으로 조직된 농민 봉기군은 불가사리의 도움을 받아 부패한 왕권에 맞서 싸우기로 결의한다.

봉기군은 불가사리와 함께 왕궁으로 진격한다. 왕의 군대는 아미를 인질로 삼아 불가사리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거나, 불로 태워 죽이려 하고, 심지어 주술사를 동원해 탁세의 한을 봉인하려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땅속에 묻혔던 불가사리는 아미가 흘린 피로 다시 부활하여 더욱 강력한 힘으로 왕궁을 파괴하고 마침내 폭정을 일삼던 왕을 처단한다.

그러나 왕조를 무너뜨린 후, 불가사리는 더 이상 백성들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쇠를 먹는 식욕을 멈출 수 없었던 불가사리는 봉기군의 무기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에 꼭 필요한 농기구와 솥, 냄비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기 시작한다. 백성들은 여전히 불가사리를 구세주로 여기며 쇠붙이를 내주었지만, 아미는 이대로 가다간 불가사리가 자신들이 싸워 지키려 했던 백성들을 파멸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불가사리의 끝없는 식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결국 다른 나라를 침략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미는 큰 슬픔에 빠진다.

결국 아미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커다란 종을 쳐서 불가사리를 유인한 뒤, 스스로 종 안으로 들어간다. 아미가 들어있는 줄 모르는 불가사리는 종을 삼키고, 곧이어 극심한 고통과 함께 슬픔의 비명을 지르며 돌처럼 굳어 산산조각 나 버린다. 아미의 희생으로 불가사리는 소멸하고, 백성들은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이후, 작아진 불가사리가 바위산 속을 걷다가 빛의 구슬이 되어 아미의 시신 곁으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이 비춰진다.

3. 등장인물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룸)

3. 1. 주요 인물


  • 리인권: 탁세 역. 민중에게 존경받는 대장장이.
  • 장선희: 아미 역. 탁세의 딸이자 인데의 연인.
  • 함기섭: 인데 역. 탁세의 제자로, 민중 봉기를 주도한다.
  • 리룡운: 황 장군 역. 왕의 군대를 이끄는 장군.
  • 박영학: 왕 역.
  • 리종국: 아나 역. 아미의 오빠.
  • 박봉익: 지사 역.
  • 유경애: 인데의 어머니 역.
  • 로혜철: 인데의 오빠 역.
  • 태상훈: 반란군 일원 역.
  • 김기천: 반란군 일원 역.
  • 리언철: 반란군 일원 역.
  • 사츠마 겐파치로: 불가사리 역 (크레딧 없음).
  • 深沢政雄|후카자와 마사오일본어: 아기 불가사리 역 (크레딧 없음).

3. 2. 그 외 인물

wikitext

배우역할비고
장선희아미대장장이의 딸
함기섭인도아미의 남자친구
리종국아나아미의 오빠
리인권탁세대장장이
박영학
리룡운황 장군왕의 징벌자
박봉익지사
유경애인도 엄마
로혜철인도 오빠
태상훈반란군 일원
김기천반란군 일원
리언철반란군 일원
사츠마 겐파치로불가사리 (크리처)크레딧 없음
마사오 후카자와아기 불가사리크레딧 없음


4. 제작

신상옥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영화의 공식 자막에는 '기획 신상옥, 감독 정건조'로 표기되었으나 실제 제작은 신상옥 감독이 주도했다. 그는 북한 영화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자 일본의 특수 촬영 전문가들을 초청했으며, 영화를 통해 핵무기 경쟁의 위험성을 경고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밝혔다.[7]

제작 과정에는 일본 도호 영화사의 특수 촬영 팀이 참여하여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했으며, 특히 "고지라 시리즈" 제작 경험이 있는 나카노 아키요시 감독과 수트 액터 사쓰마 겐파치로 등이 합류했다. 영화광으로 알려진 김정일 당시 노동당 비서의 관심 아래 대규모 조선인민군 병력이 엑스트라로 동원되기도 했다.

영화는 1985년에 완성되었으나, 감독 신상옥이 이듬해 미국으로 망명하는 등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즉시 공개되지 못했다. 이후 1998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에서 개봉되었고, 2004년에는 DVD로도 출시되었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도 1962년에 불가사리를 소재로 한 괴수 영화 《불가사리》(포스터 표기: 송도 말년의 불가사리)가 제작된 바 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괴수 영화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필름이 유실되어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다.

