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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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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준은 모용황의 차남으로, 전연의 황태자를 거쳐 연왕에 즉위한 인물이다. 그는 문무를 겸비하여 부여를 멸망시키고 후조를 공격하는 등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으며, 352년에는 황제에 즉위하여 화북 지역을 통치했다. 모용준은 360년에 사망했으며, 경서와 사적을 널리 배우고 문무를 겸비하여 군략과 정치 모두에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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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용황은 333년부터 348년까지 전연을 통치한 인물로, 형제들과의 내분을 극복하고 전연을 건국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며, 고구려를 공격하고 한화 정책을 통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다가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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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준
기본 정보
이름모용준
칭호왕 (초대 황제)
가문모용
모용 (慕容)
준 (儁)
선영 (宣英)
묘호열조 (烈祖)
시호경소황제 (景昭皇帝, "결단력 있고 능력이 뛰어난")
연호원희 (元璽): 353–357
광수 (光壽): 357–360
생년대흥 2년 (319년)
몰년광수 4년 1월 21일 (360년 2월 23일)
매장지용릉 (龍陵)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재위 기간348년–360년
즉위348년 (연왕)
대관식353년 1월 4일 (황제 즉위)
이전 통치자모용황
계승자모용위
가족 관계
아버지모용황
어머니문명황후
배우자가족혼황후
경덕황후
자녀모용엽, 경회태자
모용위
모용홍
모용충
청하공주

2. 생애

모용준은 319년 모용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337년 모용황이 전연을 건국하고 연왕에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348년 모용황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연왕에 즉위하였다.

349년 동진은 모용준을 사지절(使持節)·시중·대도독·독하북제군사(督河北諸軍事)··평 2(幽·平二州牧)·대장군·대선우·연왕에 임명하여 정식으로 연왕으로 책봉하였다.

같은 해, 후조석호가 죽고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모용준은 후조 정벌을 준비하여 350년에 출정하였다. (지금의 베이징시)를 점령하여 수도를 그곳으로 옮기고 기주를 공격하였다. 당시 후조와 염위전쟁 중이었는데, 모용준은 이 전쟁에 개입하여 많은 이득을 취하였다. 351년에 후조가 멸망하고 352년에 염위도 쇠약해지자, 모용준은 모용각을 파견하여 염위의 황제 염민을 격파·포획하고 뒤이어 염위를 멸망시켰다.

화북 동부 일대를 차지한 모용준은 352년 황제에 즉위하고 동진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후 영토 확장에 주력하여 병주·청주·연주·예주·사주 일대를 점령하고 전진·동진과 대립하였다. 357년에는 으로 천도하였다.

360년 정월,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42세, 재위 기간은 11년이었다.[73] 시호는 경소황제(景昭皇帝), 묘호는 열조, 능호는 용릉으로 정해졌다. 적자 모용위가 황위를 계승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전연 건국

319년, 모용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337년 모용황이 전연을 건국하고 연왕에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젊은 시절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여겨졌다.[3]

역사 기록에 따르면, 모용황은 모용준의 동생 모용바의 총명함에 감탄하여 그를 후계자로 고려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 기록들은 또한 이것이 모용준이 모용바를 질투하고 불안해한 이유라고 전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모용준은 재위 기간 동안 동생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4]

모용준이 군대를 지휘한 첫 번째 역사적 언급은 344년으로, 숙부 모용평과 함께 대를 공격하는 군대를 이끌라는 명을 받았지만, 대의 왕자 탁발십익건이 그의 군대와 교전하지 않아 별다른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5]

346년, 모용황은 모용준에게 부여를 공격하는 군대를 지휘하라고 명했지만, 실제 지휘는 동생 모용각이 맡은 것으로 보인다. 군대는 부여의 수도를 점령하고 국왕 부여 현왕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6]

348년, 모용황이 사망하자 모용준은 그의 뒤를 이어 연왕이 되었다.[7]

다음은 모용준의 초기 생애에 대한 연표이다.

연도사건
319년모용황의 차남으로 출생[8]
335년세자(후계자)로 책봉[9]
336년단부 침공, 대승[10]
337년모용황이 연왕으로 즉위, 모용준은 왕태자에 책봉[11]
341년동진 조정에서 연왕 지위 인정, 모용준은 좌현왕에 임명[12]
343년모용평과 함께 대국 침공 (전투 없음)[5][13]
344년동진 조정에서 사지절·진군장군에 임명[14]
346년모용각 등과 함께 부여 정벌, 부여 멸망[6][15]
348년모용황 사망, 모용준이 연왕 계승[7]


2. 2. 연왕 즉위 및 중원 진출

348년 모용황이 죽자 뒤를 이어 연왕에 즉위하였다.[7] 아버지 모용황은 모용준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지금 중원은 평정되지 않았고, 세무(世務, 이 세상의 일, 여기서는 중화 평정을 의미)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현걸(賢傑, 재주가 뛰어남)한 인물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각(慕容恪)은 지혜와 용기가 모두 훌륭하며, 그 재능은 중책을 감당할 수 있다. 너는 그에게 의지하여 나의 뜻을 이루어라. 또한 양사추(陽士秋, 양무)는 사대부의 품행을 갖추고 고결하고 충성스러우며 정고(貞固)함이 있어, 큰일을 맡길 만한 인물이다. 너는 그를 잘 대우하도록 하라."

