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베 바예스테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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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베 바예스테로스는 스페인 출신의 프로 골프 선수로,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유럽 골프계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2번,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 3번 우승했으며, PGA 투어에서 9승, 유러피언 투어에서 50승을 기록했다. 그는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과 뛰어난 쇼트 게임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1999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8년 뇌종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2011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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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베 바예스테로스 | |
|---|---|
| 기본 정보 | |
![]() | |
| 본명 | 세베리아노 바예스테로스 소타 |
| 별명 | 해당사항 없음 |
| 출생일 | 1957년 4월 9일 |
| 출생지 | 페드레냐, 칸타브리아주, 스페인 |
| 사망일 | 2011년 5월 7일 |
| 사망지 | 페드레냐, 칸타브리아, 스페인 |
| 신장 | 1.83 미터 |
| 체중 | 해당사항 없음 |
| 국적 | 스페인 |
| 거주지 | 해당사항 없음 |
| 배우자 | 카르멘 보틴 오셰아(1988년–2004년) (이혼) |
| 자녀 | 3명 |
| 선수 경력 | |
| 프로 데뷔 | 1974년 |
| 투어 | PGA 투어 유러피언 투어 |
| 프로 우승 | 90회 |
| PGA 우승 | 9회 |
| 유러피언 투어 우승 | 50회 (역대 1위) |
| 일본 투어 우승 | 6회 |
| 오스트레일리아 투어 우승 | 2회 |
| 기타 우승 | 28회 |
| 메이저 챔피언십 | |
| 우승 횟수 | 5회 |
| 마스터스 | 우승: 1980년, 1983년 |
| US 오픈 | 3위: 1987년 |
| 디 오픈 챔피언십 | 우승: 1979년, 1984년, 1988년 |
| PGA 챔피언십 | 5위: 1984년 |
| 수상 | |
| 유러피언 투어 상금왕 | 1976년, 1977년, 1978년, 1986년, 1988년, 1991년 |
| 유러피언 투어 올해의 선수 | 1986년, 1988년, 1991년 |
|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 | |
| WGHof ID | seve-ballesteros |
| 헌액 연도 | 1999년 |
| 기타 정보 | |
| Memorial Tournament 헌액 | 2010년 |
2. 경력
낙농가 집안[87][89]에서 태어나, 캐디 아르바이트를 하던 형의 영향으로 골프를 접했다. 7살 때 받은 3번 아이언 헤드에 마른 나뭇가지를 붙여 클럽처럼 만들어 놀았고, 8살에는 진짜 3번 아이언 하나로 볼이 닳아 내부 고무가 드러날 때까지 연습하며 골프에 몰두했다. 12살 무렵에는 스크래치 플레이어 실력에 도달했고, 1974년 16세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했다.[88][89]
프로 전향 2년 후인 1976년에 유럽 투어 첫 우승을 거두었고[88], 그해 19세의 나이로 유럽 투어 상금왕에 올랐다.[88][91] 1977년에는 일본 투어의 일본 오픈에서 투어 사상 최연소 우승을 기록했다. 1979년 22세에 디 오픈에서 메이저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으며,[88] 1980년에는 마스터스에서 당시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다.[87][88] 메이저 대회 통산 5승을 달성했다.
1980년대 전성기에는 세계 랭킹 1위를 통산 61주간 유지하며[87][94] 강력함을 자랑했다. 잭 니클라우스는 그의 마스터스 첫 우승 당시 "그의 미래에는 많은 그린 재킷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냈다.
1991년 6번째 유럽 투어 상금왕을 차지한 이후 슬럼프에 빠졌다. 메탈 우드와 티타늄 우드 등장 시기 스윙 개조 실패와 허리 통증, 무릎 통증으로 인해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으며, 마지막 유럽 투어 우승은 1995년이었다.[88]
1997년 라이더 컵에서는 유럽팀 캡틴으로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92][93] 1999년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87] 2007년 7월 16일 프로 골프 은퇴를 발표했다.
