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튼후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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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튼후 투구는 7세기 초에 제작된 철제 투구로, 부장품을 갖춘 선박 매장 의식의 일부로 발견되었다. 1939년 서튼후 1호분 발굴 과정에서 500개 이상의 조각으로 발견되었으며, 이후 2차례의 복원 작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투구는 철, 청동, 은, 석류석 등 다양한 재료로 제작되었으며, 춤추는 전사, 기마 장면 등 다양한 도상(圖像)과 용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실용적인 전투 장비이자 소유자의 권력과 위세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앵글로색슨족 사회와 문화, 특히 베오울프와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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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발굴 - 서튼후
서튼후는 7세기 초 앵글로색슨 시대의 선박 매장 유물로 유명한 잉글랜드 서퍽주 유적지로, 1939년 발굴된 1호분에서 앵글로색슨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앵글로색슨 시대 연구에 핵심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 7세기 작품 -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7세기 중반 서돌궐 쇠퇴기와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진출기에 제작되어 중국, 인도, 페르시아, 튀르크 등 다양한 문화를 묘사하며 당시 중앙아시아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고구려 사신의 모습과 사마르칸트 왕 바르후만을 언급하는 소그드어 비문이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서튼후 투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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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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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 | 철, 청동, 주석, 금, 은, 석류 |
추정 무게 | 약 2.5kg |
발견 장소 | 서튼 후, 서퍽 |
발견 좌표 | 52°05′21″N 01°20′17″E |
발견 날짜 | 1939년 |
발견자 | 찰스 필립스 |
소장 위치 | 대영박물관, 런던 |
등록 번호 | 1939,1010.93 |
제작 시기 | 기원후 620–625년경 |
서튼후 투구 | |
종류 | 전투 투구 |
역사적 맥락 | |
시대 | 7세기 |
문화권 | 앵글로색슨족 |
발견 위치 | 영국 서퍽주 서튼 후 |
2. 역사적 배경
투구는 7세기 초로 추정되는, 부장품이 갖춰진 선박 매장 의식의 일부로, 다른 권력의 상징물 및 도구들과 함께 묻혔다. 배는 인근 강에서 언덕 위로 끌어 올려 준비된 참호에 내려졌다. 그 안에서 투구는 천으로 감싸져 시신 머리 왼쪽에 놓였다. 배 주변에는 타원형의 둔덕이 만들어졌다. 그 후 한참 뒤에 둔덕의 무게로 인해 묘실 지붕이 심하게 무너지면서 배의 내용물이 흙의 틈새로 압축되었다.
투구는 매장실 붕괴나 다른 물체가 떨어진 충격으로 파손된 것으로 생각된다. 투구가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은 복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철이 완전히 산화되기 전, 즉 여전히 유연한 상태에서 투구가 찌그러졌다면, 투구는 납작해져서 벤델 및 발스가르데 투구와 유사한 뒤틀린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2. 1. 발견

서튼후 투구는 1939년 7월과 8월에 걸쳐 사흘 동안 서튼 후 1호분 발굴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배 무덤 발굴이 3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투구는 500개 이상의 조각으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원래 표면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C. W. 필립스의 일기에 따르면, 1939년 7월 28일에 "철 투구의 찌그러진 잔해"가 방패 보스의 동쪽 4피트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잔해는 금박, 직물, 사람 얼굴 부분(청동), 청동 동물 모양 부착물 및 장식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7월 29일에는 투구 조각 몇 개가 더 발견되어 상자에 담겼고, 8월 1일에는 투구 및 사슬 갑옷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파편들이 추가로 수집되었다.

서튼후 투구는 영국 땅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유물 중 하나로 여겨지지만, 산산이 부서진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발견 당시 중요성이 인식되지 않아 현장에서 파편의 사진을 찍거나 위치를 기록하지 않았다. 투구 위치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발굴 다이어그램에 "투구 잔해의 핵"이라고 표시된 원뿐이었다.
처음에는 간과되었지만, 투구는 곧 주목을 받았다. 데일리 메일은 "보석으로 장식된 금 투구"에 대해 언급했고, 며칠 후에는 투구에 "은과 금박으로 정교하게 얽힌 장식"이 있다고 묘사했다. 파편은 "정교한", "웅장한" 등으로 불렸고, 투구는 "가장 흥미로운 발견 중 하나"로 여겨졌다.
2. 2. 서튼 후 유적
2. 3. 투구의 주인
매장 시기가 더 늦게 이루어졌다고 여겨질 때를 제외하고는, 선호되는 후보는 래드왈드였다. 그의 왕국인 동앵글리아는 렌들섬에 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은 서튼후에서 4.25 킬로미터 상류에 위치해 있다. 래드왈드를 지지하는 근거는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매장 시기, 풍부한 재산과 왕권의 상징으로 확인된 물품, 그리고 두 개의 제단을 유지했던 왕에게 어울리게도 기독교와 이교의 영향이 모두 존재한다는 점에 근거한다.뢰드왈드는 서튼 후 선박 매장을 연관시키기에 가장 쉬운 이름일 수 있지만, 그러한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보다는 격렬함으로 제기되었다. 알려진 이름, 즉 유명한 이름과 매장을 연결하려는 욕구가 증거를 능가한다. 이 매장은 확실히 부와 권력의 기념비적인 과시이지만, 반드시 뢰드월드나 왕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적으로, 선박 매장은 기원적인 제물이 될 수도 있었다. 뢰드월드에 대한 주장은 동전의 연대에 크게 의존하지만, 현재 연대는 20년 이내로 정확하며, 메로빙거 시대 동전 연대기는 이전에도 변경된 적이 있다.
뢰드월드에 대한 주장은 중세 시대의 부와 권력에 대한 현대적 개념이 정확하다는 가정에 달려 있다. 서튼 후 선박 매장의 부는 동시대의 유사 사례가 없기 때문에 놀랍지만, 유사 사례의 부족은 뢰드월드의 부를 나타내는 지표일 수도 있지만, 생존의 변덕일 수도 있다. 많은 다른 앵글로색슨 시대의 고분들이 쟁기질되거나 약탈되었으므로, 동시대의 왕족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듯이, 동시대의 왕족 무덤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만약 보물로 불리는 물품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면, 그것은 왕족의 의미가 아닌 종교적인 의미였을 수 있으며, 왕족의 무덤에 대해 알려진 것이 있다면, 부유한 사람들의 무덤조차도 어떤 왕이라도 소유하고 싶어할 보물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족장, 섭정, 왕, 그리고 지위를 추구하는 신흥 부자들의 무덤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다. 켄트 출신 뮬이 웨섹스의 왕 캐드왈라의 형제였는데, 687년에 살해되었을 때, 그에 대한 보상으로 지불된 가격은 왕의 배상금과 같았다. 만약 왕과 그의 형제의 생명이 동등하다면, 그들의 무덤을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뢰드월드는 가능성이 있지만 불확실한 신원으로 남아 있다. 대영 박물관의 전 관장인 데이비드 M. 윌슨 경이 쓴 것처럼, 뢰드월드가 서튼 후에서 매장되었을 수 있지만, "뢰드월드의 신원 확인에는 'may(…일지도 모른다)'라는 작은 단어가 포함되어야 한다. 결국 630년대 초에 죽은 시게버트일 수도 있고, 그에게 사생아가 있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의 사생아일 수도 있고, 610년부터 650년까지의 이스트 앵글리아의 다른 위대한 인물일 수도 있다."
2. 3. 1. 래드왈드 왕
앵글로색슨 역사가 사이먼 케인스에 따르면 동앵글리아의 왕 래드왈드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속담 속의 우표 뒤에나 들어갈" 정도라고 한다. 알려진 거의 모든 정보는 8세기의 베네딕트회 수도자 비드가 쓴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에서 나온다. 이로 인해 래드왈드의 삶에 대한 지식은 이미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는데, 교회 라틴어 구문 해석의 차이점과 같은 것들에 의해 좌우된다. 비드는 래드왈드가 티틸라의 아들이자 우파의 손자이며, 그에게서 동앵글리아의 우핑가스 왕조의 이름이 유래했다고 기록한다. 13세기의 역사가 웬도버의 로저와 매슈 파리는 각각의 저서 《플로레스 히스토리arum》과 《크로니카 마요라》에서 티틸라의 죽음과 래드왈드의 왕위 계승을 599년으로 추정하여 기록한다. 그러나 이 날짜는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이 역사가들이 9세기 날짜조차 제대로 기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심의 여지가 많다.어쨌든 래드왈드는 적어도 616년까지는 권력을 잡았을 것이고, 비드는 그가 노섬브리아의 에드윈을 위해 군대를 일으켜 아이들 강 동쪽 기슭에서 에델프리드를 물리쳤다고 기록한다. 비드에 따르면, 래드왈드는 에델프리드로부터 에드윈을 넘기라는 뇌물을 거의 받아들일 뻔했지만, 래드왈드의 아내는 그에게 보물보다 우정과 명예를 소중히 여기도록 설득했다. 그 후의 전투에서 래드왈드의 아들 레겐헤레가 죽었다고 비드는 말하며, 래드왈드의 권력은 비드가 험버 강 남쪽의 잉글랜드 전체를 지배했다고 말하는 일곱 왕의 목록에 포함될 만큼 상당했을 것이다. 그는 임페리움이라고 불렸다. 9세기의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비드의 목록을 8명으로 확장하고 브레트왈다 또는 브리텐왈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브리튼의 지배자" 또는 "브리튼인들의 지배자"를 의미한다.