349년 1월, 부친의 치세와 마찬가지로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영화 5년을 "원년"[9]으로 칭했다. 모용황은 영화 원년(345년)부터 동진의 연호 사용을 멈추고, 자신의 즉위년을 기점으로 하는 기년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것이 동진과의 종속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왕조에 종속되면서도 독자적인 기년법을 사용했던 춘추 시대 제후들의 고사에 따른 것이다.

349년 4월,[10] 동진 목제는 모용준을 사지절, 시중, 대도독 하북 제군사, 유기병평 사주목,[11] 대장군, 대선우로 임명하고, 연왕에 봉하며, 승제봉배(황제를 대신하여 백관의 임용과 작위 수여를 하는 권한)를 부여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는 모용외・모용황의 고사에 따른 것으로, 모용준이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같은 해, 후조석호가 죽고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모용준은 후조를 정벌하기 위해 준비하여 350년에 출정하였다. (지금의 베이징시)를 점령하여 수도를 그곳으로 옮기고 기주를 공격하였다. 당시 후조와 염위전쟁 중이었는데, 모용준은 이 전쟁에 개입하여 많은 이득을 취하였다. 351년에 후조가 멸망하고 352년에 염위도 쇠약해지자, 모용준은 모용각을 파견하여 염위의 황제 염민을 격파·포획하고 뒤이어 염위를 멸망시켰다.

350년 겨울, 모용준은 다시 원정을 시작했고, 이때 염민은 새로운 국가인 염위를 건국하고 석지 아래의 후조 잔당과 싸우고 있었다. 그는 기주 (冀州, 현대 허베이 중부)의 여러 군을 빠르게 점령하여 석지의 임시 수도인 상국 (襄國, 현대 싱타이, 허베이)에 접근했다. 염민의 공격을 받은 석지는 351년 초 모용준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황제의 옥새(그러나 그는 실제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모용준은 그의 장군 악완을 석지와 그의 장군 요상에게 보내 그들의 연합군은 염민에게 큰 패배를 안겨 염민이 상국을 포위하는 것을 잠시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직후 염민은 석지의 장군 유현(劉顯)을 설득하여 석지를 죽이게 하여 후조를 멸망시켰다.

352년 여름, 모용준과 염민의 군대는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모용준의 주력 부대를 지휘한 모용각은 염민의 보병을 평원으로 유인한 다음, 기병대의 공격으로 그들에게 큰 패배를 안겼다. 전투 중 염민의 말이 죽었고, 그는 떨어져 모용군에게 붙잡혔다. 염민이 모용준에게 끌려갔을 때, 모용준은 "너 같은 하찮은 놈이 감히 황제를 자칭하다니?"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염민은 한족(汉族)인 모용준을 "야심찬 오랑캐 참칭자"라고 비난했다. 분노한 모용준은 염민을 300대나 채찍질하고, 유배했으며, 나중에 참수했다.

모용준은 다음으로 염위의 수도 업 (현대 한단, 허베이)을 공격했다. 염위의 태자 염지, 동태후, 그리고 주요 관료들은 진(晉)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모용준은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진의 봉신이었지만, 진에게 계속 복종할 의사는 없었다. 그러나 진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업의 방어는 곧 뚫렸고, 전연군은 염지와 동태후를 생포하여 염위를 멸망시켰다.

2. 3. 황제 즉위 및 통치

349년, 동진은 모용준을 사지절(使持節)·시중·대도독·독하북제군사(督河北諸軍事)··평 2(幽·平二州牧)·대장군·대선우·연왕에 임명·책봉하여 정식으로 연왕이 되었다. 같은 해, 후조석호가 죽고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모용준은 후조를 정벌하기 위해 준비하여 350년에 출정하였다. (薊, 지금의 북경시)를 점령하여 수도를 그곳으로 옮기고 기주를 공격하였다. 당시 후조와 염위전쟁 중이었는데, 모용준은 이 전쟁에 개입하여 많은 이득을 취하였다. 351년에 후조가 멸망하고 352년에 염위도 쇠약해지자, 모용준은 모용각을 파견하여 염위의 황제 염민을 격파·포획하고 뒤이어 염위를 멸망시켰다.[4]

화북의 동부 일대를 차지한 모용준은 352년황제에 즉위하고, 동진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영토 확장에 주력하여 병주·청주·연주·예주·사주 일대를 점령하고 전진·동진과 대립하였다. 357년에는 으로 천도하였다. 360년 정월에 병사하였다.[4]

모용준 시대에 기록된 봉작·임관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class="wiki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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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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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2년 11월

| 황제 즉위 직전, 백관 설치 및 조정 체제 정비.

