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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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염위는 350년 염민이 후조의 정권을 장악하고 건국한 국가이다. 염민은 후조의 황제 석감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 염위는 업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후조의 석지와 대립했다. 염민은 호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351년 후조를 멸망시켰으나 전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국력이 약화되었다. 352년 전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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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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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국명 | 위 (魏) |
다른 이름 | 염위 (冉魏) |
유형 | 제국 |
존속 기간 | 350년 ~ 352년 |
수도 | 업 |
언어 | |
역사 | |
건국 | 350년 |
멸망 | 352년 9월 8일 |
주요 사건 | 염민이 전연에 의해 포획됨 (352년 5월 17일)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지도자 | 염민 |
재위 기간 | 350년 ~ 352년 |
직책 | 황제 |
대표 | 염지 |
재위 기간 | 352년 |
직책 | 태자 |
통화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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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국가 | |
계승 국가 | 전연 |
이전 국가 | 후조 |
현재 국가 | 중국 |
2. 역사
349년 후조(後趙)의 무장 염민(冉閔)은 후조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350년 윤정월, 염민은 후조의 황제 석감(石鑒)을 폐위하고 염위를 건국하였다. 염위의 세력은 수도 업(鄴) 인근에 불과하였으며, 양국(襄國)에 수도를 둔 후조의 황제 석지(石祗)와 대립하였다. 351년 석지를 암살하여 후조를 멸망시켰으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352년 양국을 함락하였으나 군대의 보급도 부족하게 되자, 염민은 양국 인근에서 군량을 조달하였다. 이를 틈타 전연(前燕)이 염민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체포하였다.[2]
염민이 체포된 후 살해되자 태자 염지(冉智)가 업에서 농성하였다. 염지는 동진(東晉)에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전국새(傳國璽, 옥새)를 보냈으나, 부하의 배반으로 업이 함락되고 포로가 되었다. 염위는 멸망하였으며, 염지는 354년에 처형되었다.[2]
2. 1. 건국 배경
후조의 창시자인 석륵에게 붙잡힌 한족인 염첨의 아들 염민은, 아버지 염첨(冉瞻)이 석륵에게 귀부하면서 석륵의 양손자가 되었다. 석호(石虎)의 치세에 염민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후조의 주요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349년 석호가 죽은 후, 석민은 새로운 황제인 석세를 몰아내기 위해 음모를 꾸민 많은 장군들 중 한 명이었다. 석민은 그를 지지하는 대가로 숙부인 석준으로부터 태자 자리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석세가 폐위된 후, 석준은 다른 조카를 태자로 임명함으로써 약속을 어겼다.[1]석준이 석민을 죽이려 하자, 석민은 관료 이농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석준을 몰아내고 숙부 석감을 예(鄴)의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이 시점에서 후조는 붕괴 직전에 놓여 반란이 일어나고 주변 국가들이 혼란을 틈타 이득을 보려 했다.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를 겪은 후 석민은 “호(胡)”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한족들에게 결족 또는 “오랑캐”를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이로 인해 20만 명의 사람들(잘못 식별된 한족 포함)이 살해되었다.[2]
350년, "조(趙) 이후에는 이(李)가 온다"는 예언에 따라, 그는 국호를 위(衞)로 바꾸고 석씨 가문에게 성을 이(李)로 바꾸도록 강요했다. 많은 조나라 장군과 총독들은 석민의 권위에 따르기를 거부했으며, 일부는 상국(襄國, 현재 허베이성 싱타이)에서 왕자 석지를 중심으로 뭉쳤다. 또 한 번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석민은 석감과 그의 가족들을 예에서 학살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농에게 왕위를 제안했지만, 신하들의 간청에 따라 스스로 위(魏)의 황제를 칭했다.[3]
2. 2. 후조와의 전쟁
350년 윤정월, 염민은 후조의 황제 석감(石鑒)을 폐위하고 염위를 건국했으나, 양국(襄國)에 수도를 둔 후조의 황제 석지(石祗)와 치열하게 대립했다.[2] 351년에는 석지를 암살하여 후조를 멸망시켰으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2]350년 1월, 염민은 국호를 "위"로 바꾸고 자신의 성을 "이"로 고쳤으나, 많은 백관들이 반발했다. 같은 달, 석지 측으로 돌아선 석곤, 장거, 왕랑이 업으로 침공했으나 격퇴했다. 2월, 석감은 염민 등이 부재한 틈을 타 업을 탈환하려다 발각되어 살해되었고, 석호의 손자 28명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염민은 사도신종 등의 권유로 황제 자리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위'''로 정했다. 3월, 염민은 성을 "염"으로 되돌리고, 어머니 왕씨를 황태후, 아내 동씨를 황후, 아들 염지를 황태자로 삼았다. 석지는 염민에 대항하여 상국에서 제위에 즉위했고, 많은 호인들이 석지에게 호응했다.
