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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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대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사후 아들 히데요리를 보좌하고 정권 안정을 위해 임명한 5명의 유력 다이묘를 지칭한다. 초기 구성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였으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사후에는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합류했다. 이들은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리를 보좌하고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력 장악 시도와 5대로 간의 갈등으로 인해 체제가 변질되고 결국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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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로 | |
---|---|
개요 | |
존속 기간 | 1598년 – 1600년 |
정치 체제 | 섭정 |
이전 | 도요토미 정권 |
이후 | 에도 막부 |
구성원 | |
구성원 |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597년 사망) / 우에스기 가게카쓰 (1598년 임명) |
관련 정보 | |
관련 인물 | 도요토미 히데요시 |
관련 기구 | 오봉행 |
2. 5대로의 구성
오대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5년경 자신의 사후를 대비해 만든 일종의 합의체이다. 히데요시는 주요 다이묘 5명을 선정하여 자신의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도록 했다.
오대로 구성 초기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5인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각각 영지와 관직에서 다른 다이묘들을 압도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1597년 사망하면서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마에다 도시이에가 1599년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마에다 도시나가가 오대로에 합류하였다.
2. 1. 초기 구성원
오대로의 초기 구성원과 각자가 보유했던 석고는 다음과 같다.구성원 | 영지 및 석고 | 관직 (사망 당시) |
---|---|---|
도쿠가와 이에야스 | 간토 지역 256만 석 | 정이위·내대신 |
마에다 도시이에 | 가가 등 83만 석 | 종이위·전 권대납언 |
우키타 히데이에 | 기비 동쪽 57만 석 | 종삼위·전 권중납언 |
모리 데루모토 | 기비 서쪽, 아키 등 120만 석 | 종삼위·전 권중납언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지쿠젠 33만 석 | 종삼위·권중납언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사후에는 우에스기 가게카쓰 (아이즈 120만 석)가 대로가 되었고, 마에다 도시이에 사후에는 장남 마에다 도시나가가 그 자리를 승계하였다.[32]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키타 히데이에,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우에스기 가게카쓰) 5명은 「어칙·어칙추가」에 서명하여 다른 다이묘와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사망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명에 따라 「오대로」가 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 5명이었고, 마에다 도시이에 사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 마에다 도시나가 5명이 「오대로」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명을 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망 또는 질병 등의 이유로 결원될 경우에는 적남(삼남)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마에다 도시이에가 결원된 경우에는 적남 마에다 도시나가가 계승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세 명이 결원되었을 때의 결원 보충에 대해서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게이초 4년 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의 논의에서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를 「여섯 번째 대로」로 하는 안이 제기되었지만, 반론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실현되지는 않았다.[33]
2. 2. 변동 사항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오대로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이 변동되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사망 (1597년) → 우에스기 가게카쓰 합류
- 마에다 도시이에 사망 (1599년) → 장남 마에다 도시나가 승계
최종적으로 오대로는 다음 5명으로 구성되었다.[31][32]
이름 | 영지 및 석고 | 비고 |
---|---|---|
도쿠가와 이에야스 | 간토 지역 255만 석 이상 | 정이대장군 |
모리 데루모토 | 주고쿠 지역 8개 국 120만 5천 석 | 종삼위·전 중납언 |
우에스기 가게카쓰 | 오슈, 호쿠리쿠 지역 120만 석 | 종삼위·전 중납언 |
마에다 도시나가 | 호쿠리쿠 지역 등 61만 석 이상 | 종삼위·중납언, 아버지 마에다 도시이에 사후 승계 |
우키타 히데이에 | 산요 지역 57만 석 | 종삼위·전 중납언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1592~1598) 실패와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 등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자신의 사후 도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위해 5대로(五大老) 제도를 구상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유키 히데야스를 후계 구도에 포함시키려 했으나, 다른 다이묘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33]
3. 5대로 성립 배경
1595년, 히데요시는 어칙(御掟) 5개조와 「어칙 추가」 9개조를 발표하여 정권 안정을 도모했다. 이 문서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사후 마에다 도시나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사후 우에스기 가게카쓰) 등 5명의 유력 다이묘들이 연서했다. 이들은 훗날 도요토미 정권의 '대로(大老)'로 불리게 된다.
1598년, 히데요시는 병이 깊어지자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5대로와 이시다 미쓰나리 등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들이 합의제를 통해 정치를 운영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이로써 '오대로·오부교(五奉行)' 제도가 제도화되었다.
히데요시는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마에다 도시이에 등을 임명하여 권력의 균형을 맞추려 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도시이에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의 섭정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5대로를 포함한 위원들과 섭정들에게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다하고, 파벌을 만들지 않으며, 국정 운영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는 조항에 서명하게 했다. 또한 구마노 신사의 ''쿠마노 고후''熊野牛王府|구마노 고후일본어라는 부적을 사용하여 맹세를 받고, 죽기 직전 5대로에게 자신에게 충실할 것을 서약하게 했다.[8] 이 서약은 일본어로 ''키쇼몬''起證文|기쇼몬일본어으로 알려져 있다.
