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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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감은 후조의 황족으로, 석호의 서자였다. 석세, 석준의 통치 기간 동안 요직을 거쳤으며, 석준이 염민(석민)을 제거하려 하자 석민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석민의 반정을 도왔다. 석민은 석준을 살해하고 석감을 황제로 옹립했지만, 실권은 석민이 장악했다. 석감은 석민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석민이 반란 진압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암살을 시도했으나 다시 실패했다. 결국 석민에게 폐위되어 살해되었으며, 그의 재위 기간은 10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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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는 후조 석호의 아들로 석감이 폐위된 후 황제를 칭하며 후조를 이끌었으나 내부 반란으로 살해당해 후조는 멸망하고 염위의 염민과의 전투, 전연에 구원 요청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 후조의 황제 - 석홍
석홍은 후조의 2대 황제로, 석륵 사후 옹립되었지만 실권은 석호에게 있었고 폐위되어 살해당했으며 그의 통치는 후조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 석감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석감 |
| 한자 표기 | 石鑒 |
| 로마자 표기 | Seok Gam |
| 생몰 | |
| 사망 | 350년 |
| 재위 기간 | |
| 재위 | 349년 - 350년 |
| 이전 | 석준 |
| 이후 | 석지 |
| 연호 | |
| 연호 | 태녕(太寧): 349년 청룡(青龍): 350년 |
| 존호 및 시호 | |
| 시호 | 폐제 |
| 기타 정보 | |
| 성씨 | 석(石) |
| 시대 | 후조 |
| 아버지 | 석호 |
2. 생애
석감은 후조의 황제 석호의 아들로 태어나 의양왕(義陽王)에 봉해졌다. 349년 석준이 석민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석민에게 밀고하여 정변을 유발했고, 그 결과 석민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즉위 직후부터 실권은 석민과 이농에게 있었으며, 석감은 이름뿐인 황제였다. 그는 여러 차례 석민을 암살하려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이로 인해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다. 350년 결국 석민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석호의 손자 28명 역시 이때 함께 살해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승계
석감은 후조의 황제 석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333년 8월, 아버지 석호가 승상, 위왕, 대선우가 되면서 여러 아들을 왕으로 봉할 때, 석감은 대왕(代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337년 1월, 석호가 스스로 대조천왕(大趙天王)이라 칭하면서 석감은 의양공(義陽公)으로 강등되었다.339년 8월, 후조의 정토대도독 규안은 동진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석감은 석민, 이농, 장하도, 이토 등과 함께 이 원정에 참여했다. 9월, 후조군은 동진군을 여러 곳에서 격파하고 주성, 석성 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석감은 관중 지역의 통치를 맡았으나, 백성들에게 과도한 노역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민심을 잃었다. 345년, 친구 이송의 권유로 문무 관리들 중 머리카락이 긴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뽑아 관의 끈(冠纓)을 만드는 기행을 저질렀다. 이 사실이 석호에게 알려지자 크게 분노한 석호는 석감을 파면하고 수도 업으로 소환했으며, 이송은 체포되었다. 석감의 후임으로는 석포가 임명되었다. 이후 천왕태자 석선과 우복야 장리 등의 견제로 인해 석감을 비롯한 진공 석도, 연공 석빈, 낙평공 석포 등 여러 공(公)들의 휘하 관리와 병력이 크게 제한되기도 했다.
349년 1월, 석호가 황제로 즉위하자 석감은 의양왕(義陽王)으로 다시 봉해졌다. 같은 해 4월, 석호가 사망하고 이복동생인 석세가 뒤를 이었다. 이때 승상 장재의 권고에 따라 석감은 우승상(右丞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뒤인 5월, 팽성왕 석준이 정변을 일으켜 석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자, 석감은 시중(侍中)과 태보(太傅)에 임명되었다.
2. 2. 석민의 정변과 황제 즉위
349년 11월, 후조의 황제 석준은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던 석민(당시 이름은 석민)을 제거하기 위해 석감을 비롯한 여러 종실 왕들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모의하였다. 석준은 정황태후 앞에서 석민 주살 계획을 논의하며 동의를 구했으나, 정황태후는 석민이 석준의 즉위에 세운 공을 언급하며 반대하였다.하지만 이 자리에서 석민 제거에 동조했던 석감은 회의가 끝나자 환관 양환을 몰래 석민에게 보내 모든 계획을 밀고하였다. 이 밀고를 받은 석민은 즉시 사공 이농, 우위장군 왕기 등과 손을 잡고 반정을 일으켰다. 석민은 장군 소언과 주성에게 병력 3천 명을 주어 궁궐을 장악하고 석준을 체포하도록 했다.
당시 석준은 남대(南臺)에서 부인과 바둑을 두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체포되었다. 자신이 폐위되고 석감이 황제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석준은 "나조차 이렇게 되었는데, 감(석감)이 얼마나 오래가겠는가!"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석준은 곤화전(琨華殿)에서 처형되었으며, 정황태후, 장황후, 황태자 석연, 그리고 맹준, 왕란, 상광록 장비 등 석준의 측근들도 함께 살해되었다.
석준을 제거한 석민은 곧바로 석감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석감은 즉위 후 대사령을 내려 정변의 공로자들을 포상했는데, 석민은 대장군 겸 녹상서사(錄尙書事)에 임명되고 무덕왕(武德王)에 봉해졌으며, 이농은 대사마 겸 녹상서사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후조의 실권은 석민과 이농 두 사람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고, 석감은 이름뿐인 허수아비 황제로 전락하였다.