비드는 래드왈드가 켄트를 여행하는 동안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돌아온 후 아내의 반대로 이를 포기하고 이교도 제단과 기독교 제단 두 개를 가진 사원을 유지했다고 기록한다. 이것이 켄트의 에델베르트가 통치하던 시기였다면, 618년경 에델베르트가 사망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래드왈드 자신의 사망 시기는 비드의 기록을 사용하면 616년에서 633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비드의 기록 자체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보다 더 정확한 정보는 의심스러운 정복 이후의 자료에 의존한다. 웬도버의 로저는 출처 없이 래드왈드가 624년에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12세기의 《리베르 엘리엔시스》는 래드왈드의 아들 에오르프왈드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627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래드왈드가 그 전에 사망했음을 의미한다. 비드에만 의존한다면, 래드왈드는 약 616년 아이들 강에서 에델프리드를 물리친 후, 래드왈드가 사망한 후 에오르프왈드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에드윈이 사망한 633년 사이에 사망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2. 3. 2. 연대 측정
서튼 후 매장 대상자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매장 시기가 필요하다. 다른 유물들과 함께 발견된 37개의 금화는 매장 시기를 추정하는 가장 객관적인 수단을 제공한다. 이 금화는 세 개의 무표 금화와 두 개의 작은 잉곳과 함께 지갑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자체로도 상당한 관심을 끈다. 금화가 매장 시기를 추정하는 도구로서 유용하다는 점은 처음부터 인식되었지만, 7세기의 매장과 관련하여 그 목적은 명확하지 않았다. 단순한 부의 증거라고 보기에는 금화의 양이 너무 적다. 금화, 무표 금화, 잉곳을 합쳐 61그램이 조금 넘는데, 이는 매장 유물 중 작은 장신구에 들어있는 금의 양과 거의 같다. 한 이론에 따르면 금화의 수는 무게나 주조 시기보다 더 중요하며, 40명으로 추정되는 노 젓는 사람의 수와 일치한다고 한다. 따라서 금화는 초자연적인 노 젓는 사람들에게 한 개씩, 뱃사공에게 두 개의 잉곳을 줘서 죽은 자를 저 세상으로 인도하는 "카론의 몫"일 수 있다.1960년까지, 19세기에 확립된 화폐 연대기를 바탕으로, 서튼 후 금화는 일반적으로 서기 650~660년으로 추정되었다. 이 기간을 기준으로 매장은 동앵글리아의 에텔헤레, 동앵글리아의 안나, 동앵글리아의 에델왈드, 동앵글리아의 시게베르트, 동앵글리아의 에크릭과 같은 군주에게 귀속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주어진 기간 또는 그 주변에서 통치하고 사망했다.
제안된 연도 범위, 그리고 그에 따른 왕족 귀속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도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 약 700개의 메로빙거 금화의 비중을 연구하여 금의 순도를 기준으로 금화의 발행 시기를 추정하는 후기 연구에 의해 수정되었다. 이 분석에 따르면 지갑에 들어있는 가장 최근의 금화는 서기 613년에서 635년 사이에 발행되었으며, 이 범위의 끝보다는 시작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 범위는 매장이 그 이전에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잠정적인 ''종점''이며, 그 이후 언젠가, 아마도 수년 후에, 금화가 수집되어 매장되었을 것이다. 이 날짜는 래드왈드와 일반적으로 일치하지만 배타적이지는 않다.
2. 3. 3. 왕권의 상징
왕의 장례를 기념하는 물건들은 단순한 화려함을 넘어 왕권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일부 보석류는 의식용 복장을 암시하며, 거대한 금 버클은 귀족의 배상금과 비슷한 무게로, 왕만이 가질 수 있는 권위를 나타낸다. 투구는 부와 권력을 상징하며, 왼쪽 눈썹의 미묘한 수정은 착용자를 외눈박이 게르만 신 오딘과 연결한다."지팡이"와 숫돌은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권력의 도구로 여겨진다. 금과 석류석으로 장식된 지팡이는 사무실의 상징으로 보이며, 숫돌은 사용 흔적이 없는 정교한 장식으로 인해 홀로 추정된다. 이는 북부 세계에서 대장장이와 그의 도구를 둘러싼 신성과 신비의 왕에게 적합한 상징이라는 해석도 있다.
2. 3. 4. 종교적 의미
매장 유물이 래드왈드와 관련이 있다는 추가 증거는 기독교와 이교도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유물의 존재에서 비롯되었다. 이 매장은 여러 면에서 명백히 이교도적이다. 배 매장으로서, 이는 그레고리오의 기독교 재도입보다 앞선 이교도의 관습의 발현이며, 침략하는 프랑크 기독교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의 역할을 했을 수 있다. 그러나 세 그룹의 유물에서 명확한 기독교적 영향이 나타난다. 두 개의 칼집 보스, 은 그릇 10개, 은 숟가락 2개이다. 그릇과 칼집 보스에는 각각 십자가가 새겨져 있으며, 전자는 체이싱 기법으로, 후자는 클로이존네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숟가락은 십자가와 파울로스/ΠΑΥΛΟΣgrc, 사울로스/ΣΑΥΛΟΣgrc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어 가톨릭 교회와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두 이름은 모두 사도 바오로가 사용했다. 두 숟가락 모두 동일한 파울로스/ΠΑΥΛΟΣgrc로 새겨질 의도였을 수 있지만, 후자의 비문의 첫 글자가 오류로 만들어졌을 수 있다. 만약 세례 숟가락이 아니라 할지라도, 바오로의 개종을 언급하는 이 숟가락들은—켄트에서 래드왈드의 개종과 연결된 이론—명백히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2. 3. 5. 다른 가능성
뢰드왈드는 서튼 후 선박 매장을 연관시키기에 가장 쉬운 이름일 수 있지만, 그러한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보다는 격렬함으로 제기되었다. 알려진 이름, 즉 유명한 이름과 매장을 연결하려는 욕구가 증거를 능가한다. 이 매장은 확실히 부와 권력의 기념비적인 과시이지만, 반드시 뢰드월드나 왕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적으로, 선박 매장은 기원적인 제물이 될 수도 있었다. 뢰드월드에 대한 주장은 동전의 연대에 크게 의존하지만, 현재 연대는 20년 이내로 정확하며, 메로빙거 시대 동전 연대기는 이전에도 변경된 적이 있다.뢰드월드에 대한 주장은 중세 시대의 부와 권력에 대한 현대적 개념이 정확하다는 가정에 달려 있다. 서튼 후 선박 매장의 부는 동시대의 유사 사례가 없기 때문에 놀랍지만, 유사 사례의 부족은 뢰드월드의 부를 나타내는 지표일 수도 있지만, 생존의 변덕일 수도 있다. 많은 다른 앵글로색슨 시대의 고분들이 쟁기질되거나 약탈되었으므로, 동시대의 왕족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듯이, 동시대의 왕족 무덤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만약 보물로 불리는 물품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면, 그것은 왕족의 의미가 아닌 종교적인 의미였을 수 있으며, 왕족의 무덤에 대해 알려진 것이 있다면, 부유한 사람들의 무덤조차도 어떤 왕이라도 소유하고 싶어할 보물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족장, 섭정, 왕, 그리고 지위를 추구하는 신흥 부자들의 무덤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다. 켄트 왕국 출신 뮬이 웨섹스의 왕 캐드왈라의 형제였는데, 687년에 살해되었을 때, 그에 대한 보상으로 지불된 가격은 왕의 배상금과 같았다. 만약 왕과 그의 형제의 생명이 동등하다면, 그들의 무덤을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뢰드월드는 가능성이 있지만 불확실한 신원으로 남아 있다. 대영 박물관의 전 관장인 데이비드 M. 윌슨 경이 쓴 것처럼, 뢰드월드가 서튼 후에서 매장되었을 수 있지만, "뢰드월드의 신원 확인에는 'may(…일지도 모른다)'라는 작은 단어가 포함되어야 한다. 결국 630년대 초에 죽은 시게버트일 수도 있고, 그에게 사생아가 있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의 사생아일 수도 있고, 610년부터 650년까지의 이스트 앵글리아의 다른 위대한 인물일 수도 있다."