  • 태위: 국상 봉혁(封奕) (계속 국정 주관)
  • 시중(侍中): 모용각(慕容恪) (봉혁 보좌)
  • 상서령(尚書令): 좌장사(左長史) 양무(陽騖) (봉혁 보좌)
  •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우사마(右司馬) 황보진(皇甫真)
  • 우복야(右僕射): 전서령(典書令) 장희
  • 중서감(中書監): 송활(宋活) (송황(宋晃))
  • 중서령(中書令): 한항(韓恒)
  • 기타 관원: 공적에 따라 관직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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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2년 11월

| 현토군(玄菟郡) 태수 을일(乙逸)을 상서(尚書)에 임명, 옛 수도 용성(龍城) 정무 위임. 이후 유주자사(幽州刺史)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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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3년

|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郎) 모용수(慕容垂)를 사지절(使持節)·안동장군(安東將軍)·북기주자사(北冀州刺史)로 승진, 상산(常山) 진수.[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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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4년 3월

|

  • 모용평(慕容評)을 진남장군(鎮南將軍), 도독(都督) 진(秦)·옹(雍)·익(益)·량(梁)·강(江)·양(揚)·형(荊)·서(徐)·연(兗)·예(豫) 10주 하남(河南) 제군사(諸軍事)로 임명, 낙하(洛河) 일대 진수.[40]
  • 모용강(慕容強)을 전봉도독(前鋒都督), 형(荊)·서(徐) 2주 연회(縁淮) 제군사(諸軍事)로 임명, 황하(黃河) 남쪽 진주, 국경 방위 강화.[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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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4년 4월

| 일족 봉작:

일족 봉작
직책이름작위
무군장군(撫軍將軍)모용군(慕容軍)상양왕(襄陽王)
좌장군(左將軍)모용표(慕容彪)무창왕(武昌王)
위장군(衛將軍)모용각(慕容恪)태원왕(太原王)
진남장군(鎮南將軍)모용평(慕容評)상용왕(上庸王)
안동장군(安東將軍)모용수(慕容垂)오왕(呉王)
좌현왕(左賢王)모용우(慕容友)범양왕(范陽王)
전봉도독(前鋒都督)모용강(慕容強)낙양왕(洛陽王)
산기상시(散騎常侍)모용려(慕容厲)해주왕(下邳王)
영북장군(寧北將軍)모용도(慕容度)낙랑왕(樂浪王)
동생 산기상시모용의(慕容宜)여강왕(廬江王)
모용환(慕容桓)의도왕(宜都王)
모용준(慕容遵)임하왕(臨賀王)
모용휘(慕容徽)하간왕(河間王)
모용룡(慕容龍)역양왕(歷陽王)
모용납(慕容納)북해왕(北海王)
모용수(慕容秀)난릉왕(蘭陵王)
모용악(慕容嶽)안풍왕(安豊王)
모용덕(慕容徳)양공(梁公)
모용묵(慕容黙)시안공(始安公)
모용루(慕容僂)남강공(南康公)
아들모용장(慕容臧)낙안왕(樂安王)
모용량(慕容亮)발해왕(勃海王)
모용온(慕容溫)대방왕(帶方王)
모용섭(慕容渉)어양왕(漁陽王)
모용위(慕容暐)중산왕(中山王)



|-

| 354년 4월

|


  • 대사마(大司馬)·시중·대도독(大都督)·녹상서사(録尚書事): 모용각
  • 사도(司徒)·표기장군(驃騎將軍): 모용평
  • 사공(司空)·수상서령(守尚書令): 상서령 양무[45]
  • 이후 봉혁, 모용각, 모용평, 양무 4인이 조정 정치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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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4년 4월

| 오왕 모용수를 북기주자사(北冀州刺史)에서 기주자사(冀州刺史)로 변경, 상산에서 신도(信都)로 진수.[46] 이후 시중·녹류대상서사(録留台尚書事)로 개임, 용성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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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분명

| 모용수를 정남장군(征南將軍)·형연(荊兗) 2주 목(牧)에 임명. 모용수는 양(梁)·초(楚) 남쪽까지 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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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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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래군 태수(太守): 상서좌승(尚書左丞) 국은(鞠殷)
  • 제군(斉郡) 태수: 장무군(章武郡) 태수 선우량(鮮于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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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7년 1월

|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유주자사 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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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7년 12월

| 동이교위(東夷校尉)·평주자사(平州刺史): 오왕 모용수, 요동(遼東)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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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9년 2월

|

  • 제북왕(濟北王): 아들 모용홍(慕容泓)
  • 중산왕: 모용충(慕容沖)
  • 기타 동생과 조카: 차등을 두어 왕공(王公)에 봉함

|}

353년 4월 6일, 모용준은 부인 가즌 공주를 황후로, 그의 후계자 모용예를 황태자로 봉했다.[4]

354년, 모용준은 삼촌, 형제, 아들들을 왕으로 봉했다.