4. 1. 기획 및 배경

신상옥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영화의 공식 자막에는 '기획 신상옥, 감독 정건조'로 표기되었으나 실제 제작을 주도한 것은 신상옥 감독 본인이었다. 그는 당시 북한 영화계에 새로운 기술과 시도를 도입하고자 일본의 특수 촬영 전문가들을 초청했으며, 이 영화를 통해 핵무기 경쟁의 위험성을 경고하려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7]

영화의 기획은 1985년 2월 중순에 처음 제안되었고, 같은 해 4월에는 평양과 중국 베이징에서 로케이션 헌팅이 진행되었다. 이 영화의 기획은 신상옥 감독의 공으로 알려져 있지만, 작가 폴 피셔는 신상옥 감독이 일본의 괴수 영화 장르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며, 프로젝트의 최초 구상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언급한 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당시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정일은 일본 도호 사의 고질라 시리즈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84년에 개봉한 리부트 작품 고질라를 인상 깊게 보고, 일본에서의 상업적 성공에 주목하여 도호의 특수 촬영 부서 인력들을 직접 고용해 북한판 괴수 영화 제작을 강력히 추진했다는 증언이 있다. 신상옥 감독은 김정일이 괴수의 디자인을 소와 유사하게 만들 것을 제안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최종적으로 고려 시대로 결정되었으나, 초기 기획 단계에서는 역사 고증 및 의상 제작의 용이성을 고려하여 삼국 시대의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방안도 검토되었다.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영화 속 왕궁의 모습은 베이징의 자금성, 특히 태화전을 모델로 삼아 제작되었다. 영화의 핵심 줄거리는 고려 말, 폭정으로 고통받던 민중과 억울하게 죽은 대장장이 탁세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탁세가 죽기 전 쌀밥을 뭉쳐 만든 작은 형상이 딸 아미의 피를 통해 생명을 얻어 전설 속 괴물 '불가사리'로 태어난다는 민간 설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불가사리는 쇠를 먹으며 점차 거대해지고,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부패한 왕조에 맞서 싸우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단순한 괴수 영화를 넘어, 민중의 저항 정신과 권력에 대한 비판을 담으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김정일은 신상옥 감독의 영화 제작을 매우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촬영 현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영화 제작을 위해 약 20,000 (약 66115m2) 규모의 대형 촬영 단지인 문수 촬영소 건설을 지시하는 등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촬영소는 특수 효과 촬영이 진행될 당시에도 계속해서 건설 중인 상태였다.

4. 2. 제작진


  • 감독: 정건조 (명의상)[1] / 신상옥 (실질)
  • 제작: 정건조 (명의상) / 신상옥 (실질, 신필름) / 김정일 (총괄 프로듀서)[1]
  • 각본: 김세륜, 이춘구
  • 촬영: 조명현, 박승호
  • 편집: 김련순
  • 조명: 로동천, 리인범
  • 특수 효과: 김득호
  • 특수 효과 미술: 박정길, 스즈키 요시오 (일본)
  • 음악: 서정건
  • 미술: 리도익
  • 불가사리 슈트 제작: 야스마루 노부유키 (일본)


'''협력 스태프 (일본 도호)'''[1]

  • 협력 특수촬영 감독: 나카노 아키요시
  • 협력 촬영: 에구치 켄이치
  • 협력 미술: 스즈키 요시오
  • 협력 조명: 미카미 코헤이
  • 협력 특수 효과: 쿠메 오사무
  • 조형 치프: 야스마루 노부유키
  • 조작: 시로쿠마 에이지
  • 치프 조감독: 아사다 에이이치


'''제작사'''

  • 신필름
  • 조선예술영화촬영소
  • 도호 (일본)
  • 베이징 영화 제작소 (중국)


'''협력'''

  • 도호 영상

4. 3. 특수 효과

신상옥 감독은 북한 영화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자 일본의 특수 촬영 전문가들을 초청했다.[7] 이는 고질라 시리즈의 팬이었던 김정일의 영향도 있었는데, 그는 1984년작 고질라를 인상 깊게 보고 도호의 특수 촬영팀을 고용하여 북한 자체 괴수 영화 제작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상옥 감독은 김정일이 괴수 디자인을 소와 비슷하게 만들 것을 제안했다고 회상했다.