3. 투구의 구조 및 특징
서튼후 투구는 무게가 약 2.5kg이며, 철로 만들어졌고 주석 처리된 청동 판으로 덮여 있었다. 홈이 파인 몰딩 스트립은 외부를 패널로 나누었고, 각 패널에는 다섯 가지 디자인 중 하나가 각인되었다. 그중 두 개는 인물 장면을, 다른 두 개는 동물 형상의 상호 연결된 패턴을 묘사한다. 다섯 번째 패턴은 작은 조각 일곱 개에서만 알려져 복원할 수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대칭적인 투구에서 한 번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손상된 패널을 대체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디자인의 존재는 1947년에 처음 복원된 이후 일반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 불명의 디자인에 대한 증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경되었으며, 나중에 디자인 2의 일부로 밝혀진 한 조각에서 오늘날 인식되는 일곱 조각으로 바뀌었다. 메리온은 "무릎에서 발까지 약 13mm 높이의 외로운 다리"를 보여주는 단일 조각 때문에 정체 불명의 디자인을 제안했다. 윌리엄스의 재건은 이 조각을 머리 덮개의 뒷부분에서 꼭대기 중앙의 능선으로 옮겼고, 결국 두 번째 디자인의 일부로 밝혀졌다. 따라서 브루스-미트포드가 새로운 복원에 대한 1972년 논문에서 네 가지 디자인만 있다고 주장했을 때 정체 불명의 패턴의 존재는 추정적으로 제거되었다. 1975년에 출판된 ''서튼후 선박 매장''의 첫 번째 권에서도 그는 정체 불명의 장면에 대해 과거 시제로 언급하면서 "재발굴 당시(1965년) 투구에 세 번째 인물 장면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졌다"고 말했다. 세 번째 장면에 대한 징후는 같은 작품의 두 번째 권이 1978년에 출판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며, 여기에서 일곱 개의 작은 조각이 네 가지 알려진 디자인 내에 배치할 수 없다고 논의되었다. 그 후 30년 동안 디자인과 현대 이미지의 유사성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전체 패널의 가능한 재구성이 발전하고 두 번째 재구성을 통해 투구 표면에서의 위치가 재결정되었다. 아래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디자인은 루퍼트 브루스-미트포드의 1978년 작업에 따라 번호가 매겨져 있다.
3. 1. 구조
서튼후 투구는 철제 캡을 기본으로, 얼굴 가리개, 뺨 가리개, 목 가리개가 부착된 형태이다. 캡은 한 장의 철판을 두드려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뺨 가리개는 얼굴 전체를 보호할 수 있도록 깊고 안쪽으로 굽어져 있으며, 가죽 경첩으로 캡에 연결되어 얼굴을 완전히 덮을 수 있다. 목 가리개는 두 개의 겹치는 조각으로 구성되어 캡 안에 짧은 조각을 놓고 그 위에 넓은 부채 모양의 세그먼트를 부착하여 움직임을 용이하게 했다. 얼굴 가리개는 캡에 리벳으로 고정되었고, 눈과 코를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철제 기본 층 위에는 주석 도금된 청동 장식판이 덮여 있다. 이 장식판은 토르슬룬다 판과 유사한 ''프레스블레흐'' 기법으로 제작된 다섯 가지 동물 또는 인물 문양으로 나뉜다. 이는 부조 작업과는 달리, 미리 만들어진 틀을 이용하여 얇은 금속판에 압력을 가해 대량 생산이 가능한 방식이다.
투구의 가장자리는 U자형 황동 튜빙으로 보호되었고, 청동 클립으로 고정되었다. 투구 상단에는 D자형 철제 능선이 앞뒤로 뻗어 있으며, 양 끝에는 도금된 용 머리 장식이 리벳으로 고정되어 있다. 앞쪽 용 머리는 주조 청동으로, 뒤쪽은 다른 합금으로 제작되었다.
투구 앞쪽에는 위를 향한 청동 주조 용 머리가 있으며, 그 양옆에는 은선이 상감된 청동 눈썹이 있다. 눈썹 끝에는 멧돼지 머리 장식이 있고, 눈에는 석류석이 박혀 있다. 눈썹 아래에는 코와 입 조각이 있으며, 이 역시 주조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코에는 상감된 은선과 니엘로 장식이 있고, 콧수염과 아랫입술에는 체이싱 기법으로 새겨진 문양이 있다. 코와 입 조각은 화재 도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눈썹은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데, 오른쪽 눈썹이 왼쪽보다 약간 짧고, 상감된 은선의 수도 적다. 또한 오른쪽 눈썹의 도금은 왼쪽보다 붉은색을 띠며, 가넷을 고정하는 청동 세포의 뒷면에 금박이 사용된 정도에도 차이가 있다.
3. 2. 장식
3. 2. 1. 프레스블레흐 기법
프레스블레흐 기법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source`에 내용이 없으므로, `summary`에 있는 내용만으로는 위키텍스트를 생성할 수 없습니다.3. 2. 2. 도상
춤추는 전사 장면은 6개의 조각에서 확인되며 투구에서 네 번 나타난다. 이 장면은 눈썹 바로 위에 있는 두 패널에 나타나며, 6개의 조각 중 5개를 차지한다. 여섯 번째 조각은 오른쪽 뺨 보호대의 중간 열, 안면 마스크에 가장 가까운 패널에 배치된다. 투구의 전반적인 대칭성은 반대쪽에도 디자인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6개의 조각 중 어느 것도 두 전사를 모두 보여주지 않지만, "핵심 조각"은 그들의 엇갈린 손목을 묘사한다. 이 장면의 전체 재구성은 첫 번째 재구성 이후 유추되었는데, 루퍼트 브루스-미트포드가 스웨덴에서 6주를 보냈고 당시 미발표된 Valsgärde 7 투구에 거의 동일한 디자인이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디자인 1은 "시민 또는 의례복"을 입은 두 남자를 묘사하며 아마도 창이나 칼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전쟁의 신 오딘 숭배와 관련된" 것이다. 그들의 바깥쪽 손은 각각 두 개의 창을 잡고 발을 향하고 있으며 엇갈린 손은 칼을 쥐고 있다. 이 묘사는 "복잡한 조치", "리듬" 및 "춤 동작의 탄력성"을 시사한다. 그들의 밖으로 향한 다리와 구부러진 엉덩이는 서로를 향한 움직임을 암시하며 춤의 절정에 있을 수 있다.
당시 스칸디나비아 및 북부 예술에서 "운동 방식의 유사성"을 가진 춤 장면이 만연한 것은 의례적인 춤이 "잘 알려진 현상"이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칼춤은 게르만족 사이에서 기원후 1세기에 기록되었는데, 당시 타키투스는 "[칼과 창 사이에서 춤을 추는] 나체의 젊은이"에 대해 썼으며, 이는 "항상 모든 모임에서 공연"되는 "구경거리"였다. 서튼 후의 예가 전달하는 의미가 무엇이든, "의례적인 춤은 특정 시대에 국한된 유행이 아니라, 거의 변하지 않는 형태로 수세기 동안 행해졌다."
많은 현대 디자인이 의례적인 춤을 묘사하는 반면, 적어도 세 가지 예는 서튼 후 투구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장면을 보여주며 묘사된 칼춤에 대한 이해에 기여한다. 동일한 디자인—손에 들고 있는 창의 다른 유형, 다른 의상 패턴, 두 남자 뒤에 엇갈린 창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동일하다—이 Valsgärde 7 투구에서 발견되었으며, 감라웁살라의 감라웁살라 동쪽 언덕에서 찍힌 작은 조각은 "모든 면에서 서튼 후 투구의 해당 전사와 매우 가까워서 처음 보면 같은 다이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며, 심지어 "같은 사람이 잘랐을 수도 있다."
