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먼 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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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먼 터커는 1917년 텍사스 주 고든에서 태어난 전 야구 선수이다. 고등학교 시절 야구, 농구, 육상 등 여러 종목에서 활약했으며, 1936년 프로 선수로 데뷔하여 마이너 리그를 거쳐 1942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1944년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94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이적하여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51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이후 보험설계사로 일했으며, 1993년 오클라호마시티에서 사망했다.

서먼 터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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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의 터커
이름서먼 터커
원어 이름Thurman Lowell Tucker
출생지텍사스주 고든
사망지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시티
포지션중견수
타석
투구
신장178
체중75
데뷔 리그MLB
첫 출장일1942년 4월 14일
첫 출장 팀시카고 화이트삭스
마지막 리그MLB
마지막 경기일1951년 4월 29일
마지막 팀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프로 입단 연도1936년
수상 경력
올스타1944년
월드 시리즈 우승1948년
선수 경력
시카고 화이트삭스 (1942–1944, 1946–194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48–1951)
통계
타율.255
홈런9
타점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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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 경력 이전

(내용 없음)

2.1. 유년 시절

터커는 1917년 9월 26일 텍사스주 고든에서 태어나 자랐다. 고등학교 시절 야구에서는 2루수로 활약했고, 농구육상 선수로도 뛰었는데, 세 종목 모두 두각을 나타냈다. 193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세미프로 야구를 했으며, 아칸소주 핫스프링스에 있는 야구 학교에 다녔다. 1936년, 18세의 나이에 터커는 아칸소-미주리 리그의 페이엣빌 베어스와 프로 계약을 맺었으나,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2주 만에 팀을 나왔다. 이후 같은 리그 소속의 실로암스프링스 트레블러스와 계약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2.2. 아마추어 및 마이너 리그 초기

1935년 고등학교 졸업 후 세미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아칸소주 핫스프링스에 있는 야구 학교에 다녔다. 1936년, 아칸소-미주리 리그의 페이엣빌 베어스와 계약했지만 2주 만에 팀을 나왔고, 같은 리그의 실로암스프링스 트레블러스와 계약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트레블러스에서의 첫 시즌이었던 1936년, 터커는 수비 위치를 바꿔 외야수로 나서며 117경기에서 타율 .319, 2루타 25개를 기록했다. 다음 해에는 코튼 스테이트 리그의 엘도라도 라이언스에서 뛰려고 했지만 허리 부상으로 인해 거의 시즌 전체를 뛰지 못했다. 1938년 시즌에는 에반젤린 베이스볼 리그의 애비빌 에이스와 코튼 스테이트 리그의 그린빌 벅스에서 각각 55경기와 50경기를 뛰었다. 1939년에는 코튼 스테이트 리그에 소속된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이너 리그 팀 클락스데일 레드삭스에서 뛰며 136경기 타율 .298, 3루타 10개를 기록했다. 마이너 리그 시절, 한 감독이 코미디언 조 E. 브라운과 닮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광대 분장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조 E.'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진지한 성격의 터커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클락스데일에서의 두 번째 해인 1940년은 터커에게 중요한 시즌이었다. 6월 말까지 .374의 타율로 코튼 스테이트 리그 타격 선두를 달렸다. 클락스데일에서 총 97경기에 출전해 .390의 높은 타율을 기록한 후, 오클라호마시티 인디언스로 승격되어 40경기를 뛰었다. 시즌 후, 그의 활약을 지켜본 시카고 화이트삭스 매니저 빌리 웹은 오클라호마시티로부터 그의 계약을 사들였다.

1941년 시즌 시작 전, 터커는 화이트삭스의 마지막 외야수 자리를 놓고 데이브 쇼트 등과 경쟁했으나 밀려났다. 결국 그해 시즌을 로저스 혼즈비 감독이 이끄는 오클라호마시티 인디언스에서 보냈다. 인디언스 소속으로 141경기에 출전해 타율 .246, 3루타 12개를 기록했다.

1942년 시즌을 앞둔 스프링 트레이닝에서는 마지막 외야수 자리를 놓고 데이브 필리와 경쟁했다. 수비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메이저 리그 로스터에 포함되었고, 그해 4월 14일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하지만 데뷔전을 포함해 단 두 경기만 출전한 후 텍사스 리그의 포트워스 캐츠로 내려갔다. 포트워스에서 144경기에 출전하여 .313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마이너 리그 시즌 종료 후 다시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어 그해 화이트삭스 소속으로 총 7경기를 뛰며 시즌을 마쳤다.

