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대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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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대공국은 1091년경부터 1217년까지 존재했던 중세 세르비아의 국가이다. 세르비아인들은 7세기에 발칸 반도에 정착했으며, 블라스티미로비치 왕조가 통치했다. 9세기에는 불가리아의 침공을 받았고, 870년경 기독교화되었다. 11세기에는 두클랴가 세르비아 공국으로 부상하여 세르비아 내륙을 병합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1091년 부칸은 독립을 선언하고 비잔틴 제국과 갈등을 겪었다. 12세기에는 헝가리와의 관계가 복잡하게 전개되었고, 우로시 2세와 데사의 시대에 비잔틴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168년 스테판 네마냐가 대공이 되면서 네마냐 왕조가 시작되었고, 세르비아는 독립을 강화하며 세르비아 왕국으로 발전했다. 주요 행정 구역은 주파였으며, 라슈카, 제타, 훔, 트라부니아 등의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아드리아 해와 세르비아를 연결하는 무역로가 경제적으로 중요했으며, 건축 유산으로는 쿠르슈믈리야의 성 니콜라스 수도원 등이 있다.
2. 역사적 배경
세르비아 대공국은 초기 중세 시대에 세르비아인들이 발칸 반도에 정착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 황제 헤라클리우스의 보호를 받으며, 블라스티미로비치 왕조의 통치 아래 있었다. 초기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이 강했지만,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갔다. 특히 두클랴를 중심으로 성장하여 주변 지역을 통합해 나갔으며, 보이슬라블레비치 왕조 시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과의 갈등, 내부 분열 등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기도 했다.
2. 1. 초기 슬라브 정착과 비잔티움 제국
콘스탄티누스 7세의 저서 ''제국 통치론''(DAI)에 따르면, 세르비아인들은 비잔티움 제국 황제 헤라클리우스(610년 ~ 641년)의 보호 아래 발칸 반도에 정착했으며, 블라스티미로비치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슬라브족은 6세기 초 비잔티움 제국 깊숙이 침략한 후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1] 그들은 보스니아를 포함하는 "세례받은 세르비아"와 트라부니아, 자후믈레, 파가니아의 해안 지역(''포모르예'')에 정착했고,[2] 해안 두클랴는 비잔틴 제국이 소유했지만, 아마도 세르비아인들이 정착했을 것이다.[3] 모든 해안 지역은 북쪽으로 "세례받은 세르비아"와 접해 있었다.[4] 9세기 중반, 그동안 평화로운 이웃이었던 불가리아가 침공했지만, 전쟁에서 패배했다.[5] 세르비아는 헤라클리우스 통치 기간 동안 선교가 이루어졌지만, 870년경에 기독교화되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왕조의 구성원들은 계승 전쟁을 벌였고, 세르비아는 비잔틴-불가리아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왕조에 관한 기록 정보는 차슬라브 왕자(950년경)의 죽음으로 끝나며, 그 후 왕국은 붕괴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짧은 기간 동안 라스에 카테파나테를 설립했고, 군사 총독직은 곧 불가리아에 대한 비잔틴 정복으로 종료되었으며, 1018년경에 짧은 기간 동안 시르미움 테마와 함께 재설립되었다.