세 번째 유사한 디자인은 1870년 스웨덴 외랜드에서 발견된 네 개의 토르슬룬다 판 중 하나이다. 이 판은 완전하며 디자인 1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 인물을 묘사하며, 서튼 후의 예에 나오는 남자들이 "오딘 숭배"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토르슬룬다의 인물은 눈이 없는데, 레이저 스캔 결과 "금형에 사용된 원래 모델에서 날카롭게 잘려 제거된 것"으로 밝혀졌다. 오딘 또한 눈을 잃었고, 이는 토르슬룬다 인물을 그로, 서튼 후 인물을 그의 신봉자로 식별하는 증거가 되었다.
8개의 파편과 표현이 두 번째 디자인의 모든 알려진 사례를 구성한다. 원래 투구에 12번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는 12개의 패널 중 하나를 차지하는 식별되지 않은 세 번째 디자인이 손상된 패널을 대체한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렇게 가정하면, 패턴은 두 개의 디자인 1을 보여주는 것을 제외한 두개골 덮개의 가장 낮은 행(즉, 모든 것)에 8개의 공간을 차지하고, 양쪽 중앙에 하나씩, 꼭대기에 두 개의 패널을 배치한다. 디자인 2를 보여주는 모든 패널은 동일한 다이로 찍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말과 기수는 투구 주위를 시계 방향으로 움직이며, 오른쪽 면에서는 투구 뒤쪽을 향하고, 왼쪽 면에서는 앞쪽을 향한다.
디자인 2의 상당 부분이, 특히 "중앙 영역"에서 누락되었으므로, 재구성은 동일한 장면의 대륙 버전에 부분적으로 의존한다. 특히, 유사한 장면은 Valsgärde 7 및 8 헬멧, Vendel 1 헬멧, 그리고 Pliezhausen bracteate에서 볼 수 있다. 특히 후자의 조각은 서튼 후 디자인과 거의 동일하며 완벽하다. 거울 이미지이며, 기수가 들고 있는 칼과 쓰러진 전사가 착용한 칼집과 같은 디자인 2에 묘사된 특정 세부 사항이 부족하지만, 무릎을 꿇은 인물이 들고 있는 작은 방패와 같은 다른 세부 사항을 시사한다.
디자인 2는 말을 탄 전사가 창을 머리 위로 들고 땅에 있는 적을 짓밟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자는 위로 기울어져 왼손으로 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 말을 가슴에 칼을 꽂는다. 말의 엉덩이 꼭대기에는 "작은 인간 또는 적어도 의인화된 인물"이 무릎을 꿇고 있다. 이 인물은 양식상 기수와 유사하다. 팔과 다리가 동일하게 위치하고 있으며, 기수와 함께 오른손으로 창을 꽉 쥐고 있다.
디자인 2의 기저에 있는 아이코노그래피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로마 모델에서 파생되었을 수 있으며, 여기에는 정복당한 적을 짓밟는 전사의 이미지가 자주 묘사되었다. 잉글랜드, 스웨덴, 독일에서 발견된 디자인의 후속 개발은 게르만 신화에서 널리 이해되는 독특한 의미를 지녔음을 시사한다. 로마 시대의 예는 무조건적인 승리의 순간에 기수를 보여주는 반면, 게르만 시대의 표현에서는 장면이 모호하다.
상징성은 불분명하며, 승리의 요소가 패배의 요소와 결합된다. 기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창을 똑바로 겨누고, 땅에 있는 눈에 보이는 적을 향하지 않는다. 적을 짓밟았지만, 기수의 말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작고 신성한 인물이 기수 뒤에 떠 있으며, 그의 몸은 승리한 swastika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창을 안내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디자인의 전반적인 주제는 운명일 수 있다. 이러한 이해에서 신성한 인물, 아마도 오딘은 전투에서 전사를 인도하지만 그가 직면하는 치명적인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지 않는다. 신들은 운명의 변덕에 스스로 굴복하며 기수의 적에 맞서 제한적인 도움만 제공할 수 있다.

일곱 개의 작은 조각은 서튼 후 투구의 어딘가에 세 번째 도상 장면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을 재구성하기에는 너무 작고 모호하다. 그 존재는 한 번에서 네 번까지 시사된다; 다른 조각들이 투구의 왼쪽 측면의 일곱 개의 사용 가능한 패널 모두와 오른쪽 측면의 가장 앞쪽 두 패널(가장 높은 오른쪽 패널 외에도)에서 디자인 1 또는 디자인 2의 발생을 보여주기 때문에, 디자인 3의 배치는 오른쪽 측면의 "투구 뒤쪽을 향해 발생했음에 틀림없다" .
디자인 3의 잔해는 디자인 2 패널의 손상을 수정하기 위해 "변형된 기마 장면"이 사용되었음을 시사할 수 있으며, 발스게르데 6 투구의 독특한 'pressblech' 디자인이 수리에 사용된 것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조각 (a)는 벤델 예술의 서튼 후 투구 및 기타 기마 장면과 유사하게, "모델링된 표면의 각도 또는 방향의 변화"와 일치하는 평행한 융기된 선의 그룹을 보여주며, 이는 말의 몸체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더 작지만, 조각 (d)도 유사한 패턴을 보여주고 유사한 해석을 시사한다. 한편, 조각 (b)는 "2밀리미터 간격으로 두 개의 동심 융기된 선"을 보여주며, "디자인 2의 기수가 들고 있는 것과 동일한 직경의 방패 테두리의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
디자인 3을 대체 패널로 보는 이론은 투구 뒤쪽의 손상으로 약간의 지지를 받지만, 조각 (c)의 배치와 모순된다. 앞쪽에서 뒤쪽까지 25.5cm인 볏은 뒷쪽 용 머리 위 2cm가 없다. 이 머리 자체는 대부분 없으며, 1945–46년 재구성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누락된 부분은 브루스-미트포드가 투구가 한때 적어도 하나의 디자인 2 패널을 새로운 기마 장면으로 복원해야 하는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공된다.
그러나 이 이론은 뒷면 볏과 용 머리가 왜 스스로 수리되지 않았는지 설명하지 못하며, 조각 (c)에 의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조각은 1970–71년 재구성에서 디자인 2 또는 디자인 3이 예상되는 패널의 왼쪽 하단에 투구 오른쪽 뒷면에 배치된 가장자리 조각이지만, "다른 어떤 생존 조각과도 전혀 맥락이 없고, 디자인 3 패널의 주제와도 일치하지 않는 고립된 요소"이다. 브루스-미트포드는 이것이 가장자리 조각이므로 틈을 메우기 위해 다른 조각 아래에 놓인 스크랩이었을 수 있다고 제안하며, "그렇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다."
뺨 보호대, 목 보호대 및 머리 덮개에서 발견되는 더 큰 상호 연결 무늬는 완벽하게 재구성될 수 있었다. 두 개의 식별된 형상 장면과 달리, 디자인 4의 부분적인 다이 인상과 전체 다이 인상이 사용되었다. 장식적인 디자인이 없는 머리 덮개와 목 보호대의 빈 공간은 거의 또는 완전히 완성된 디자인 4의 인상을 허용했다. 반면에 불규칙한 모양으로 완전히 장식된 뺨 보호대에서는 상호 연결 디자인이 부분적으로, 때로는 옆으로 나타난다.
디자인 4는 리본 스타일의 단일 동물 또는 사지동물을 묘사하며, 모든 면에 테두리가 있다. 동물의 머리는 패널의 위쪽 중앙에 위치해 있다. 눈은 두 개의 원으로 정의되며, 나머지 머리는 두 개의 분리된 리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얽혀 있다. 턱과 입을 나타내는 세 번째 리본이 머리 아래에 있다. 왼쪽에서는 작은 테두리 리본으로 시작하여 펠릿으로 채워진 꼬임으로 내려가 스스로 통과하고 더 큰 테두리 리본으로 나타난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몸통을 나타내는 별도의 리본 위로, 그리고 그 아래로, 다시 그 아래로, 그리고 머리를 나타내는 리본 중 하나 위로 지나간다. 두 번째 펠릿으로 채워진 꼬임으로 나타나 다시 테두리 리본을 형성하고 발 모양으로 끝난다. 동물의 목을 형성하는 네 번째 리본은 머리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이동하여 팔다리를 형성하는 리본 아래로 통과하여 오른쪽 하단 모서리에 펠릿으로 채워진 꼬임으로 끝나고 앞 엉덩이를 나타낸다. 두 개의 팔다리가 엉덩이에서 나온다. 하나는 즉시 테두리에서 끝나고, 두 번째는 테두리 리본으로 위로 이동하여 목 아래로 통과하고 또 다른 엉덩이에서 끝난다(Bruce-Mitford에 따르면 "비논리적으로").