2. 3. 허수아비 황제와 암살 시도
석준이 석민(石閔)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오히려 살해당하자, 석민은 349년 11월 석감을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석감이 황제가 되었음에도 후조의 실권은 대장군이 된 석민과 대사마(大司馬)가 된 이농(李農)에게 있었다. 석감은 사실상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다.석민과 이농의 전횡에 불안감을 느낀 석감은 349년 12월, 석포, 중서령 이송, 전중장군 장재 등에게 석민 등을 암살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곤화전에서의 야습은 실패로 돌아갔고 궁궐은 큰 혼란에 빠졌다. 석민의 보복을 두려워한 석감은 자신이 시킨 일이 아니라고 발뺌하며, 그날 밤 서중화문에서 암살을 시도했던 이송, 장재, 석포를 살해하여 책임을 떠넘겼다.
한편, 양국(襄國)을 지키던 신흥왕(新興王) 석지(石祗)는 석민과 이농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요익중, 포홍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석민은 석곤, 장거, 호연성 등에게 토벌을 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령군 석성(石成), 시중 석계(石啓), 전 하동군 태수 석휘(石暉) 등이 다시 석민과 이농을 죽이려 모의했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살해당했다.
용양장군(龍驤將軍) 손복도(孫伏都)와 유주(劉銖) 역시 갈족 병사 3천 명을 이끌고 석민 등을 제거하려 했다. 손복도 등은 석감이 있는 중대(中臺)로 올라가 황제의 신병을 확보한 후 석민 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봉양문(鳳陽門)으로 퇴각했다. 석민은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금명문(金明門)을 부수고 중대로 향했다. 죽음을 두려워한 석감은 석민과 이농을 안으로 불러들여 손복도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토벌하라고 명했다. 석민 등은 손복도 군을 격파하고 주모자들을 처형했다. 이 사건 이후 석민은 석감을 어룡관(御龍觀)에 가두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했으며, 음식조차 줄을 매달아 올려보내는 방식으로 제공했다.
석감을 유폐시킨 석민은 수도 업(鄴)에서 한족(漢族)을 선동하여 호족(胡族)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 염민의 호족 학살) 이 과정에서 신분이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20만 명이 넘는 호족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2. 4. 폐위와 죽음
350년 정월, 석민은 자신의 독단으로 국호를 '''위'''(衛)로 바꾸고 자신의 성씨를 이(李)씨로 고쳤다. 또한 대사령을 내려 연호를 청룡(靑龍)으로 개원했다. 그러나 태재 조서, 태위 장거를 비롯한 만 명이 넘는 공경들이 이에 반발하여 이탈했고, 그 대부분은 양국에 있던 석지에게 합류했다. 이외에도 석곤은 기주로, 무군장군 장침은 부구로, 장하도는 석도로, 건의장군 단근은 여양으로, 영남장군 양군은 상벽으로, 유국은 양성으로, 단감은 진류로, 요익중은 섭두로, 포홍은 방두로 각각 근거지를 옮겨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석민에게 반기를 들었다.같은 달, 석곤, 장거, 왕랑이 7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수도 업을 침공했으나, 이민(석민)은 천여 명의 기병으로 맞서 싸워 이들을 크게 격파했다. 이후 이민은 이농과 함께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석민에게 반항하며 석독에 근거지를 둔 장하도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다.
350년 윤정월, 이민은 마침내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 2월, 연금되어 있던 석감은 이민과 이농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업을 되찾으려 했다. 그는 부구에 주둔하던 장침에게 몰래 편지를 보냈으나, 심부름을 맡은 환관이 배신하여 이 사실을 이민에게 알렸다. 보고를 받은 이민과 이농은 즉시 업으로 돌아와 석감을 폐위시키고 살해했다. 석감이 황제로 있었던 기간은 103일에 불과했다. 이와 함께 석호의 손자 28명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3. 가족 관계
4. 평가
석감은 석준이 석민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석민에게 밀고하여 황위에 올랐으나, 실제 권력은 석민과 이농에게 있었다. 석감은 이름뿐인 황제였으며, 사실상 석민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황제가 된 석감은 곧바로 자신을 옹립한 석민을 제거하려 시도했다. 349년 12월, 석포, 이송, 장재에게 석민 암살을 지시했으나 실패했다. 실패가 드러나자 석감은 자신과 무관한 일처럼 행동하며 책임을 회피했고, 오히려 실행범인 이송, 장재, 석포를 살해하여 석민의 의심을 피하려 했다.
이후에도 석감은 석민 제거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양국의 석지가 반란을 일으켜 석민이 토벌을 준비하자, 손복도, 유주 등이 갈족 병사를 동원해 석감을 확보하고 석민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궁지에 몰린 석감은 오히려 석민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손복도 등을 토벌하게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사건 이후 석감은 석민에 의해 어룡관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다.
350년 2월, 석감은 유폐된 상황에서도 석민과 이농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장침에게 밀서를 보내 업 탈환을 시도했으나, 밀사가 배신하여 발각되었다. 결국 석감은 석민에게 폐위되고 살해당했으며, 그의 재위 기간은 103일에 불과했다.
석감의 짧은 치세 동안 후조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석민에 의한 대규모 호족 학살이 자행되었고, 각지에서 석지를 비롯한 반란 세력이 봉기하여 후조는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석감은 실권 없이 석민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후조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력한 황제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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