2008년 10월 6일 마드리드 공항에서 쓰러져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88] 총 4차례의 수술과 화학 요법 치료를 받았으나[95], 2011년 5월 7일 페드레냐 자택에서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2][88][96]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세베 바예스테로스 소타(Severiano Ballesteros Sota|세베리아노 바예스테로스 소타es)는 1957년 4월 9일 스페인 칸타브리아주 페드레냐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부였던 발도메로 바예스테로스 프레스마네스(Baldomero Ballesteros Presmanes, 1919–1987)이고, 어머니는 카르멘 소타 오세호(Carmen Sota Ocejo, 1919–2002)이다. 그는 다섯 아들 중 막내였으며[2][3], 형제 중 한 명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프로 골퍼가 되었다.[4]그의 외삼촌 라몬 소타는 스페인 프로 챔피언을 네 번이나 차지했으며, 1965년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6위를 기록한 유명 골퍼였다.[6] 바예스테로스는 어린 시절, 학교에 가는 대신 집 근처 해변에서 골프를 치며 실력을 키웠다. 주로 여덟 살 때 형 마누엘에게 받은 3번 아이언 하나로 연습했다.[5] 7살 때는 3번 아이언 헤드에 마른 나뭇가지를 붙여 만든 자신만의 클럽으로 작은 돌을 치며 놀았고, 8살에 진짜 3번 아이언을 얻은 후에는 몸의 일부처럼 항상 가지고 다니며 단 하나의 볼이 닳아 내부 고무가 드러날 때까지 연습했다고 한다. 12살 무렵에는 이미 스크래치 플레이어 수준의 실력을 갖추었다.[88][89] 그의 형 마누엘 역시 1972년부터 1983년까지 매년 유러피언 투어 상금 랭킹 100위 안에 들었으며, 나중에는 바예스테로스의 매니저가 되었다. 다른 형제인 빈센테와 발도메로, 그리고 조카 라울과 이반도 프로 골퍼이다.[7][8][9]
1974년 3월, 바예스테로스는 불과 16세의 나이로 프로 골퍼가 되었다.[10][88][89] 프로 전향 2년 후인 1976년, 로열 버크데일 골프 클럽에서 열린 1976년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 2위를 차지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11][88] 그는 3라운드까지 2타 차 선두였으나, 마지막 라운드에서 74타를 기록하며 우승자 조니 밀러에게 6타 뒤진 채 잭 니클라우스와 공동 2위에 머물렀다.[12][13] 같은 해, 19세의 나이로 유러피언 투어 상금왕(Order of Merit)에 올랐으며[88][91], 이후 5번 더 상금왕을 차지하여 총 6번의 유러피언 투어 상금왕 기록을 세웠다(이 기록은 나중에 콜린 몽고메리가 경신했다).[14] 1977년에는 일본 투어의 일본 오픈에서 투어 역사상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다.
바예스테로스는 1979년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 메이저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다.[88] 당시 22세였던 그는 20세기 최연소 디 오픈 우승자였으며, 1907년 프랑스의 아르노 마시 이후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대륙 유럽 출신 골퍼가 되었다.[17] 특히 마지막 라운드 16번 홀에서 티샷이 주차장으로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버디를 잡아낸 장면은 유명하다.[15] 이듬해인 1980년에는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며 유럽 선수 최초의 마스터스 챔피언이 되었고, 당시 23세로 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다(이 기록은 1997년 타이거 우즈가 21세로 우승하며 깨졌다).[16][87] 1976년 마스터스 직전에는 미국의 골프 다이제스트 잡지에서 "사상 최초의 10대 우승 가능성"이라는 특집 기사를 실을 정도로 그의 재능은 일찍부터 인정받았다.
