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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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지는 후조의 신흥왕으로, 349년 석감이 즉위하고 염민이 실권을 장악하자 요익중, 부홍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염민이 국호를 '위'로 바꾸고 황제 자리에 오르자 석지는 황제를 칭하며 대항했다. 이후 염민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 전연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부하 유현에게 살해당하며 후조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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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지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석지 |
| 출생 | 알 수 없음 |
| 사망 | 351년 |
| 재위 기간 | 350년 – 351년 |
| 이전 통치자 | 석감 |
| 후임 통치자 | 없음 |
| 휘 | 석지 |
| 묘호 | 없음 |
| 시호 | 없음 |
| 왕조 | 후조 |
| 가문 | 석씨 |
| 아버지 | 석호 |
| 배우자 | 알 수 없음 |
| 자녀 | 알 수 없음 |
| 통치 | |
| 연호 | 영녕 (350년 – 351년) |
| 기타 | |
| 존호 | 황제 (皇帝) 또는 왕 (王) |
2. 생애
석호(石虎)의 서자로 태어났지만, 아버지 시대의 업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신흥왕(新興王)에 봉해져 양국(襄國)을 지켰다.
349년 석감(石鑒)이 즉위하고 염민(石閔)이 실권을 장악하자 양국에서 요익중, 포홍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350년 1월, 염민은 국호를 '위(衛)'로 바꾸고 청룡(青龍)으로 개원했다. 하지만, 태재 조서와 태위 장거를 비롯한 만 명을 넘는 공경(公卿)들이 이에 반발했고, 많은 이들이 석지에게 귀순했다. 더욱이 석곤은 기주(冀州)로 도망쳤고, 여러 장수들이 각지에서 염민에게 반기를 들었다.
2월, 염민은 석감을 살해하고 석호의 손자 28명을 모두 죽인 뒤,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국호를 '대위(大魏)'로 정하고 영흥(永興)으로 개원했다(염위(冉魏) 건립). 3월, 석지는 석감의 죽음을 알고 양국에서 황제 자리에 올라 영녕으로 개원했다. 석곤을 상국(相國)에 임명하고, 요익중을 우승상(右丞相)·친조왕(親趙王)으로, 요상(姚襄)을 표기장군·예주자사·신창공(新昌公)으로 삼았다.
4월, 석지는 염민 토벌군을 일으켜 석곤에게 10만 명의 병사를 주어 본거지인 업(鄴)을 공략하도록 명했다. 6월, 석곤은 한단까지 진격했고, 유국 또한 번양(繁陽)에서 출진하여 석곤과 합류했다. 하지만, 염위의 위장군 왕태에게 대패하여 만 명 이상의 병사를 잃었고, 유국은 번양으로 철수했다.
8월, 장해도·단근·유국·근돈(靳豚)이 결탁하여 업으로 침공하자, 염위의 행대도독 유군(劉羣)이 이를 맞아 싸웠고, 염민도 정예 8만 명을 이끌고 후방을 지원했다. 양군은 창정(蒼亭)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장해도 등은 대패하여 2만 8천 명의 병사를 잃었다. 음안(陰安)까지 추격당했고, 근돈은 전사했으며 남은 병사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11월, 염민은 10만 명을 이끌고 양국으로 침공했다. 351년 2월, 염민이 양국을 포위한 지 백일이 넘자, 석지는 황제 칭호를 버리고 조왕(趙王)을 칭하면서, 전연(前燕) 황제 모용준에게 전국새를 넘겨주는 대가로 원군을 요청했다. 또한 장춘을 요익중에게 파견하여 원군을 요청했다. 요익중은 아들 요상에게 2만 8천 명의 기병을 주어 구원에 파견했고, 전연에도 출병을 촉구하자, 전연 또한 열관에게 3만 명의 병사를 주어 출격하도록 하고 요상과 합류하게 했다. 기주에 있던 석곤도 군사를 일으켜 석지를 구원하러 갔다. 3월, 요상과 석곤이 양국에 육박하자, 염민은 전군을 동원하여 대치했지만, 열관·요상·석곤은 삼방에서 염민을 공격했으며, 석지는 후방에서 공격하여 염민을 크게 격파했다. 염민은 간신히 업으로 철수했지만, 염민을 따르던 호인(胡人) 율특강(栗特康)은 염윤(冉胤)과 유기(劉奇)를 사로잡아 후조에 항복시켰고, 석지는 이 둘을 처형했다.
2. 1. 초기 생애와 반란
349년 12월, 염민(당시 이름은 석민)과 이농(李農)의 전횡으로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석지는 염민 등을 주살할 것을 내걸고 강(羌)족 추장 요익중과 저(氐)족 추장 부홍 등과 결탁하여 내외에 격문을 날렸다. 염민은 여음왕 석곤(석지의 동생)을 대도독에 임명하고, 태위 장거와 시중 호연성(呼延盛)에게 7만 명의 병사를 주어 두 방향에서 석지를 공격하게 했다.2. 2. 황제 즉위와 대립
350년, 석감(石鑒)이 폐위되고 염민이 염위(冉魏)를 건국하자, 석지는 양국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염민에 대항했다. 6월에는 염민에 반대하는 여러 이민족 세력을 규합하여 공격했으나 크게 패배했고, 10월에는 염민에게 수도를 포위당하는 등 수세에 몰렸다.2. 3. 최후
351년, 석지는 황제 칭호를 버리고 조왕(趙王)을 자칭하며 전연에 구원군을 요청했다. 전국새를 넘겨주는 대가로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실제 전국새는 업에 있었으므로 이는 위조된 것이었다. 또한, 요익중에게도 구원을 요청했다.염민에게 매수된 부하 유현에게 살해당했다. 유현은 351년 4월, 양국으로 귀환하여 석지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을 살해하고 양국을 제압한 뒤, 그 수급을 업으로 보냈다. 이로써 후조는 멸망했다. 염민은 석지의 머리를 길가에서 불태웠다.
3. 가계
3. 1. 부모
태조 무제(석호)3. 2.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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