특수 효과 제작을 위해 도호 특수 기술과의 스태프 15명이 초빙되었으며, 여기에는 "고지라 시리즈"를 담당했던 특촬 감독 나카노 테루요시 (크레딧상 나카노 아키요시)와 1984년작 고질라에서 고질라를 연기했던 수트 액터 사쓰마 겐파치로가 포함되었다. 김정일은 사츠마의 고질라 연기를 칭찬하며 불가사리 역을 맡도록 직접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사츠마는 1985년 4월 할리우드 영화로 착각하고 제안을 수락했으며, 북한 영화에 출연한 최초의 외국인 배우로 여겨진다.

불가사리 슈트 제작은 도호의 야스마루 노부유키와 코바야시 토모키가 담당했으며, 도호 스튜디오 내에서 제작된 후 북한으로 운반되었다. 불가사리는 이빨이 난 물소 같은 머리에 갑옷을 입은 듯한 외형을 하고 있으며, 쇠를 먹고 점차 거대해진다. 탄생 직후에는 섬세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거대화되면 육중하게 움직인다. 영화 속에서는 민중을 억압하는 왕조에 맞서는 존재로 묘사된다. 크기에 따라 여러 종류의 슈트가 사용되었는데, 태어난 직후의 작은 불가사리는 후카자와 마사오가, 거대화된 불가사리는 사쓰마 겐파치로가 연기했다. 사츠마는 꼬리가 없어 연기하기 편했다고 술회했다.

중국 베이징 영화 스튜디오 입구 사진
중국 베이징 영화 스튜디오 (2022년 촬영). 불가사리가 왕궁을 파괴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영화는 조선 민화를 소재로 한 사극에 괴수가 등장하는 특수 촬영 영화로, 기와나 내부 기둥까지 충실히 재현된 왕궁 미니어처와 그 파괴 장면의 박력이 특징이다. 왕궁 미니어처는 베이징의 자금성을 모델로 제작되었다. 클라이맥스인 왕궁 파괴 장면은 중국 베이징 영화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는데, 사츠마는 중국 정부가 영화 촬영을 위해 이러한 대규모 세트 파괴를 허가한 것에 감명받았다고 언급했다. 또한, 조선인민군 병력이 대규모 엑스트라로 동원되어 혁명군과 정부군 간의 격돌 장면 등 현실감 있는 전투 장면을 연출했다.

일본 스태프들은 1985년 9월 중순, 베이징 영화 스튜디오에서 2주간 미니어처 세트 작업을 진행한 후, 평양으로 이동하여 약 2개월간 특수 효과 촬영을 완료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촬영은 전력 부족 문제와 장비 도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사츠마 등은 촬영 스튜디오 창문에 유리가 없어 한겨울처럼 추웠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일부 장면은 한국예술영화촬영소 내부가 아닌 뒤편 언덕에서 촬영되었다.

일본 스태프들은 "예산이 마음대로였다"고 회고할 정도로 제작비가 풍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 제작에 참여한 일본인 스태프들의 이름은 초기 크레딧에는 오르지 않았다. 후반 작업은 일부 일본에서 진행되었으며 1985년 12월에 완료되었다.

4. 4. 북한 영화 산업과 신상옥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는 1978년 북한에 의해 납치되어, 당시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정일의 지시 아래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해야 했다. ''불가사리''는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제작한 마지막 영화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신상옥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영화 크레딧에는 '기획 신상옥, 감독 정건조'로 표기되었으나 실제 제작 총괄은 신상옥 본인이었다. 그는 북한 영화계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일본의 특수 촬영 전문가들을 초청했으며, 영화를 통해 핵무기 경쟁의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밝혔다.[7] 그러나 작가 폴 피셔에 따르면, 신상옥 감독은 일본의 괴수 영화 장르에 큰 관심이 없었고, 누가 처음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불가사리''의 기획 배경에는 김정일의 개인적인 관심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일본 도호 영화사의 고질라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특히 1984년작 고질라를 인상 깊게 보고 북한판 괴수 영화 제작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도호의 특수 촬영 부서 스태프들을 직접 고용하여 제작에 참여시켰고, 괴수의 디자인을 소와 비슷하게 만들라는 구체적인 제안까지 했다고 신상옥 감독은 회고했다.