2. 2. 전성기
1974년 16세의 나이로 프로 골프 선수로 데뷔하였다.[88][89] 프로 전향 2년 후인 1976년에는 유럽 투어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으며,[88] 그해 19세의 나이로 유럽 투어 상금왕에 올랐다.[88][91] 같은 해 마스터스 개막 전, 미국 골프 다이제스트지는 "사상 최초의 10대 우승 가능성"이라는 특집 기사를 통해 그의 뛰어난 재능을 조명했다. 1977년에는 일본 투어의 일본 오픈에서 투어 사상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다.1979년 22세의 나이로 디 오픈에서 생애 첫 메이저 대회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88] 이듬해인 1980년에는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며 당시 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훗날 타이거 우즈에 의해 경신되었다.[87][88] 바예스테로스는 메이저 대회에서 통산 5승을 기록했다.
전성기였던 1980년대에는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총 61주 동안 지키며[87][94] 세계 골프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마스터스 첫 우승 당시, 잭 니클라우스는 "그의 미래에는 많은 그린 재킷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밝은 미래를 예측했다.
1991년에는 통산 6번째 유럽 투어 상금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후 1997년 라이더 컵에서는 유럽팀의 캡틴을 맡아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 미겔 앙헬 히메네스 등과 함께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92][93] 이러한 화려한 경력을 인정받아 1999년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87]
2. 3. 후반 경력 및 은퇴
1991년 유럽 투어에서 6번째 상금왕을 차지한 이후 점차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메탈 우드와 티타늄 소재의 클럽이 등장하면서 시도했던 스윙 개조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부진은 더욱 깊어졌고, 세계 랭킹이 급격히 하락했다. 또한 고질적인 허리 통증과 무릎 통증에도 시달리며 전성기의 기량을 되찾기 어려워졌다. 그의 마지막 유럽 투어 우승은 1995년이었다.[88]그러나 1997년 라이더 컵에서는 유럽팀 캡틴을 맡아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 미겔 앙헬 히메네스 등과 함께 팀을 승리로 이끄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92][93] 1999년에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안았다.[87]
결국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한 채, 2007년 7월 16일 프로 골프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할 것을 발표했다.
은퇴 이듬해인 2008년 10월 6일, 스페인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44][45] 정밀 검사 결과,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46][88] 그는 총 4차례의 종양 절제 수술과 화학 요법 치료를 받았다.[95] 첫 수술은 10월 15일, 1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47], 10월 24일에는 6시간 반의 추가 수술 끝에 종양 대부분이 제거되었다.[48][49] 종양은 암성 희소돌기아교종으로 최종 확인되었다.[48]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재활을 시작했으며[50], 2008년 12월 9일 퇴원하여[51] 스페인 북부의 자택으로 돌아가 화학 요법 외래 치료를 이어갔다.[52] 그는 4차례의 화학 요법 치료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회복 의지를 다졌다.[53][54][55]
2009년 6월, 바예스테로스는 뇌종양 치료 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며 의료진과 응원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표했다.[56] 또한 암과 싸우는 환자들을 돕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젊은 골프 유망주들을 지원하기 위한 "세베 바예스테로스 재단"의 출범을 발표했다.[57]
하지만 오랜 투병 생활 끝에 2011년 5월 6일, 그의 가족은 바예스테로스의 신경학적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58] 그리고 다음 날인 2011년 5월 7일 새벽, 스페인 페드레냐의 자택에서 향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92][88][96] 그의 형 발도메로는 정확한 사망 시각이 CEST 오전 2시 10분이라고 확인해주었다.[59]