두클랴는 지배적인 세르비아 공국으로 부상하여 점차적으로 트라부니아, 자후믈레, 보스니아 및 세르비아 본토를 포함했다. 초기에 비잔틴 제국의 봉신이었던 스테판 보이슬라브(1034년 ~ 1043년)는 일어나 이전 세르비아 공국의 영토를 차지하여 보이슬라블레비치 왕조를 창건했다. 미하일로 보이슬라블레비치(1050년 ~ 1081년)와 그의 아들 콘스탄틴 보딘(1081년 ~ 1101년) 치하에서 1043년에서 1080년 사이에 두클랴는 전성기를 맞았다. 미하일로는 비잔틴 진영을 떠나 발칸 반도의 슬라브 반란을 지원한 후 교황으로부터 명목상의 '슬라브족의 왕' 칭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보딘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세르비아 내륙을 합병하고 그곳에 봉신 통치자를 임명하면서, 두클랴는 통치자들이 사용한 칭호("세르비아 공", "세르비아의")에서 볼 수 있듯이 가장 강력한 세르비아 정치체로 부상했다. 그러나 보딘이 비잔틴 제국에 패배하여 투옥되면서 그 부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배경으로 밀려난 그의 친척이자 봉신인 부칸은 세르비아에서 독립했고, 두클랴가 내전으로 타격을 입는 동안 비잔틴 제국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2. 2. 두클랴의 부상과 세르비아의 독립
콘스탄티누스 7세의 저서 ''제국 통치론''(DAI)에 따르면, 세르비아인들은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 (재위 610년~641년)의 보호 아래 발칸 반도에 정착했으며, 블라스티미로비치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슬라브족은 제국 깊숙이 침략한 후 6세기 초에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1] 그들은 보스니아를 포함하는 "세례받은 세르비아"와 트라부니아, 자후믈레, 파가니아의 해안 지역(''포모르예'')에 정착했고,[2] 해안 두클랴는 비잔틴 제국이 소유했지만, 아마도 세르비아인들이 정착했을 것이다.[3] 모든 해안 지역은 북쪽으로 "세례받은 세르비아"와 접해 있었다.[2] 9세기 중반, 평화로운 이웃이었던 불가리아가 침공했지만, 전쟁에서 패배했다.[4] 세르비아는 헤라클리우스 통치 기간 동안 선교가 이루어졌지만, 870년경에 기독교화되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왕조의 구성원들은 계승 전쟁을 벌였고, 세르비아는 비잔틴-불가리아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5] 왕조에 관한 기록 정보는 DAI와 차슬라브 왕자의 죽음(950년경)으로 끝나며, 그 후 왕국은 붕괴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짧은 기간 동안 라스에 카테파나테를 설립했고, 군사 총독직은 곧 불가리아에 대한 비잔틴 정복으로 종료되었으며, 1018년경에 짧은 기간 동안 시르미움 테마와 함께 재설립되었다.
한편, 두클랴는 지배적인 세르비아 공국으로 부상하여 점차적으로 트라부니아, 자후믈레, 보스니아 및 세르비아 본토를 포함했다. 초기에 비잔틴 제국의 봉신이었던 스테판 보이슬라브 (1034년–1043년 활동)는 봉기하여 이전 세르비아 공국의 영토를 차지하고 보이슬라블레비치 왕조를 창건했다. 미하일로 보이슬라블레비치 (재위 1050년–1081년)와 그의 아들 콘스탄틴 보딘 (재위 1081년-1101년) 치하에서 1043년에서 1080년 사이에 두클랴는 전성기를 맞았다. 미하일로는 비잔틴 진영을 떠나 발칸 반도의 슬라브 반란을 지원한 후 교황으로부터 '슬라브족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보딘은 반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세르비아 내륙을 합병하고 그곳에 봉신 통치자를 임명하면서, 두클랴는 통치자들이 사용한 칭호("세르비아 공", "세르비아의")에서 볼 수 있듯이 가장 강력한 세르비아 정치체로 부상했다. 그러나 보딘이 비잔틴 제국에 패배하여 투옥되면서 두클랴의 부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친척이자 봉신인 부칸은 세르비아에서 독립했고, 두클랴가 내전으로 타격을 입는 동안 비잔틴 제국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3. 역사
세르비아 대공국의 역사는 11세기 후반, 두클랴로부터 독립하면서 시작되었다. 1091년 또는 1092년, 부칸은 대공(''veliki župan'') 칭호를 사용하며 독립을 선언했다.[2] 부칸은 비잔티움 제국과 갈등을 겪었는데,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황제와 여러 차례 전쟁과 평화 협정을 반복했다. 바르다르 강 유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브라네, 스코페, 테토보 등의 도시를 점령하기도 했다.
부칸 사후, 우로시 1세가 대공위를 계승했다. 우로시 1세는 비잔티움 제국과 헝가리 왕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쳤다. 그의 딸 옐레나는 헝가리 국왕 헝가리의 벨라 2세와 결혼하여 헝가리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우로시 1세의 뒤를 이은 우로시 2세는 동생 데사와 함께 비잔티움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마누엘 1세 콤네노스 황제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데사는 우로시 2세를 축출하고 대공이 되었지만, 마누엘 1세에 의해 다시 우로시 2세가 복위되었다.