영화의 배경은 고려 시대로 설정되었으나, 왕궁 장면은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을 모델로 하여 촬영되었다. 주연 배우로는 당시 21세였던 장선희가 캐스팅되었는데, 그녀는 원래 평양 국제공항에서 만난 신상옥 감독의 즉석 제안으로 배우가 된 승무원 훈련생이었다. 일본에서는 1984년 고질라에서 고질라 역을 맡았던 수트 액터 사츠마 겐파치로를 비롯한 15명의 도호 특수 효과 스태프가 초빙되었다. 김정일은 사츠마의 연기를 높이 평가하며 그에게 불가사리 역을 맡기라고 직접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츠마는 처음에는 할리우드 영화인 줄 알고 참여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

주요 촬영은 1985년 6월부터 8월까지 평양에서 진행되었고, 특수 효과 촬영은 같은 해 9월부터 12월까지 이어졌다. 촬영 감독은 조명현과 박승호가 맡았다. 사츠마 겐파치로에 따르면, 영화 제작비는 약 200만달러에서 300만달러 사이로 추정되며, 이는 당시 북한 영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예산이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예산이 사실상 "무제한"이었다고 묘사하기도 한다. 특히, 조선인민군 병력이 대규모 엑스트라로 동원되었는데, 약 13,000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츠마는 "신상옥 감독이 엑스트라 장면에는 원하는 만큼 많은 사람들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군대가 사람들을 데려오고 그들은 올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돈 문제는 전혀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김정일은 촬영 현장에 직접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제작 과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영화 제작을 위해 약 20,000 '''' 규모의 대형 촬영소인 문수 촬영소 건설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 촬영소는 특수 효과 촬영 당시에도 계속 건설 중이었다.

신상옥 감독은 실제 제작을 주도했지만, 촬영 막바지에는 정건조 감독이 투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일본에서 극장 개봉 시에는 감독 명의가 정건조로 변경되었고, 참여한 일본인 스태프들의 이름은 크레딧에서 제외되었다.

영화는 민화에 등장하는 불가사리 설화를 바탕으로, 사극에 괴수 장르를 접목한 특수 촬영 영화이다. 정교하게 제작된 왕궁 미니어처 세트와 그 파괴 장면,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의 특징인 대규모 엑스트라 동원을 통한 전투 장면의 현실감이 특징으로 꼽힌다.

1985년에 영화가 완성되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즉시 공개되지 못했다. 이는 감독인 신상옥이 1986년 오스트리아 에서 미국 대사관을 통해 망명한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상옥 감독의 망명 이후, 북한 당국은 그의 이름을 제작 기록에서 삭제하려 했으며, 영화의 공개도 미루어졌다. 결국 일본에서는 1998년에야 개봉될 수 있었고, 2004년에는 DVD로도 발매되었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도 1962년에 같은 소재의 괴수 영화 ''불가사리''(포스터 표기: 송도 말년의 불가사리)가 제작된 바 있다. 이는 한국 최초의 괴수 영화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 없다. 신상옥 감독은 미국 망명 후 이 작품의 리메이크를 기획하여, 1996년 무대를 중세 유럽으로 옮긴 영화 《갈가메스》(Galgameth)가 숀 맥나마라 감독, 마이클 안젤리 각본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5. 개봉 및 반응

《불가사리》는 1986년 일본에서 개봉될 예정이었으나 신상옥 감독의 망명으로 무산되었고,[8] 이후 1998년 일본에서 개봉되어 주목을 받았다.[9]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 최초의 북한 영화로 개봉하였으나 흥행에는 실패하였다.[10]

5. 1. 해외 개봉

''불가사리''는 처음부터 국제적인 개봉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다. 1986년 1월 도호 스튜디오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같은 해 2월 신상옥 감독은 제3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참석하여 서방 영화 배급사들에게 영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괴물과 고려 시대 장군 세 명이 등장하는 포스터. 왼쪽에는 영어로 제작진 이름이, 오른쪽 상단에는 영화 제목 'Pulgasary'가 영어로 인쇄되어 있다.
사쓰마 겐파치로의 저서 ''북한의 고질라 관점'' 1994년판에 실린 영어 포스터.


