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서유구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로, 179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실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농업과 백성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06년 관직에서 물러나 18년간 농촌에서 생활하며 《임원경제지》를 저술했다. 《임원경제지》는 농업, 식물, 의학, 건축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룬 방대한 백과사전으로, 서유구의 실용적인 학문관을 보여준다. 만년에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82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실생활에 유용한 지식을 담은 《임원경제지》를 통해 실학의 가치를 알리고자 했으며, 그의 사상은 현대에도 재평가받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45년 사망 - 앤드루 잭슨
앤드루 잭슨은 미국의 제7대 대통령으로서, 군사적 성공을 통해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강력한 대통령 권한 행사, 제2 미국 은행 폐지, 인디언 강제 이주 정책 추진 등 잭슨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으나 인종차별적 정책에 대한 논란 또한 존재하는 인물이다. - 1845년 사망 - 헨리크 베르겔란
헨리크 베르겔란은 노르웨이의 시인이자 극작가, 정치가, 저술가로, 애국주의적 배경 속에서 성장하여 시집 발표 후 문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정치 활동과 사회 운동을 통해 노르웨이 사회에 기여하고 논쟁적인 인물이었지만 좌파 운동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 1764년 출생 -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뛰어난 군사 전략과 공화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나폴레옹 전쟁 중 포로가 되기도 했으며, 부르봉 왕정 복고 후에는 전쟁 및 해군 장관을 역임했고 화가와 음악가로도 활동했다. - 1764년 출생 - 니콜라이 레자노프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18~19세기 러시아의 정치가이자 탐험가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설립에 기여했으며, 일본과의 통상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알래스카 식량난 해결을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식량을 확보한 후 현지 여성과 약혼했으나 귀국길에 사망했다. - 대구 서씨 - 서명원
서명원은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종손으로, 교육학자이자 대학교수, 교육행정 관료로서 서울대학교 교수, 문교부 차관, 여러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문교부 장관, 학술회 회원,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 대구 서씨 - 서주석
서주석은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대한민국의 정치학자이자 외교안보 전문가로, 한국국방연구원에서 근무하며 민주당계 정권에서 외교안보 정책 수립에 관여했고,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각각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 수석비서관, 국방부 차관, 국가안보실 제1차장을 역임하며 남북 합의 도출에 기여했으나, 5.18 민주화운동 왜곡 활동에 참여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서유구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서유구 |
한자 이름 | 徐有榘 |
자 | 준보(準甫) |
호 | 풍석(楓石), 자호산인(紫호山人), 약산거사(藥山居士) |
시호 | 문간(文簡) |
본관 | 대구 서씨(大丘徐氏) |
생애 | |
출생 | 1764년 |
사망 | 1845년 |
시대 | 조선 후기 |
학문 | |
학문 분야 | 실학 |
주요 저서 | 임원경제지 |
경력 | |
관직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대사성(大司成) 이조판서(吏曹判書) |
기타 | |
관련 인물 | 서명응 |
2. 생애
서유구는 실학에 조예가 깊었고, 백가서(百家書)에 통달하여 문명이 높았다. 1834년 호남 순찰사로 노령 남북을 돌아보던 중 기근을 겪고 있는 백성들의 궁핍을 목격하고, 일본에 가는 통신사 편에 부탁하여 고구마 종자를 구입하여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재배를 장려했다. 또한 《종저보》, 《경계책》 등 농정에 대한 경론 및 상소문을 써서 영농법(營農法)의 개혁을 여러 차례 주장했다.[7]
1800년 정조가 승하한 후, 서유구는 숙부 서형수가 김달순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정계에서 축출되자 1806년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18년 동안 직접 농사를 지으며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토대로 《임원경제십육지》를 저술했다. 이 책은 조선과 중국의 각종 문헌 892권을 참조하여 30년 이상 걸려 완성되었으며, 아들 서우보(徐宇輔)의 도움을 받았다.[8] 서유구는 환갑이 되어 다시 관직에 복귀해 전라 관찰사와 중앙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2. 1. 가계와 출생
