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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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관걸은 전한 무제의 측근으로 시중과 태복을 지냈으며, 소제의 보정을 맡았던 인물이다. 무제의 신임을 받아 실권을 장악하고 병권을 쥐었으며, 이광리의 대완 원정에 수속도위로 종군하여 공을 세워 소부에 임명되었다. 소제 즉위 후 곽광 등과 함께 마하라의 난을 진압하고 안양후에 봉해졌다.
이후 곽광과의 갈등으로 곽광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연왕 유단, 상홍양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가 곽광에게 일망타진되었다. 그의 전기는 《한서》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손녀와 이광리의 전기에 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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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걸 | |
---|---|
기본 정보 | |
![]() | |
성 | 상관(上官) |
휘 | 걸(桀) |
시호 | 경(敬) |
생몰 | |
몰년 | 기원전 80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상관안정(上官安政) |
아들 | 상관안(上官安) |
손녀 | 상관황후 |
주요 활동 | |
시대 | 전한 |
관직 | 시중(侍中) 태자소부(太子少傅) |
봉작 | 갈양후(葛陽侯) |
2. 생애
상관걸은 힘이 세서 괴력을 가진 역사(力士)로 알려져 있었다. 젊어서 우림기문랑(羽林期門郞)을 지내면서 한 무제의 신변을 보호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나중에는 시중이 되었고, 태복까지 승진했다.[5] 황제의 비서를 맡으면서 실권을 장악하고, 병권도 장악하였다.
태초 원년, 수속도위였던 상관걸은 이광리의 대완 원정에 종군하여 별동대를 이끌고 욱성을 공략했다.[3] 욱성의 왕이 강거로 달아나자, 강거까지 추격하여 대완이 항복한 후 욱성의 왕을 조제와 함께 이광리에게 보냈다.[6] 귀국 후 원정 중의 공으로 소부에 임명됐다.[6]
태초 3년, 소부가 되었으나 나이가 들어 면직되었다[4]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에도 상관걸은 은퇴하지 않고 활약했기 때문에 안사고는 다른 사람의 기록이거나 오류라고 주장한다.
무제의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 상관걸은 미앙구령의 말이 여윈 것을 질책받자 "폐하의 몸이 걱정되어 말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라고 눈물로 답했다. 무제는 이를 보고 충의로운 신하라고 여겨 측근으로 발탁하여 시중으로 삼았다.
2. 1. 무제 사후 권력 투쟁
기원전 88년(후원 2년), 한 무제가 병이 들자 상관걸은 좌장군으로 임명되어 곽광, 김일제, 상홍양, 전천추와 함께 한 소제의 보정을 맡았다. 그러나 정사는 곽광이 오로지했고, 곽광이 휴가를 나가면 상관걸이 정사를 처리했다. 무제의 유조로 소제가 즉위한 후 김일제·곽광과 함께 마하라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안양후(安陽侯)에 봉해졌다.[7]처음에는 곽광과 사이가 좋아 곽광의 딸을 아들 상관안의 아내로 삼았으나, 이 부부가 낳은 딸(효소황후)을 소제의 황후로 세우려 한 것을 곽광이 거절하면서 곽광과 갈등이 생겨 한나라 조정은 상관걸 세력과 곽광 세력으로 나뉘었다. 상관안의 계략으로 소제의 누나 악읍갑주를 끌어들여 결국 기원전 83년 상관안의 딸이 소제의 황후가 됐고, 상관안도 거기장군이 됐으며 기원전 82년에 상락후에 봉해졌다. 이 무렵 곽광이 휴가를 나갔기에, 상관걸이 재빨리 모든 일을 결정했다.[7]
상관걸은 악읍갑주의 애인으로 상관안이 포섭한 정외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상관안과 함께 정외인을 열후에 봉하려 했으나, 공적이 없으면 열후에 봉하지 않는 전통에 따라 곽광은 거절했고, 광록대부 자리를 구했으나 이마저도 거절됐다. 이를 원망하여 악읍갑주도 상관걸 세력에 가담했다.[7] 상관걸의 장인이 죄를 지어 사형에 처해지게 됐을 때 갑주가 말 24필을 주어 속죄하여 죽음을 면하게 해, 상관걸은 곽광을 더욱 미워하고 갑주의 덕을 입었다.[5] 또 외조(外朝)의 실력자 상홍양과 제위에 오르지 못해 불만을 품은 연날왕을 끌어들여, 곽광을 제거하려고 곽광이 휴가 나가고 상관걸이 정무를 맡았을 때에 곽광의 비행을 지목하는 상소문을 만들어서 연날왕의 이름으로 올렸다. 그러나 멀리 있는 연날왕에게까지는 아직 전해지지 않았을 사건을 상소문에서 지목하는 바람에 거짓이 들통나 실패하여, 소제와 곽광을 함께 제거하고 연날왕을 제위에 올리려는 음모를 꾸몄다.[8] 이 음모가 발각되어 상관걸은 상홍양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7]
기원전 80년(원봉 원년), 상관걸은 소제의 형이자 제위를 노리던 연왕 유단과 어사대부 상홍양과 결탁하여 곽광을 제거하려 했다. 곽광이 부재중일 때 연왕의 이름으로 곽광을 탄핵하는 상주를 재가받으려 했으나 소제가 허락하지 않아 실패했고, 오히려 곽광에 의해 일망타진되어 곽광의 손녀이기도 한 상관황후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형되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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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계
상관걸의 가계는 복잡하게 얽혀 권력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상관걸의 아들 상관안은 권신 곽광의 딸과 결혼하여 권력 기반을 다졌다. 이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한 소제의 황후(상관황후)가 되면서 상관 가문은 외척으로서 지위가 급상승했다.[2] 그러나 곽광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상관 가문은 몰락하고, 상관황후를 제외한 일족이 모두 처형되었다.[2]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0080-10-20
[2]
서적
Book of Han
[3]
서적
漢書
[4]
서적
漢書
[5]
서적
한서
[6]
서적
사기
[7]
서적
한서
[8]
서적
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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