3.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 안정 노력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1592~1598)이 실패로 끝나자 점차 변해갔다. 히데요시는 직접 참전하지 않고 가신들에게 지휘를 맡겼다. 1597년 14만 명의 군대를 조선에 보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4]
이 시기 히데요시는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나기 전,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삼았다가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히데츠구에게 고야산(高野山)에서 할복(자살)을 명했다. 히데츠구의 가족과 가신들도 모두 처형되었다.[4]
1595년, 히데요시는 체제 안정과 히데츠구 제거 후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5개의 법령(御定五ヶ条)을 발표했다. 같은 해 7월 15일, 주요 다이묘들은 마에다 도시이에의 저택에 모여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3]
1598년, 병으로 건강이 나빠지자[4] 히데요시는 신뢰하는 다이묘들에게 아들 히데요리를 부탁했다.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섭정이 되어 히데요리가 성년이 되면 통치 자격을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에야스가 거절했다는 기록도 있다.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 등 5대 장로(五奉行)는 이에야스와 다른 원로들을 "고부교슈(御奉行衆)"라 칭하고, 자신들을 "토시요리도모(年寄共)"라 불렀다.[9] 그러나 5대 장로가 실제로 "고다이로(五大老)"로 불렸다는 증거는 없다. "다이로(大老)"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로주(老中)보다 높은 최고 직책이었다.[11]
분로쿠 4년(1595년)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히데요시는 유력 다이묘들이 연서하는 형태로 「어칙(御掟)」 5개조[28]와 「어칙 추가」 9개조를 발표하여 정권 안정을 꾀했다. 이 연서에 참여한 5명의 유력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사후에는 마에다 도시나가), 모리 테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사후에는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후세에 도요토미 정권의 「대로(大老)」로 여겨지게 되었다.
게이초 3년(1598년) 여름,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시다 미쓰나리 등 가신들과 함께 합의제로 정치를 운영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른바 「오다이로·오부교(五奉行)」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관위관직도 정이위(正二位)·내대신(内大臣)으로 다른 4명보다 높았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모리 테루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임명했고,[29] 히데요시 사후에는 이에야스가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마에다 도시이에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의 섭정이 되었다.[30]
하지만 도시이에 사후 이에야스는 다른 대로들을 귀국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들어가 히데요리를 장악했다.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보냈고, 나머지 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몰락하면서, 이에야스의 단독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3. 2. 5대로 임명 과정
오대로(五大老)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정치를 운영하기 위해 임명한 다섯 명의 유력 다이묘를 말한다. 이들은 히데요시와의 관계, 국가 내 권력의 크기 등을 고려하여 선발되었다. 히데요시는 권력이 한 명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강력한 다이묘들을 선택했다.[4][5]
마에다 도시이에와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와의 친분으로 인해 오대로에 임명되었다. 도시이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던 히데요시의 친구였으며, 도요토미 가문으로부터 존경받았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 것을 견제하고자 그를 선택했다.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양아들로, 친분을 바탕으로 오대로에 임명되었다.[4][5] 이들은 모두 히데요시 휘하에서 오랫동안 가정 관리에 종사했다.[6]
히데요시는 오대로를 다른 다이묘들과 다르게 대우했는데, 그 이유는 취차(取次)가 없었기 때문이다. 취차는 다이묘들 사이에서 명령 전달을 돕는 중개자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오대로는 히데요시와 직접 대화할 수 있었고, 히데요시는 이들의 영지 통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다이묘의 영지가 클수록 영지 통치 경험이 풍부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지역 통치에 자신의 개입이 필요한 소규모 다이묘들과는 다르게 대우했다. 1588년 검 사냥령(刀狩)에서 히데요시는 소규모 다이묘들에게만 정책 집행을 명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규모 다이묘들은 명령 없이도 따랐지만, 히데요시는 그들에게 정책 집행을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았다.[7]
1598년 8월 5일, 히데요시는 오대로를 포함한 위원들과 섭정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항에 서명하게 했다.[8]
조항 | 내용 |
---|---|
제1조 | 히데요시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일편단심으로 히데요리(秀頼)를 섬겨야 한다. |
제2조 | 히데요시 집안의 규칙은 변경되지 않는다. 국정 운영 방침을 결정할 수 없는 경우, 이에야스(家康)와 토시이에(利家)를 통해 히데요리(秀頼)와 상의하거나, 천황과 상의해야 한다. |
제3조 | 파벌을 만들지 않고, 사적인 고려와 편파를 배제해야 한다. |
제4조 | 모든 사소한 질투와 불화를 억압하며 국정 운영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 |
제5조 |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되, 소수 의견도 사적인 이익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고려해야 한다. |
제6조 | 모든 회계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방식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
제7조 | 히데요시가 비밀로 유지하기를 원했던 것은 유출되어서는 안 된다. |
제8조 | 위원이나 그들의 추종자들이 명령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경우, 상급 장교에게 보고하고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 |
히데요시는 다이묘와 맹세할 때 구마노 신사의 ''쿠마노 고후''(熊野牛王府)라는 부적을 사용했으며,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오대로에게 자신에게 충실할 것을 서약하도록 했다.[8] 이 서약은 일본어로 ''키쇼몬''(起證文)으로 알려져 있다.