1166년, 마누엘 1세는 티호미르를 세르비아 대공으로 임명했다. 티호미르는 동생 스테판 네마냐와 갈등을 겪었고, 네마냐는 티호미르를 몰아내고 세르비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판티노 전투에서 티호미르를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세르비아를 통일하여 네마냐 왕조를 열었다.[1]
3. 1. 부칸의 독립과 비잔티움과의 갈등 (1091-1112)
1091년 또는 1092년에 부칸은 대공(''veliki župan'') 칭호를 사용하며 독립했다.[2] 부칸에게 종속된 이들은 지방 백작(''župan'' 칭호 사용)이었으며, 이들은 자신의 카운티 내부 문제에서는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졌지만, 충성과 전쟁 지원은 해야 했다.[3] 백작들은 세습 영주였으며, 두클랴가 세르비아를 합병하기 전부터 토지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4] 부칸은 약 1090년에 코소보 인근의 비잔티움 제국 영토를 침략하기 시작했는데, 비잔티움 제국은 침략해 온 페체네그족에 맞서 싸우느라 처음에는 대응할 수 없었다.[5]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페체네그족을 물리친 후 디라키움의 스트라테고스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1092년에 부칸에게 패배했다. 알렉시오스는 그 후 직접 이끄는 훨씬 더 큰 군대를 동원하여 세르비아로 진군했다. 부칸은 사절을 보내 평화를 요청했고, 알렉시오스는 쿠만족이 아드리아노폴리스까지 약탈하는 등 국내에서 문제가 발생했기에 이를 신속하게 수락했다. 황제가 떠난 직후, 부칸은 조약을 파기하고 바르다르 강을 따라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여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고 브라네, 스코페, 테토보 도시를 점령했다. 1094년 또는 1095년에 알렉시오스는 출정하여 부칸과 만났고, 부칸은 평화를 제안하며 사촌 우로스와 아들 스테판을 포함한 20명의 인질을 제공했다(통상적으로 통치자의 친척은 평화의 인질로서 황실에 머물렀다). 이 시점에서 부칸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행동했으며, 내전으로 인해 분쟁에 개입하지 않은 두클랴의 봉신이 아니었다.
1101년 보딘이 사망한 후, 부칸은 두클랴의 왕조 내전을 틈타 코차파르와 동맹을 맺고 1102년에 그와 함께 두클랴를 침략했다. 코차파르의 통치는 짧았는데, 그는 자훔레와의 분쟁 중 전투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부칸은 왕조의 또 다른 일원인 블라디미르를 세웠고, 그에게 자신의 딸을 결혼시켰다. 두클랴에서 영향력을 확산시킨 후, 부칸은 1106년 봄에 노르만 원정을 틈타 다시 비잔티움 제국을 침략하여 공동 황제 요한 2세 콤네노스를 격파했지만, 11월에 평화를 대가로 인질을 보냈다. 이 전쟁 이후 부칸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그는 약 1112년에 사망하고 사촌인 우로시가 그 뒤를 이은 것으로 추정된다.
3. 2. 우로시 1세 시대와 헝가리와의 관계 (1112-1145)
1106년 봄, 우로시 1세의 전임자인 부칸은 노르만 원정을 틈타 비잔틴 제국을 다시 침략하여 공동 황제 요한 2세 콤네노스를 격파했지만, 11월에 평화를 대가로 인질을 보냈다.[1] 이 전쟁 이후 부칸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그는 약 1112년에 사망하고 사촌인 우로시 1세가 그 뒤를 이은 것으로 추정된다.
1113년 또는 1114년에 디라키움의 비잔틴 군대가 두클랴를 침략하여 수도인 스쿠타리를 점령했다.[1] 비잔틴 제국은 그들의 후원자를 세웠고, 통치자 조르제는 우로시의 보호 아래 세르비아로 피신하여 그의 친척과 결혼했다. 이 둘은 1125년에 군대를 이끌고 두클랴로 진군하여 영토 대부분을 성공적으로 유지했다. 해상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침략 후, 그들은 명목상으로 그라디냐를 인정했고, 그 결과 조르제의 체포로 끝난 게릴라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라디냐는 두클랴의 작은 부분만 통치했고, 그 후 세르비아와의 관계를 강화했다.[1]
약 1127년에 비잔틴-헝가리 전쟁이 발발하여 헝가리군은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후 니시, 소피아, 필리포폴리스까지 진격했고, 요한은 다뉴브 강에서 보병과 해군으로 그들을 격파했다.[1] 그동안 비잔틴 통치를 인정했던 세르비아인들은 라스의 비잔틴 총독 크리토플을 몰아냈고,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도망가 조롱을 받았다.[1]
