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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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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화제는 명나라의 제8대 황제이다. 1447년에 태어나 1487년에 사망했으며, 영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토목의 변 이후 황태자가 되었으나 숙부 경태제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탈문의 변으로 영종이 복위하면서 다시 황태자가 되었다. 1464년 영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연호를 성화로 정하고 우겸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등 초기에는 선정을 펼쳤다. 그러나 만귀비를 총애하고 환관을 기용하여 실정을 저질렀으며, 결국 만귀비가 사망한 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치세는 문관의 지배력이 커지고 문화 중심지가 이동하는 등 정치적, 문화적 변화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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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립고궁박물원 (타이베이)|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족자]] 형태의 궁중 초상화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족자 형태의 궁중 초상화
묘호헌종(憲宗)
시호계천응도성명인경숭문숙무굉덕성효순황제(繼天凝道誠明仁敬崇文肅武宏德聖孝純皇帝)
연호성화(成化)
주견심(朱見深), 처음 이름은 주견유(朱見濡)
출생1447년 12월 9일
사망1487년 9월 9일
매장지명나라 황릉, 모릉(茂陵)
정치
재위 기간1464년 2월 23일 ~ 1487년 9월 9일
즉위1464년 2월 28일
선대 황제영종 (천순제)
후대 황제홍치제
황태자 (첫 번째)1449년 ~ 1452년
선대 황태자황태자 주기진
후대 황태자회헌태자 주견제
황태자 (두 번째)1457년 ~ 1464년
선대 황태자회헌태자 주견제
후대 황태자도공태자 주우극
의왕1452년 ~ 1457년
가계
아버지영종
어머니효숙황후
배우자오황후(1464년 폐위)
효정순황후
자녀홍치제
흥헌왕 주우원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Chénghuà Dì

2. 생애

명나라 제6대 황제 영종(정통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49년 아버지 영종이 토목의 변으로 오이라트에게 포로로 잡히자 황태후의 명으로 황태자가 되었다. 1452년 숙부 경태제에 의해 황태자에서 폐위되어 기왕(沂王)이 되었다. 1457년 탈문의 변으로 정통제가 천순제로 복위하면서 다시 황태자가 되었고, 이름을 고쳤다. 1464년 정통제가 죽은 뒤 황위를 이었다. 1465년 연호를 성화로 바꾸었다.

성화제는 재위 중에 우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경태제의 제호(帝號)를 회복했다. 그러나 황장(皇莊)을 처음으로 설치하고, 권세가들이 한전(閑田)을 요구하자 전지(田地)를 빼앗아 장전(莊田)으로 만드는 것을 허락하는 등 실정을 저지르기도 했다.

자신보다 17살 많은 만귀비를 총애하여 낳은 아들이 얼마 뒤 죽자 온갖 패악을 저질렀다. 내비(內批)에게 관직을 주는 제도를 실시했고, 방술을 지나치게 믿어 방사(方士)와 승도(僧道)가 내비로 고관이 되었다. 환관 왕직을 기용해 서창을 설치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고, 왕직이 축출된 뒤에도 환관 상명(尙銘)을 시켜 동창을 맡기면서 매관매직을 거침없이 자행했다.

하투의 달단 부락과 형양 유민, 광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세가 어지러웠다. 성화 23년(1487년) 병으로 죽었다.

2. 1. 어린 시절

주견심은 1447년 12월 9일 영종황제의 장남이자 그의 후궁인 주씨(周氏)의 아들로 태어났다.[1]

1449년, 그의 아버지는 토목보 전투에서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 결과, 포로로 잡힌 황제의 동생인 주기유(朱祁鈺)가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했고, 주견심은 황태자로 책봉되었다.[2] 며칠 후, 주기유는 경태제(景泰帝)로 즉위했다.[3] 1450년, 몽골은 포로로 잡혀 있던 영종황제를 명나라에 돌려보냈지만, 경태제는 그를 가택 연금했다.[1] 주견심은 1452년까지 황태자로 남아 있었으나,[1][4] 이후 의왕(沂王)으로 강봉되었다.[1] 그는 부모와 떨어져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했고,[5] 상황의 압박으로 말더듬증이 생겼다. 1453년 경태제의 외아들이자 새로운 황태자가 사망하면서, 계승 문제는 여전히 미결 상태였다. 주견심의 지위는 1456년 말 경태제가 병이 들 때까지 불확실했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영종황제의 추종자들이 이용했고, 그들은 1457년 2월 쿠데타를 일으켜 영종을 복위시켰다.[1]

1457년 3월 1일, 주견심은 아버지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견심에서 견준(見濬)으로 바꾸었는데, 아마도 1449년 경태제가 지어준 그의 원래 이름이 영종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1]