분로쿠 4년(1595년)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히데요시는 유력 다이묘들이 연서하는 형태로 「어칙(御掟)」 5개조[28]와 「어칙 추가」 9개조를 발령하여 정권 안정을 도모했다. 이 연서에 참여한 5명의 유력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사후에는 마에다 도시나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사후에는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후세에 도요토미 정권의 「대로(大老)」로 여겨지게 되었다.
게이초 3년(1598년) 여름,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년이 될 때까지 앞서 언급한 유력 다이묘 5명(이미 사망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제외)과 이시다 미쓰나리 등 도요토미 가문의 벼슬아치들에 의한 합의제를 유언으로 남겼다. 이른바 「오대로·오부교(五奉行)」 제도가 확립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로 내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유지했으며,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모리 데루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29], 마에다 도시이에를 임명했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가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처리하고, 도시이에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의 섭정이 되었다.[30]
하지만 도시이에 사후 이에야스는 자신 이외의 대로들을 귀국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들어가 히데요리를 장악하여, 중앙에서 이에야스를 견제하는 존재가 사라졌다.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제공했고, 나머지 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개역(改易) 또는 대폭적인 감지가 되어 몰락했고, 이에야스의 단독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4. 5대로의 역할과 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5년 히데쓰구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유력 다이묘들이 연서하는 형태로 「어칙(御掟)」 5개조[28]와 「어칙 추가」 9개조를 발령하여 정권 안정을 도모했다. 이 연서에 참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사후 마에다 도시나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사후 우에스기 가게카쓰) 5명의 다이묘가 후세에 도요토미 정권의 대로로 여겨지게 되었다.
1598년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년이 될 때까지 5명의 대로와 이시다 미쓰나리 등 도요토미 가문 가신들에 의한 합의제를 통해 정치를 운영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른바 「오대로·오부교(五奉行)」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로 내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유지했으며,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마에다 도시이에를 임명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처리하고, 도시이에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의 섭정이 되었다.[30]
하지만 도시이에 사후 이에야스는 다른 대로들을 귀국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들어가 히데요리를 장악하여, 중앙에서 이에야스를 견제하는 존재가 사라졌다.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제공했고, 나머지 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개역(改易) 또는 대폭적인 감봉으로 몰락했고, 이에야스의 단독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히데요시의 유서에는 이에야스 등을 "오인의 중(五人の衆)", 미쓰나리 등을 "오인의 물(五人の物)"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그 외의 명칭은 확인되지 않는다. 히데요시의 죽음 직전부터 미쓰나리 등은 이에야스 등을 "어봉행중(御奉行衆)", 자신들을 "연로자들(年寄共)"이라고 하는 문서를 다수 발급했다.[34] 모리 데루모토나 우키타 히데이에의 문서에도 자신들을 "봉행"이라고 하는 문구가 있다.[35]
시마즈 요시히사는 "어로중중・어봉행중(御老中衆・御奉行衆)"[36],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어연로자중・어봉행중(日本御年寄衆・御奉行衆)"[37]이라고 각각 이에야스 등과 미쓰나리 등을 구분하여 불렀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마에다 겐이・마스다 나가모리・나가쓰카 마사이에는 이에야스 탄핵장 "내부 치카이의 조조(内府ちかひの条々)"를 여러 다이묘에게 발표했지만, 그 문서에서도 이에야스 등을 "어봉행중(御奉行衆)", 자신들을 "연로자들(年寄共)"[39]이라고 했다.
"오대로(五大老)"라는 명칭은 야마가 소코의 『무가사기(武家事紀)』, "오봉행(五奉行)"은 오세 호안의 『타이코키(太閤記)』등에 보이며, 후에 "오대로・오봉행(五大老・五奉行)"이라는 구분이 정착하게 되었다.