355년, 모용준은 사촌 단감(段龕)이 황제를 칭하는 것을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자 분노하여 모용각과 양무를 보냈다. 단감은 현재의 산둥성을 장악하고 명목상 진(晉)의 제후(제공, Duke of Qi)였다. 356년, 단감의 수도 광고(廣固, 현재의 칭저우)가 튼튼한 요새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용각은 이를 포위했고, 단감은 식량이 떨어지자 항복했다. 모용준은 처음에는 단감을 살려두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357년에 단감을 처형했다.

356년에 모용준의 황태자 모용예가 죽었고, 357년에 모용준은 막내 아들 모용위를 황태자로 봉했다.

357년에 모용준은 수도를 계성에서 업으로 옮겼다.

358년, 모용준은 대규모 징집을 시작하여 각 가정이 한 가구를 제외하고 군대에 복무할 자격이 있는 남자를 보내도록 하여 전진과 진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유귀(劉貴)의 청원 후, 징집 계획을 축소하여 각 가구에서 군대에 복무할 자격이 있는 남자가 다섯 명일 경우 세 명을 군대에 입대하도록 했다.

같은 해, 모용준과 모용수의 앙심이 다시 불거졌다. 모용수의 부인 단 공주는 그들의 씨족이 과거 요서공(Liaoxi)의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모용씨와 동등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모용준의 부인 가즌 황후를 존경하지 않았다. 환관 섭호(涅浩)는 황제와 황후의 뜻이라고 믿고 단 공주와 모용수의 조수 고필(高弼)을 마술 혐의로 거짓 고발하여 모용수를 사건에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고문에도 불구하고 단 공주와 고필은 인정하지 않았고, 모용수는 연루되는 것을 피했지만, 단 공주는 결국 감옥에서 죽었다. 모용수는 사실상 외딴 평주(平州, 현재의 동부 랴오닝성)의 태수로 유배되었다.

359년, 제갈유(諸葛攸)와 사만(謝萬) 휘하의 진(晉) 군대가 전연을 공격했지만, 전연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 승리로 전연은 점차 황하 남쪽의 현재 허난성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360년 초, 모용준은 병에 걸렸고, 모용각에게 전진 및 진과의 경쟁을 고려하여 왕위를 넘겨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모용각은 성인이자 매우 유능했기 때문에 10세의 모용위보다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모용각은 이를 거절했고, 자신의 능력이 제국을 통치할 수 있다면 어린 황제를 돕는 데에도 적합하다고 모용준을 설득했다. 그는 또한 모용수를 수도로 소환했다. 그 후 병세가 약간 호전되었고, 업에서 징집된 병사들을 모아 모용각과 양무에게 진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려 했지만, 곧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는 모용각, 양무, 모용평, 무여근(慕輿根)을 소환하여 황태자를 그들에게 위탁했다. 그는 곧 사망했고 모용위가 뒤를 이었다.

2. 4. 죽음

359년 12월, 모용준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대사마이자 태원왕인 모용각을 불러 자신의 병이 낫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그는 두 적(동진, 전진)의 위협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고, 모용위가 어려 가문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없을 것이라 걱정했다. 그래서 고대 의 선공을 본받아, 사직을 모용각에게 맡기려 한다고 말했다.[72] 그러나 모용각은 태자가 비록 어리지만 총명하며, 정통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다. 모용준은 형제간에 겉치레를 할 필요가 있냐며 노했지만, 모용각은 자신이 어린 군주를 보좌할 수 있다고 간청하며, 후계자가 되기보다는 보좌하는 쪽으로 가기를 원했다. 이에 모용준은 매우 기뻐하며 주공처럼 일을 처리해달라 부탁하고, 이적을 잘 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72]

같은 달, 모용준은 동생 모용수를 요동에서 업으로 귀환시켰다. 360년 1월, 모용준은 병세가 조금 회복되자 업에서 대대적으로 열병을 거행하고, 모용각과 양무에게 정벌을 명하려 했다. 그러나 곧 병세가 악화되어 중단되었다. 모용준은 죽음을 깨닫고, 모용각, 양무, 모용평, 모여근 등을 불러 보정(輔政)을 맡기는 유조를 남기고, 응복전에서 붕어했다. 향년 42세[72], 재위 기간은 11년[73]이었다. 시호는 경소황제(景昭皇帝), 묘호는 열조, 능호는 용릉으로 정해졌다. 적자 모용위가 황위를 계승했다.