주견심은 화가들에 의해 종종 건장한 체격, 통통한 볼, 날카로운 눈, 큰 귓불, 다듬은 콧수염과 수염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중앙아시아적 특징은 그의 증조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조상들의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성화제는 수염을 길렀지만 키가 작았고, 다른 황제들은 더 날씬하고 남방적인 외모를 지녔다.[6] 어린 시절 주견심은 반응이 느리고 말더듬이였다. 이 때문에 영종황제는 그의 지능과 통치 능력에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이현(李賢)을 중심으로 한 대신들은[7] 그에게 장남의 계승을 유지하도록 설득했다.[5]

2. 2. 즉위와 통치

영종(정통제)의 장남으로, 정통 14년(1449년) 토목의 변으로 아버지가 포로가 되고 숙부 경태제가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곧 폐위되어 기왕(沂王)에 봉해졌다.

1457년 탈문의 변으로 정통제가 천순제로 복위하면서 다시 황태자가 되었다. 천순 8년(1464년) 아버지가 죽자 황위를 이었다. 즉위 후 우겸의 명예를 회복하고 경태제의 황제 칭호를 부활시켰으며, 민심을 헤아려 정무에 힘썼다. 류큐, 하미(쿠무르), 샴(아유타야), 토루판(토루판), 사마르한(사마르칸트) 등으로부터 조공도 받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방술에 빠져 도사들을 중용하고, 도사를 례부 시랑(문부차관)에 임명하는 등 인사를 단행하였다. 또한, 유모이자 19세 연상인 궁녀 만귀비를 총애하여 조정이 혼란스러웠고, 왕직환관들의 첩보 기관인 서창을 설립하여 신하들을 감시했다.

만귀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얼마 뒤 죽자, 성화제와 다른 후궁 사이에 임신이 확인되면 낙태를 시켰다. 장년이 되어도 후계자가 없던 성화제는 측근 환관에 의해 만귀비의 손을 피해 비밀리에 길러진 황자 주유당(朱祐樘, 훗날의 홍치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귀비는 주유당을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487년 분사하였다. 성화제도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 향년 41세였다.

2. 3. 후계 문제와 죽음

1475년 이후, 황제와 만귀비의 관계는 변화하였다. 1476년부터 1487년까지 황제는 5명의 후궁에게서 총 11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두었다.[1] 더 이상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황제는 그녀에게 헌신적이었으며, 그녀의 활동을 지원했다.[1] 그의 치세 후반기에 그는 그녀의 불법적인 행동까지도 거의 제한하지 않았다.[1] 그녀의 대리인들은 운남의 구리, 은, 금, 보석 채굴, 해외 무역, 광둥의 진주 채취, 양자강 유역의 세금 징수, 그리고 염전 무역 등 다양한 활동에 관여했다.[1]

수많은 고발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만귀비의 행위에 대해 처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권력 남용, 과도한 지출, 부패를 비판한 관리들을 처벌했다. 그 결과 그녀는 1487년 사망할 때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2]

천순제(성화제)는 1487년 9월 9일에 사망하여 묘릉(茂陵)에 묻혔다. 시호는 순황제(純皇帝)이며, 묘호는 현종(憲宗)이다. 그는 장남인 주우탱(朱祐樘)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그가 홍치제이다.

성화제는 만귀비와 환관들을 중심으로 한 세력에게 관직을 매매한 책임이 있다. 임명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었다. 천순제의 신중하고 침착한 성격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완전히 좌우되지는 않았지만, 만귀비와 일부 환관들은 그의 총애를 이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취했다.

당시 후궁에서는 총애받는 만귀비가 전횡을 저질렀고, 만귀비가 낳은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자, 성화제와 다른 후궁 사이에 임신이 확인되면 만귀비에 의해 낙태되었다. 그 결과, 장년이 되어도 후계가 될 적자가 없었던 성화제였으나, 후에 측근 환관에 의해 만귀비의 손을 피해 비밀리에 길러진 황자 주유당(朱祐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가 훗날의 홍치제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만귀비는 주유당을 독살하려 하였으나, 주유당은 화를 면했고, 독살에 실패한 만귀비는 1487년에 분사하였다. 그 죽음을 슬퍼한 성화제도 같은 해에 사망하였다. 향년 41세였다.