서유구는 명문가 출신으로, 증조부 서종옥(徐宗玉)은 내무대신을, 조부 서명응(徐命膺)은 규장각 제학을 역임했다. 아버지 서호수(徐浩修) 역시 내무대신을 지냈으며, 서유구는 서철수(徐澈修)의 양자로 들어갔다.[7]2. 2. 관직 생활
1790년(정조 14)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1792년 대교(待敎)·검열을 지냈다. 1797년 왕명에 따라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편집했다. 1806년 숙부 서형수(徐瀅修)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정계에서 축출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18년간 향촌에서 농업에 전념하며 《임원경제십육지》 저술에 힘썼다. 순조 때 관직에 복귀하여 의주 부윤, 대사성, 강화부 유수, 형조·예조 판서, 대사헌을 역임했다. 1838년(헌종 4) 다시 대사헌, 이어 상호군, 이조·병조 판서, 우참찬, 좌참찬, 대제학 등 중앙 요직을 역임했다.[7]2. 3. 은퇴와 사망
벼슬에서 물러난 후 그동안 모으고 다듬고 덧붙인 방대한 분량의 《임원경제지》를 완성했으나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출판까지 하지는 못했다. 그는 경기도 남양주 두릉에서 82세의 나이로 시봉하던 시사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7]3. 임원경제지
서유구가 30여 년에 걸쳐 저술한 임원경제지는 113권 252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백과사전이다.[9][1][3] 조선과 중국의 문헌 892권을 참고하여 농촌 생활과 농업 전반을 다루었으며, 아들 서우보(徐宇輔)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임원경제지는 농업, 식물, 원예, 의복, 기상, 축산, 어업, 음식, 건축, 보건, 의학, 의례, 취미, 지리, 경제 등 16개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분야별로 상세한 정보와 그림, 도표 등을 제공하며, 전국의 시장 날짜까지 수록하여 실용성을 높였다.
3. 1. 구성
분야 | 권수 | 내용 |
---|---|---|
본리지(本利志) | 13권 | 농업 일반, 토지 제도, 수리, 토양, 농업 기상, 농기구, 관개 시설 등을 다룸. |
관휴지(灌畦志) | 4권 | 식용 식물, 약용 식물, 산나물, 해초, 소채, 약초 등을 다룸. |
예원지(藝畹志) | 5권 | 화훼류 재배법, 50여 종 화훼 명칭 고증, 토양, 재배 시기 등을 다룸. |
만학지(晩學志) | 5권 | 과일, 과채류, 나무 등 품종과 재배법, 벌목, 저장법을 다룸. |
전공지(展功志) | 5권 | 뽕나무 재배, 비단, 무명, 직조, 염색 등 의복 재료학을 다룸. |
위선지(魏鮮志) | 4권 | 기상 예측, 점성술, 천문 관측 등을 다룸. |
전어지(佃漁志) | 4권 | 가축, 야생 동물, 어류 사육, 질병 치료, 사냥법, 어구 등을 다룸. |
정조지(鼎俎志) | 7권 | 식품, 의약학, 영양식, 음식 조리법, 조미료, 술 등을 다룸. |
섬용지(贍用志) | 4권 | 가옥 건축, 건축 기술, 도량형, 공작 기구, 농기구, 생활 기구, 교통 수단 등 (중국과 조선 비교)을 다룸. |
보양지(葆養志) | 8권 | 도가적 양생론, 불로장생, 식이요법, 정신 수련, 육아법, 계절별 섭생법을 다룸. |
인제지(仁濟志) | 28권 | 의학, 약학, 구황, 구황 식품 260종을 다룸. |
향례지(鄕禮志) | 5권 | 지방 관혼상제, 일반 의식을 다룸. |
유예지(游藝志) | 6권 | 독서법, 선비 취향, 기예를 다룸. |
이운지(怡雲志) | 8권 | 선비 취미 생활을 다룸. |
상택지(相宅志) | 2권 | 조선 지리를 다룸. |
예규지(倪圭志) | 5권 | 조선 사회 경제, 무역, 치산, 재산 증식을 다룸. |
3. 2. 번역 및 출판
임원경제지는 워낙 분량이 방대하고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어 번역 및 출판에 어려움이 있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국학(國學) 붐이 일면서 주목받았으나, 다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10]이후 고려대학교 유전공학과를 졸업하고 도올서원과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공부한 정명현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2008년 3월 http://www.imwon.net/intro 임원경제연구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10] 순수 민간연구소인 만큼 일반의 후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11]
2015년에는 http://pungseok.net/ 풍석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임원경제지 번역 지원, 학술 대회 개최, 요리연구소[12]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재정적 제약으로 인해 저술 전체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시리즈로 출판되고 있다.[4] 첫 번째 소개서인 『임원경제지』는 2012년 6월 소우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임원경제연구소는 임원경제지 번역 및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참여자들은 훌륭한 선조의 업적을 공개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파트타이머이기 때문에 작업 속도가 매우 느리다. 2015년에는 풍석문화재단과 연계하여 임원경제지에 묘사된 여러 요리를 실제로 만들어 서유구가 뛰어난 요리사였음을 증명하는 실험적인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5]