3. 프로 선수 경력

서먼 터커는 1936년 마이너 리그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외야수로 활동했다. 여러 마이너 리그 팀을 거치며 경험을 쌓은 후, 1942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 무대에 데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해군 복무로 인해 1945년 시즌에는 결장했지만, 1947년까지 화이트삭스에서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활약했다. 특히 1944년에는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1948년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이적하여 1951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이적 첫해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터커는 선수 시절 뛰어난 수비 능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선수 생활 후반기에는 주로 백업 외야수 및 대타로 출전했다.

3.1. 마이너 리그 경력 (1936-1942)

1936년, 실로암스프링스 트레블러스에서의 첫 시즌에 터커는 수비 위치를 외야수로 변경했다. 그 해 11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19와 2루타 25개를 기록했다. 다음 해인 1937년에는 코튼 스테이트 리그의 엘도라도 라이언스 소속이었으나, 허리 부상으로 인해 시즌 대부분을 결장했다. 1938년에는 에반젤린 베이스볼 리그의 애비빌 에이스에서 55경기, 코튼 스테이트 리그의 그린빌 벅스에서 50경기를 뛰었다. 1939년에는 코튼 스테이트 리그에 속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이너 리그 팀 클락스데일 레드삭스에서 뛰며 136경기에서 타율 .298, 3루타 10개를 기록했다. 마이너 리그 초기에 한 감독은 터커가 코미디언 조 E. 브라운과 닮았다며 광대 분장이 어울릴 것이라고 말했고, 이로 인해 '조 E.'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터커는 진지한 성격이었기에 이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클락스데일에서 보낸 두 번째 해인 1940년은 터커에게 중요한 시즌이었다. 6월 말까지 그는 .374의 타율로 코튼 스테이트 리그 타격 선두를 달렸다. 클락스데일에서 총 97경기에 출전해 .390의 높은 타율을 기록한 후, 오클라호마시티 인디언스로 승격되어 40경기를 더 뛰었다. 그의 활약을 눈여겨본 시카고 화이트삭스 매니저 빌리 웹은 시즌 종료 후 오클라호마시티로부터 그의 계약을 사들였다.

1941년 시즌 시작 전, 터커는 화이트삭스의 마지막 외야수 자리를 놓고 데이브 쇼트 등과 경쟁했지만 밀려났다. 결국 그해 시즌은 로저스 혼즈비 감독이 이끄는 오클라호마시티 인디언스에서 보냈다. 인디언스 소속으로 14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46과 3루타 12개를 기록했다.

1942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터커는 데이브 필리와 마지막 외야수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화이트삭스 구단은 그의 수비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메이저 리그 로스터에 포함시켰고, 터커는 1942년 4월 14일에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데뷔전을 포함해 단 두 경기만 출전한 후 텍사스 리그의 포트워스 캐츠로 강등되었다. 포트워스에서 144경기에 출전해 .313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마이너 리그 시즌이 종료된 후 다시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어 그해 화이트삭스 소속으로 총 7경기를 뛰며 시즌을 마쳤다.

3.2. 시카고 화이트삭스 (1942-1947)

1943년 시즌을 앞두고 시카고 화이트삭스 외야진에서 주전 자리가 확실했던 선수는 월리 모지스뿐이었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터커는 무스 솔터스와 주전 중견수 자리를 놓고 경쟁하며 지미 다이크스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결국 주전 중견수와 리드 오프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활약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스타 선수들이 빠져나가 어려움을 겪던 아메리칸 리그의 윌 해리지 회장이 새롭게 주목할 정도였다. 1943년 7월 26일,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서는 끝내기 홈런을 쳐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해당 시즌 터커는 135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35, 6개의 3루타, 79개의 볼넷을 기록했다. 29개의 도루로 아메리칸 리그 3위에 올랐지만, 17번의 도루실패로 리그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1944년 시즌 전, 터커는 미국 해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통과했다. 그해 바로 입대할 예정이었으나, 계획과 달리 시즌 전체를 소화했다. 시즌 첫 달에는 뛰어난 타격감을 선보이며 5월 16일까지 타율 .403으로 아메리칸 리그 선두를 달렸다. 그의 다재다능한 활약에 스포츠기자 프레드 리엡은 그를 잠재력을 터뜨린 선수로 꼽았고, 지미 다이크스 감독은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외야수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6월 말까지 터커는 타율 .369로 아메리칸 리그 타격 선두를, 내셔널 리그에서는 딕시 워커가 .377로 타격 선두를 달렸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터커는 자신의 선수 경력에서 유일하게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올스타전에서는 리드 오프로 출전했으나 4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하지만 올스타전 이후 터커의 타격감은 급격히 하락했다. 7월 초에는 28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며 타율이 .375에서 .327로 떨어져 리그 타격 선두 자리를 내주었다. 이후 35타수 1안타의 극심한 부진으로 타율이 .320까지 하락하자,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주말 경기에서는 잠시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곧 선발 라인업에 복귀했지만,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87과 6개의 3루타에 머물렀다. 그해 7월 말, 화이트삭스 구단이 주최한 전쟁 지원 자선 행사에서는 조지 케이스와 약 68.58m 달리기 경주를 벌여 1야드 차이로 아쉽게 패배했다. 시즌 종료 후 터커는 정식으로 해군에 입대하여 1945년 시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다른 선수들과 함께 복귀한 터커는 1946년 시즌 주전 중견수로 예상되었으며, 외야는 월리 모지스, 태피 라이트와 함께 구성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시즌 초반에는 이전 시즌과 달리 타격 부진을 겪으며 수비는 뛰어나지만 타격은 약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6월 말까지 그의 타율은 .229에 머물렀는데, 이는 1944년 같은 시점보다 1할 5푼 가까이 낮은 수치였다. 다행히 후반기에 타격감을 회복하여 시즌 최종 타율 .288과 커리어 하이인 20개의 2루타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