3. 가족

봉호시호이름(성씨)재위 기간생몰년도국구(장인/장모)비고
폐황후(廢皇后)오씨(吳氏)1464년? ~ 1509년오준(吳俊)[3]
황후(皇后)효정순황후
(孝貞純皇后)
왕씨(王氏)1464년 ~ 1487년1442년 ~ 1518년왕종영(王鐘英)[4]
숙비(淑妃)효목황후
(孝穆皇后)
기씨(紀氏)(추존)1451년 ~ 1475년경원단희백(慶元端僖伯)
기귀(紀貴)
경원백부인(慶元伯夫人)
당씨(唐氏)
[5] [6]
귀비(貴妃)효혜황후
(孝惠皇后)
소씨(邵氏)(추존)? ~ 1522년소림(邵林)
양씨(楊氏)
[7] [8]



봉호시호이름(성씨)생몰년도국구(장인/장모)비고
황귀비(皇貴妃)공숙단신영정황귀비
(恭肅端愼榮靖皇貴妃)
만정아(萬貞兒)1428년 ~ 1487년만귀(萬貴)
현비(賢妃)단순현비(端順賢妃)백씨(柏氏)? ~ 1527년백진(柏珍)
덕비(德妃)장의덕비(莊懿德妃)장씨(張氏)1448년 ~ 1497년장경(張敬)
고씨(高氏)
안비(安妃)단의안비(端懿安妃)요씨(姚氏)? ~ 1491년
경비(敬妃)공의경비(恭懿敬妃)왕씨(王氏)1465년 ~ 1510년왕오(王敖)
황씨(黄氏)
공비(恭妃)영혜공비(榮惠恭妃)양씨(楊氏)
단비(端妃)강순단비(康順端妃)반씨(潘氏)? ~ 1538년
순비(順妃)장정순비(莊靖順妃)왕씨(王氏)1448년 ~ 1505년왕신(王信)
관씨(管氏)
영비(榮妃)정희영비(靖僖榮妃)당씨(唐氏)? ~ 1524년
여비(麗妃)소순여비(昭順麗妃)장씨(章氏)? ~ 1501년
화비(和妃)공혜화비(恭惠和妃)양씨(梁氏)? ~ 1533년궁순(宮純)
혜비(惠妃)정순혜비(靖順惠妃)곽씨(郭氏)? ~ 1491년
정비(靜妃)화혜정비(和惠靜妃)악씨(岳氏)1465년 ~ 1534년악기(岳紀)
심씨(沈氏)
소비(昭妃)단영소비(端榮昭妃)왕씨(王氏)



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자식비고
장남1466년귀비 만씨요절
차남황태자(皇太子)도공(悼恭)주우극(朱祐極)1469년 ~ 1472년단순현비 백씨[9]
3남황태자(皇太子)주우탱(朱祐樘)1470년 ~ 1505년효목황후 기씨2남 1녀홍치제(弘治帝), 제9대 황제
4남흥왕(興王)헌(獻)주우원(朱祐杬)1476년 ~ 1519년효혜황후 소씨2남 4녀가정제(嘉靖帝)의 아버지 [10]
5남기왕(岐王)혜(惠)주우륜(朱祐棆)1478년 ~ 1501년효혜황후 소씨
6남익왕(益王)단(端)주우빈(朱祐檳)1479년 ~ 1539년장의덕비 장씨4남 2녀
7남형왕(衡王)공(恭)주우휘(朱祐楎)1479년 ~ 1538년장의덕비 장씨1남
8남옹왕(雍王)정(靖)주우운(朱祐枟)1481년 ~ 1507년효혜황후 소씨
9남수왕(壽王)정(定)주우저(朱祐楮)1481년 ~ 1545년단의안비 요씨
10남1483년공의경비 왕씨요절
11남여왕(汝王)안(安)주우형(朱祐梈)1484년 ~ 1541년장의덕비 장씨
12남경왕(涇王)간(簡)주우순(朱祐橓)1485년 ~ 1537년영혜공비 양씨1남
13남영왕(榮王)장(莊)주우추(朱祐樞)1486년 ~ 1539년강순단비 반씨6남
14남신왕(申王)의(懿)주우해(朱祐楷)1487년 ~ 1503년영혜공비 양씨



봉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비고
장녀인화공주(仁和公主)? ~ 1544년장정순비 왕씨제세미(齊世美)대장공주(大長公主)
차녀영강공주(永康公主)1478년 ~ 1547년정순혜비 곽씨최원(崔元)대장공주(大長公主)
3녀덕청공주(德淸公主)? ~ 1548년임악(林岳)대장공주(大長公主)
4녀공주(公主)요절
5녀장태공주(長泰公主)? ~ 1487년요절
6녀선유공주(仙游公主)? ~ 1492년화혜정비 악씨



왕황후의 초상화. 국립고궁박물원, 타이베이

4. 정치

성화제는 영종(정통제)의 장남으로, 즉위 후 여러 개혁과 경제 발전을 이루었으나, 만귀비를 총애하여 조정이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내정 문단 참조)

성화제 시대에는 대외 관계와 군사 정책에서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명나라의 국경 너머 영향력은 상징적인 수준에 머물렀고, 직접적인 간섭보다는 작위, 벼슬, 무역 특권 부여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북쪽과 북서쪽의 여러 국가 및 부족들은 명나라와 무역 및 상업에 적극적이었고, 조공 사절의 수와 빈도가 증가했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무역 확장과 철, 곡식, 공예품, 사치품 획득을 위해 약탈을 일삼아 중국인들의 불만을 샀다.