우로시 1세는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의 손녀인 안나 디오게니사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그 중에는 옐레나가 있었는데, 1131년 3월 1일에 헝가리 국왕 헝가리의 벨라 2세와 결혼했다.[1] 맹인이었던 벨라 2세는 공동 통치자 역할을 한 옐레나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1141년 2월 13일 벨라 2세가 사망했을 때, 장남인 게자 2세가 아직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1] 따라서 옐레나와 그녀가 궁정으로 초청한 그녀의 오빠 벨로시는 1146년 9월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헝가리 왕국을 섭정으로 통치했다.[1] 1145년에 벨로시는 최고 궁정 작위인 ''comes palatinus''(팔라틴 백작)을 받았는데, 이는 필요할 때마다 국왕을 대신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1142년부터 벨로시는 크로아티아의 반으로 활동했다.[1]
3. 3. 우로시 2세와 데사 시대 (1145-1166)
우로시 1세는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의 손녀인 안나 디오게니사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아들로는 우로시 2세, 데사, 벨로시가 있었고, 딸로는 옐레나가 있었다.[1] 1131년 3월 1일, 우로시 1세는 옐레나를 헝가리 국왕 헝가리의 벨라 2세와 결혼시켰다.[1] 벨라 2세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공동 통치자인 옐레나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옐레나는 아라드 회의에서 68명의 귀족을 학살했는데, 이는 그들이 이전에 콜로만을 설득하여 남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1] 1141년 벨라 2세가 사망하고 장남 게자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아직 어렸기 때문에 옐레나와 벨로시가 1146년 9월까지 헝가리 왕국을 섭정으로 통치했다.[1] 1145년 벨로시는 헝가리 최고 궁정 작위인 ''comes palatinus''(팔라틴 백작)을 받았고, 1142년부터는 크로아티아의 반으로 활동했다.[1]
우로시 1세의 뒤를 이어 아들 우로시 2세가 대공이 되었다.[1] 벨로시는 우로시 2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의지했다.[1] 1148년경 발칸 반도의 정치 상황은 비잔틴 제국과 베네치아 동맹, 노르만족과 헝가리인 동맹으로 나뉘었다. 마누엘 1세 콤네노스 황제는 1148년에 쿠만족을 격파한 후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1] 세르비아인, 헝가리인, 노르만족은 사절을 교환했는데, 이는 노르만족이 마누엘의 이탈리아 회복 계획을 저지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1] 1149년, 벨로시의 헝가리 군대는 비잔틴 제국에 맞서 우로시 2세를 지원했다.[1] 우로시 2세와 데사 형제는 마누엘이 아드리아 해를 건너 공격을 계획하기 위해 아블로나에 있을 때 비잔틴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세르비아인들이 아드리아 해 기지를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이탈리아를 공격할 경우 위험을 초래했다.[1]
이후 우로시 2세와 데사는 비잔틴 제국의 충실한 봉신인 두클랴의 라도슬라프를 공격했다.[1] 라도슬라프는 코토르까지 밀려나 해안 지역만 유지했고, 형제들은 두클랴와 트레비네 대부분을 차지했다.[1] 라도슬라프는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황제는 디라키움에서 지원을 보냈다.[1] 이 시점에서 ''두클랴 사제 연대기''가 끝나는데, 이는 원본 텍스트의 저자가 사망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 발칸 반도에서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려 했고, 비잔틴 제국의 보복을 고려하여 우로시 2세와 데사는 헝가리의 팔라틴 백작인 벨로시의 도움을 구했다.[1] 1150년까지 헝가리 군대는 세르비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
1150년, 데사는 문서에 두클랴, 트라부니야, 자훔레의 ''dux''로 언급되었다. 같은 해 우로시 2세는 비잔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데사를 감옥에 가두라고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토지를 회복했고, 데사 또한 충성을 맹세했으며, ''달마티아 지역''의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두 형제는 마누엘의 봉신으로 지정된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1] 1151년, 마누엘 1세는 헝가리에 선전포고했다.[1] 이는 헝가리가 비잔틴 제국에 대한 세르비아의 반란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비잔틴 군대는 시르미아로 파견되어 다뉴브 강을 건넜다.[1] 비잔틴 제국은 큰 파괴를 일으킨 후 철수했는데, 이 작전은 징벌적이었고 영토 점령은 없었다.[1] 게자 2세는 곧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 그 후 20년 동안 헝가리에 대한 10번의 원정이 있었다.[1] 마누엘 1세는 노르만과의 분쟁을 포기하는 대가로 발칸 반도에서 헝가리인을 통제할 수 있었다.[1]