4월, 염민은 이농 등 측근들을 숙청하고, 동진에 사자를 보내 함께 후조를 토벌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같은 달, 석지는 염민 토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6월에는 석곤이 한단까지 진군했다. 염민은 위장군 왕태를 보내 이들을 격파했다.
8월, 장하도, 단근, 유국, 근돈이 연합하여 업으로 침공했으나, 염민은 이들을 격파하고 근돈의 수급을 베었다. 염민의 병사는 30만 명을 넘어 그 위세가 대단했으며, 국내는 안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인 관료와 명가를 포섭하는 데 힘썼음에도 불구하고, 후조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거나 전연과 통하는 자들도 있었다.[4]
11월, 염민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상국을 포위했다. 351년 2월, 석지는 전연 황제 모용준과 요익중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3월, 요상, 석곤, 열관이 연합하여 삼면에서 공격해오자 염민은 대패하고 업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염위는 많은 인재를 잃었다.
이후 도적들이 봉기하고 기근이 발생하여 백성들은 서로 잡아먹을 정도였다. 이민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혼란과 기근, 역병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중원은 대혼란에 빠져 인구가 급감하고 토지가 황폐해졌다.
같은 달, 석지의 장군 유현이 업으로 침공했으나, 염민은 이를 격퇴하고 유현을 추격했다. 유현은 석지를 살해하는 대신 목숨을 구걸했고, 염민은 이를 받아들였다. 4월, 유현은 석지를 살해하고 상국을 제압했고, 염민은 유현을 상대장군 등에 임명했다.
2. 3. 전연과의 전쟁 및 멸망
351년 석지를 암살하여 후조를 멸망시키고, 352년 양국을 함락하였으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군대의 보급도 부족하였다. 이에 염민은 양국 인근에서 군량을 조달하였다. 이를 틈타 전연이 염민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체포하였다.[2]염민이 체포된 후 살해되자 태자 염지(冉智)가 업에서 농성하였다. 염지는 동진의 구원군을 청하기 위해 전국새(傳國璽, 옥새)를 동진에 보냈으나 곧 부하의 배반으로 업이 함락되고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염위는 멸망하였으며, 염지는 354년에 처형되었다.[2]
염민은 모용각이 이끄는 군대와 허베이성동후방 향에 위치한 롄타이(廉台)에서 전투를 벌였다. 염민은 초반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그의 군대는 모용각의 기병에 압도당했다. 그는 말을 타고 도주하려 했지만 체포되어 계로 보내져 처형되었다.[2]
염민의 아들 염지는 예성을 포위 당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곧 기근이 발생하여 성내에서 광범위한 식인 풍습이 일어났다. 동진의 증원군은 포위를 풀지 못했고, 결국 성의 방어군은 전연 군대를 위해 성문을 열었다. 염지는 계로 보내져 처음에는 좋은 대우를 받았고 제후의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354년에 그는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2]
351년 2월, 백여 일에 걸쳐 상국(襄国) 포위가 계속되자 석지는 크게 두려워 황제 칭호를 버리고 조왕을 칭하고, 전연 황제 모용준과 요익중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요익중은 아들 요상에게 2만 8천 명의 기병을 주어 구원하게 하고, 전연은 어난장군 열관에게 3만 명의 군사를 주어 요상과 합류하게 했다. 또한, 기주에 있던 석곤도 군사를 일으켜 석지를 구원하러 갔다. 이로 인해, 세 방향에서 정예병이 집결하여 그 수가 10만을 넘었다.