천순제 재위 기간 동안 명나라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신장 하미(哈密) 장악 시도에 국한되었다. 1473년, 명나라는 하미의 이전 정부 복원을 시도했지만, 투르판군에게 패배하면서 실패했다.

만주에서는 여진 부족장 384명이 명나라 수비대장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1465년과 1479년, 천순제는 명나라 군사력을 이용하여 여진족을 공격했고, 이 전투에는 조선군이 지원했다. 이를 통해 건주 여진을 약화시켜 17세기 초까지 분열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다.

15세기 후반, 몽골은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고, 중국은 이들 집단 뒤에 사는 사람들을 타타르라고 불렀다. 1468년, 몽골인들이 서안과 란저우 사이의 국경 방어 거점인 귀원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명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에도 몽골의 약탈은 계속되었고, 15세기 말에는 몽골의 세력이 바투뭉케에 의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 그의 지도하에 몽골은 중국 영토 공격을 재개하여 1470년대 명나라의 승리를 무효화했다.

4. 1. 내정

성화제는 6대 황제인 영종(정통제)의 장남으로, 정통 14년(1449년) 토목의 변으로 아버지가 포로가 되고 숙부인 경태제가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곧 폐위되어 이왕(沂王)에 봉해졌다. 경태 8년(1457년) 탈문의 변으로 정통제가 천순제로 복위되면서 다시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천순 8년(1464년)에 아버지가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후 성화제는 탈문의 변에서 처벌받았던 우겸의 명예를 회복하고 경태제의 황제 칭호를 부활시키는 등 민심을 헤아려 정무에 힘썼다.[2] 류큐, 하미(쿠무르), 샴(아유타야), 토루판(토루판), 사마르한(사마르칸트) 등으로부터 조공도 받았다.

그러나 말년에 방술에 빠져 도사들을 중용하고, 도사를 례부 시랑(문부차관)에 임명하는 등 많은 도사들을 '''전봉관'''으로 삼아 측근에 두었다. 또한, 자신의 유모이자 19세 연상인 궁녀 만귀비를 총애하여 조정이 혼란에 빠졌고, 이에 반대하는 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왕직환관들의 첩보 기관인 서창을 설립하여 신하들의 감시를 강화하였다.

당시 후궁에서는 총애받는 만귀비가 전횡을 저질렀다. 만귀비가 낳은 아들이 얼마 안 되어 죽자, 성화제와 다른 후궁 사이에 임신이 확인되면 만귀비에 의해 낙태되었다. 그 결과, 장년이 되어도 후계가 될 적자가 없었던 성화제였으나, 후에 측근 환관에 의해 만귀비의 손을 피해 비밀리에 길러진 황자 주유당(朱祐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가 훗날의 홍치제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만귀비는 주유당을 독살하려 하였으나, 주유당은 화를 면했고, 독살에 실패한 만귀비는 1487년에 분사하였다.

성화제는 오랜 경기 침체기를 거친 후 경제 회복에 힘썼다. 15세기 후반부터 귀금속 채굴 증가로 중국과 주변 국가들의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징더전 자기 공장들이 생산을 재개하여 동남 해안에서 무역이 번성했고, 명나라 도자기는 아시아 및 아프리카 시장에서 인기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1480년대에는 유럽으로도 진출했다. 특히 '더우차이'(鬥彩|더우차이중국어)의 발전은 매우 인정받았고 다음 세기에 모방되었다.

회색빛 청자 항아리 사진.
난징 박물관에 있는 천하(天啓) 연간의 자기 항아리


1465년 중국 중부와 남부의 대홍수 이후 다리 건설이 급증하면서 교통이 발전하여 무역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1470년대와 1480년대에는 비단 산업의 성장으로 강남 농촌 지역에서 비단이 짜였다. 이러한 경제 호황으로 도시와 상업이 확장되었고, 1470년 이후 외국 무역의 증가와 일본 은의 유입으로 경제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1430년대 주조소 폐쇄 이후 동전 부족 현상이 발생하여 위조 동전이 성행했다. 국가 주조를 재개하려는 제안이 있었지만 거부되었고, 불법 주조소가 번성하여 베이징 시장에서 기존의 영락(永樂) 동전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사설 동전은 품질이 떨어져 진짜 동전과 확연히 달랐지만, 구형 주화 부족으로 상인들은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했다.