2. 4. 뇌종양 투병과 사망
2008년 10월 6일, 스페인의 마드리드 공항에서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정밀 검사 결과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88] 이후 총 네 차례에 걸쳐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고, 화학 요법 치료도 병행했다.[95] 한때는 골프를 다시 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호전되기도 했으나, 오랜 투병 끝에 2011년 5월 7일 스페인 칸타브리아 페드레냐에 있는 자택에서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92][88][96]그가 사망했을 당시 스페인에서는 오픈 데 에스파냐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유러피언 투어는 바르셀로나의 레알 클럽 데 골프 엘 프라트에서 열린 3라운드 경기 도중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60]
동시대 골프 선수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타이거 우즈는 발레스테로스를 "골프 역사상 가장 재능 있고 흥미로운 선수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고,[61] 리 웨스트우드는 "세베가 오늘날의 유럽 골프를 만들었다"고 말했다.[61] 필 미켈슨은 2010년 마스터스 토너먼트 우승자 자격으로 참석한 2011년 마스터스 챔피언 만찬에서, 건강 악화로 참석하지 못한 발레스테로스를 기리기 위해 스페인 요리를 메뉴로 선택했다. 주요리로는 해산물 파에야와 만체고 치즈를 곁들인 필레미뇽이 나왔다.[62]
골프계 외 다른 스포츠계에서도 추모 물결이 일었다. 마드리드 오픈 (테니스)에서는 라파엘 나달과 로저 페더러의 준결승 경기에 앞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발레스테로스와 절친했던 나달은 비디오 화면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63] 5월 8일 동부 표준시 기준 오후 3시 8분에는 미국의 3대 남자 골프 투어가 동시에 경기를 중단하고 묵념했다.[64]
5월 10일 아일랜드의 신문 ''아이리쉬 인디펜던트''는 "그는 명예, 존엄성, 스포츠맨십, 품위, 페어플레이, 충성심, 성실함, 그리고 마침내 대담하고 잊을 수 없으며 놀라운 용기라는 언어를 구사했다. 그의 스포츠나 조국을 위한 이보다 더 훌륭한 대사는 없었다"고 평가하며 그를 기렸다.[65]
화장 후 장례 미사는 고향 페드레냐의 산 페드로 교구 교회에서 열렸으며, 많은 조문객이 몰려 400석 규모의 교회 밖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었다.[66][67] 그의 유해는 이후 자택 부지에 뿌려질 예정이었다.[68]
미국 플로리다에 위치한 월드 골프 명예의 전당에서는 그가 사망한 날 스페인 국기를 게양하고 성조기를 조기로 내렸으며, 그의 사진과 검은 리본을 사물함에 걸어 추모했다.[69] 다음 주말 열린 2011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는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팀 클라크 (골퍼)의 요청으로 그의 모국 국기 대신 스페인 국기를 조기로 게양했다.[69][70] 클라크는 "세베는 나의 영웅이었다. 골프계 전체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그의 국기를 게양하는 것은 작은 헌사일 뿐이며, 그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71][72][73]
3.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 시절, 세베는 천재적인 플레이로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진 사라센이 평가했듯, 그의 스타일은 장타를 앞세운 공격적인 골프의 전형이었다.[87][89] 드라이버 샷은 때로 불안정했지만, 아이언 샷은 매우 정교하고 날카로웠으며 다양한 기술을 구사했다. 숲 속처럼 그린 공략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버디를 잡아내는 창의적인 플레이로 '일곱 빛깔 아이언 샷'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플레이를 상징하는 유명한 장면 중 하나는 1979년 디 오픈 마지막 날 나온 '주차장 샷'이다. 16번 홀에서 티샷이 오른쪽으로 크게 벗어나 임시 주차장의 자동차 밑으로 들어갔다. 규칙에 따라 차를 옮겨 샷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우승 경쟁 중인 그에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잔디도 없고 그린도 보이지 않는 맨땅 위에서 친 샷이 홀컵 약 4m 거리에 떨어졌고, 극적인 버디를 성공시키며 생애 첫 메이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88] 이 창의적인 플레이는 디 오픈 역사상 명장면으로 계속 회자된다.