3. 가계

아버지문명황제 모용황
어머니단왕후
정실가족혼황후
후궁모용수후연 건국 후 경덕황후(景德皇后)로 추존한 단소의
장남헌회태자 모용엽(慕容曄) - 는 경선(景先). 356년 사망.
차남낙안왕 모용함 → 모용장(慕容臧) - 모용위의 서형
3남모용위 - 태자 책봉, 훗날 황제 즉위
4남발해왕 모용량 - 는 영흥(永興). 370년 숙부 의도왕 모용환에게 살해당함.
5남대방왕 → 낙랑도왕 모용온 - 384년 후연에서 낙랑왕에 봉해졌으나, 389년 적료부장 고제(故堤)에게 암살당함.
6남어양왕 모용섭
7남제북왕 모용홍 - 훗날 서연군주
8남중산왕 → 위제 모용충 - 훗날 서연군주
아들정양왕 모용연
청하공주 모용씨 - 모용충의 누이. 370년 전연을 멸망시킨 부견이 황비로 맞아들임.



헌회태자와 중산왕, 낙안왕, 어양왕은 353년에, 제북왕중산왕359년에 봉해졌다. 356년 태자 모용엽이 사망하면서 중산왕 모용위가 태자가 되었다. 정양왕 모용연은 《자치통감》에만 보이며, 봉작 시기는 알 수 없고 모용준의 아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387년경, 서연황제 모용영은 자신의 치하에 있던 모용준의 자손들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전부 몰살시켰다.

4. 평가 및 영향

모용준은 경서와 사서를 널리 배우고 문무를 겸비하여 군략과 정치 모두에 뛰어났으며, 행동에는 기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를 좋아했고, 그 소재는 기물이나 차실에까지 이르렀으며, 모두 권계(권선징악)를 행하는 것이라고 하여 칭찬을 받았다.[74]

즉위 후 만년까지 강론을 싫어하는 일이 없었고, 정무의 틈을 내어 측근과 문학 서적의 해석에 대해 논의를 나누었으며, 40여 편을 저술했다고 한다. 성격은 엄중했으며, 행동을 신중하게 하고 예의범절을 준수했다. 복장을 소홀히 하고 조정에 임하는 일은 없었고, 사적인 술자리에서도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군령을 항상 엄격하게 했기 때문에, 제장들이 약탈 등을 범하여 군율을 어기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74]

「진서」, 「십육국춘추」에는 당시 전연에 관한, 진실인지 의심스러운 서상(瑞祥)과 괴이담이 몇 가지 기록되어 있다.[74]