3월, 요상과 석곤이 상국에 육박하자 염민은 차기장군 호목에게 요상을, 장군 손위에게 석곤을 요격하게 했으나, 양 군은 모두 패했다. 이에, 염민은 스스로 출진하여 전군을 이끌고 요상과 석곤과 대치했다. 이때, 열관 또한 염위군에서 불과 수 리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있었고, 요상, 석곤과 함께 삼면에서 공격해왔으며, 더불어 석지가 후방에서 공격했다. 이로 인해 염민은 대패를 겪었고, 10여 기의 호위를 받으며 간신히 업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은 10만 명에 달했고, 염위는 유망한 인재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잃었다고 한다.
352년 4월, 모용각은 염위 토벌을 위해 군을 일으키자, 양군은 위창(魏昌)의 렴대(廉台)에서 격돌했다. 염민은 전연군과 10차례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했다. 모용각은 패배한 척하며 군을 물리고, 염민을 평지로 유인했다. 모용각은 전군을 세 부대로 나누어 방진을 만들고, 염민이 계략에 빠져 평지로 유인되어 나오자, 양쪽 날개에서 협격을 가하여 염위군은 대패했다. 염민은 추격해온 모용각의 기병에게 따라잡혀 포로로 잡혔다. 염민은 계(薊)로 연행되어 300차례 채찍으로 맞았다. 그 후 용성(龍城)으로 보내져, 힐경산(遏陘山)에서 처형되었다.
같은 달, 전연의 보필장군 모용평과 중위 후감이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업을 포위하자, 황태자 염지는 대장군 장간과 함께 농성하며 철저하게 항전할 태세를 보였지만, 성 밖의 병사들은 모두 모용평에게 항복했다.
5월, 양식 공세로 인해 업성 내에서는 식량이 부족해져 인육을 먹을 지경까지 몰렸다. 게다가 광위장군 모용군, 전중장군 모여근, 우사마 황보진 등이 2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모용평을 지원했다. 장간은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동진에 칭번함과 동시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동진의 복양군 태수 대시는 구원을 요청하기 전에 먼저 전국옥새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장간은 정말 원군을 파견할지 의심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6월, 대시는 장사 100여 명을 이끌고 업으로 돌입하여 장간을 설득해 전국옥새를 건강으로 보냈다.
같은 달, 장간은 정예 5천 명을 이끌고 동진군과 함께 성에서 출격했지만, 모용평에게 격파되어 4천 명의 병사를 잃었다.
8월, 염위의 장수교위 마원, 용양 전향은 성문을 열고 전연군을 끌어들였다. 대시와 장간은 창원으로 도주했다. 황태자 염지, 동황후, 태위 신종, 사공 조매 등은 체포되어 계로 보내졌다. 이로써 염위는 완전히 멸망했다.
염지는 해빈후에 봉해졌지만, 354년 9월에 모반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3. 정치
350년 1월, 석민은 국호를 "위"로 바꾸고 자신의 성을 "이"로 고쳤으나, 많은 백관들이 반발하여 석지에게 의존했다. 같은 달, 석지는 석곤, 장거, 왕랑을 보내 업을 공격했으나, 염민이 직접 출격하여 격퇴했다. 이농은 장하도를 토벌했다.
2월, 석감은 염민이 없는 틈을 타 업을 탈환하려 했으나, 밀고로 인해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염민은 석호의 손자 28명을 모두 죽였다.
사도 신종, 사공 랑개 등 48명은 염민에게 황제 즉위를 권했다. 염민은 이농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이농이 사양하여 남교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연호를 영흥으로, 국호를 '''대위'''로 정했다. 이것이 염위의 성립이다.
3월, 염민은 성을 "염"으로 되돌리고, 어머니 왕씨를 황태후, 아내 동씨를 황후, 아들 염지를 황태자로 삼았다. 여러 아들들을 왕으로 봉하고, 문무백관의 품계를 올려 봉작했다. 석지는 상국에서 제위에 즉위하여 염민에 대항했고, 여러 호인들이 이에 호응했다.
