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결정에 따라 198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사건이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경제적 어려움과 국제적 상황을 고려하여 철수를 결정하고, 국내외적 요인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철수 결정 배경에는 개혁·개방 정책, 민족 화해 정책 등이 있었으나, 미국의 이중적인 태도와 무자헤딘의 공격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제네바 협정을 통해 철수가 이루어졌지만, 이후 나지불라 정권의 붕괴와 탈레반의 등장을 초래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89년 아프가니스탄 - 아프가니스탄 내전 (1989년~1992년)
    1989년 소련군 철수 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나지불라 정부와 무자헤딘 반군 간에 벌어진 내전은 정부 붕괴와 무자헤딘 파벌 간 권력 투쟁으로 이어져 아프가니스탄의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 1988년 아프가니스탄 - 3234고지 전투
    3234고지 전투는 1988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소련 공수부대가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과 격전을 벌인 사건으로, 소련군은 고지를 사수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 1988년 아프가니스탄 - 1988년 하계 올림픽 아프가니스탄 선수단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아프가니스탄 선수단은 복싱, 레슬링, 육상, 역도 종목에 5명의 남성 선수가 출전했으나, 레슬링과 수영에서 모두 예선 라운드에서 탈락했다.
  • 아프가니스탄이 참가한 전투 - 3234고지 전투
    3234고지 전투는 1988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소련 공수부대가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과 격전을 벌인 사건으로, 소련군은 고지를 사수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 아프가니스탄이 참가한 전투 - 2001년 헤라트 봉기
    2001년 헤라트 봉기는 2001년 11월 이란 특수 부대와 북부 동맹 민병대가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고 헤라트를 점령한 사건이다.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최종 단계
시기1988년 5월 15일 – 1989년 2월 15일
장소중앙아시아 및 남아시아
결과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의 승리
결과 상세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완료
아프가니스탄 내전 발발
교전 세력
교전 1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교전 2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 자미아트에 이슬라미
* 헤즈베 이슬라미 굴부딘
* 헤즈베 이슬라미 칼리스
지원 세력 (무자헤딘)


지휘관 및 지도자
소련군보리스 그로모프
발렌틴 바렌니코프
무자헤딘아흐마드 샤 마수드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병력 규모
소련군100,283명
무자헤딘불명
피해 규모
소련군523명 사망
무자헤딘1,200여명 사망 (추정)
이미지
[[BTR-80]] 장갑차로 구성된 소련군 마지막 부대가 [[아프가니스탄-우즈베키스탄 우호의 다리|헤라탄 다리]]를 통해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즈베크 SSR]]로 진입하는 모습 (1989년 2월 15일)
BTR-80 장갑차로 구성된 소련군 마지막 부대가 헤라탄 다리를 통해 우즈베크 SSR로 진입하는 모습 (1989년 2월 15일)

2. 소련의 철수 결정 배경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어려운 경제적, 국제적 상황이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으로 더욱 복잡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결정하고 1985년 10월까지 정치국의 지지를 얻었다.[3][4] 그는 이전의 소련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품위 있는 철수만이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6]

2. 1.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정책 변화

고르바초프는 1985년 10월 정치국의 지지를 얻어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결정했다.[3][4] 그는 소련의 어려운 경제적, 국제적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정치국을 자신의 동맹들로 확장하여 소련 정부 최고위층에서 지지 기반을 강화했다.[5]

고르바초프는 국내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후 철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국내적으로는 군산 복합체, 군 지휘부, 정보 기관을 만족시켜야 했다.[6] (후에 고르바초프는 유엔 특사 디에고 코르도베스에게 전쟁 로비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코르도베스는 고르바초프의 고문들이 이 발언에 만장일치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미국, 파키스탄과의 의견 불일치와 카불의 현실이 철수를 지연시키는 데 더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 모두 동의했다고 회상한다).[5] 국외적으로는 제3세계 동맹국들의 눈에 명성을 유지하고자 했으며, 이전의 소련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품위 있는 철수만이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6]

소련은 1988-9년 최종 철수할 때까지 아프가니스탄 내 안정을 창출해야 했다.[4][5] 고르바초프는 철수에 필요한 조건으로 내부 안정, 제한된 외세 개입,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공산주의 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 이 세 가지 목표를 간주했다.[4]