1153년, 데사는 우로시 2세를 축출했다. 세르비아 궁정의 친 헝가리파는 비잔틴 종주권에 불만을 품었다.[1] 1154년 가을, 마누엘 1세는 우로시 2세와 데사 사이의 분쟁을 해결했다.[1] 황제는 1155년 또는 1156년에 우로시 2세를 복원하고 데사에게 니시 근처의 덴드라를 분봉했다. 1161~62년에 우로시 2세는 잠시 벨로시에게 교체되었고, 그 후 벨로시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 그의 직무로 돌아갔다.[1] 우로시 2세는 1165년 또는 1166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3. 4. 티호미르와 스테판 네마냐 (1166-1168)
마누엘 1세는 티호미르를 세르비아 왕좌에 앉혔다. 그는 자훔레를 소유했던 우로시 2세의 가까운 친척인 자비다의 아들이었다. 통치는 티호미르와 세 명의 남동생으로 나뉘었다. 티호미르는 최고 통치를 담당했고, 스트라시미르는 서부 모라바, 미로슬라프는 훔과 트라부니야, 스테판 네마냐는 토플리차, 이바르, 라시나 및 레케를 통치했다.[1] 형제 중 막내인 네마냐는 마누엘 1세로부터 두보치차 카운티도 받았는데, 이는 그가 1164년 시르미아에서 헝가리에 맞서 비잔틴 제국을 도왔기 때문이다.[1] 티호미르는 네마냐가 마누엘 1세와 맺은 관계를 위협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네마냐는 티호미르의 승인 없이 쿠르슈믈리야와 코사니차 근처에 수도원을 지었는데, 네마냐는 자신이 그렇게 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티호미르는 네마냐가 마누엘 1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독립을 추구한다고 생각하여 동의하지 않았다.[1]
티호미르는 네마냐를 투옥하고 그의 땅을 빼앗았다. 네마냐의 지지자들은 티호미르가 교회 건축에 대한 불찬성 때문에 이 모든 일을 했다고 교회에 음모를 꾸몄고, 그리하여 세르비아 교회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네마냐는 탈출하여 자신의 땅으로 돌아왔다. 이후 네마냐는 군대를 동원했고, 아마도 비잔틴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마누엘 1세는 티호미르의 행동에 불만을 품었을 수 있다). 그리고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나섰다. 티호미르, 스트라시미르, 미로슬라프는 패배하여 1167년에 비잔틴 제국으로 추방되었다.[1] 네마냐는 이제 매우 강력해졌고, 비잔틴 제국은 세르비아를 분열시켜 약화시키려 했으므로, 마누엘 1세는 이제 추방된 형제들에게로 향했다. 티호미르는 군대를 제공받아 스코페에서 파견되었고 즈베찬 근처에서 네마냐의 대군과 만났다. 네마냐는 판티노에서 그를 결정적으로 격파했고, 티호미르는 시트니차 강에서 익사했으며, 그 후 다른 형제를 사로잡아 그들과 평화를 맺고 그들이 세르비아의 유일한 통치자로 인정하는 대가로 이전 땅을 돌려주었다.[1]
3. 5. 네마냐 왕조의 성립과 세르비아 왕국 (1168-1217)
1091년 또는 1092년에 부칸은 대공(''veliki župan'') 칭호를 사용하며 독립했다.[2] 부칸에게 종속된 이들은 지방 백작(''župan''이라는 칭호 사용)이었으며, 이들은 자신의 카운티 내부 문제에서는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졌지만, 충성과 전쟁 지원 의무는 있었다.[3] 백작들은 세습 영주였으며, 두클랴가 세르비아를 합병하기 전부터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 부칸은 약 1090년에 코소보 인근의 비잔틴 영토를 침략하기 시작했는데, 비잔틴 제국은 침략해 온 페체네그족에 맞서 싸우느라 처음에는 대응할 수 없었다.[5]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페체네그족을 물리친 후 디라키움의 스트라테고스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1092년에 부칸에게 패배했다. 알렉시오스는 이후 직접 이끄는 훨씬 더 큰 군대를 동원하여 세르비아로 진군했다. 부칸은 사절을 보내 평화를 요청했고, 알렉시오스는 쿠만족이 아드리아노폴리스까지 약탈하는 등 국내 문제로 인해 이를 신속하게 수락했다. 황제가 떠난 직후, 부칸은 조약을 파기하고 바르다르 강을 따라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여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고 브라네, 스코페, 테토보 도시를 점령했다. 1094년 또는 1095년에 알렉시오스는 출정하여 부칸과 만났고, 부칸은 평화를 제안하며 사촌 우로스와 아들 스테판을 포함한 20명의 인질을 제공했다(통상적으로 통치자의 친척은 평화의 인질로서 황실에 머물렀다). 이 시점에서 부칸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행동했으며, 내전으로 인해 분쟁에 개입하지 않은 두클랴의 봉신이 아니었다.