  • 모용준이 태어나기 전, 조부 모용외는 "내가 복을 쌓고 어짊을 더해 온 것으로, 자손이 중원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는데, 과연 모용준의 시대에 현실이 되었다. 또한 그가 태어났을 때 모용외는 "이 아이의 골상은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다. 우리 집안이 이런 아이를 얻을 수 있었는가"라며 기뻐했다고 한다.[74]
  • 어머니 단씨(段氏)는 임신 13개월 만에 모용준을 낳았다고 하며, 출산할 때 신광(神光)이 발현되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십육국춘추』에 기록되어 있다.[74]
  • 어느 날 밤, 모용준은 석호에게 팔을 물어뜯기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나 석호를 미워하며 묘를 파헤치도록 명령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백 금(金)의 현상금을 걸자, 업에 사는 이토(李菟)라는 여성이 동원 아래에 묻혀 있다고 밀고했다.[74] 모용준은 그곳을 파내게 했고, 수맥을 세 번 찾은 끝에 관을 발견했지만, 시체는 썩지 않았다고 한다. 모용준은 시체를 밟으며 "겨우 죽은 호랑이가 어찌 살아있는 천자의 꿈에 나타났는가!"라고 욕했다. 어사중위 양약(陽約)에게 명하여 잔혹한 죄를 열거하게 한 뒤, 채찍질한 후 장하(漳河)에 던져 버리게 했다. 하지만 시체는 다리 기둥에 걸려 흘러가지 않았다고 한다. 전연 멸망 후, 전진의 재상 왕맹은 이 이야기를 듣고 이토를 주살하고, 석호의 유해를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74]
  • 영화 8년(352년) 5월, 제비가 계성 정양전(正陽殿) 서쪽의 초(椒)에 둥지를 틀고 세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에 곧게 솟아오른 털이 보였다고 보고되었다. 같은 시기에 범성(凡城)에서는 오색 무늬가 있는 이조(異鳥)가 헌상되었다. 모용준은 여러 신하들에게 "이는 무슨 상서(祥, 좋은 징조)인가?"라고 묻자, "제비는 연조(燕鳥)를 말하며, 머리에 털 갓을 가지고 있는 것은 대연(大燕)이 융성할 것을 말하고, 하늘에 통하는 장부(章甫, 은나라 시대의 관)를 쓰는 것을 가리킵니다. 정양(正陽)의 서초(西椒)에 둥지를 튼 것은 지존(황제)이 임선(臨軒)하여 만국을 정벌하는 징조입니다. 세 자(三子)라는 것은 삼대(하・)에 응하고 있는 증험(징표)입니다. 신조(神鳥)의 오색(五色)은, 성조(聖朝)가 오행의 부명(符命)을 이어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라고 대답했다. 모용준은 이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74]
  • 조부 모용외는 "자백(赭白)"이라는 준마를 타고 다녔으며, 사후에는 모용황에게 계승되었다. 후조의 석호가 극성을 습격했을 때, 모용황은 도망치려고 자백을 타려 했다. 그러나 자백은 울부짖으며 발로 차고 물려고 하여,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모용황은 "이 말은 선조(모용외의 시대)로부터 평범한 말이 아니라고 일컬어졌으며, 나 또한 항상 이것에 의지하여 난을 벗어났다. 지금 타지 않으려는 것은 선군(모용외)의 뜻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도망을 중단했다. 석호가 극성 공략을 포기하고 군대를 철수시키자, 모용황은 이 말에게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모용황 사후 모용준이 물려받았지만, 49세가 되어서도 민첩함은 쇠퇴하지 않았다. 모용준은 자백을 "포씨총(鮑氏驄, 전한의 포선・포영・포욱의 삼대에 걸쳐 사용된 말)"에 필적한다고 생각하여, 구리로 상을 만들게 했다. 스스로 동상 곁에 말의 공적을 칭찬하는 전륵(금속에 새겨 새기는 것)을 하고, 계성 동액문(東掖門)에 설치하기로 했다. 원새 5년(356년), 상은 완성되었지만, 자백 또한 같은 해에 죽었다고 한다.[74]
  • 염민을 처형했을 때, 억형산(遏陘山)에서는 주변 7리에서 초목이 말라 죽고, 메뚜기 피해가 발생했다. 5월임에도 강우가 없어 가뭄이 12월까지 이어졌다. 모용준은 염민의 저주가 아닌가 두려워, 사자를 파견하여 염민의 제사를 거행하고, 무도천왕(武悼天王)으로 시호했다. 그러자, 곧 대설이 내렸다고 한다.[74]
  • 후조의 석호는 화산에 사람을 보내 탐색하게 하여, 옥판(玉版)을 얻었다. "세신유(歲申酉, 348년부터 349년)에 있어서, 끊이지 않는 것은 실과 같으니. 세임자(歲壬子, 352년)에 있어서, 진인(真人)이 나타나리라"라고 새겨져 있었다. 원새 원년(352년)에 모용준이 황제에 즉위하자, 옥판의 이야기를 알고 있던 전연의 사람들은 진인이란 것이 모용준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74]
  • 원새 5년(356년) 3월, 상산사(常山寺) 왕모사(王母祠) 앞 큰 나무가 뿌리에서 쓰러졌고, 뿌리 아래에서 70개의 벽(璧)과 73개의 규(珪)가 발견되었다. 광색(光色)에는 불가사의한 정채(精彩)가 있어 평범하지 않은 보옥이었다. 모용준은 산신(嶽神)의 명으로 여기고, 상서랑(尚書郎) 단근(段勤)을 파견하여 태뢰(소・양・돼지 등의 제물)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제사를 지낼 때마다 호랑이가 사당 곁을 왕래했지만, 온순하고 사람에게 길들여져 물건을 해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74]
  • 원새 6년(357년) 5월, 요서에서 검은 토끼가 잡혔다고 한다.[74]
  • 모용준이 죽기 직전, 달이 묘수(昴宿)에 있고 태백(금성)을 범했다(접근하는 것)고 한다. 점술가는 "군주가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조(업) 땅에는 병사가 있을 것이다"라고도 말했다고 한다.[74]


부친 모용황은 모용달을 어릴 때부터 총애하여, 모용준 대신 세자로 삼으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모용준은 마음이 편치 않았고, 차츰 모용달을 미워하게 되었다. 부친의 뒤를 이은 후에도 모용달을 좋게 여기지 않았고,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던 일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중원 공략에 즈음하여 모용달에게 주력군 일각을 위임했으며, 그 후에도 자주 중요한 전역에 모용달을 기용했다. 죽음을 깨달았을 때 요동에서 모용달을 불러들인 것을 보면, 배척하려 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74]