명나라 시대의 농업은 무역, 수공업, 도시화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었다. 15세기 후반의 추운 기후는 소농들의 성공을 방해했고, 특히 1460년대에 중국 북부와 중부 지역에서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하여 식량 가격이 급등했다. 정부는 관개수로 건설 및 국가 비축량에서 수수 제공 등의 조치를 시행하여 백성을 도왔다. 베이징 지역의 기근 동안에는 이재민들에게 임시 주택, 종자, 가축, 그리고 5년간의 세금 면제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천화 연간에는 황장(皇莊, 황실 소유지)의 규모가 크게 증가했다. 16세기 초까지 그 규모는 16배나 증가했다.[2] 황실 소유지 확장은 소작농이 될 수밖에 없었던 원래 지주들과 국가 재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4. 2. 외교 및 군사

1473년에 건립된 진절사는 인도의 마하보디 사원(Mahabodhi Temple)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금강좌탑" 양식으로 지어졌다.


천화제는 군사적 능력을 갖춘 조부 선덕제와 부친 영종제를 모범으로 삼아 적극적인 군사 정책을 추진했고, 장군들에게 후하게 보상하여 공로에 따라 9명의 백작과 1명의 후작을 임명했다.[10]

천화 연간, 명나라 군대는 '위소(衛所)' 제도 하에 약 500개의 위(衛)로 조직되었고, 각 위는 전국에 배치된 소(所)로 구성되었다. 이론상 300만 명의 병사가 있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절반 정도였다. 위들은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의 감독을 받았다. 북경과 주변에는 70개가 넘는 친위대(禁軍) 부대가 주둔하여 이론상 100만 명의 병력을 추가했으나, 실제 병력은 훨씬 적었다. 많은 병사들이 노동자로 고용되었고, 수만 명의 초과 임관(임명된 인원수보다 많은 장교)이 임명되어 급여를 받았기 때문이다. 오군도독부의 감독을 받는 위와 달리 친위대는 그들의 권한에 굴하지 않았다. 북쪽 국경선을 따라 있는 9개의 방어 지역(약 30만 명의 병사, 내륙 부대보다 훈련과 보급이 잘 됨)도 예외였다.

15세기 후반, 세습 장교들의 군사적 능력은 1세기 초에 비해 현저히 감소했고 왕위와의 유대감도 약해졌다. 성공적인 장군들의 미숙한 2, 3세대 자손들 대신, 군사 경력에 전념하는 문관과 환관들이 군사 문제를 감독했다. 한옹(韓雍, 1422~1478), 왕월(王越, 1426~1499), 향중(向忠, 1421~1502), 마문승(馬文升, 1426~1510) 등 군사에도 관여하는 관리들이 군대를 지휘했다.

천화제는 즉위 후 특별 시험을 통한 관리 선발 제도를 시행했지만, 1470년대에는 군사 재판 사용이 증가했다. 그는 북경 주둔 부대의 군사 훈련에 중요한 변화를 시작했다. 이전에는 각 성의 병사들이 삼대영(三大營)으로 보내져 훈련받았다. 보병은 오군영(五軍營), 기병은 삼천영(三千營), 화기 부대는 신기영(神機營)에서 훈련받았다. 1464년 5월, 천화제는 통합 훈련 부대(1449~1457년 존재) 재건을 명하고, 1만 명씩 12개 부대(十二團營)로 나누었다. 이들은 삼대영의 30만 명 중 선발되었고,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졌다.

이 조치는 보병, 기병, 화기 부대가 혼성 부대로 함께 작전하도록 훈련하기 위함이었다. 이전에는 세 영에서 따로 훈련받았다. 손기종(孫繼宗) 후작이 총괄 지휘했지만, 영락제 시대 출신 73세 노장 환관 유용성(劉永誠)이 실질적으로 군사적 측면을 이끌었다. 각 부대에는 감총내신(監鎗內臣, 무기고 감찰 환관) 부사령관이 있었는데, 환관이며 화기를 담당했다. 천화제의 최측근들이 화기 경비 책임을 맡았다. 1470년대 중반부터 왕지(王智)의 영향으로 이 부대들은 완전히 환관 통제하에 놓였다.