4. 1. 히데요리 보좌 및 양육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4년에 오사카 성의 소유권을 당시 한 살이었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넘겨주었다.[4] 마에다 도시이에는 히데요리가 성년이 되어 히데요시의 후계자 자리를 이어받을 때까지 오사카 성에서 히데요리를 양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0] 도쿠가와 이에야스 또한 히데요리의 후견인 역할을 맡아, 히데요리가 섭정 역할을 맡도록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다.[20]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리의 충실한 신하로 여겨졌다.1595년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 이후, 히데요시는 유력 다이묘들이 연서하는 형태로 「어칙(御掟)」 5개조[28]와 「어칙 추가」 9개조를 발령하여 정권 안정을 도모했다. 이 연서에 참여한 다이묘들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사후 마에다 도시나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사후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후세에 도요토미 정권의 오대로로 여겨지게 되었다.
1598년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앞서 언급한 5명의 유력 다이묘와 이시다 미쓰나리 등 도요토미 가문의 벼슬아치들에 의한 합의제를 통해 정치를 운영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른 다이묘들보다 높은 관위와 관직을 가지는 등 특별한 지위를 유지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모리 데루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임명했고,[29] 오대로 제도를 만들 때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임명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처리하고 도시이에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의 섭정이 되었다.[30]
하지만 도시이에 사후, 이에야스는 다른 대로들을 귀국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들어가 히데요리를 장악했다.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제공했고, 나머지 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개역(改易)되거나 영지가 크게 줄어 몰락하면서 이에야스의 단독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4. 2. 정치적 역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현재의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 지방 8개국을 지배했으며, 오봉행(五奉行) 중에서도 가장 많은 석고(石高)를 보유하여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12]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15세가 될 때까지 섭정을 맡도록 임명되었고, 후시미에 거주할 것을 요청받았다.[12]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5년 히데쓰구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유력 다이묘들이 연서하는 형태로 「어칙(御掟)」 5개조[28]와 「어칙 추가」 9개조를 발령하여 정권 안정을 도모했다. 이 연서에 참여한 5명의 유력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사후에는 마에다 도시나가), 모리 테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사후에는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후세에 도요토미 정권의 대로(大老)로 여겨지게 되었다.
1598년 히데요시는 죽기 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년이 될 때까지 앞서 언급한 5명의 대로(이미 사망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제외)와 이시다 미쓰나리 등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들에 의한 합의제를 통해 정치를 운영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른바 「오대로·오부교(五奉行)」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로 내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마에다 도시이에를 임명했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가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처리하고, 도시이에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의 섭정이 되었다.[30]
하지만 도시이에 사후 이에야스는 자신 이외의 대로들을 귀국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들어가 히데요리를 장악하여, 중앙에서 이에야스를 견제하는 존재가 사라졌다.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제공했고, 나머지 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개역(改易) 또는 대폭적인 감봉으로 몰락했고, 이에야스의 단독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4. 3. 임진왜란 관련 역할
히데요시 사후, 오봉중(五奉中)은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철군 명령을 내렸다. 오봉중은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 알려질 경우 조선에 있는 일본군 내부에 혼란이 초래될 것을 우려하여 사망 사실을 은폐하고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에 알리지 않았다. 군사적 교착 상태 이후 일본군 철수가 이루어진 후에도 전쟁 종식을 위한 최종 평화 협상은 수년간 계속되었다.[21]4. 4. 기타 역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의 아들(각각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마에다 도시나가)은 아버지들을 도와 오봉행 관련 업무를 보좌했으며, 마에다 도시나가는 향후 봉행으로 임명될 계획이었다.[12]5. 5대로 체제의 변질과 붕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로쿠 4년(1595년) 히데쓰구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유력 다이묘들이 연서하는 형태로 「어칙(御掟)」 5개조[28]와 「어칙 추가」 9개조를 발령하여 정권 안정을 도모했다. 이 연서에 참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사후 마에다 도시나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사후 우에스기 가게카쓰) 5명의 유력 다이묘가 훗날 도요토미 정권의 「대로(大老)」로 불리게 되었다.