어프로치와 벙커 샷 등 쇼트 게임 능력도 뛰어났으며, 특히 퍼팅 실력은 골프 역사상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다재다능함과 위기관리 능력에 대해 동시대 선수들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니클라우스에게는 퍼트가 있었죠. 저에게는 비거리가 있었고요. 골프의 신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한 가지 약점을 줍니다. 하지만 세베 외에는요." (리 트레비노)
- "톰 왓슨은 스윙을 완벽하게 하려고 생각하죠. 세베는 이기는 것만을 생각하고요." (바이런 넬슨)
- "세베는 거의 완벽한 골퍼였습니다. 트러블처럼 보여도 그에게는 그것이 난제가 아니었죠." (벤 크렌쇼)
- "다양하게 공을 다루는 기술은 타이거보다 훨씬 뛰어날 겁니다." (쿠라모토 마사히로)
1980년 마스터스 첫 우승 당시, 잭 니클라우스는 "그의 미래에는 많은 그린 재킷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뛰어난 재능과 밝은 미래를 예견했다.[87]
4. 유산 및 평가
세베 바예스테로스는 유럽 골프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닉 프라이스는 "유러피언 투어는 발레스테로스의 존재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93] 그는 1997년 라이더 컵에서 캡틴으로서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 미겔 앙헬 히메네스 등과 함께 유럽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92][93]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에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87]
그의 독창적이고 뛰어난 기술은 많은 동료 및 후배 골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타이거 우즈는 그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했고,[92] 닉 프라이스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30~40가지 기술밖에 가지지 못한데 반해, 그는 1만 가지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극찬했다.[92] 벤 크렌쇼 역시 "세베는 거의 완벽한 골퍼였습니다. 트러블처럼 보여도 그에게는 그것이 난제가 아니었죠"라고 평가했으며, 쿠라모토 마사히로는 "다양하게 공을 다루는 기술은 타이거보다 훨씬 뛰어날 겁니다"라고 언급했다. 그의 예측 불가능하고 창의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또한, 그는 강한 승부욕과 관중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닌 선수였다. 잭 니클라우스는 그를 "열정을 가지고 위대한 엔터테이너였다"고 회상했으며,[92] 바이런 넬슨은 "톰 왓슨은 스윙을 완벽하게 하려고 생각하죠. 세베는 이기는 것만을 생각하고요"라고 비교하며 그의 승부사 기질을 설명했다. 리 트레비노는 "니클라우스에게는 퍼트가 있었죠. 저에게는 비거리가 있었고요. 골프의 신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한 가지 약점을 줍니다. 하지만 세베 외에는요"라며 그의 완벽에 가까운 재능을 칭송했다.
2011년 그의 사망 소식에 많은 골프계 인사들이 애도를 표했다. 일본의 나카지마 쓰네유키는 라이벌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고,[87] 아오키 이사오와 오자키 마사시는 그와의 개인적인 추억을 이야기하며 안타까워했다.[97] 젊은 세대인 이시카와 료 역시 "옆 홀이나 숲 속에서의 리커버리 샷 등 전설적인 플레이를 동경했다"고 말하며 그의 플레이가 후배들에게 미친 영향을 보여주었다.[98] 일본의 다른 골퍼들 역시 그의 플레이를 동경하고 따라 했으며(마루야마 시게키), 그의 플레이가 마치 페라리처럼 약동감 넘치고 특별했다고(요코타 신이치) 회상했다. 마루야마 다이스케는 "이 사람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하며 그의 경이로운 능력에 감탄했다.
5. 한국과의 인연
세베 바예스테로스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매년 일본을 방문하며 일본 골프계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특히 일본 프로 골프 투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당시 한국의 골프 팬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7년에는 20세 7개월의 나이로 일본 오픈에서 우승하며, 당시 일본 투어 사상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우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이 기록은 2007년 이시카와 료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유지되었다[99][100]. 1978년에는 일본 오픈 2연패를 달성했으며, 이후에도 1988년 VISA 태평양 클럽 마스터스, 1977년과 1981년 던롭 피닉스 토너먼트 등 일본의 주요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며 일본 선수들에게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되었다[101]. 일본 투어에서의 마지막 우승은 1991년 국제 초청 골프·주니치 크라운즈였다.
또한, 일본의 유명 맥주 회사인 삿포로의 "검은 라벨" CM에 출연하는 등[87] 일본 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발생 5일 후인 3월 16일에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Japan, I am with you|일본, 나는 당신과 함께한다eng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일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87][92].