새로 훈련된 북경 부대는 북방 국경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71년, 1473년, 1480년 몽골군을, 1467년과 1479년 여진족을 물리쳤다. 그들은 사납고 잔혹한 병사로 명성을 얻었고, 1478년 산서성 서부 반란 대비 경계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팽식(彭時)의 조언으로 북경에 남았는데, 파병 시 민간인 안전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소규모 부대는 광서성 반란 요족과 싸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공 및 사적 노역에 동원되어 약화되고 비판받았지만, 천화 초기에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군대였다.

광서 지역에서 부족 지도자 후대구(侯大狗)가 이끈 요족 반란은 1450년대부터 준비되어 1464년 발발했다. 묘족과 장족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중심지는 순주(荀州, 현재 귀항시) 북서쪽 120~160km 산악 지대였다. 반군은 산악 지역에서 광동 인구 밀집 해안 지역으로 싸움을 옮겨 중국군을 놀라게 했다. 반란과 군사 이동은 호광 남부, 귀주, 강서까지 확산되었다. 지역 유력자들은 사면과 기부금으로 요족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병부상서 왕홍(王竑)은 강력한 대응을 결정했다. 조복(趙輔) 장군을 원정군 지휘관으로 임명했지만, 실제로는 부관이자 광동 신임 순찰사 한용(韓雍)이 군대를 이끌었다. 1,000명의 몽골 기마궁수를 포함한 3만 명의 병사와 16만 명의 지역군을 거느렸다. 1466년, 한용은 호광에서 북쪽, 광동에서 서쪽으로 진군하는 두 기둥으로 반군 중심부를 공격했고, 격렬한 전투에서 반군을 정복했다. 지역 평정에는 몇 년 더 걸렸다. 1468년까지 남은 한용은 새 현을 설립, 광동과 광서 당국 조정을 강화, 요족 추장들을 명나라 행정에 편입시켜 지역 행정을 개편했다.

후대구의 반란은 15세기 후반 남서부 소수 민족 반란 중 가장 강력했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몇 년간 묘족과 요족은 중국 남서부 여러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李震) 장군은 귀주와 호광 경계에서 반복적으로 패퇴시켜 정복 지역에 공포를 심었다. 1467년과 1475~1476년 수천 명의 묘족 반군을 학살했다. 1466~1468년 귀주와 사천 경계에서 또 다른 반란이 발생, 병부상서 정신(程信)이 진압에 파견되었으나 1477~1480년 다시 발생했다. 1460년대와 1470년대 사천 남부에서 일련의 묘족 반란이 일어났고, 장강(張剛) 순찰사가 강력하게 진압했다. 그는 도성 남부 묘족과 북서쪽 티베트인들과 번갈아 싸웠다.

장족도 반란을 일으켰는데, 독화살 사용은 전사들에게 공포를 안겼다. 후대구 전투에서 요족에 대항해 사용되었다. 15세기 말까지 장족은 두 번이나 명나라 지배에 반항했다.

1465~1476년 경향의 난(Jingxiang rebellion)은 15세기 중국의 가장 중요한 봉기였다. 1399년-1402년 내전과 명나라 말년 이자성 난 사이 명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혼란이었다. 호광성 북서부 경주(荊州)와 향양(襄陽) 두 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명나라 초기, 경주와 향양 현은 대부분 무인지경이었다. 1430년대부터 불법 이주민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1460년대 북중국과 장강 중하류 지역 기근으로 난민 수가 증가했다. 국가와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난민은 200만 명 미만으로 추산된다. 유통(劉通)이 이들을 이끌었는데, 산적 무리를 통합, 한왕(漢王)을 자칭하고 행정 체제를 수립, 1만 명 군대를 조직했다. 정부는 복녕후 주용(朱永)과 공부상서 백규(白圭)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다. 1465년, 호광성 이진(李珍) 군대 등 여러 성에서 모인 군대가 봉기를 진압, 유통은 1466년 여름 체포되었다.

허술한 관료 행정 문제는 지속되었고, 1470년 기근으로 90만 명이 추가 이주하여 새로운 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감찰어사 향중(向忠)이 진압 임무를 맡았다. 이진의 도움으로 호광성에서 25만 명 군대를 모았다. 함께 봉기를 진압, 수백 명 처형, 수천 명 유배, 150만 명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다시 그 지역으로 돌아와 1476년 여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는 감찰원 원걸(原傑, 原傑|위안제중국어, 1417–1477)을 파견, 사회경제적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문제 해결책에 대한 조정에서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정부는 사회적, 조직적 조치로 문제 해결을 결정, 원걸에게 이행을 맡겼다. 이주민 경작 토지 권리를 인정, 11만 3천 가구, 43만 8천 명을 등록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여러 새 현이 설립되었고, 1476년 말 운양(雲陽)이라는 새 부가 형성되었다. 신설 부 중심지에는 인접 성의 현들을 관할하는 방어 군사 사령부가 설립되었다. 1년 만에 원걸은 적절한 행정으로 상황을 안정시키고 평화를 가져왔다.

