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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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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릉은 남북조 시대 양나라, 동위, 북제, 진나라에서 활동한 문인이다. 8세에 글을 짓고 12세에 경서에 통달했으며, 소강(후의 양 간문제)의 후원을 받아 시문집 《옥대신영》을 편찬했다. 그는 유신과 함께 '서유체'라는 시풍을 확립했으며, 궁체시의 대표 작가로 칭송받았다. 후경의 난으로 북제에 억류되기도 했으나, 진나라에서 좌복야 등을 역임하며 '일대의 문종'으로 불렸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 유실되었으나, 일부가 《사고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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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릉
기본 정보
이름서릉
효목(孝穆)
시호정자(定子)
출생507년
사망583년
시대남북조 시대
국적남진
관직
직위중서감(中書監)
상서령(尙書令)
봉작신안군공(信安郡公)
가족
아버지서치
아들서검
저작
주요 작품《옥대신영》(玉臺新詠)
《서신안집》(徐信安集)

2. 생애

서릉은 산둥성 탄청 현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시와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양 간문제가 되는 소강의 후원을 받아 편찬한 선집 《옥대신영》으로 이름을 알렸다.

양나라 때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를 역임한 서초지(徐超之)의 손자이자, 태자좌위솔(太子左衛率)을 지낸 서기(徐摛)의 아들이다. 8세 때 글을 지을 수 있었고, 12세 때에는 ≪장자≫·≪노자≫ 등의 뜻에 통달했으며, 성장해서는 사적들을 두루 섭렵해 구변에 막힘이 없었다.

소강(후에 간문제)이 지은 ≪장춘전의기(長春殿義記)≫의 서문을 쓰고, ≪장자의(莊子義)≫를 강술하기도 했다.

지덕 원년(583년)에 사망했으며, 향년 77세였다. 시호는 장(章)이다.

서릉은 문재가 뛰어나 양진 교체 시의 선양문이나 진나라의 중대한 국가 문서는 모두 그의 손으로 쓰였다. 도량이 넓어 "일대의 문종"으로 칭송받았으며,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굴지 않고 후진 문인들에게도 정중하게 대했다고 한다.

2. 1. 초기 생애와 남조 양에서의 활동

보통 2년(521년), 아버지 서기가 양나라 무제의 셋째 아들 진안왕 소강의 자문 참군이 되자, 서릉도 소강의 막부에 초청되어 영만부 군사가 되었다. 중대통 3년(531년), 소강이 황태자가 되자, 유신과 함께 동궁의 초선학사가 되어 궁체시 작가로서 양나라 궁정에서 활약했다. 그 후, 통직산기시랑이나 남평왕 소각, 상동왕 소역(후의 원제)의 참군을 맡았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8세에 글을 짓고, 12세에 『장자』, 『노자』에 통달했으며, 성장해서는 사서를 널리 읽고 변설에도 능했다.

2. 2. 동위와 북제에서의 억류

태청 2년(548년), 서릉은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를 겸직하여 동위로 사신을 가게 되었는데, 수도 업에서 동위 조정의 크게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에 후경의 난이 일어나 남조 양이 전란에 휩싸이면서, 서릉은 귀국하지 못하고 동위와 그 선양을 받은 북제에서 수년간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2. 3. 남조 양으로의 귀환과 진나라에서의 활동

보통 2년(521년), 아버지 서기가 양나라 무제의 셋째 아들 진안왕 소강의 자문 참군이 되자, 서릉도 소강의 막부에 초청되어 영만부 군사가 되었다. 중대통 3년(531년), 소강이 황태자에 세워지자, 유신과 함께 동궁의 초선학사가 되어 궁체시 작가로서 양나라 궁정에서 활약했다. 그 후, 통직산기시랑이나 남평왕 소각, 상동왕 소역(후의 원제)의 참군을 맡았다.

태청 2년(548년), 통직산기상시를 겸임하여 동위로의 사신으로서 수도 업으로 가서 동위 조정에서 크게 환대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후경의 난으로 남조 양이 전란에 휩싸이자, 서릉은 귀국할 수 없게 되어, 동위와 그 선양을 받은 북제에서 수년간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승성 3년(554년), 강릉에 있던 양의 원제가 서위에 의해 살해되고, 괴뢰 정권 후량이 세워지자, 이듬해 소태 원년(555년), 북제는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양의 황족인 소연명을 자신의 군대와 함께 황제로, 건강에 있던 왕승변에게 보내고, 서릉도 그에 따라갔다. 소연명을 맞이한 왕승변은 서릉을 후대하고, 상서이부랑에 임명하여 조칙의 기안을 담당하게 했다. 왕승변이 진패선에게 살해되자, 서릉은 왕승변 휘하의 장수였던 임약에게 의탁했다. 임약이 패배하자 진패선에게 용서받아 정위장군·상서좌승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소태 2년(556년)에는 다시 북제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영정 원년(557년), 진나라가 건국되자, 원래의 관위에 산기상시를 더했다. 문제가 즉위하자, 태부경·산기상시·어사중승·이부상서 등을 역임하고, 선제 시대에는 상서 좌복야가 되어, 건창현후에 봉해졌다. 서릉은 노령을 이유로, 종종 선제에게 치사를 청했지만, 그때마다 만류되었다. 후주가 즉위하자, 좌광록대부·태자소부로 옮겼다.