6. 주요 우승 기록
세베 바예스테로스는 프로 골프 선수로서 활동하는 동안 메이저 대회 5승을 포함하여 전 세계 다양한 투어에서 눈부신 우승 기록을 남겼다. 그는 PGA 투어에서 총 9번 우승했으며, 특히 유러피언 투어에서는 역대 최다인 50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 외에도 일본 프로 골프 투어, 호주 프로 골프 투어, 뉴질랜드 골프 서킷 등 여러 국제 투어에서도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6. 1. 메이저 대회
세베 바예스테로스는 메이저 대회에서 총 5번 우승했다.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2회 (1980년, 1983년),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 3회 (1979년, 1984년, 1988년) 우승을 차지했다.'''메이저 대회 우승 (5회)'''
| 연도 | 선수권 대회 | 54홀 | 우승 스코어 | 차이 | 2위 |
|---|---|---|---|---|---|
| 1979 | 디 오픈 챔피언십 | 2타차 | −1 (73-65-75-70=283) | 3 strokes | 미국 잭 니클라우스, 미국 벤 크렌쇼 |
| 1980 | 마스터스 토너먼트 | 7타 리드 | −13 (66-69-68-72=275) | 4 strokes | 미국 기비 길버트, 오스트레일리아 잭 뉴턴 |
| 1983 | 마스터스 토너먼트 (2) | 1타차 | −8 (68-70-73-69=280) | 4 strokes | 미국 벤 크렌쇼, 미국 톰 키트 |
| 1984 | 디 오픈 챔피언십 (2) | 2타차 | −12 (69-68-70-69=276) | 2 strokes | 서독 베른하르트 랑거, 미국 톰 왓슨 |
| 1988 | 디 오픈 챔피언십 (3) | 2타차 | −11 (67-71-70-65=273) | 2 strokes | 짐바브웨 닉 프라이스 |
'''메이저 대회 결과'''
| 대회 |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2007 |
|---|---|---|---|---|---|---|---|---|---|---|---|---|---|---|---|---|---|---|---|---|---|---|---|---|---|---|---|---|---|---|---|---|---|
| 마스터스 토너먼트 | T33 | T18 | T12 | 1 | CUT | T3 | 1 | CUT | T2 | 4 | T2 | T11 | 5 | T7 | T22 | T59 | T11 | T18 | T45 | 43 | CUT | CUT | CUT | CUT | CUT | CUT | CUT | CUT | |||||
| US 오픈 | T16 | CUT | DQ | T41 | CUT | T4 | T30 | T5 | T24 | 3 | T32 | T43 | T33 | CUT | T23 | CUT | T18 | CUT | |||||||||||||||
| 디 오픈 챔피언십 | CUT | T2 | T15 | T17 | 1 | T19 | T39 | T13 | T6 | 1 | T39 | T6 | T50 | 1 | T77 | CUT | T9 | CUT | T27 | T38 | T40 | CUT | CUT | CUT | CUT | CUT | CUT | CUT | |||||
| PGA 챔피언십 | T33 | 13 | T27 | 5 | T32 | CUT | T10 | CUT | T12 | CUT | T23 | CUT | CUT |
'''범례'''
- '''1''' = 우승
- '''2'''–'''10''' = 10위 이내
- CUT = 컷 탈락
- DQ = 실격
- "T" = 공동 순위
- 빈칸 = 불참
'''메이저 대회 요약'''
| 대회 | 우승 | 2위 | 3위 | 5위권 | 10위권 | 25위권 | 참가 횟수 | 컷 통과 |
|---|---|---|---|---|---|---|---|---|
| 마스터스 토너먼트 | 2 | 2 | 1 | 7 | 8 | 14 | 28 | 18 |
| US 오픈 | 0 | 0 | 1 | 3 | 3 | 7 | 18 | 12 |
| 디 오픈 챔피언십 | 3 | 1 | 0 | 4 | 7 | 11 | 28 | 18 |
| PGA 챔피언십 | 0 | 0 | 0 | 1 | 2 | 5 | 13 | 8 |
| 합계 | 5 | 3 | 2 | 15 | 20 | 37 | 87 | 56 |
- 최다 연속 컷 통과: 10회 (1984년 US 오픈 – 1986년 디 오픈 챔피언십)
- 최장 연속 10위권: 4회 (1984년 디 오픈 챔피언십 – 1985년 US 오픈)
6. 2. PGA 투어
세베 바예스테로스는 PGA 투어에서 총 9번 우승했으며, 이 중 5승은 메이저 대회 우승이다.메이저 선수권 대회 우승은 '''굵은 글씨'''와 연한 갈색 배경으로 표시한다.