1101년 보딘이 사망한 후, 부칸은 두클랴의 왕조 내전을 틈타 코차파르와 동맹을 맺고 1102년에 그와 함께 두클랴를 침략했다. 코차파르의 통치는 짧았는데, 자훔레와의 분쟁 중 전투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부칸은 왕조의 또 다른 일원인 블라디미르를 세웠고, 그에게 자신의 딸을 결혼시켰다. 두클랴에서 영향력을 확산시킨 후, 부칸은 1106년 봄에 노르만 원정을 틈타 다시 비잔틴 제국을 침략하여 공동 황제 요한 2세 콤네노스를 격파했지만, 11월에 평화를 대가로 인질을 보냈다. 이 전쟁 이후 부칸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그는 약 1112년에 사망하고 사촌인 우로시가 그 뒤를 이은 것으로 추정된다.
1113년 또는 1114년에 디라키움의 비잔틴 군대가 두클랴를 침략하여 수도인 스쿠타리를 점령했다. 그들은 이후 자신들의 후원자를 세웠고, 통치자 조르제는 우로스의 보호 아래 세르비아로 피신하여 그의 친척과 결혼했다. 이 둘은 1125년에 군대를 이끌고 두클랴로 진군하여 영토 대부분을 성공적으로 유지했다. 해상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침략 후, 그들은 명목상으로 그라디냐를 인정했고, 그 결과 조르제의 체포로 끝난 게릴라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라디냐는 두클랴의 작은 부분만 통치했고, 이후 세르비아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약 1127년에 비잔틴-헝가리 전쟁이 발발하여 헝가리군은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후 니시, 소피아, 필리포폴리스까지 진격했고, 요한은 다뉴브 강에서 보병과 해군으로 그들을 격파했다. 그동안 비잔틴 통치를 인정했던 세르비아인들은 라스의 비잔틴 총독 크리토플을 몰아냈고,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도망가 조롱을 받았다.
우로시 1세는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의 손녀인 안나 디오게니사와 결혼하여 세 아들(우로시 2세, 데사, 벨로시)과 딸 옐레나를 두었다. 1131년 3월 1일, 우로시 1세는 자신의 딸 옐레나를 헝가리 국왕 헝가리의 벨라 2세와 결혼시켰다. 맹인이었던 벨라 2세는 공동 통치자 역할을 한 옐레나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옐레나는 아라드 회의에서 68명의 귀족을 학살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그들이 앞서 콜로만을 설득하여 남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 1137년에 헝가리의 라디슬라우스 2세는 벨라 2세와 옐레나의 아들이자 명목상의 보스니아 반이 되었다. 1141년 2월 13일 벨라 2세가 사망했을 때, 장남인 게자 2세가 아직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옐레나와 그녀가 궁정으로 초청한 그녀의 오빠 벨로시는 1146년 9월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헝가리 왕국을 섭정으로 통치했다. 1145년에 벨로시는 최고 궁정 작위인 ''comes palatinus''(팔라틴 백작)을 받았는데, 이는 필요할 때마다 국왕을 대신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1142년부터 벨로시는 크로아티아의 반으로 활동했다.
우로시 1세는 아들 우로시 2세가 계승했다. 벨로시는 우로시 2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어려울 때 서로 의지할 수 있었다. 약 1148년에 발칸 반도의 정치 상황은 비잔틴 제국과 베네치아의 동맹, 그리고 노르만족과 헝가리인의 동맹으로 양분되었다. 노르만족은 전장이 발칸 반도에서 이탈리아의 그들 지역으로 이동할 위험을 확신했다. 마누엘 1세 콤네노스 황제는 또한 1148년에 쿠만족을 격파한 후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 세르비아인, 헝가리인, 노르만족은 사절을 교환했는데, 노르만족은 마누엘의 이탈리아 회복 계획을 막는 데 관심이 있었다. 1149년에 벨로시의 헝가리 군대는 비잔틴 제국에 맞서 우로시 2세를 도왔다. 우로시 2세와 데사 형제는 마누엘이 아드리아 해를 건너 공격을 계획하기 위해 아블로나에 있을 때 비잔틴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세르비아인들이 아드리아 해 기지를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이탈리아를 공격할 경우 위험을 초래했다.