3. 문학적 업적과 영향

서릉은 아버지 서침, 유견오·유신 부자와 함께 황태자 소강(훗날 간문제) 휘하의 문인으로 활약하며 서유체라는 화려한 시풍을 확립했다.[2] 후경의 난으로 잠시 북조의 동위·북제에 억류되기도 했지만, 강남으로 돌아와 진나라에서도 문단의 중심인물로 "일대의 문종"이라 불렸다.[2] 시집 『옥대신영』은 황태자 소강의 명으로 편찬했다고 전해지며, 그 서문은 육조 시대 변려문의 걸작으로 꼽힌다.[2]

3. 1. 서유체와 궁체시

그의 글은 구체(舊體)를 변화시켜 구성이 교묘하고 빈틈이 없으며 새로운 뜻이 많았다. 하나의 글이 나올 때마다 호사가들이 일찌감치 전사(傳寫)해 암송하니, 마침내 중원과 이적들에게까지 두루 퍼졌다. 그는 당시에 유신과 제명(齊名)되어 그들의 글을 ‘서유체’라고 했으며, 궁체시의 대표 작가이기도 했다.[1]

그의 글들은 수나라의 침략 등 전란으로 인해 대부분이 망실되었으며, 특히 문집 30권은 후인이 ≪예문유취≫와 ≪문원영화≫ 등에서 일부를 찾아내어 총 6권으로 집일(輯佚)했는데, 청나라 오조의(吳兆宜)가 전주(箋注)해 ≪서효목집전(徐孝穆集箋)≫이라는 형태로 사고전서 속에 남아 있다.[1]

아버지 서침, 유견오·유신 부자와 함께 황태자 소강(후의 간문제) 휘하의 문인으로 활약하며, "서유체"라는 염려한 시풍을 확립했다.[2] 후경의 난의 혼란으로 인해 한때 북조의 동위·북제에 억류되었지만, 후에 강남으로 돌아와 진에서도 문단의 거물로서 "일대의 문종"이라고 칭송받았다.[2] 시집 『옥대신영』은 황태자 소강의 명에 의해 서릉이 편찬했다고 전해지며, 그 서문은 육조 시대변려문의 걸작으로 유명하다.[2]

3. 2. 옥대신영 편찬

서릉은 양나라 간문제 소강(503-551)의 후원을 받아 선집 《옥대신영(玉臺新詠)》을 편찬하였다. 소강은 처음에는 왕자였으며, 이후 간문제로 즉위하여 549년부터 551년까지 양나라의 황제였다.[1] 서릉의 글은 구체(舊體)를 변화시켜 구성이 교묘하고 빈틈이 없으며 새로운 뜻이 많았다.[1] 그의 글이 나올 때마다 호사가들이 다투어 베껴 쓰고 암송하여, 중원과 이적들에게까지 널리 퍼졌다.[1] 또한 그는 당시에 유신과 함께 이름을 날려 '서유체(徐庾體)'라 불렸으며, 궁체시의 대표 작가이기도 했다.[1] 그의 글은 수나라의 침략 등 전란으로 인해 대부분 사라졌으며, 특히 문집 30권은 후대 사람들이 ≪예문유취≫와 ≪문원영화(文苑英華)≫ 등에서 일부를 찾아내어 총 6권으로 엮었다. 청나라 오조의(吳兆宜)가 주석을 달아 ≪서효목집전(徐孝穆集箋)≫이라는 형태로 사고전서에 남아 있다.[1]

3. 3. 평가

그는 글의 구성이 교묘하고 빈틈이 없으며 새로운 뜻이 많아 당시 유신과 함께 '서유체(徐庾體)'라고 불렸으며, 궁체시의 대표 작가로 꼽혔다. 그의 글은 수나라의 침략 등 전란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후대 사람들이 ≪예문유취≫와 ≪문원영화(文苑英華)≫ 등에서 일부를 찾아내 총 6권으로 엮었고, 청나라 오조의(吳兆宜)가 주석을 달아 ≪서효목집전(徐孝穆集箋)≫이라는 형태로 사고전서에 남겼다.[1]

서침과 유견오·유신 부자와 함께 간문제 휘하의 문인으로 활약하며 "서유체"라는 염려한 시풍을 확립했다. 후경의 난으로 동위·북제에 억류되기도 했지만, 강남으로 돌아와 진나라에서도 문단의 거물로서 "일대의 문종"이라 칭송받았다. 시집 『옥대신영』은 서릉이 편찬했다고 전해지며, 그 서문은 육조 시대 변려문의 걸작으로 유명하다.[2]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8세에 글을 짓고 12세에 『장자』, 『노자』에 통달했으며, 성장하여 사서를 널리 읽고 변설에도 능했다. 문재가 뛰어나 양진 교체 시의 선양문이나 진나라의 중대한 국가 문서는 모두 그의 손으로 쓰였다. 도량이 넓어 "일대의 문종"으로 칭송받았음에도 겸손하고 후진 문인들에게도 정중했다고 한다.[2]

4. 저작

그의 글은 구체(舊體)를 변화시켜, 구성이 교묘하고 빈틈이 없으며 새로운 뜻이 많았다. 하나의 글이 나올 때마다 호사가들이 일찌감치 전사(傳寫)해 암송하니, 마침내 중원과 이적들에게까지 두루 퍼졌다. 그는 당시에 유신과 제명(齊名)되어 그들의 글을 ‘서유체(徐庾體)’라고 했으며, 궁체시의 대표 작가이기도 했다.[1] 그의 글들은 수나라의 침략 등 전란으로 인해 대부분이 망실되었으며, 특히 문집 30권은 후인이 ≪예문유취≫와 ≪문원영화(文苑英華)≫ 등에서 일부를 찾아내어 총 6권으로 집일(輯佚)했는데, 청나라 오조의가 전주(箋注)해 ≪서효목집전(徐孝穆集箋)≫이라는 형태로 사고전서 속에 남아 있다.[1]

5. 가족

참조

[1] 웹사이트 Yu Tai Xin Yong http://www.chinaknow[...] 2019-04-14
[2] 서적 六朝詩人傳 大修館書店 2000
[3] 서적 (제목 없음) 中公新書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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