명나라의 국경 너머 영향력은 상징적 수준에 불과했고, 직접 간섭 없이 작위, 벼슬, 무역 특권 부여에 그쳤다. 북쪽과 북서쪽 여러 국가와 부족들은 명나라와 무역, 상업에 적극적이었고, 조공 사절 수와 빈도가 증가했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무역 확장과 철, 곡식, 공예품, 사치품 획득을 위해 약탈을 서슴지 않아 중국인들의 불만을 샀다. 명나라 작위는 수혜자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조공 관계를 맺을 권리를 주었지만, 명나라 정부는 중국 내부와 달리 신하들에 대한 공식 권한을 제공할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중국은 북방 초원 지역으로 영향력과 위신을 확장하려 했다.

천순제(成化帝) 재위 기간, 명나라의 중앙아시아 관심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하미(哈密) 장악 시도에 국한되었다. 하미 위구르 지배자들은 이슬람교도였으며 명나라 주권을 인정, 명 황제로부터 '왕' 칭호를 받았다. 1470년대 초, 하미 지배자는 모굴리스탄(莫古里斯坦) 왕자가 살해했고, 그 왕자는 투르판 술탄으로 선포, "이교도"(비무슬림) 오이라트족과 갈등을 빚었다. 전투는 영토 북서쪽, 특히 일리 강 계곡에서 발생했다. 베이징에서는 신료들이 하미 충돌과 불안을 군사 작전이나 외교(관계 단절 등)로 해결할지 논의했다.

1473년, 명나라는 하미 이전 정부 복원을 시도했다. 중국과 하미 사이 지역 명나라 최대 동맹인 두 몽골 부족 지원을 받아 소규모 중국군이 파견되었다. 3만 명 몽골인들이 임무에 합류했다. 그러나 하미 도착 시 적군이 이미 지나갔음을 알게 되었고, 몽골인들은 후퇴, 영토를 방어했다. 중국군 분견대는 투르판군에게 쉽게 패배했다. 1490년대 초가 되어서야 중국은 다시 하미 상황에 개입했다.

만주에서는 명나라 수비대장 칭호를 가진 여진 부족장 384명이 있었다. 1465년과 1479년, 천순제는 부활한 명나라 군사력을 이용, 여진족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는 조선군이 지원했으며, 건주 여진을 약화시켜 17세기 초까지 분열된 상태로 남게 했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몽골 정치 상황 때문에 중국은 이해가 부족했다. 15세기 후반, 몽골은 여러 집단으로 나뉘었다. 북경 북쪽과 북동쪽 우량카이, 산서성 북쪽 투메드 몽골, 섬서성 북쪽 오르도스 몽골 등이었다. 중국은 이들 집단 뒤에 사는 사람들을 타타르라 불렀다. 중국-몽골 국경과 북서쪽 실크로드를 따라 많은 작은 공국들이 있었다. 우량카이는 가장 안정적이고 명나라와 가까운 관계였다.

1468년, 몽골인들이 서안과 란저우 사이 국경 방어 거점 귀원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현지 몽골인들은 1460년대 후반부터 정착, 세습 지도자들에 의해 통치받았다. 1468년 6월, 알 수 없는 이유로 봉기, 도시 북쪽 산악 지대에 요새를 구축, 현지 명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정부는 사헌부 장관이자 섬서순찰사 향중과 마문성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다. 1468년 가을까지 몇 달 만에 반군을 진압, 마지막 반군은 1469년 초 패배했다.

귀원 사건은 일부 북경 고위 관리들 사이에서 중국 영토 내 몽골인 존재와 국경 너머 몽골인, 티베트인과의 잠재적 연관성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1468년과 1469년, 몽골 침입자들이 유림을 공격, 재편성된 북경 수비대 위험을 강조했다. 수비대 사령관들은 군대 시험, 영광과 전리품 획득을 위해 전투를 갈망했다. 그러나 반란이 이미 진압되었다는 대각사 팽시와 상루의 반대에 직면했다.