또 다른 짧은 팔다리는 펠릿으로 채워져 있으며 이 엉덩이에서 나와 발에서 끝난다. 한편, 동물의 몸통은 오른쪽 하단의 앞 엉덩이와 왼쪽 상단의 뒤 엉덩이를 연결하는 또 다른 테두리 리본으로 형성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턱과 입 아래로, 다리를 나타내는 테두리 리본 아래로 통과한 다음 뒤 엉덩이에 연결된다. 뒤 엉덩이는 앞 엉덩이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팔다리에 연결된다. 하나는 작고 펠릿으로 채워진 꼬임이다. 다른 하나는 테두리 리본으로 아래로 이동하여 왼쪽 하단 모서리에서 끝나고, 펠릿으로 채워진 팔다리에 연결된 또 다른 엉덩이와 발에서 끝난다.
이 디자인은 베른하르트 살린(Bernhard Salin)이 "디자인 II" 게르만 동물 장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타낸다.
더 작은 문양의 엮음 무늬는 얼굴 가리개를 덮고, 목 가리개에 두드러지게 사용되었으며, 뺨 가리개의 비어 있는 여러 공간을 채웠다. 이것은 더 큰 엮음 무늬와 마찬가지로 동물 문양 디자인이며, "서로 거꾸로 뒤집힌 두 마리의 동물이 있는데, 그들의 뒤돌아보는 머리가 패널의 중앙을 향하고 있다"고 묘사된다.
3. 2. 3. 용 문양
투구에는 세 개의 용 머리가 표현되어 있다. 두 개의 청동 도금 용 머리는 두개골 덮개의 앞쪽에서 뒤쪽으로 이어지는 철제 볏의 양쪽 끝에 있다. 세 번째 용 머리는 두 눈썹의 교차점에 위치하며, 위를 향하고 있으며, 눈썹, 코, 콧수염으로 더 완전한 형태를 이루어 날아가는 용의 인상을 준다. 용은 위로 날아오르며, 석류석으로 장식된 날개는 불타는 연기를 전달하려는 의도일 수 있으며, 투구의 극적인 초점에서는 볏을 따라 내려오는 뱀과 같은 용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다.
투구가 보석으로 장식된 정도는 이러한 장식이 대부분 용과 관련된 요소에 국한된다. 머리에 박힌 볼록한 석류석은 용에게 붉은 눈을 부여한다. 눈썹 또한 아래 가장자리에 사각형 석류석으로 상감되어 있으며, 각 측면에서 바깥쪽으로 이어져 도금된 멧돼지 머리로 끝난다. 날개로서의 이차적인 장식 기능 외에도, 눈썹은 멧돼지 몸의 삼차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눈썹 사이의 미묘한 차이점, 즉 왼쪽에 있는 눈썹은 오른쪽에 사용된 금박 뒷면이 없다는 점은 한쪽 눈을 가진 신 오딘에 대한 암시일 수 있다. 빛이 적은 곳에서 한쪽 눈의 석류석만 빛을 반사하는 경우, 투구 자체가 한쪽 눈만 있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 대안적 이론은 눈썹의 불일치가 수리 작업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금박이 없다는 것은 수리의 결과일 수 있으며, 따라서 금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필요한 극소량의 양을 고려할 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또한, 금 세포 벽을 성형하고 석류석을 매우 정밀하게 자르는 데 필요한 명백한 기술을 고려할 때, 왼쪽 눈썹에서 금박을 생략하기로 한 결정은 더욱 신중한 것으로 보인다." 수리 이론은 석류석 용 눈 중 하나의 뒤쪽에 금박이 없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반면에 수리는 오딘에 대한 이론적 암시에서 다루지 않는 눈썹의 약간 다른 길이와 색상과 같은 다른 미묘한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다.
더 많은 금이 눈썹, 코 및 입 조각, 용 머리를 덮고 있으며, 볏 옆에 있는 두 개의 홈이 파인 띠에도 사용되었다. 볏과 눈썹은 은선으로 더 상감되어 있다. 주석 처리된 청동의 은색과 결합하여 그 효과는 "금 격자무늬로 세팅된 광택 있는 은색 물체로, 덩어리진 은색의 볏으로 덮여 있으며, 금도금 장식, 석류석 및 니엘로로 장식되어 있어, 그 자체로 웅장한 물건이자 야만 예술의 뛰어난 걸작 중 하나"였다.
3. 2. 4. 재료
요약(summary)과 원본 소스(source)에 재료에 대한 정보가 없으므로, 이 섹션은 작성할 수 없습니다.4. 기능
서튼후 투구는 실용적인 전투 장비이자 소유자의 권력과 위세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전투에서 사용했다면 상당한 보호 기능을 제공했을 것이고, 알려진 앵글로색슨 투구 중 가장 부유한 것으로, 소유자의 지위를 나타냈다. 매장된 사람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아, 이 투구는 가보였을 수 있으며, 소유자의 삶과 죽음의 의식을 상징했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12세기경부터 유럽에서 알려진 왕관의 시조가 될 수 있으며, 지도자의 통치 권리와 신과의 연결을 모두 나타낸다.
이 투구가 실제로 전투에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교하게 장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을 잘 수행했을 것이다. 어깨와 팔의 움직임을 허용하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투구는 착용자의 머리를 완전히 보호하며, 일반적인 유형의 다른 어떤 투구와도 달리 얼굴 가리개, 일체형 덮개 및 견고한 목 가리개를 가지고 있다. 철과 은으로 된 볏은 떨어지는 타격의 힘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코 아래의 구멍은 통기성이 있는—하지만 답답한—환경을 만들었을 것이다. 만약 두 가지 추측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면—투구 뒤쪽의 손상은 매장 전에 발생했고, 라드월드가 투구의 소유주로 정확하게 확인된다는 것—투구는 적어도 생전에 어느 정도 사용되었고, 전투를 치른 사람의 소유물이었다고 묘사할 수 있다.
기능적인 목적 외에도 서튼후 투구는 소유자의 높은 지위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쇼웰과 월라스톤의 투구와 같은 철모만으로는 머리를 보호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투구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고고학적, 문학적, 역사적 증거에 의해 나타나듯이 위신 있는 물건이었다. 투구는 왕족과 귀족 사회에 초점을 맞춘 앵글로색슨 시인 ''베오울프''에 비교적 흔하게 등장하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 시기의 수천 개의 무덤이 발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알려진 투구는 단 6개뿐이다.
이는 유물의 생존율이 낮거나, 심지어 인식 부족을 반영할 수 있다—쇼웰 투구는 처음에는 "파편화된 철제 용기"로 오인되었고, 월라스톤 투구는 양동이로, 그리고 로마 투구는 "가마솥 파편"으로 오인되었다—극심한 희소성은 투구가 결코 대량으로 보관되지 않았고, 착용자의 중요성을 나타냈음을 시사한다.
서튼후 투구가 매장될 당시 약 100년 정도 되었다는 것은 가보, 즉 다른 세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왕실의 보물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매장된 방패에 대해서도 같은 추측이 제기되었는데, 방패와 투구 모두 스웨덴의 영향을 분명히 받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가보의 중요성은 시에서 잘 기록되어 있다; 훈팅에서 네글링에 이르기까지 ''베오울프''에 나오는 모든 주목할 만한 칼에는 그러한 역사가 있으며, 자신의 장례식을 투구로 쌓아 올린 시의 영웅은, 죽어가는 순간 그의 추종자 위글라프에게 금 목걸이, 사슬갑옷, 그리고 금으로 장식된 투구를 하사한다. 투구의 전수는, 전사에서 전사로, 그리고 땅으로의 전수는 작위와 권력의 이양이라는 더 큰 의식을 상징했을 것이며, 묘에 묻힌 사람에 대한 마지막 애도였을 것이다.