4. 기타 저서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고조부 | 서문유(徐文裕) |
증조부 | 서종옥(徐宗玉) |
조부 | 서명응(徐命膺) |
아버지 | 서호수(徐浩修) |
어머니 | 김덕균(金德均)의 딸 |
형 | 서유본(徐有本) |
형수 |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
동생 | 서유락(徐有樂) |
동생 | 서유비(徐有棐) |
양부 | 서철수(徐澈修) |
숙부 | 서형수(徐瀅修) |
숙부 | 서낙수(徐樂修) |
숙부 | 서책수(徐策修) |
숙부 | 서채수(徐采修) |
숙부 | 서유수(徐柔修) |
서유구의 가계는 매우 명망이 높았다. 증조부는 내무대신을 지낸 서종옥(徐宗玉)이었고, 조부는 규장각 제학을 지낸 서명응(徐命膺)이었다. 아버지 서호수(徐浩修) 또한 내무대신을 역임했으며, 서철수(徐澈修)의 양자로 들어갔다.[1]
6. 현대적 평가
서유구는 실용적인 학풍을 추구하고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노력한 실학자로 평가받는다. 동시대 실학자 정약용이 법과 제도 개혁을 통해 국가 개혁을 추구했다면,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는 성리학에 매몰된 일부 선비들이 탁상공론을 일삼는다고 비판하며, 실생활에 유용한 지식과 정보를 담은 《임원경제지》를 통해 실학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자 했다.[15]
서유구는 시골의 일상생활에서 먹는 것, 사용하는 것, 사는 곳, 취미 생활을 즐기는 방법 등 실용적인 책과 자료들을 연구하고 수집했다. 그는 개념적이거나 문학적인 작품과 유교 경전에 치우친 동료 선비들을 비판했다. 그는 그들이 흙으로 끓인 국과 종이로 만든 떡(토갱지병(土羹紙餠))과 같은 개념적인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조롱했다.[6]
《임원경제지》는 한국과 중국에서 수백 개의 자료를 바탕으로 서유구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체계적으로 반영한 방대한 백과사전적 저술이다. 세심한 인용을 통해 독자들은 모든 참고자료 목록을 만들 수 있으며, 그중 일부는 현재는 구할 수 없다. 이 책은 한국 과학기술사, 특히 농업기술 연구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1]
하지만 그의 작품은 그가 가진 방대한 실용적 지식의 가치나 완전한 출판에 대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너무 방대하여 쉽게 복사하고 일반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렵다는 점과, 정약용[6]이라는 같은 시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서유구의 지혜와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이해하게 되었고, 열렬한 추종자들도 생겨나고 있다.
참조
[1]
논문
History Lessons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Period of Korea: Human Technology (Ondol), Its Impacts on Forests and People, and the Role of the Government
https://www.mdpi.com[...]
2023-10-30
[2]
논문
A Study on the Costume View of Seo Yu-Gu-Focused on the Analysis of [Seomyongji]'Boksikjigu'-
https://koreascience[...]
2023-10-30
[3]
서적
Pungseok Seo Yu-gu and Imwon Gyeongjeji
Sowadang
2011
[4]
웹사이트
book catalogue
https://search.kyobo[...]
[5]
서적
Joseon’s Chef Seo Yu-gu
Sower Publishing Co.
2016-04
[5]
뉴스
Interview with Ms. Gwak
http://news.joins.co[...]
2016-05-26
[6]
뉴스
Seo Yu-gu was the representative bureaucrat of practical knowledge in the late Joseon Dynasty
https://www.chosun.c[...]
Chosun Ilbo
2020-12-16
[7]
뉴스
흙으로 만든 국과 종이로 만든 떡(토갱지병, 土羹紙餠)을 누가 먹으랴!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20-12-16
[8]
간행물
금화지비집
1827
[9]
간행물
정조지
[10]
논문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담긴 해양 박물학의 성격
[10]
논문
서유구의 농업정책서인 《의상경계책》
[11]
뉴스
252만자 보물창고를 캐다, 더 잘사는 나라를 그리다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19-07-18
[12]
서적
조선셰프 서유구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16-04
[12]
뉴스
곽미경 소장 인터뷰
http://www.joongang.[...]
중앙일보
2016-05-26
[13]
간행물
[14]
시집
1840
[15]
뉴스
중앙일보
2019-07-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