상황 해결 책임은 환관과 신하들 관련 전쟁파의 가장 유능한 추종자 왕월에게 주어졌다. 王越|왕월중국어(1426~1499)은 문관으로 1469년까지 대동 순찰사였다. 1469년 말 유림으로 전근했다. 1470년, 왕월은 몽골 침입자들을 격퇴했다. 전쟁파 반대자이자 병부상서 백귀는 유자준(余子俊|유자준중국어, 1429~1489, 뛰어난 학자, 21세 진사, 복건성 대규모 수리 사업 조직 능력)을 순찰사로 파견했다(1477년까지 재직). 유자준과 왕월은 함께 상황을 안정시켰다. 왕월이 전장에서 몽골군을 물리치는 동안(1471년, 1473년), 유자준은 오르도스 방어벽 건설을 계획했다. 비용 우려에도 불구, 정부는 1474년 허가했다. 몇 달 만에 4만 명 병사들이 높이 9m, 길이 1000km 성벽을 건설, 망루 등 지원 시설을 갖추었다. 1482년 여름 대규모 공격에서 효과적이었다.

그럼에도 몽골 약탈은 계속되었다. 15세기 말, 몽골 세력은 1480년부터 몽골 대칸 바투뭉케에 의해 부분 회복되었다. 그의 지도하에 몽골은 중국 영토 공격을 재개, 1470년대 명나라 승리를 무효화했다.

5. 문화

1468년, 곡부의 공자묘 중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


성화제(천순제)는 관대하고 복수심이 없는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어린 시절의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기근 지역을 돕는 등 어진 정치를 펼쳤다.[1] 그러나 1468년, 한림원 학자들과의 논쟁 후 체벌을 명령한 사건은 그의 평소 성향과는 다른 이례적인 일이었다.[2]

성화제는 대신(大臣)과 재상(宰相)들의 조언을 존중하고 정직하고 유능한 관리들을 높이 평가했다.[3] 그러나 완씨(萬氏)에게 부적절한 인물들을 등용하도록 허용하여, 정부 논의에서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파벌 간의 갈등을 조정하려는 노력은 갈등을 줄이는 데 기여했지만, 북방과 남방 사이의 긴장은 여전했으며 황제는 남방 출신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5]

1464년 이후 정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재상 리시안(李賢)이었으며, 그는 영종(英宗)의 말년에도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6] 리시안은 유능하고 존경받는 인물들을 요직에 임명하고 공개적인 논의를 통해 의사 결정을 하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7]

초기 재상들은 점차 유정지(劉定之), 상루(尚僂)와 같은 학자들로 교체되었으나, 기회주의적인 만안(萬安)과 유길(劉吉)이 내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8] 성화제 말년에는 환관 왕지(王直)와 양방(梁芳)이 권력을 잡았고, 완씨(萬氏) 주변의 친목 또한 악명을 떨쳤다.[9]

6. 평가

성화제는 유능한 정치가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지역 관료 간 불화를 원만히 관리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의 치세는 문관 중심의 정치, 남부 지역의 영향력 확대, 문화 중심지의 이동 등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군사적으로도 요족 영토 확장, 뤄저우 원정 성공, 여진족 약화, 만리장성 건설 등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어 명나라의 번영에 기여했다.[2]

하지만, 성화제는 총애하는 만귀비(萬貴妃)와 환관들에게 관직을 매매하고, 그들이 사익을 추구하도록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 특히 환관의 수는 15세기 말 1만 명이 넘어 정규 관리 수와 맞먹었으며,[2] 군사, 외교, 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며 폐단을 야기했다.[2] 심지어 사법 기관의 판결에까지 개입할 정도였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제의 치세는 명나라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요족 영토 확장은 서강 유역 교통과 정착에 기여했고, 뤄저우 원정은 장강 통행 안전을 확보했다. 군사 개혁으로 군대가 강화되었고, 만리장성은 몽골족 방어에 기여했다.

성화제는 서예 실력이 뛰어났고, 신화 속 인물 종규(Zhong Kui)를 그린 그림과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또한 연극과 음악을 즐겼으며, 불교를 지원하여 진절사와 같은 인도 양식의 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Война и общество: Факторный анализ исторического процесса. История Востока (Университетская библиотека Александра Погорельского) Территория будущего
[2] 서적 Chronicle of the Chinese Emperors: The Reign-By-Reign Record of the Rulers of Imperial China Thames & Hudson
[3] 문서 만귀비의 계략으로 인하여 폐후가 됨.
[4] 문서 황태후(皇太后)/자성태황태후(慈聖太皇太后)
[5] 문서 공각장희숙비(恭恪莊僖淑妃)/효목순황후(孝穆純皇后)
[6] 문서 만귀비에 의해 독살당함. 홍치제가 즉위한 후에 황후로 추존.
[7] 문서 신비(宸妃)/수안황태후(壽安皇太后)
[8] 문서 사후에 가정제에 의하여 황후로 추존.
[9] 문서 만귀비에 의하여 독살당함.
[10] 문서 가정제 즉위 후 예종(睿宗)으로 추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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