원래 1986년 일본에서 상영될 계획이었으나, 그해 3월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북한 감시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 사건 직후 북한 당국은 《불가사리》에 대한 상영 금지령을 내렸고, 일본을 포함한 해외 개봉 계획은 전면 중단되었다.[8]

신상옥 감독의 망명 이후 한동안 잊혔던 《불가사리》는 1994년 김정일이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면서 다시 빛을 볼 가능성이 생겼다. 1995년 1월 21일, 일본의 비디오 배급사 트윈(Twin)이 《불가사리》를 VHS로 출시하며 영화의 첫 공개 배포라고 주장했다. 이 VHS는 통신 판매로만 구매할 수 있었는데, 트윈 측은 신상옥 감독의 허가를 받았다고 밝혔지만, 이후 일본 영화 잡지 키네마 준보 등에서는 이를 저작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지적하며 논란이 일었다.

10여 년이 지난 1998년 7월 4일, 《불가사리》는 마침내 일본에서 정식으로 극장 개봉되었다. 도쿄의 키네카 오모리 단 한 곳의 소극장에서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수요가 많아 상영 기간이 9월까지 연장되었다. 특히 같은 시기 개봉한 헐리우드 대작 영화 고질라(1998)보다 흥행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북한 영화가 할리우드를 꺾었다'는 식의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9]

극장 개봉 성공 이후, 일본 배급사 레이징 선더(Raging Thunder)는 일본 내 다른 영화관에서도 《불가사리》를 상영했으며, 일본어 자막 또는 더빙을 선택할 수 있는 가정용 비디오로도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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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HS불가사리 전설의 대괴수【일본어 더빙판】NTSC1998년レイジング・サンダー|레이징 선더일본어
LD불가사리 전설의 대괴수일본어 자막/조선어, NTSC1998년파이오니아 LDC (현 NBC유니버설 엔터테인먼트 재팬)
DVD불가사리 전설의 대괴수특전: 촬영 풍경 사진, NTSC1998년파이오니아 LDC (현 NBC유니버설 엔터테인먼트 재팬)
DVD불가사리 전설의 대괴수 <더・정본 제1탄>저가판, 특전: 촬영 풍경 사진, NTSC2004년제네온 엔터테인먼트
DVD불가사리 전설의 대괴수NTSC2012년ブロードウェイ|브로드웨이일본어



일본에서는 텔레비전으로도 방영되었는데, 1999년 11월 20일에는 도쿄도 지역 방송국인 MX TV(현 TOKYO MX)에서 황금 시간대인 저녁 8시에 방송되었으며, 연도는 불명이지만 간사이 TV에서도 심야 시간대에 방영된 기록이 있다.

5. 2. 한국 개봉

2000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개봉된 북한 영화가 되었다. 당시 4개관에서 상영되었으나,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10]

5. 3. 평가

일본에서는 1986년 1월 도호 스튜디오에서 처음 상영되었을 때 호평을 받았다. 1998년 7월 정식 개봉 이후에는 흥행에 성공하여, 도쿄 키네카 오모리 극장에서의 상영 기간 동안 약 18,00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는 같은 해 개봉한 트라이스타의 1998년판 고질라보다 높은 흥행 성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 평론가들은 고지라 시리즈 제작 경험이 있는 도호 특수 촬영 팀이 참여하여 구현한 특수 효과, 충실하게 재현된 왕궁 미니어처와 그 파괴 장면의 박력,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을 살린 대규모 엑스트라 동원을 통한 혁명군과 정부군 간의 현실감 있는 전투 장면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조선 민화를 바탕으로 압제에 저항하는 민중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점도 주목받았다.