  • 원희 3년(352년) 11월, 모용준이 황제 자리에 오르자 모용달은 급사황문시랑에 임명되었지만, 황제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칙명을 전달하는 문관직이었으며, 군사상의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 1년 동안 모용달은 정벌 임무를 받지 못했지만, 위장군 모용각(모용달의 형) · 무군장군 모용군(모용황의 동생) · 좌장군 모용표(모용황의 동생)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모용달에게 명세의 재능(세상에 널리 알려진 재능)이 있다고 호소하며 더 큰 임무를 맡길 것을 권했다. 원희 3년(353년) 12월, 모용준은 요청을 받아들여 모용달을 사지절, 안동장군, 북기주 자사로 승진시키고, 상산 방위를 명했다.[74]
  • 모용달(당시 이름은 모용패)이 오왕에 봉해졌을 때, 모용준은 이름을 "'''패'''"에서 "'''𡙇'''"로 고치게 했다. 극결(춘추 시대 진의 정치가)을 흠모하여 그 이름을 주었다고("'''𡙇'''"와 "'''缺'''"은 같은 글자)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모용달을 헐뜯고 조롱할 목적이었다. 모용달은 젊은 시절 수렵을 취미로 삼았는데, 사냥 중 낙마하여 이를 부러뜨리는 부상을 입었다. 모용준은 이가 빠진 것을 조롱하여 "'''𡙇'''"로 개명하게 한 것이다("'''𡙇'''"는 "'''欠'''"의 이체자). 그 후, "'''𡙇'''"라는 글자가 참언(예언서)에 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𡙇'''"에서 의 "'''夬'''"를 제거하여 "'''垂'''"로 개명하게 했다.[74]
  • 원희 3년(354년) 4월경, 모용달을 시중, 록류대상서사에 임명하여 구도인 용성을 진수하게 했지만, 모용달이 동북(요서, 요동 일대) 백성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자, 모용준은 이를 듣고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였다.[74]
  • 모용달의 첫 번째 정실 부인 단씨(단말파의 딸)는 고귀한 출신임을 자처하며 모용준의 황후 가족혼씨를 존경하려 하지 않았고, 가족혼씨로부터 크게 미움을 받았다. 광수 2년(358년), 가족혼씨는 중상시 열호에게 명하여, 단씨가 전서령 고필과 결탁하여 주술을 행했다는 거짓 죄를 씌워 단씨와 고필을 체포하게 했다. 단씨에게 고문을 수반한 혹독한 신문을 가했고, 모용달에게도 저주의 거짓 자백을 하도록 했다. 단씨는 옥중에서 사망했지만, 끝까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용달은 죄를 면할 수 있었다. 모용준은 모용달을 평주 자사로 임명하고 요동으로 출진하게 했다고 한다.[74]
  • 영화 5년(349년) 1월, 모용준은 즉위를 기념하여 28자루의 칼을 만들게 하고, 28장이라고 이름 짓고 예서로 명문을 새겼다.[74]
  • 351년 5월, 광의장군 · 민산공(성명 불상)이 황지를 사용하여 상소를 올리자, 모용준은 "내 이름은 특별한 것이 아닌데, 어찌 이런 것이 적절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이후 상소 시에는 백지만 사용하도록 명령했다.[76]
  • 영화 7년(351년), 모용준이 근교에서 관병을 실시했을 때, 길가에서 감당을 발견했지만, 수행원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모용준은 탄식하며 "이곳은 시에서 말하는 감당의 길(주나라 재상 소공 석이 감당나무 아래에서 백성의 소송을 듣고 공정하게 재단했기 때문에 백성이 소공의 덕을 사모하여 감당의 시를 지었다는 고사)이로다. 감(甘)은 맛의 으뜸이며, 목(木)은 봄의 행이다. 오덕에서는 인(仁)에 속하고, 오행에서는 토(土)를 주로 한다. 시생(만물을 기르는 것)으로써 봄을 삼고, 양물(만물을 기르는 것)으로써 맛을 삼는다. 색은 적색이며, 바로 중토에서의 혁혁한 경사라 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국가의 성함은, 이것이 그 징표이로다. 전해지길 '부(賦)를 잘 짓는 자는 승고(昇高)하여, 이것으로 대부(大夫)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군사(郡司)도 또한 각각 그 뜻을 글로 쓰고, 내가 그것을 보리라"고 말했다. 안팎의 군신에게 명하여, 감당의 송(頌)을 읊게 했다.[74]
  • 원새 2년(353년) 2월, 모용준이 제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신들이 "대연은 명을 받아 엽광기흑정의 군(오방상제 중 한 명인 흑제의 일)을 받았으니, 그 운력이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금행(진)을 대신하여 천하를 장악하라는 것입니다(오행사상에 따르면, 금은 물을 낳는다. 진은 금행이며, 흑제는 수행에 해당한다). 이에, 여름의 역법을 채택하고, 주의 면관을 착용하며, 기치는 검은색을 숭상하고, 제사에 사용하는 희생물은 현흑(짙은 검정)을 존중해야 합니다"라고 권하자, 모용준은 이를 따랐다. 전연의 오덕(오행사상)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군신들에게 논의하게 했지만, 크게 분규가 일었다. 모용준은 병으로 용성에 머물던 자의참군 한항을 소집하여 결정하려 했다. 한항이 도착하기 전, 군신들의 논의는 연이 진을 이어받아 수덕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항은 모용준에게 "조가 중원에 있었던 것은, 인사가 아닌 천명입니다. 하늘이 준 것을 사람이 빼앗는 것은, 신은 은밀히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조의 존재를 부정하고 진으로부터 직접 계승하려는 것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대연의 왕업은 진에서 시작되었지만, ''에 따르면 진은 청룡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수명(受命)한 초기에, 도성에 용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용은 목덕이니, 이것이 바로 유계의 부(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과의 계약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호소했다. 모용준은 한 번 결정한 것을 고치는 것에 난색을 표했지만, 이내 한항의 말을 따라, 연 왕조의 오행은 목덕으로 정했다.[74]