| 번호 | 날짜 | 토너먼트 | 우승 스코어 | 승리 차 | 준우승 |
|---|---|---|---|---|---|
| 1 | 1978년 4월 2일 | 그레이터 그린스보로 오픈 | −6 (72-75-69-66=282) | 1 스트로크 | 미국 잭 레너, 미국 퍼지 조엘러 |
| 2 | 1979년 7월 21일 | 디 오픈 챔피언십 | −1 (73-65-75-70=283) | 3 스트로크 | 미국 벤 크렌쇼, 미국 잭 니클라우스 |
| 3 | 1980년 4월 13일 | 마스터스 토너먼트 | −13 (66-69-68-72=275) | 4 스트로크 | 미국 기비 길버트, 호주 잭 뉴턴 |
| 4 | 1983년 4월 11일 | 마스터스 토너먼트 (2) | −8 (68-70-73-69=280) | 4 스트로크 | 미국 벤 크렌쇼, 미국 톰 키트 |
| 5 | 1983년 6월 12일 | 매뉴팩처러스 해노버 웨스트체스터 클래식 | −8 (69-67-70-70=276) | 2 스트로크 | 미국 앤디 빈, 미국 크레이그 스태들러 |
| 6 | 1984년 7월 22일 | 디 오픈 챔피언십 (2) | −12 (69-68-70-69=276) | 2 스트로크 | 서독 베른하르트 랑거, 미국 톰 왓슨 |
| 7 | 1985년 3월 17일 | USF&G 클래식 | −11 (68-69-68=205)* | 2 스트로크 | 미국 피터 제이콥슨, 미국 존 마페이 |
| 8 | 1988년 6월 12일 | 매뉴팩처러스 해노버 웨스트체스터 클래식 (2) | −8 (72-68-69-67=276) | 플레이오프 | 남아프리카 공화국 데이비드 프로스트, 미국 켄 그린, 호주 그렉 노먼 |
| 9 | 1988년 7월 17일 | 디 오픈 챔피언십 (3) | −11 (67-71-70-65=273) | 2 스트로크 | 짐바브웨 닉 프라이스 |
*''참고: 1985 USF&G 클래식은 악천후로 인해 54홀로 축소되었다.''[83]
'''PGA 투어 플레이오프 기록 (1승 2패)'''
플레이오프 승리는 연한 녹색 배경, 패배는 연한 분홍색 배경으로 표시한다.
| 번호 | 연도 | 토너먼트 | 상대 | 결과 |
|---|---|---|---|---|
| 1 | 1987년 | 마스터스 토너먼트 | 미국 래리 미즈, 호주 그렉 노먼 | 미즈가 두 번째 연장 홀에서 버디로 우승 바예스테로스는 첫 번째 홀에서 파로 탈락 |
| 2 | 1987 | 매뉴팩처러스 해노버 웨스트체스터 클래식 | 미국 J. C. 스니드 | 첫 번째 연장 홀에서 파로 패배 |
| 3 | 1988년 | 매뉴팩처러스 해노버 웨스트체스터 클래식 | 남아프리카 공화국 데이비드 프로스트, 미국 켄 그린, 호주 그렉 노먼 | 첫 번째 연장 홀에서 버디로 우승 |
6. 3. 유러피언 투어
토니 존스톤, 샘 토런스,키스 워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