게이초 3년(1598년) 여름, 히데요시는 죽음을 앞두고 적자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년이 될 때까지 이시다 미쓰나리 등 도요토미 가문 관료들과 함께 합의제로 정치를 운영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른바 「오대로·오부교(五奉行)」 제도가 제도화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로 내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유지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어칙·어칙 추가」 발령 시에는 모리 데루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29], 「오대로·오부교」 제도화 시에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임명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도시이에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의 섭정이 되었다.[30]
그러나 마에다 도시이에 사후, 이에야스는 다른 대로들을 귀국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들어가 히데요리를 장악하면서 중앙에서 이에야스를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다.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보냈고, 다른 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개역(改易)되거나 영지가 대폭 축소되어 몰락하면서 이에야스의 단독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최근에는 '오대로·오부교'라는 구분이 오용이며 '오부교(五奉行)·오년기(五年寄)'가 정확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42]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어[45] 연구가 진행 중이다. 히데요시가 이시다 미쓰나리 등 측근을 정권 운영의 중심으로 삼기 위해 봉행을 "년기(年寄)"로 명목상 중요하게 만들고, 반대로 이에야스 등 숙로(宿老)를 "오봉행(御奉行)"이라고 부르며 세력 약화를 꾀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46]
5. 1. 5대로 간의 권력 불균형
의회 내 권력 균형은 각 구성원의 지위와 소유한 곡물(koku)의 양에 따라 결정되었다. 1596년 5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내대신(内大臣) 지위를 받았다. 마에다 도시이에는 종1위 대납언(大納言)이었고, 다른 세 명은 종2위 중납언(中納言)이었다.[22] 이에야스는 구성원 중 최고 지위에 있었고, 많은 곡물(koku)을 소유하여 다른 5대로 중에서도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만 곡물(koku)은 250명의 병사를 통솔하는 것과 맞먹는다고 여겨졌기에, 곡물(koku, 石)의 양은 다이묘(大名)의 수입뿐만 아니라 군사력을 보여주는 척도였다.[23]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뢰하는 가신들의 토지를 제외하고도 약 200만 곡물(koku)을 소유했다. 이에야스는 강력한 군 지휘관으로도 알려져,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지지하는 반란 가능성 때문에 5대로에 임명했을 수 있다.[5]각 의회 구성원의 잠재적 수입량은 다음과 같다:
1595년 秀次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유력 다이묘들이 연서하는 형태로 「어칙(御掟)」 5개조[28]와 「어칙 추가」 9개조를 발령해 정권 안정을 도모했다. 이 연서에 참여한 5명의 유력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사후 마에다 도시나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사후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후세에 도요토미 정권의 「대로(大老)」로 여겨지게 되었다.
1598년 여름,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년이 될 때까지 유력 다이묘 5명(사망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제외)과 이시다 미쓰나리 등 도요토미 가문 신하들의 합의제를 유언으로 남겼다. 이른바 「오다이로·오부교(五奉行)」 제도가 만들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로 내에서도 특별한 지위(관위관직도 정이위(正二位)·내대신(内大臣)으로 다른 4명보다 높았다)를 유지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견제할 인물로 「어칙·어칙 추가」 발령 시에는 모리 데루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29], 「오다이로·오부교」 제도화 시에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임명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도시이에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의 섭정이 되었다.[30]
그러나 마에다 도시이에 사후, 이에야스는 자신 이외의 대로들을 귀국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들어가 히데요리를 장악하여 중앙에서 이에야스를 견제하는 존재가 사라졌다.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제공했고, 나머지 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개역(改易) 또는 대폭적인 감지가 되어 몰락했고, 이에야스의 단독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5. 2. 5대로 간의 갈등 심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정략결혼시켰는데, 이는 5대로(大老)와 5부교(五奉行) 사이의 불화를 일으켰다.[20] 1595년의 "오사카 성 중벽서(大阪城中壁書, ''Osakajochu-kabegaki'')"에는 장로와 위원 모두의 협의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위원들은 이러한 결혼을 이유로 이에야스의 사임을 요구했다.[20] 가신 중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 문제에 대해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불만을 토로했지만, 이에야스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고, 이 문제는 이에야스의 친구였던 호리오 요시하루에 의해 해결되었다.[20]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5대로 평의회 구성원들 사이에 마찰이 발생했다. 문치파(文治派: 전문적인 관리들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원하는 세력)와 무단파(武断派: 강력한 군사 권력을 지지하는 세력)의 두 파벌이 형성되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단파에 속했다.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은 지 1년 후, 이에야스는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포착했다. 1599년 마에다 도시이에의 죽음으로 이에야스는 5대로 중 가장 경험이 많은 인물이 되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불법적으로 성을 건설하고 수리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에야스는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었고, 이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어졌다.[20] 전투 후인 1603년,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나이다이진으로 임명되었다. 이에야스는 두 가문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손녀인 센히메를 오사카로 보내 히데요리와 결혼시켰다.[20]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원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위해 일하면서 권력을 얻었다. 이에야스의 권력은 히데요리에 의해 위협받는 것처럼 보였고, 이에야스와 히데요리 모두를 겨냥한 일련의 음모와 오사카 전투(1614-15)의 여러 전투가 이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씨를 완전히 제압하여 승리함으로써 일본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25]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가 승리한 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도요토미 씨가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가능한 한 많은 도요토미 가문 사람들을 죽였고, 히데요리의 딸은 수녀원에 보냈다.[25] 이에야스는 당시 8살이었던 히데요리의 아들 쿠니마츠를 교토의 로쿠죠 강가(로쿠죠-가와라)에서 죽였다.[25]