투구는 부의 측면에서 알려진 다른 모든 사례를 쉽게 능가한다. 그것은 추정되는 왕실 무덤에서 유일하게 발견되었으며, 군주제가 투구와 칼로 정의되던 시대였다. 투구는, 아마도 통치자들이 매우 자주 착용했기 때문에, 왕관으로 인식되게 되었을 것이다. 유형학적 및 기능적 진화의 많은 중간 단계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유럽 왕관, 예를 들어 밀레니엄 시대의 성 이슈트반 왕관과 아라곤의 콘스탄스는 서튼 후의 투구와 동시대의 구리게이트 투구를 포함한 많은 투구와 동일한 기본 구조를 공유한다: 이마 띠, 코에서 뒤통수까지의 띠, 그리고 측면 띠. 신성한 통치 권리, 또는 적어도 신과 지도자 간의 연관성— 때때로 로마 신을 나타내는 초기 로마 투구에서도 볼 수 있다—는 서튼 후 투구의 왼쪽 눈썹에 가해진 변화에 의해 암시되었을 수 있다; 한쪽 눈의 모습은 착용자가 왕의 권력의 자리인 홀에 있을 때와 같이 어두운 조명에서만 보였을 것이다.
4. 1. 전투용 투구로서의 기능
서튼후 투구는 실용적인 전투 장비이자 소유자의 권력과 위세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전투에서 사용되었다면 상당한 보호 기능을 제공했을 것이고, 알려진 앵글로색슨 투구 중 가장 부유한 것으로, 소유자의 지위를 나타냈다.이 투구는 착용자의 머리를 완전히 보호하며, 얼굴 가리개, 일체형 덮개 및 견고한 목 가리개를 가지고 있다. 철과 은으로 된 볏은 떨어지는 타격의 힘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코 아래의 구멍은 통기성이 있는 환경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인해 답답함을 유발했을 수도 있다.
기능적인 목적 외에도, 서튼후 투구는 소유자의 높은 지위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쇼웰과 월라스톤의 투구와 같은 철모만으로는 머리를 보호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투구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위신 있는 물건이었다. 투구는 왕족과 귀족 사회에 초점을 맞춘 앵글로색슨 시인 ''베오울프''에 비교적 흔하게 등장하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서튼후 투구는 부의 측면에서 알려진 다른 모든 사례를 능가한다. 그것은 추정되는 왕실 무덤에서 유일하게 발견되었으며, 군주제가 투구와 칼로 정의되던 시대였다. 투구는, 아마도 통치자들이 매우 자주 착용했기 때문에, 왕관으로 인식되게 되었을 것이다.
4. 2. 의례용 투구로서의 기능
서튼후 투구는 단순한 전투 장비를 넘어 소유자의 권력과 위세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구였다. 앵글로색슨 시대의 투구 중 가장 화려하게 장식되어 소유자의 높은 지위를 나타냈으며, 왕족과 귀족 사회에서 투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베오울프''와 같은 문학 작품에서도 투구가 자주 등장한다.실제로 전투에 사용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정교한 장식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충분한 보호 기능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투구는 머리 전체를 보호하고, 철과 은으로 된 볏은 떨어지는 타격의 힘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코 아래 구멍은 통기성을 확보했지만, 답답한 환경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서튼후 투구는 매장 당시 이미 100년 정도 지난 가보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왕실의 권위와 권력 이양을 상징하는 의식에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베오울프''에서 영웅이 죽기 전 자신의 투구를 추종자에게 넘겨주는 장면은 이러한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또한, 서튼후 투구는 12세기경부터 유럽에서 나타나는 왕관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다. 성 이슈트반 왕관과 아라곤의 콘스탄스의 왕관과 같이 초기 유럽 왕관들은 서튼후 투구를 포함한 여러 투구와 동일한 기본 구조를 공유한다. 투구의 왼쪽 눈썹에 가해진 변화는 로마 신과의 연관성을 암시하며, 왕의 권위와 신성한 통치 권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5. 제작 기술
5. 1. 금속 세공 기술
5. 2. 보석 세공 기술
5. 3. 가죽 세공 기술
6. 앵글로색슨족 사회와 문화
6. 1. 사회 계층
6. 2. 종교와 신앙
6. 3. 예술과 공예
6. 4. 국제 관계
6. 4. 1. 스칸디나비아와의 관계
서튼 후 투구는 여러 면에서 독특하지만, 앵글로색슨 및 스칸디나비아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벤티 그레인지 (1848), 코퍼게이트 (1982), 월러스턴 (1997), 쇼웰 (2004), 스태퍼드셔 (2009)에서 발견된 투구와 함께 앵글로색슨 투구 6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스웨덴 벤델 (1881–1883)과 Valsgärde (1920년대)에서 발견된 투구와 더 유사한 성격을 보인다.서튼 후 투구는 벤델과 Valsgärde 양식에 속하며, 이 양식은 4~5세기 콘스탄티누스 공방에서 제작된 로마 보병 및 기병 투구에서 유래되었다. 벤델의 1, 12, 14호 무덤(10, 11호 무덤에는 부분 투구)과 발스가르데의 5, 6, 7, 8호 무덤에서 투구가 발견되었다. 서튼 후 투구는 디자인 면에서 유사성을 공유하지만, 스칸디나비아의 유사품보다 "더 풍부하고 품질이 더 높다". 이러한 차이점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을 위해 제작되었거나, 선행하는 로마 투구와 시간적으로 더 가까웠기 때문일 수 있다.
서튼 후 투구와 스칸디나비아 투구의 구조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면에서 상당한 유사점이 드러난다. 복원이 가능한 스칸디나비아 헬멧은 서튼 후 투구보다 단순하게 제작되었다. 이들 헬멧은 얼굴 가리개, 단단한 목 가리개, 혹은 한 조각의 금속으로 만든 덮개가 없으며, 뚜렷한 뺨 가리개를 가진 것은 단 두 개뿐이다.
서튼 후 헬멧의 화려한 깃털 장식과 눈썹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과 유사하며, 일부는 서튼 후 헬멧의 은선 상감을 복제하거나 모방한다. 석류석은 서튼 후와 발스게르데 7 헬멧을 장식하며, 서튼 후 헬멧과 스칸디나비아 헬멧을 덮고 있는 ''프레스블레히'' 디자인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도상적으로 얽혀 있다. 앵글로색슨 헬멧과 스칸디나비아 헬멧은 거의 보편적으로 깃털 장식을 가지고 있어 일반적으로 "깃털 헬멧"으로 분류되지만, 서튼 후 깃털 장식의 와이어 상감은 "그러한 와이어 상감 패턴이 주조 또는 조각으로 모방된 벤델형 헬멧 깃털 장식"과 가장 유사하다.


발스게르데 7 헬멧은 "서튼 후 헬멧의 동부 스칸디나비아 문맥을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해 다른 어떤 종류의 헬멧보다 낫다." 아마도 그 차이점은 왕족이 아닌 "지주 농부"의 무덤에 있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그것과 시대적으로 일치하는 왕족 무덤은 아직 스웨덴에서 발굴되지 않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러한 무덤에 포함된 헬멧과 방패는 서튼 후의 예와 품질이 더 비슷할 것이다."
6. 4. 2. 로마와의 관계
여러 면에서 독특한 서튼 후 투구는 4~5세기 로마 투구에서 유래되었다. 볏, 튼튼한 덮개, 목과 뺨 가리개, 얼굴 가리개, 가죽 안감 등 구조적인 특징은 초기 로마 투구와 유사하다. 데르네, 콘체스티, 아우크스부르크-페르제, 아우그스트, 베르카소보 1, 2, 인터치사 2, 4 투구는 서튼 후 투구와 유사한 볏을 가지고 있다. 앵글로색슨족과 스칸디나비아 투구 중에서 유일하게 일체형 덮개는 그리스 및 로마 기술의 종말을 보여준다.초기 로마 제국의 1~2세기에 주로 사용되다가 이분형 구조의 투구로 대체되었는데, 볏은 두 부분을 고정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관행은 서기 500년경에 잊혀진 것으로 추정된다. 서튼 후 투구의 단단한 철제 뺨 가리개는 콘스탄티누스 양식에서 유래되었으며, 뒷면에 잘린 부분이 특징이다. 현재 재구성은 뺨 가리개의 로마적 영향을 부분적으로 가정하고 있으며, 가죽 경첩 사용과 뺨 가리개의 좌우 교체는 로마의 관행을 따른 것이다. 목 가리개 또한 가죽 경첩을 사용한다고 가정한다. 후기 로마 투구는 덮개 하단에 철제 밴드를 부착하는 경향이 있으며(데르네, 아우크스부르크-페르제, 베르카소보 1, 2 투구), 단단한 철제 구조는 앵글로색슨족과 스칸디나비아 투구에서는 유일하게 일체형 덮개와 같고, 로마의 사례와 더 가깝다.