2. 2. 국내외적 요인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과 국제적 상황이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으로 더욱 복잡해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결정하고, [1985년 10월까지] 정치국의 지지를 얻었다".[3][4] 그는 나중에 자신의 동맹들로 정치국을 확장하여 소련 정부 최고위층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더욱 강화했다.[5]

국내 및 국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르바초프는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둔 후 철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국내적으로 고르바초프는 매파적인 군산 복합체, 군 지휘부, 정보 기관을 만족시켜야 했다.[6] (후에 고르바초프는 유엔 특사 [https://www.nytimes.com/2014/05/30/world/americas/diego-cordovez-envoy-and-conflict-mediator-dies-at-78.html?_r=0 디에고 코르도베스]에게 전쟁 로비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코르도베스는 고르바초프의 고문들이 이 발언에 대해 만장일치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미국, 파키스탄과의 의견 불일치와 카불의 현실이 철수를 지연시키는 데 더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 모두 동의했다고 회상한다).[5]

국외적으로 고르바초프는 제3세계 동맹국들의 눈에 명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는 이전의 소련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품위 있는 철수만이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6] 이는 소련이 1988-9년 최종 철수할 때까지 시도할 아프가니스탄 내의 안정을 창출해야 했다.[4][5] 고르바초프는 철수에 필요한 조건으로 세 가지 목표, 즉 내부 안정, 제한된 외세 개입,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공산주의 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간주했다.[4]

3. 민족 화해 정책과 그 한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사망 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 의지는 약화되었다.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기에 부족했고,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DRA)의 영토 손실을 막는 정도였다.[7]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철수 절차를 시작하며 무함마드 나지불라 아흐마드자이를 아프가니스탄 공산당 서기장으로 임명, 협상을 통한 해결을 모색했다.[7][6]

소련은 "반군 지휘관 포섭을 통한 평화 정착"을 강조하는 민족 화해 정책을 추진했다.[4] 나지불라 정부를 지원하고, 대규모 원조와 군사 시설 이전을 약속했다.[4] 나지불라는 정부 권력을 강화했지만, 반군 세력을 통합하는 데는 실패했다.

소련군과 나지불라 정부는 반군 및 부족 지도자와 협력하려 했으나, 소련 중간급 장교들의 인식 부족과 아프가니스탄군의 적대적 태도는 걸림돌이었다.[4]

소련은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 했으나, 군사 작전과 무장 해제 요구 등으로 인해 공식적인 휴전은 어려웠다.[4]

3. 1. 나지불라 정권의 등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바브라크 카르말 대신 무함마드 나지불라 아흐마드자이를 아프가니스탄 공산당 서기장으로 임명했다.[7][6] 소련은 나지불라가 소련의 개입 없이도 통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물로 판단했다.[7][6]

소련은 나지불라 정부가 반군 세력과 관계를 맺도록 지원하고, 많은 원조를 보냈으며, 소련군 철수 시 "군사 기반 시설 전부를 DRA군에 넘겨줄 것"을 약속했다.[4] 나지불라는 국가 내에서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지만, 반대 세력을 통합하는 데는 실패했다.[4]

소련은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의 협력을 통해 반군과의 관계 개선에 진전을 이루었다.[4] 그러나, 나지불라는 "특정 채널을 통해" 다른 반군 지도자들과도 정기적으로 접촉하고 있었다.[5]

3. 2. 정책의 실패와 소련의 실망

나지불라는 카불과 정부 기구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지만,[4] PDPA 내부의 분열은 제외하고, 반대파를 어떤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정부에 통합하지 못했다. 대신 "그때까지 정부를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던 저명한 비 PDPA 인물들에게 비교적 무력한 직책"을 주었다.[5]

1987년 초부터 소련은 처음 구상했던 형태의 민족 화해 정책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PDPA의 지도력 우위와 나지불라가 당 지도자로서 원하는 정체성이 소련 지도부에게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지만, 이제 "정치국의 새로운 합의는 소련군이 떠난 후 PDPA가 권력의 한 정치 세력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안드레이 그로미코조차 화해가 PDPA가 주도적 지위를 잃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데 동의했다".[4]