서구권에서는 컬트 고전으로 여겨진다. 이는 신상옥 감독의 납북 및 탈출이라는 극적인 제작 배경과 맞물려, 이 영화가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자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북한 영화 중 하나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2001년 미국 개봉 이후 서구 평론가들과 괴수 팬들 사이에서는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부는 영화를 선전물로 치부하거나, 신상옥 감독의 최악의 작품으로 평가했으며, "즐겁게 캠피하다"거나 "영화로서 꽤 형편없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콜라이더와 벌처 등 일부 매체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보다는 그 제작 비화가 더 흥미롭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반면, 영화 제작자 안나 브로노우스키는 북한 영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본 영화들 중 ''불가사리''를 뛰어난 작품으로 언급했으며, ''괴수'' 장르에 대한 가치 있는 오마주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 7월 22일, 북한 영화 최초로 정식 개봉하여 50개 극장에서 상영되었으나, 최종 관객 수는 1,000명 미만에 그치며 흥행 실패를 기록했다. 초기 관객 수가 저조하여 개봉 첫 주 만에 상영을 중단하는 극장이 많았다. 당시 한국 내에서 일본식 괴수 영화 장르의 비인기, 상대적으로 조악해 보이는 특수 효과에 대한 젊은 관객층의 외면 등이 흥행 실패의 원인으로 분석되었다.

6. 해석 및 논란

영화 《불가사리》는 그 제작 과정의 특수성과 영화 내용 자체로 인해 다양한 해석과 논란을 낳았다. 특히 영화가 특정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으며, 이는 신상옥 감독의 의도와 관련된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6. 1. 정치적 해석

요하네스 쇤헤르에 따르면, 신상옥 감독이 영화 《불가사리》에 숨겨진 메시지를 담았다는 추측이 있었다. 영화 속 불가사리는 김일성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혁명을 배신한 것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거나, 북한 주민들에게 김씨 정권에 맞서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해석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왕조를 무너뜨린 불가사리가 백성들의 농기구까지 먹어 치우며 더 많은 쇠를 요구하는 모습에서 이러한 해석의 근거를 찾는다. 이는 결국 자신들을 구해준 존재를 스스로 파괴해야 하는 민중의 상황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신상옥 감독은 이러한 정치적 해석, 특히 영화가 북한의 동시대 계급 갈등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그는 만년에 《불가사리》가 오히려 평화주의에 대한 호소이자 핵전쟁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순수한 괴수 영화였으며, 어떠한 이념도 담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6. 2. 저작권 문제

(내용 없음)

7. 리메이크

신상옥 감독은 촬영 후 1986년 오스트리아 체류 중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을 신청했다.[11] 이후 미국에서 활동하며 1996년 《불가사리》를 리메이크한 영화 《갈가메스》(Galgameth)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사이먼 쉰(Simon Sheen)이라는 가명으로 참여했으며, 무대를 중세 유럽으로 옮겨 젊은 왕자가 자애로운 괴물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왕국을 되찾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감독은 션 맥나마라, 각본은 Michael Angeli|마이클 앤젤리영어가 맡았다. 그러나 신상옥 감독은 이 영화가 《가든 오브 이블》(1998)과 함께 자신에게 큰 재정적 손실을 입혔다고 언급했다.

8. 기타


  • 영화 제작에는 조선인민군 병력이 대규모로 동원되었다.
  • 녹음: 김유성
  • 미술: 이도익
  • 특수촬영: 김득호

참조

[1] 서적 俺は俳優だ 着グルミ役者と呼ばれて30年 ワイズ出版 2004-12-08
[2] 문서 クレジットなし
[3] 웹사이트 監督との対話から見える『グエムル -漢江の怪物-』の輪郭 https://www.thecinem[...] 2021-10-19
[4] 서적 大ゴジラ図鑑 1995
[5] 서적 大ゴジラ図鑑2 1995
[6] 서적 ゴジラ365日 洋泉社 2016-11-23
[7] 뉴스 [신상옥의 북한영화 이야기] 불가사리 http://nk.chosun.com[...] NK조선 2000-10-15
[8] 뉴스 北억류때 만든 북한판 고질라'불가사리' 신상옥감독 영화 日서 개봉 경향신문 1998-06-19
[9] 뉴스 북한영화가'할리우드'꺾었다 경향신문 1998-08-31
[10] 뉴스 北영화 '불가사리' 흥행 참담 한국일보 2000-07-24
[11] 뉴스 인터뷰▶부천영화제 참석 신상옥-최은희 부부 "북에서 만든 영화 상영하고 싶어" 한겨레 1997-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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