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압사 사고
1. 개요
서울역 압사 사고는 1960년 1월 26일 설날 이틀 전에 서울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압사 사고이다. 귀향 인파가 몰린 가운데, 열차 증차와 개찰 지연으로 인해 승객들이 좁은 계단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31명이 사망하고 49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고 원인으로 과도한 표 발급, 승객들의 무리한 개찰, 안전 관리 소홀 등이 지목되었다. 사고 이후 서울역장과 여객주임이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입건되었으며, 서울역장은 무죄, 여객주임은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1960년 10대 뉴스에 선정되었으며, 안전 불감증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서울시장의 체육시설 개조 계획 발표와 철도청의 열차 증편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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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월 -
1959년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1959년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은 1959년 최고의 영화를 선정하여 시상했으며, 최우수 작품상은 《벤허》가, 최우수 남자배우상은 제임스 스튜어트가, 최우수 여자배우상은 오드리 헵번이 각각 수상했다. -
1960년 대한민국 -
4·19 혁명
4·19 혁명은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이승만 정권의 장기 집권과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로 시작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혁명이다. -
1960년 대한민국 -
대한민국 헌법 제4호
대한민국 헌법 제4호는 4·19 혁명 후 이승만 정부 몰락과 과도정부 수립 과정에서 제정되어 의원내각제 도입, 대통령 권한 축소, 국회 권한 강화, 국민 기본권 보장 강화, 자유권 확대, 대법원장 및 대법관 선거 제도화, 헌법재판소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9개월 만에 폐지된 단명 헌법이다. -
다중밀집사고 -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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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밀집사고 -
힐즈버러 참사
힐즈버러 참사는 1989년 4월 15일 잉글랜드 셰필드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FA컵 준결승전 중 과도한 관중으로 인해 발생한 압사 사고로, 97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부상당한 영국 축구 역사상 최악의 참사 중 하나이다.
2. 사고 경위
1960년 1월 26일 오후 11시 45분경 서울역발 목포행 호남선 완행열차를 타려던 승객들이 서울역 3번 계단에서 집단으로 넘어진 사건이다. 구정 이틀 전, 귀성객들이 서울역에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열차 증편 및 개찰 지연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2.1. 발생 과정
1960년 1월 26일 구정 이틀 전, 이른 아침부터 다른 지역으로 귀향하려는 승객들이 서울역에 몰려 역 구내와 광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평소보다 3배가량 많은 3,926명이 열차표를 예매했고, 이날 오후 10시 50분에 출발하는 서울역발 목포행 호남선 601편 완행열차는 차량을 8량에서 18량으로 증차하였다. 이에 원래 발차 35분 전인 10시 15분에 개찰할 예정이었으나 차량 증차로 인해 출발 5분 전인 10시 45분에 개찰을 시작하였다. 열차가 먼저 출발한 것을 우려한 탑승객들은 개찰구에서 무리하게 뛰어나갔고, 먼저 타려는 승객들이 폭이 좁은 4·5번 플랫폼 전용 3번 계단으로 무질서하게 몰려들면서 승객 한 명이 앞으로 쓰러지자 연쇄적으로 후속 승객들이 밀려 넘어지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31명이 압사하고 49명이 부상을 입었다.
2.2. 사고 원인
수사 당국은 1960년 1월 27일, 당일 서울역 관계자가 객차 1량당 최대 수용 인원이 80명인데 비해 각 객차당 평균 200장, 도합 3,000장의 표를 발급하여 급히 증차를 한 점, 많은 승객을 한꺼번에 개찰한 점, 열차의 정원을 초과하여 표를 판매한 점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서울역장은 승객들의 편의를 위해 한꺼번에 개찰을 하였으며, 기차 출발이 지연된다는 점을 여러 번 안내방송으로 고지하였고, 혼잡을 덜기 위해 부녀자들을 먼저 내보냈다고 해명했다. 또한 열차표를 산 사람이 전부 타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임시 편성을 준비할 계획이었다고 덧붙였다.
3. 인명 피해
최종적으로 31명이 압사하고 41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망자들은 서울철도병원에 안치되었으며, 부상자들은 세브란스병원, 서울적십자병원, 국립중앙의료원으로 분산 수용되어 입원 후 치료를 받았다.
사망자 대부분은 짐을 든 부녀자들이었다.
4. 사고 여파
사고 직후 70여 명의 역무원들과 다른 사건에 출동 중이던 경찰관 30여 명이 즉시 현장에 투입되어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인근 병원으로 옮겼다. 김일환 교통부 장관 등 교통부 관료들이 현장 수습을 지휘하였다. 서울역에는 사고대책본부가 설치되었고, 다음 날인 27일 오후 3시 교통부 앞 광장에서 사망자 합동 위령제를 치르고 유가족에게 시신을 인계하고 위자료를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사고로 열차를 타지 못한 승객 2,300명은 다음 날 0시 2분경 출발하는 임시 열차에 탑승하였고, 나머지 승객들은 새벽 2시 3분경 출발하는 임시 열차를 이용하였다.
국회 교통체신위원회는 당일 긴급위원회를 열고 최인규 내무부 장관을 불러 사건 경위와 경찰 수사에 대한 서면 보고를 받고, 교통부 내부 인사 조치를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