  • 광수 2년(358년) 12월, 전연에서는 병력 징발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관리는 각 개인이 각각 사자를 파견했기 때문에, 도로는 혼잡해졌고, 군현은 고통을 받았다. 태위 · 영중서감 봉혁은 모용준에게 "이후, 군기가 엄하지 않은데 함부로 사자를 보내서는 안 됩니다. 부역과 징발은 모두 주군의 책임으로 해야 하며, 군사(관료)가, 외지에서 파견하고 있는 자들은, 일체를 귀환시켜야 합니다"라고 간언하자, 모용준은 이를 따랐다.[74]
  • 광수 3년(359년) 2월, 모용준은 군신들을 업의 포지에 모아 주연을 열었다. 연회가 무르익자, 부시를 읊거나 경서의 논의가 행해졌다. 태자 진(주의 영왕의 태자였으나 요절했다. 그의 죽음은 주 왕조가 어지러워지는 요인이 되었다)에 대한 화제가 나오자, 모용준은 눈물을 흘리며 "옛날, 위무(조조)는 창서(조충의 자)를 추통했고, 손권은 등(손등)을 애도했다. 나는 늘, 이 두 주군이 아들을 사랑하는 나머지 기이하다고 칭찬받는 것에, 대아로서의 체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엽(장남 모용엽)을 잃은 이래, 내 수염과 머리카락에는 흰 것이 섞이게 되었고, 이에 이르러 비로소 두 주군의 심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경들은 엽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지금은 이를 애도하고, 장래에 대한 불안을 남기지 않도록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적이 "헌회(모용엽의 시호)가 동궁에 있을 때, 이 적은 중서자(태자를 보살피는 직책)를 맡고 있었고, 감히 근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성질이나 지업에 대해서는 이 적이 실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적, 도를 듣는 데 전혀 부족한 점이 없고, 유일한 성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선 태자는 대덕을 여덟 가지 가지고 있었으며, 아직 부족한 곳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모용준은 "경의 말이 조금 지나친 것처럼 보이는데, 만약 그렇다면 시험 삼아 말해 보라"고 말했다. 이적은 "지효는 하늘로부터 받들었고, 성품은 도에 적합했습니다. 이것이 하나입니다. 총명하고 혜지하며, 기지는 흐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둘입니다. 침착하고 강개하며, 결단력에도 풍부하고, 그 이치에 어두운 곳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셋입니다. 아첨을 미워하고, 사리에 밝으며, 직언을 아름답게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넷입니다. 학문을 좋아하고 현인을 사랑하며, 아래에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섯입니다. 영웅적인 자태는 옛것보다 뛰어나고, 예업은 시대를 초월했습니다. 이것이 여섯입니다. 허심하고 공손하며, 스승을 존경하고 도를 중시했습니다. 이것이 일곱입니다. 재물을 중시하지 않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며, 백성의 고통에 근휼했습니다. 이것이 여덟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모용준은 눈물을 흘리며 "경의 칭찬에는 지나친 부분이 있지만, 확실히 이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나는 죽어도 근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당우를 추종할 수 없다. 그래서, 천하를 다스릴 유덕한 자에게 양위하고, 가까이는 삼왕을 본받아 세상에 전수하려고 한다. 경무(모용위의 자)는 어린아이이며, 그 기예에 눈에 띄는 점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이적은 "황태자는 천성이 기윽하고, 그 성경은 해가 솟아오르는 듯하며, 팔덕은 조용하지만 들리고 있습니다만, 두 가지 부족함은 아직 보완되지 않았습니다. 유전을 좋아하고, 사죽(음악)에 마음을 빼앗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안타깝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모용준은 곁에서 시중을 들던 모용위를 돌아보며 "백양의 말은, 약석의 은혜(약이나 돌침처럼 도움이 되는 것)이다. 너는 이것을 마음에 새겨두도록 해라"라고 훈계했다. 모용위는 이적의 발언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후에 모용위가 즉위했을 때 이적이 실각하는 요인이 되었다.[74]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2010년부터 2011년까지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배우 정욱이 모용준 역을 맡았다.[4]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Zizhi Tongjian
[3] 서적 Jin Shu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十六国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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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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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서적 十六国春秋
[72] 서적 晋書, 十六国春秋
[73] 서적 晋書, 十六国春秋
[74] 서적 水経注
[75] 문서 東明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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