히데요시 사후에는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가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처리하고, 도시이에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의 섭정이 되었다.[30]
하지만 도시이에 사후 이에야스는 자신 이외의 대로들을 귀국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들어가 히데요리를 장악하여, 중앙에서 이에야스를 견제하는 존재가 사라졌다.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제공했고, 나머지 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개역(改易) 또는 대폭적인 감지가 되어 몰락했고, 이에야스의 단독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5. 3.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력 장악
이에야스는 아들과 딸들을 정략결혼시켰는데, 이는 5대 장로와 5대 위원 사이의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아들 다다테루를 다테 마사무네의 딸 이로하히메와 결혼시켰다. 1595년의 "오사카 성 중벽서(大阪城中壁書, Osakajochu-kabegaki|오사카조추카베가키일본어)"에 따르면, 이러한 결혼은 장로와 위원 모두의 협의가 필요했다. 위원들은 이러한 결혼을 이유로 이에야스의 사임을 요구했다. 가신 중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 문제에 대해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야스는 이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고, 이 문제는 우연히 이에야스의 친구였던 호리오 요시하루에 의해 해결되었다.히데요시 사후, 5대 장로 평의회 구성원들 사이에 마찰이 발생했다. 문치파(文治派: 전문적인 관리들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원하는 세력)와 무단파(武断派: 강력한 군사 권력을 지지하는 세력)의 두 파벌이 형성되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단파에 속했다. 마에다 도시이에가 죽은 지 1년 후, 이에야스는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포착했다. 1599년 마에다 도시이에의 죽음으로 이에야스는 5대 장로 중 가장 경험이 많은 인물이 되었다. 마침내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불법적으로 성을 건설하고 수리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에야스는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었고, 이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어졌다.[20] 전투 후인 1603년,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었고, 히데요리는 나이다이진으로 임명되었다. 이에야스는 두 가문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손녀인 센히메를 오사카로 보내 히데요리와 결혼시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원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위해 일하면서 권력을 얻었다. 이에야스의 권력은 히데요리에 의해 위협받는 것처럼 보였고, 이에야스와 히데요리 모두를 겨냥한 일련의 음모와 오사카 전투(1614-15)의 여러 전투가 이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씨를 완전히 제압하여 승리함으로써 일본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25]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가 승리한 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도요토미 씨가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가능한 한 많은 도요토미 가문 사람들을 죽였고, 히데요리의 딸은 수녀원에 보냈다.[25] 이에야스는 당시 8살이었던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를 교토의 로쿠조 강가(로쿠조가와라)에서 죽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로쿠 4년(1595년) 히데쓰구 사건이 초래한 정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유력한 다이묘들이 연서하는 형태로 「'''어칙(御掟)'''」 5개조[28]와 「어칙 추가」 9개조를 발령하여 정권 안정을 도모했다. 이 연서에 참여한 5명의 유력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사후에는 마에다 도시나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사후에는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후세에 도요토미 정권의 「대로(大老)」로 여겨지게 되었다.
게이초 3년(1598년) 여름, 죽음의 자리에 있던 히데요시는, 적자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년이 될 때까지의 정치 운영에 있어서는, 앞서 언급한 유력 다이묘 5명(이미 사망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제외)과 이시다 미쓰나리 등 도요토미 가문의 벼슬아치들에 의한 합의제를 취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른바 「'''오다이로·오부교(五奉行)'''」가 제도화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종일관 대로 내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관위, 관직도 정이위(正二位)·내대신(内大臣)으로 다른 4명보다 높았다.) 히데요시는 이 이에야스에 대항하고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어칙·어칙 추가」 발령 시에는 모리 데루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29], 「오다이로·오부교」 제도화 시에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임명했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가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처리하고, 도시이에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의 섭정이 되었다.[30]
하지만 도시이에 사후 이에야스는 자신 이외의 대로들을 귀국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들어가 히데요리를 장악하여, 중앙에서 이에야스를 견제하는 존재가 사라졌다.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제공했고, 나머지 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개역(改易) 또는 대폭적인 감지가 되어 몰락했고, 이에야스의 단독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6. 5대로 체제에 대한 평가와 논쟁
5대로 체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권력 구조와 그 변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복잡한 주제이다.
종래에는 5대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남긴 유언에 따라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정치를 담당하는 합의체로서 국정 최고 기관으로 여겨졌다.[41]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오봉행(五奉行)·오년기(五年寄)' 구분이 더 정확하며,[42] 5대로는 히데요시의 의도와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면서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5대로 체제에 대한 평가는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 기존 통설: 5대로는 쇠퇴한 관백(関白) 권력을 대신하여 태합(太閤) 권력 아래서 국정을 맡는 기관이었다.[41]
- 수정주의적 관점: '오봉행(五奉行)·오년기(五年寄)' 구분이 더 정확하며, 히데요시는 측근 관료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42]
- 비판적 관점: 5대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력 장악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으며, 히데요시의 본래 의도와는 달랐다.[49]
이처럼 5대로 체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며,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이다.