우로시 2세와 데사는 다음으로 비잔틴 제국의 충실한 봉신인 두클랴의 라도슬라프를 공격했다. 라도슬라프는 두클랴의 남서쪽 구석인 코토르까지 밀려났고 해안 지역만 유지했으며, 형제들은 내륙 두클랴와 트레비네의 대부분(두클랴의 2/3 이상)을 차지했다. 라도슬라프는 황제의 도움을 구했고, 황제는 디라키움에서 지원을 보냈다. 이 시점에 ''두클랴 사제 연대기''가 끝나는데, 이는 원본 텍스트의 저자가 사망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발칸 반도에서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려 했고, 비잔틴 제국의 보복을 고려하여 우로시 2세와 데사는 헝가리의 팔라틴 백작인 형제 벨로시의 도움을 구했다. 1150년까지 헝가리 군대는 세르비아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150년, 데사는 두클랴, 트라부니야, 자훔레의 ''dux''로 문서에 언급되었다. 같은 해, 우로시 2세는 비잔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데사를 감옥에 가두라고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토지를 회복했고, 데사 또한 충성을 맹세했으며, ''달마티아 지역''의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두 형제는 마누엘의 봉신으로 지정된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비잔틴 황제와 신성 로마 황제 사이의 경쟁의 일부였으며, 이는 곧 헝가리로 옮겨갈 것이다. 1151년에 마누엘 1세는 헝가리에 선전포고했다. 이는 헝가리가 비잔틴 제국에 대한 세르비아의 반란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비잔틴 군대는 시르미아로 파견되어 다뉴브 강을 건넜다. 비잔틴 제국은 큰 파괴를 일으킨 후 철수했는데, 이 작전은 엄격히 징벌적이었고, 영토 점령은 없었다. 게자 2세는 곧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 후 20년 동안 헝가리에 대한 10번의 원정이 있었다. 마누엘 1세는 노르만과의 분쟁을 포기하는 대가로 발칸 반도에서 헝가리인을 통제할 수 있었다. 1153년에 데사는 우로시 2세를 축출했다. 세르비아 궁정의 친 헝가리파는 비잔틴 종주권에 불만을 품었다. 1154년 가을, 마누엘 1세는 우로시 2세와 데사 사이의 분쟁을 해결했다. 황제는 1155년 또는 1156년에 우로시 2세를 복원하고 데사에게 니시 근처의 덴드라를 분봉했다. 1161–62년에 우로시 2세는 잠시 벨로시에게 교체되었고, 그 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 그의 직무로 돌아갔다. 우로시 2세는 1165년 또는 1166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마누엘 1세는 티호미르를 세르비아 왕좌에 앉혔다. 그는 자훔레를 소유했던 우로시 2세의 가까운 친척인 자비다의 아들이었다. 통치는 티호미르와 세 명의 남동생으로 나뉘었다. 티호미르는 최고 통치를 담당했고, 스트라시미르는 서부 모라바, 미로슬라프는 훔과 트라부니야, 스테판 네마냐는 토플리차, 이바르, 라시나 및 레케를 통치했다. 형제 중 막내인 네마냐는 또한 마누엘 1세로부터 두보치차 카운티를 받았는데, 그가 시르미아(1164)에서 헝가리에 맞서 비잔틴 제국을 도왔기 때문이다. 티호미르는 네마냐가 마누엘 1세와 맺은 관계를 위협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네마냐는 티호미르의 승인 없이 쿠르슈믈리야와 코사니차 근처에 수도원을 지었는데, 네마냐는 자신이 그렇게 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티호미르는 네마냐가 마누엘 1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독립을 추구한다고 생각하여 동의하지 않았다.
티호미르는 네마냐를 투옥하고 그의 땅을 빼앗았다. 네마냐의 지지자들은 티호미르가 교회 건축에 대한 불찬성 때문에 이 모든 일을 했다고 교회에 음모를 꾸몄고, 그리하여 세르비아 교회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네마냐는 탈출하여 자신의 땅으로 돌아왔다. 이후 네마냐는 군대를 동원했고, 아마도 비잔틴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마누엘 1세는 티호미르의 행동에 불만을 품었을 수 있다). 그리고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나섰다. 티호미르, 스트라시미르, 미로슬라프는 패배하여 1167년에 비잔틴 제국으로 추방되었다. 네마냐는 이제 매우 강력해졌고, 비잔틴 제국은 세르비아를 분열시켜 약화시키려 했으므로, 마누엘 1세는 이제 추방된 형제들에게로 향했다. 티호미르는 군대를 제공받아 스코페에서 파견되었고 즈베찬 근처에서 네마냐의 대군과 만났다. 네마냐는 판티노에서 그를 결정적으로 격파했고, 티호미르는 시트니차 강에서 익사했으며, 그 후 다른 형제를 사로잡아 그들과 평화를 맺고 그들이 세르비아의 유일한 통치자로 인정하는 대가로 이전 땅을 돌려주었다.