4월, 염민은 제왕 이농, 상서령 왕모, 시중 왕모, 중상시 엄진, 조승 등을 숙청하여 정권 안정을 꾀했다. 동진에 사자를 보내 후조 토벌을 요청했으나, 동진 조정은 응하지 않았다.
3. 1. 한족 중심 정책
염민은 한족 출신으로, 한족 중심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는 유교를 장려하고, 재능에 따라 관직을 수여하여 유학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다.3. 2. 호인 학살
염민은 "호(胡)"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려, 한족들에게 결족 또는 “오랑캐”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20만 명의 사람들(잘못 식별된 한족 포함)이 살해되었다.[3] 귀천, 남녀, 유아, 노인의 구별 없이 많은 이들이 살해되었고, 시체는 성 밖으로 버려져 들개, 승냥이, 이리에게 먹혔다. 사방의 호인 거주지에서도 한인 장군들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다. 또한, 체격이 크고 코가 높으며 수염이 많은 한인들도 호인으로 오인되어 다수 살해되었다.[3]이러한 학살은 황위 찬탈의 연장선상에서 후조에 마음을 두고 있는 호인들을 배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염위 안에 있던 호인 사회를 뒤흔들고, 한인을 포함한 전체에 동요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
4. 군사
349년 석호가 사망하고 아들 석세가 뒤를 잇자, 염민은 석준(석세의 형)에게 석세를 제거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도록 권했다. 350년 1월, 염민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국호를 "위"로 바꾸고, 자신의 성을 "이"로 고쳤다. 하지만, 많은 백관들은 이에 반발하여 등을 돌렸고, 그들 중 상당수는 석지에게 의존했다.[2]
염민의 군대는 창정(倉亭; 현재 산둥성 양구현 북쪽)에서 연합 조군을 격퇴한 후 30만 명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그 후 1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석지가 스스로 황제를 칭한 상국을 포위했다. 백일 간의 포위 공격 후 염민은 후조와 전연의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석지는 유현 장군을 업으로 보내 염민을 공격했지만, 그는 패배하여 염위에게 항복했다. 염민의 강요로 유현은 상국으로 돌아가 석지와 그의 일족을 몰살했고, 이로써 후조는 멸망했다.[2]
염민이 한인 관료와 명가를 포섭하는 데 힘썼음에도 불구하고, 석지의 진영으로 향하여 후조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는 자, 전연과 통하는 자도 있었고, 한인 우월주의라고 일컬어지면서도 현실적으로는 한인들 사이에서도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했으며, 후조와 염민 모두 여전히 호한 쌍방이 뒤섞인 정권이었다는 지적도 있다.[4]
351년 2월, 백여 일에 걸쳐 포위가 계속되자 석지는 크게 두려워하여 황제 칭호를 버리고 조왕을 칭하고, 전연 황제 모용준과 요익중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요익중은 아들 요상에게 2만 8천 명의 기병을 주어 구원하게 하고, 전연은 열관에게 3만 명의 군사를 주어 요상과 합류하게 했다. 또한, 기주에 있던 석곤도 군사를 일으켜 석지를 구원하러 갔다. 이로 인해, 세 방향에서 정예병이 집결하여 그 수가 10만을 넘었다.
3월, 요상과 석곤이 상국에 육박하자 염민은 차기장군 호목에게 요상을, 장군 손위에게 석곤을 요격하게 했으나, 양 군은 모두 패했다. 이에, 염민은 스스로 출진하여 전군을 이끌고 요상과 석곤과 대치했다. 이때, 열관 또한 염위군에서 불과 수 리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있었고, 요상, 석곤과 함께 삼면에서 공격해왔으며, 더불어 석지가 후방에서 공격했다. 이로 인해 염민은 대패를 겪었고, 10여 기의 호위를 받으며 간신히 업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은 10만 명에 달했고, 염위는 유망한 인재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잃었다고 한다.
5.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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