1947년 시즌을 앞두고, 터커는 1946년 시즌 마지막 달에 4할의 타율을 기록한 덕분에 중견수 자리를 지켰다. 팀의 좌익수는 신인 데이브 필리가 맡았고, 우익수는 태피 라이트와 밥 케네디가 플래툰 시스템으로 번갈아 출전했다. 하지만 터커는 시즌 초 위장병으로 인해 종종 경기에 결장하며 5월 중순까지 꾸준히 출전하지 못했다. 이후 경기에 복귀했지만 데이브 필리와 출전 시간을 나누었고, 시즌 최종 성적은 89경기 출전에 타율 .236에 그쳤다.

3.3.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48-1951)

1951년 카드에 있는 터커
1951년 카드에 있는 터커

1948년 1월 27일, 터커는 랄프 와이겔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이적했다. 당시 클리블랜드 구단은 터커를 "야구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는 주전 중견수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한 경기에서는 팀이 8-2로 승리했음에도 유일하게 안타를 치지 못하기도 했다. 6월에는 투구에 맞아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3주간 결장했다. 부상 복귀 후 시즌 후반기에는 제4의 외야수 역할을 맡아 앨리 클라크와 번갈아 출전했으며, 당시 외야진은 래리 도비, 데일 미첼로 구성되어 있었다. 터커는 1948년 시즌 83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60, 52득점을 기록했고, 실책 없이 완벽한 수비율 1.000을 달성했다. 팀이 진출한 1948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6차전에 출전하여 6회 볼넷으로 출루한 뒤 득점하며 팀의 4-3 승리에 기여했다.

1949년 시즌, 터커는 팀의 네 번째 외야수로 주로 도비의 백업 선수 역할을 맡았다. 대타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고, 20경기 출전에 200타수 미만을 기록하며 타율 .244로 시즌을 마쳤다. 타격 부진이 이어지자 루 부드로 감독은 1950년 시즌을 앞두고 그를 스위치 히터로 전향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터커는 여전히 백업 외야수 역할에 머물렀다. 그해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유일한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8-5 승리에 기여했는데, 이 경기는 클리블랜드 지역 동네 야구 팀 지원을 위한 60의 기금을 마련하는 자선 경기이기도 했다. 터커는 1950년 시즌 54경기에 출전해 타율 .178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최저 타율을 기록했다.

1951년 시즌이 시작되자 해리 심슨과 미니 미노소가 외야진에 새롭게 합류하면서 터커와 앨리 클라크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 트레이드되거나 방출될 위기에 놓였다. 터커는 4월 29일 시즌 첫 경기에 출전했으나, 단 한 타석에 들어서 삼진으로 물러났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메이저 리그 경기가 되었고, 5월 초 구단은 그를 트리플 A 퍼시픽 코스트 리그 소속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내려보냈다.

4. 은퇴 이후

선수 생활을 마친 후, 터커는 오클라호마시티에 정착하여 보험설계사로 일했다. 그는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아들 로널드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1962년에는 새로 창단된 메이저 리그 팀인 휴스턴 애스트로스스카우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터커는 1993년 5월 7일 오클라호마시티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고향인 텍사스주 고든에 있는 고든 공동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