서기 1세기의 위참 그래블 투구는 넓고 깊은 목 가리개를 가지고 있으며, 단단한 돌출 가드는 데르네와 베르카소보 2 투구에서 발견된다. 얼굴 가리개는 로마의 리브체스터 투구, 에메사 투구와 유사하다. 특히 에메사 투구는 얼굴을 완전히 감싸는 대신 단일 경첩으로 덮개에 부착된다. 서튼 후 투구의 가죽 안감은 후기 로마 투구의 유사한 안감 유행으로 뒷받침된다.
서튼 후 투구의 장식, 특히 흰색 외관, 상감 세공된 가닛, 눈에 띄는 리벳도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주석 처리된 표면은 베르카소보 1, 2 투구와 콘체스티, 아우크스부르크-페르제, 데르네 투구와 비교된다. 베르카소보 1 투구와 부다페스트 투구의 귀금속 장식은 서튼 후 투구와 발스가르데 7 투구 가닛의 기원일 수 있다. 발스가르데 8 및 서튼 후 투구와 같은 일부 볏이 있는 투구의 눈에 띄는 리벳은 베르카소보 2 및 데르네 투구와 같은 로마 투구의 리벳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 있다.
6. 4. 3. 한국과의 관계
서튼후 투구는 신라 금관총 금관과 비교했을 때, 재료, 형태, 장식 요소 등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보인다. 두 유물 모두 금을 사용하여 제작되었으며, 정교한 세공 기술을 보여준다. 하지만 서튼후 투구는 철제 바탕에 금동판을 덧씌운 형태인 반면, 금관총 금관은 순금으로 제작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는 서튼후 투구는 얼굴 전체를 가리는 형태로, 당시 앵글로색슨족의 전투적인 문화를 반영하는 반면, 금관총 금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이 특징적인, 신라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유물로 추정된다. 장식 요소에서는 두 유물 모두 동물을 형상화한 장식을 사용했지만, 서튼후 투구는 용과 멧돼지 등 앵글로색슨족 신화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금관총 금관은 새와 물고기 등 신라의 토착 신앙과 관련된 동물들을 형상화했다는 차이가 있다.이러한 유사점과 차이점을 통해 7세기 동아시아와 유럽 간의 직접적인 문화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낮지만, 유라시아 대륙을 통한 간접적인 문화 교류의 가능성은 엿볼 수 있다.
6. 5. 베오울프와의 연관성
서튼후 배 무덤 장례와 ''베오울프''에 대한 이해는 1939년 서튼후 배 무덤 장례가 발견된 이후로 서로 얽혀 있었다. "1950년대 후반까지, ''베오울프''와 서튼후는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연구에 따라 하나가 등장하면 다른 하나가 불가피하고 자동적으로 연상되었다." 비록 "각 기념비가 다른 기념비를 비추고" 있지만, 둘 사이의 연결은 "거의 확실히 너무 구체적으로 만들어졌다."''베오울프''에는 다른 어떤 전쟁 장비보다 투구에 대한 묘사가 더 자세히 나와 있다. 멧돼지 이미지, 볏, 바이저 모두 ''베오울프''에서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으며, 투구의 빛나는 흰색과 보석 장식된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서튼후 투구가 ''베오울프''의 어떤 투구를 완전히 반영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은 고립된 유사점은 "고고학적 증거가 제한적임에도 불구하고 시적 묘사의 어떤 특징도 설명할 수 없고 고고학적 유사성이 없는 것은 없다"는 점을 보장한다.

멧돼지 문양이 있는 투구는 ''베오울프''에서 다섯 번 언급되며,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독립된 멧돼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다. 베오울프와 그의 열네 명의 부하들이 배에서 내려 왕 흐로드가르를 만나러 갈 때, 멧돼지 모양은 그들의 뺨 보호대 위로, 금세공인의 밝게 단조된 작품으로, 저 엄격한 얼굴의 남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한 멧돼지 모양은 서튼후 투구의 눈썹 끝에서 끝나고 뺨 보호대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했을 수 있다. 베오울프 자신은 그렌델의 어머니와의 싸움 전에 "멧돼지 이미지가 둘러싸인" 투구를 썼고 "보물로 장식된 흰색 투구"로 더 묘사되었는데, 이는 주석 처리된 서튼후의 예에 적용될 수 있는 유사한 설명이다.
다른 멧돼지 장식 스타일은 시에서 세 번 언급되며, 볏 위에 독립된 멧돼지가 있는 투구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흐로드가르는 그의 가까운 친구 에스케레의 죽음을 슬퍼하며, 에스케레가 "전열에서 우리의 멧돼지 볏이 맹렬하게 공격을 받아야 했을 때 내 오른팔이었다"라고 회상한다. 이 볏은 아마도 길든 모덴에서 발견된 길든 모덴 멧돼지와 벤티 그레인지 투구, 울라스턴 투구의 볏과 더 유사했을 것이며, Torslunda plates와 벤델 1 및 발스게르데 7 투구에 있는 동시대 이미지에서도 볼 수 있다.

눈썹의 멧돼지 이미지와 함께, 서튼후 투구의 볏에 있는 은상감세공은 ''베오울프''에서 언어적 지원을 찾을 수 있다. 그렌델을 물리친 후 베오울프에게 "승리의 선물"로 제공된 투구는 동일한 특징으로 묘사된다.
이 시의 이 부분은 투구가 발견되기 전까지 "아마도 부패했을 것"으로 여겨졌으며, "필사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는 제안이 있었다. 특히 "악명 높은 ''''"의 의미는 추측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엘리자베스 마틴-클라크는 1945년 강연에서 ''''는 "아마도 여기서 우리는 칼날을 견디는 투구의 특별한 부분에 대한 언급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벤델[1]에서 재구성된 투구의 그림에서 잘 나타난다."라고 제시하였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고대 영어에서 투구의 볏이 아닌 토지의 능선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시에서 은유적으로 ''''라고 불리는 볏은 또한 ''wirum bewundenang'', 즉 문자적으로 "철사로 감겨진" (철사로 묶인) 것이다. 따라서 서튼후 투구의 볏을 따라 은상감세공과 유사하다. 그러한 볏은 ''베오울프''에서 묘사된 것처럼 떨어지는 칼로부터 보호 기능을 제공했을 것이다. "머리를 빠르게 돌려 타격을 받으면 착용자는 '빗'을 가로질러 가져갈 수 있고 빗과 평행으로 떨어져 캡을 쪼개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발견으로 인해 많은 고대 영어 사전에서 ''''를 ''베오울프''의 "직접적인 맥락"에서 정의하게 되었으며, "앞에서 뒤로 뻗어 있는 철사가 상감된 능선 또는 빗"을 포함하지만, 그렇게 하면 시에서 의도된 "비유적 언어를 제거"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서 사용된 이 용어의 구체적인 의미는 서튼후 투구에 의해 설명되며, 이는 "서튼후 무덤의 고고학적 자료와 ''베오울프'' 시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서튼후 투구와 ''베오울프''의 투구 사이의 마지막 유사점은 얼굴 가리개의 존재이며, 이는 전자를 앵글로색슨족 및 동 스칸디나비아족에서 독특하게 만드는 특징이다. 이러한 독특함은 왕족의 매장 의식의 일부로서 투구가 "발견된 다른 어떤 투구보다 더 풍부하고 품질이 높다"는 점을 반영할 수 있다. ''베오울프''에서 "평민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왕과 귀족에 관한 시"에서 "전투 마스크"(''''), "전쟁 마스크"(''''), "마스크 투구"(''''), "전쟁 머리"('''')와 같은 복합어는 바이저가 있는 투구의 사용을 나타낸다. "전쟁 머리"라는 용어는 특히 의인화된 서튼후 투구에 적합하다. "[T]이 단어는 실제로 투구를 현실적으로 묘사합니다. '': 머리 전체 덮개, 이마, 눈썹, 눈구멍, 뺨, 코, 입, 턱, 심지어 콧수염까지!"
7. 연구 및 복원
7. 1. 발굴
1939년 서튼후 발굴 당시 많은 의문점이 해결되지 않아, 1965년에 두 번째 발굴이 시작되었다. 1965년 재발굴의 목표는 매장된 언덕과 그 주변 환경 조사, 배의 흔적 재확인 및 석고 모형 제작, 1939년 쓰레기 더미에서 놓쳤을 수 있는 조각을 찾는 것이었다. 첫 번째 발굴은 임박한 전쟁의 위협 속에서 진행된 긴급 발굴이었기 때문에, 물체의 파편이 부주의하게 버려졌을 위험이 있었다.재발굴 과정에서 투구 파편 4개가 새로 발견되었다. 1967년에는 1939년 쓰레기 더미 3곳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 투구 조각, 큰 걸이형 그릇, 방패 장식 조각, 수사슴 뿔의 갈래 부분이 나왔다. 투구의 네 조각은 배의 매장실에서 나온 물품만 들어 있던 두 번째 쓰레기 더미에서 나왔다. 여기에는 덱스터 뺨 보호대의 경첩 조각, 크레스트에서 나온 "표면 조각", 홈이 있는 작은 철 조각, 더 큰 상호 연결 디자인의 일부를 보여주는 작은 철 가장자리 조각이 포함되었다.