4. 행정 구역
지역 | 주파(Župa) |
---|---|
라스 | 라스 |
드리나 | |
파트코보 | |
흐보스노 | |
포드림례 | |
토플리차 | |
이바르 | |
라시나 | |
서모라바 | |
두보치차 | |
코스트르츠 | |
드라슈코비나 | |
시트니차 | |
라브 | |
리플란 | |
기타 지역 | 글보치차 |
레케 | |
우스카 | |
포모라블레 | |
자그를라타 | |
레브체 | |
벨리차 | |
림 | |
기타 지역 | 쿠야브차 |
자트르나바 | |
제타 (역사적 두클랴) | 루슈카 |
부드바 | |
오노고슈트 | |
오블리크 | |
리브니차 | |
훔 (자후믈레) | 스톤 |
포포보 | |
두브라바 | |
루카 | |
다바르 | |
잡스카 | |
고리치카 | |
기타 지역 | 베체니크 |
트라부니아 | 트레비네 |
우르모 | |
코나블레 | |
리산 | |
루디나 | |
라반 (아르바논) | 파일럿 |
5. 경제
젠타 가도는 아드리아 해와 세르비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로였다. 이 도로는 보야나강 하구, 슈코더(스카다르) 항구에서 시작하여 (또는 바르를 거쳐 체티네) 드리니 계곡을 따라 프리즈렌, 리플얀, 노보 브르도를 거쳐 브라네와 니시로 이어졌다. 베네치아 공화국과 라구사 공화국은 세르비아 및 불가리아와의 무역을 위해 이 도로를 사용했다.
요안니스 키나모스는 1149년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 근처의 갈리치를 비잔틴 제국이 정복했을 때, 많은 야만인들이 포로로 잡혔는데 "그들은 부분적으로는 전사였고 부분적으로는 가축 사육자였다"고 언급했다.
1168년 티레의 윌리엄 대주교는 성지로 가기 위해 세르비아를 지나면서 세르비아인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은 가축과 양떼가 풍족하며, 우유, 치즈, 버터, 고기, 꿀 및 밀랍의 공급이 매우 풍부하다."[2]
12세기와 13세기에는 라구사 공화국이 번성하는 세르비아 국가의 상업 거점이 되면서 큰 혜택을 얻었는데, 특히 스테판 1세와의 조약 체결 이후에 더욱 그러했다.[3] 1268년, 우로시는 라구사와 조약을 맺어 소위 성 데메트리우스 수입(Svetodimitarski dohodak)을 부과했는데, 이로 인해 라구사인들은 세르비아 국왕에게 연간 2000hyperperi를 지불하게 되었다.[4]
6. 건축
- 쿠르슈믈리야의 성 니콜라스 수도원
- 코사니차와 토플리차 사이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
- 게오르기 기둥 사원(Đurđevi stupovi) - 1171년 라스에 위치
- 자비로우신 성모 마리아 사원(Studenica) - 1190년 이바르에 위치
- 비스트리차와 림의 합류 지점에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
- 이바르 강변 콘출(Končulj)에 있는 성 니콜라스 수도원
- 라스의 그리스도의 어머니 수녀원
7. 역대 통치자
통치자 | 재위 기간 |
---|---|
부칸 | 1091년–1112년 |
우로시 1세 | 1112년–1145년 |
우로시 2세 | 1145년–1153년 |
데사 | 1153년–1155년 |
우로시 2세 | 1155년–1162년 |
벨로시 | 1162년 |
데사 | 1162년–1166년 |
티호미르 | 1166년–1168년 |
네마냐 | 1168년–1196년 |
스테판 | 1196년–1202년 |
부칸 | 1202년–1204년 |
스테판 | 1204년–1217년 |
참조
[1]
웹사이트
Stećak's - Medieval Tombstones
https://whc.unesco.o[...]
UNESCO
2011-05-07
[2]
서적
Historia Transmarina
[3]
서적
The Birth of Yugoslavia
https://books.google[...]
[4]
서적
Dubovnik:A History
https://books.google[...]
[5]
서적
Gde se nalazila Srbija od VII do XII veka
http://www.rastko.rs[...]
Narodna knjiga i Istorijski instit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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