4. 미국의 개입과 제네바 협정

소련은 국가 화해 정책이 실패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면서, 파키스탄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간섭을 제한하는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했다.[4] 1987년 소련 외교관들은 미국을 설득하여 소련군 철수 이후 무자헤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중단하고,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 아프가니스탄 정치의 주요 세력으로 남도록 하는 권력 분점 제안에 합의를 시도했으나, 미국과의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 국무장관 조지 슐츠의 발언으로 소련은 미국의 협조를 기대했으나, 레이건 대통령은 무기 수송 중단에 동의하지 않았다.[4] 미국은 계속 모순된 입장을 보였고, 1988년 2월 소련의 철군 발표에도 미국의 태도는 변하지 않아 소련의 협상력만 약화되었다.[4][5]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독자적인 철수보다는 국제 협약의 틀 내에서 철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바딤 자글라딘은 중거리 핵전력 조약 (INF) 등 여러 과정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었다고 회상했다.[5] 나지불라는 제네바 협정에 동의하도록 설득하기 어려웠지만, 소련의 철수 후 지원 확대 약속으로 안심했다.[5]

4. 1. 미국의 이중적 태도

소련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한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1987년 소련 외교관들은 미국에 소련군 철수 직후 무자헤딘에 대한 무기 지원 중단과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아프가니스탄 정치 주도권을 보장하는 권력 분점 제안에 합의하도록 설득하려 했다.[4]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의 발언으로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소련의 "선적재" 철군(대부분 군대를 철수 초기에 철수하여 재배치를 복잡하게 하는 것) 시 무자헤딘에 대한 군사 물자 수송을 즉시 중단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5] 그러나 이는 오해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무기 수송 중단에 동의하지 않았고,[4] 백악관미국 국무부는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엇갈린 입장을 보였다.[5]

1988년 2월, 소련은 미국의 군사 물자 수송 중단을 유도하고자 미국이 수년간 요구해 온 군사 철수 시작 시점을 발표했지만, 미국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고 소련의 협상력만 약화되었다.[4][5]

결국 1988년 4월 14일,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미국은 협정에 따른 군사 원조 중단 의무가 없었고, 무기 수송 통로였던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으로의 국경 간 무기 흐름을 막아야 했다.

4. 2. 제네바 협정 체결

1988년 4월 14일, 소련미국이 보증인으로 참여하고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사이에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소련군의 철수와 파키스탄 및 아프가니스탄 간의 상호 불간섭 조항을 명시했다.[5] 그러나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군사 원조를 중단할 의무는 없었다.[5] 다만, 군사 원조가 흘러 들어가는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으로의 국경 간 무기 흐름을 막아야 했다.

5. 소련군의 철수 과정

1988년,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 과정에서 아프간 무자헤딘의 공격이 계속되었고, 소련은 유엔에 제네바 협정 위반 사항을 보고하며 미국의 협조를 요청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4]

나지불라 정부의 안보 상황이 악화되자 소련 내부에서는 정책 결정에 혼선이 빚어졌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휴전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KGB와 셰바르드나제는 나지불라 정권의 안정을 위해 마수드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4] 1988년 11월, 고르바초프는 철수 중단 명령을 내렸지만, 1989년 1월 철수를 재개하면서 태풍 작전을 통해 마수드를 공격했다.[4]

1989년 2월 15일, 제40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마지막으로 "우정의 다리"를 건넌 그로모프 장군은 소련 TV 인터뷰에서 전쟁을 일으킨 지도부를 비난했다.[9]

5. 1. 철군 중 공격과 갈등

소련군의 철수 과정에서 아프간 무자헤딘의 공격은 계속되었다.[4] 소련은 제네바 협정 위반 사항을 유엔에 반복적으로 보고하고, 미국에 무자헤딘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요청했지만, 소련의 철수 의지와 미국의 통제력 부재로 인해 효과가 없었다.[4]

무자헤딘의 공격과 나지불라 정부의 안보 상황 악화는 소련 내 정책 결정에 혼선을 야기했다. 소련군이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휴전을 맺었음에도, KGB와 셰바르드나제는 나지불라 정권의 안정을 위해 마수드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4] 야코블레프가 1988년 가을 정치국에서 물러난 후, 고르바초프는 셰바르드나제와 KGB의 정책 노선을 채택하여 1988년 11월 5일 철수 중단 명령을 내렸다.[4] 1989년 1월, 소련군은 철수를 재개하면서 마수드를 상대로 태풍 작전을 시작했다.[4]