6. 1. 기존 통설: 국정 기관으로서의 5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5년 히데쓰구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유력 다이묘들에게 5개조의 '''어칙(御掟)'''과 9개조의 '어칙 추가'를 발표하여 정권 안정을 도모했다.[28] 이 문서에 서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사후 마에다 도시나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사후 우에스기 가게카쓰) 5명의 유력 다이묘가 후세에 도요토미 정권의 '대로(大老)'로 불리게 되었다.[41]1598년 히데요시는 죽음을 앞두고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앞서 언급한 5명의 다이묘(이미 사망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제외)와 이시다 미쓰나리 등 도요토미 가문의 관료들이 합의제를 통해 정치를 운영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이른바 「'''오대로·오부교(五奉行)'''」 제도가 확립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로 중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유지했으며, 관직도 다른 4명보다 높았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어칙·어칙 추가' 발령 시에는 모리 데루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29] '오대로·오부교' 제도화 시에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임명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도시이에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의 섭정을 맡았다.[30]
그러나 도시이에 사후, 이에야스는 다른 대로들을 귀국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들어가 히데요리를 장악하여 중앙에서 이에야스를 견제할 인물이 사라졌다.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보냈고, 나머지 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개역(改易)되거나 영지가 대폭 축소되어 몰락하면서 이에야스의 단독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6. 2. 히데요시의 구상과 5대로 체제의 변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5년 히데쓰구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유력 다이묘들에게 '''어칙(御掟)''' 5개조와 「어칙 추가」 9개조를 발령하여 정권 안정을 도모했다.[28] 이 문서에 연서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사후 마에다 도시나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사후 우에스기 가게카쓰) 5명의 유력 다이묘가 후세에 도요토미 정권의 '대로(大老)'로 불리게 되었다.1598년 여름, 히데요시는 죽음을 앞두고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앞서 언급한 5명의 유력 다이묘(이미 사망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제외)와 이시다 미쓰나리 등 도요토미 가문의 신하들이 합의제를 통해 정치를 운영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이른바 '오대로(五大老)·오봉행(五奉行)'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로 중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유지했으며, 관위관직도 정이위(正二位)·내대신(内大臣)으로 다른 4명보다 높았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어칙·어칙 추가' 발령 시에는 모리 데루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29], '오대로·오봉행' 제도화 시에는 마에다 도시이에를 임명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정무를, 도시이에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의 섭정을 맡았다.[30]
그러나 도시이에 사후, 이에야스는 다른 대로들을 귀국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들어가 히데요리를 장악했다. 이로써 중앙에서 이에야스를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다. 마에다 가문은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보냈고, 나머지 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개역(改易)되거나 영지가 대폭 삭감되어 몰락하면서 이에야스의 단독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
최근에는 '오대로·오봉행'이라는 구분이 오용이며, '오봉행(五奉行)·오년기(五年寄)'가 정확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42] 히데요시가 측근을 정권 운영의 중심으로 삼기 위해 봉행을 '년기'로 명목상 중요하게 만들고, 이에야스 등 숙로(宿老)를 '오봉행'으로 불러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46]
한편, 히데요시가 죽기 직전 5대로·5봉행의 체제와 권한, 직무를 결정하고 집단 지도 체제를 계획했으며, 이에야스의 권력만을 돋보이게 하는 것을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49]
야베 겐타로(矢部健太郎)는 5대로 제도의 본질이 무가 관백제(武家関白制)와 연동하여 형성된 '청화가(清華家)'에 필적하는 가문 등급을 얻는 '청화성(清華成)'이며, 1588년에 이미 성립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에도 막부 성립 후 도쿠가와 가문이 모리, 우에스기 등 다른 다이묘 가문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던 '청화성'을 숨기기 위해 사료를 조작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50]
6. 3. 5대로 체제의 본질: 무가 청화가(武家清華家)
야베 켄타로(矢部健太郎)는 5대로 제도의 본질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근간이었던 무가 관백제(武家関白制)와 연동하여 형성된, 청화가(清華家)에 필적하는 가격을 얻는 '청화성(清華成)'(무가 청화가)이라고 보았다.[50] 이는 15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미 청화성을 달성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우키타 히데이에 외에 모리 테루모토,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이후에는 마에다 도시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청화성을 달성하면서 5대로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50]야베는 에도 막부 성립 이후 도쿠가와 씨가 모리, 우에스기 등 외양 다이묘와 동등하게 취급된 사실("청화성")을 숨기기 위해 사료를 조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50] 그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도요토미 정권의 가격 질서에서 우에스기 가게카쓰보다 위에 있던 적이 없는데도 먼저 대로가 된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지적한다.[52] 1595년 8월 3일, 5대로 제도의 근거가 되는 어칙(御掟) 작성 당시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슈지 사건으로 후시미성으로 가는 중이었으므로 어칙에 서명할 수 없었고, 나중에 승낙했을 것이라 추정한다.[51] (어칙 사본 중에는 가게카쓰 서명이 있는 것도 있다)[52] 어칙 본문에 가게카쓰가 이에야스, 도시이에, 테루모토, 다카카게와 함께 "승물어사면지중(乗物御赦免之衆)"으로 동등하게 취급된 점을 볼 때, 가게카쓰는 이미 이 시점에 대로의 자리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52] 따라서 '대로 다섯 명'이나 '다카카게 사후 가게카쓰가 대로가 되었다'는 것은 사료 조작의 결과일 뿐이라고 한다.