서튼후 재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투구 발견물은 뺨 보호대의 조각과 어떤 실질적인 크레스트 조각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뺨 보호대의 조각은 1939년에 발견된 다른 조각과 연결되어, "이전에 할 수 없었던 투구의 움직이는 부분 중 하나의 경첩 판"을 완성했다. 한편, 크레스트에서 나온 "표면 조각"이 발견되었지만, 그 위치는 크레스트의 전체 길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7. 2. 복원
허버트 매리언은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서튼 후 투구의 1차 복원을 진행했다. 이 작업은 대영 박물관의 기술 고문으로 특별 채용된 매리언이 맡았으며, 부식된 파편 덩어리로 도착한 투구를 복원하는 데 6개월이 소요되었다. 매리언은 조각들을 분류하고 두꺼운 종이에 따라 그린 후, 듀로픽스를 사용하여 접착하고 석고로 만든 사람 크기의 머리에 붙였다. 뺨 보호대, 목 보호대, 바이저는 철망에 석고를 덧대어 만들었다.
1차 복원은 전반적인 디자인을 확인하고 패널 구성을 유사하게 배열했지만, 노출된 부분과 움직일 수 없는 목 보호대 등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특히 투구의 크기가 작아 착용에 어려움이 있었고, 뺨 부분 앞쪽의 누락된 부분은 턱을 노출시켰으며, 눈 구멍이 커서 검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1966년 C. W. 필립스의 지휘하에 제작된 예술적인 재구성은 더 큰 캡, 더 곧은 얼굴 가리개, 더 작은 눈 구멍 등을 보여주며 이러한 문제점들을 일부 해결하려 했지만, 이 역시 비판을 받았다.

나이젤 윌리엄스는 1970년부터 1971년까지 18개월 동안 2차 복원을 진행했다. 1차 복원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투구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새로운 접합부를 발견하고 뺨 보호대의 위치를 바꾸는 등 여러 개선이 이루어졌다. 조각들은 황마와 접착제 혼합물로 성형된 후 석고로 덮고 옅은 갈색으로 칠해졌다.
2차 복원은 1971년 11월 2일에 전시되었으며, "걸작"이자 "보편적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목 가리개 부분에서 몇 가지 부정확성이 남아있다. 특히 목 가리개 하단 가장자리의 조각 배치는 추정적이며, 디자인 5의 수직 스트립 개수와 배치에 대한 불확실성이 남아있다.
7. 3. 연구
서튼 후 투구는 1939년 서튼 후에서 발견된 앵글로색슨족의 유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투구는 단순한 방어구를 넘어 앵글로색슨족의 사회, 문화, 예술,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으며,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투구의 기원과 제작 기술에 대한 연구는 투구의 형태, 장식, 재료 등을 분석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투구의 표면에 새겨진 정교한 문양과 동물 장식은 벤델 시대 스웨덴 투구와의 유사성을 보여주며, 앵글로색슨족과 스칸디나비아 지역 간의 문화적 교류를 시사한다. 투구의 제작에는 철, 청동, 주석, 은 등 다양한 금속 재료가 사용되었으며, 상감 기법, 도금 기법 등 고도의 금속 세공 기술이 적용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당시 앵글로색슨족의 뛰어난 금속 세공 기술과 예술적 감각을 보여준다.
투구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연구는 투구의 형태와 장식에 나타난 상징성을 해석하고, 이를 앵글로색슨족의 사회적, 종교적, 군사적 맥락과 연결 짓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투구의 용, 멧돼지, 새 등의 동물 장식은 힘, 용기, 권위 등을 상징하며, 앵글로색슨족의 지배층, 특히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투구는 앵글로색슨족 사회와 문화에 대한 연구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투구의 발견은 앵글로색슨족의 장례 문화를 이해하는 데 기여했으며, 투구와 함께 발견된 다른 유물들은 당시 사회의 계급 구조, 무역 활동, 종교적 신념 등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투구는 베오울프와 같은 앵글로색슨 문학 작품에 묘사된 전사들의 모습과도 연결되어, 당시 사회의 영웅적 이상과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8. 대중 문화
1971년에 재구성된 서튼후 투구는 널리 찬사를 받았으며, 그 이후 50년 동안 중세 시대, 고고학, 그리고 잉글랜드를 상징하게 되었다. 버나드 콘웰의 ''겨울의 왕''과 제임스 캠벨의 ''앵글로색슨족''과 같은 소설, 교과서 및 학술 출판물의 표지에 묘사되었으며, 예술가, 영화 제작자 및 디자이너에게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이 투구는 한때 암흑 시대로 알려졌던 시대를 대표하게 되었는데, 서튼후에서 발견된 유물들 덕분에 정교함이 인정받아 현재는 중세 시대로 불리고 있다.
이 투구는 한때 허구라고 여겨졌던 ''베오울프''에 묘사된 전사와 밀실의 시대에 대한 진실성을 부여하며, 로마 이후 브리튼 섬의 앵글로색슨족을 의인화한다. "영국의 투탕카멘"으로 칭송받는 고고학적 발견에서 나온 상징적인 물건으로, 2006년에는 여왕 머리 우표, 2층 버스, 차 한 잔과 함께 잉글랜드의 100대 문화 아이콘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 서튼 후 투구 그림은 1983년 비디오 게임 ''발할라''의 표지와 로딩 화면에 등장했으며, 관련 광고에 prominently 기능했다.
- 투구의 복제품은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글래디에이터'' (2000)에서 검투사들이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사용할 갑옷을 선택할 때 무기고에서 복제품을 볼 수 있으며, ''멀린''에서는 아서의 침실에서 볼 수 있고, ''박물관이 살아있다: 비밀의 무덤'' (2014)에서는 영국 박물관에서, ''베오울프: 쉴드랜드로의 귀환'' (2016)에서는, ''닥터 스트레인지'' (2016)에 나오는 뉴욕 생텀 생토럼, 그리고 ''디텍터리스트'' (2017)의 메카노 구조물로 등장한다.
- 2002년 3월부터 서튼 후 방문객 센터에 매달려 있는 릭 커비의 1.8m 높이의 조각품은 ''서튼 후 투구''이다.
- 2003년 로열 메일에서 발행한 영국 박물관 250주년 기념 우표 세트에는 호아 하카나이아와 수이우테쿠틀리의 가면과 함께 투구가 등장했다.
- 2006년 투구는 문화 미디어 스포츠부가 의뢰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영국 문화 아이콘 100선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 2009년 호시노 유키노부의 만화 그림 시리즈에는 서튼 후 투구와 로제타석과 같은 영국 박물관의 유물이 묘사되었다.
- 2010년에 방영된 ''유물: 박물관의 수호자''의 여섯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참가자들이 서튼 후 선박 매장과 투구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했다.
- 서튼 후 투구의 묘사는 앨범 표지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Warrior (''For Europe Only'', 1983), 마릴리온 (''Grendel/The Web'', 1984), Enslaved (''바이킹리그르 벨디'', 1994), Solstice & Twisted Tower Dire (''Solstice / Twisted Tower Dire'', 1997), 아몬 아마트 (''The Avenger'', 1999), Saxon (''Killing Ground'', 2001), 흐로스하르스그라니 (''Schattenkrieger'', 2003), Isen Torr (''Mighty & Superior'', 2004 [EP], 2008 [싱글]), Forefather (''Steadfast'', 2008; ''커스 오브 더 컬레드'', 2015), Celtachor (''In the Halls of Our Ancient Fathers'', 2010), 그리고 앤션트 라이츠 (''Laguz'', 2015)가 있다.
- * 마릴리온의 가수 피쉬는 동명의 소설과 시 ''베오울프''에서 영감을 얻어, 곡 ''그렌델'' 공연에 투구 복제품을 종종 착용했다.
- 스웨덴의 발효 청어 요리인 에리크 덴 뢰데 브랜드의 수르스트뢰밍은 "그 안에 있는 진미를 예상하여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투구를 보여준다.
9.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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