[52] 야베에 따르면 대로 다섯 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하야시 라잔이 1641년에 편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보(豊臣秀吉譜)』(1591년 조)로 추정되지만, 이 시기에 이에야스, 도시이에, 테루모토, 히데이에, 다카카게를 하나의 집단으로 다룬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5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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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modern Japan : a historical surv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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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大老の序列や五奉行との違いなどについて解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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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31回 あえなく崩れた五大老五奉行制、豊臣政権崩壊は秀吉の誤算に始まる - 真田丸の補足解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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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別授与品 - 熊野速玉大社公式サイト|和歌山県新宮市鎮座 根本熊野大権現 世界遺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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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8回 1586年の豊臣秀吉、統一目前で勢いは最高潮 - 真田丸の補足解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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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杉景勝とは~豪毅果断・潔白謹厳で笑わない戦国武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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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毛利輝元とは【かろうじて毛利家をつないだ戦国大名】
https://senjp.com/mo[...]
2018-06-17
[16]
뉴스
小早川隆景【詳細版】~毛利家大きく支えた智将
https://senjp.com/ta[...]
2018-06-17
[17]
비디오
【日本史】 近世11 織豊政権8 豊臣秀吉5 (11分)
https://www.youtube.[...]
2018-06-17
[18]
서적
小早川隆景
マツノ書店
[19]
뉴스
【 幻のシックスマン?】 豊臣政権「五大老」、実は六人目にはあの智将がいた
https://rekijin.com/[...]
2018-06-10
[20]
서적
Een geschiedenis van Japan : van samurai tot soft power
Acco
2014
[21]
서적
Samurai Invasions of Korea 1592–1598
[22]
뉴스
五大老筆頭 徳川家康は他の大老たちを凌駕するだけの力を持っ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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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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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戦国大名の軍事力はどれくらい? - 日本史が好きになる?歴史ブロ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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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7
[24]
서적
A brief history of Japanese civilization
Wadsworth, Cengage Learning
2013
[25]
서적
Early modern Japan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26]
웹사이트
大河ドラマ「軍師官兵衛」|NHKドラマ
https://www6.nhk.or.[...]
2018-06-15
[27]
웹사이트
人物紹介 {{!}} 大河ドラマ「天地人」 {{!}} チャンネル銀河
https://www.ch-ginga[...]
201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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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伝「水口藩加藤家文書」
『特別展 五大老』パンフレット
[29]
간행물
「家康・輝元・隆景連署起請文前書案」
防府毛利報公会蔵・『特別展 五大老』パンフレット
[30]
간행물
「浅野家文書」
『大日本史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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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毛利家文書』天正19年(1591年)旧暦3月13日付(『大日本古文書 家わけ文書第8 毛利家文書之三』所収)では、112万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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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能登国21万石余は前田利政および長連龍が領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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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秀康宛て秀忠書状」
大阪城天守閣蔵・『特別展 五大老』パンフレッ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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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武家事紀』第三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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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毛利家文書」「加能越古文書」
『大日本史料』『新訂徳川家康文書の研究』中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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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薩藩旧記雑録 後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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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島津家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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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萩藩閥閲録・義演准后日記
[39]
문서
真田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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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毛利家文書・吉川家文書・秋田家文書
[41]
서적
近世封権制成立史論 織豊政権の分析II
東京大学出版会
[42]
논문
豊臣五大老・五奉行についての一考察
[43]
서적
石田三成
[44]
서적
徳川家康文書の研究
[45]
논문
豊臣「五大老」・「五奉行」についての再検討―その呼称に関して―
[46]
논문
家康と秀吉―内府"律義"の真相―
[47]
문서
毛利家文書
[48]
논문
徳川家康の豊臣政権運営-「秀吉遺言覚書」体制の分析を通して―
[49]
논문
『十六・七世紀イエズス会日本報告集』における五大老・五奉行に関する記載についての考察(その2)
別府大学史学研究会
[50]
서적
豊臣政権の支配秩序と朝廷
吉川弘文館
[51]
문서
문서 제목 없음 (본문 내용만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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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豊臣政権と上杉家
高志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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