5. 2. 철수 완료

나지불라 정부의 안보 상황이 악화되면서 소련 내에서는 정책적 의견 불일치가 발생했다. 소련군은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실질적인 휴전을 맺었지만, KGB와 셰바르드나제는 고르바초프에게 나지불라의 생존을 위해 마수드 공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소련군 지휘관들은 나지불라가 소련군을 자신의 안보를 위해 이용하려 한다고 비판했다.[4]

1988년 가을 야코블레프가 정치국에서 물러난 후, 고르바초프는 셰바르드나제-KGB 정책 노선을 채택했고, 11월 5일에 철수 중단 명령이 내려졌다.[4] 12월에 고르바초프는 철수를 재개했지만, 마수드를 상대로 작전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1989년 1월, 소련군 철수가 계속되었고, 1월 23일 태풍 작전이 시작되었다.[4]

1989년 2월 15일, 제40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그로모프 장군은 아프가니스탄과 소련 간의 "우정의 다리"를 마지막으로 건넜다. 그는 소련 TV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뒷수습을 강요하는 나라의 지도부"를 비난했다.[9]

6. 철수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아프가니스탄은 혼란스러웠다. 소련은 나지불라 정부를 지원했지만,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지원을 중단하면서 나지불라 정권이 무너지고 탈레반이 등장하게 되었다.

6. 1. 나지불라 정권의 붕괴

소련은 정규군 철수 이후에도 나지불라 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에 달하는 지원을 보냈으며, 여기에는 군용기(MiG-27)와 스커드 미사일이 포함되었다.[6] 주로 이러한 지원 덕분에 나지불라 정부는 CIA와 국무부의 예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했다. 소련 군대가 철수한 후 무자헤딘은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고,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2년 봄까지 나지불라를 축출하는 데 실패했다.[6]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소련(나중에는 러시아 연방의 보리스 옐친)은 아프간 동맹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이는 국민민주당(이전에는 PDPA로 알려짐)과 무자헤딘과의 전투 및 내부 갈등으로 이미 약화된 군대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1990년 아프가니스탄 쿠데타 미수 이후, 육군은 (이미 자원 부족과 높은 탈영률을 겪고 있었다) 숙청되었다. 궁극적으로 소련의 지원 중단과 이로 인한 불안정은 무자헤딘이 카불을 점령하도록 만들었다.[7] [10] 나지불라는 자신의 당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었고, 이후 무자헤딘은 안정적인 연립 정부를 구성하려 했으나 실패했다.[7] 마수드굴부딘 헤크마티아르 간의 불화와 내분은 결국 탈레반의 부상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6. 2. 탈레반의 등장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소련은 나지불라 정부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였다. 여기에는 군용기(미코얀 MiG-27)와 스커드 미사일을 포함한 수십억 달러 규모의 지원이 포함되었다.[6] 이러한 지원 덕분에 나지불라 정부는 CIA와 국무부의 예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했다.[6] 그러나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소련(러시아 연방의 보리스 옐친)은 아프가니스탄 동맹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이는 국민민주당과 무자헤딘과의 전투 및 내부 갈등으로 약화된 군대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7] 결국 소련의 지원 중단과 이로 인한 불안정은 무자헤딘의 카불 점령으로 이어졌다.[7][10] 나지불라는 자신의 당에서 축출되었고, 이후 무자헤딘은 안정적인 연립 정부를 구성하려 했으나 실패했다.[7] 마수드굴부딘 헤크마티아르 간의 불화와 내분은 결국 탈레반의 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7. 한국의 관점과 평가

한국의 관점에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냉전 시대의 복잡한 국제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조

[1] 뉴스 How Not to End a War https://www.washingt[...] 2007-07-17
[2] 웹사이트 The anniversary of the withdrawal of the Red Army from Afghanistan https://ariananews.c[...] 2018-09-18
[3] 서적 War in Afghanistan: A Short History of 80 Wars and Conflicts in Afghanistan and the Northwest Frontier 1839 to 2011 Rosenberg Publishing
[4] 서적 A Long Goodbye: The Soviet Withdrawal from Afghanistan Harvard University Press
[5] 서적 Out of Afghanistan: The Inside Story of the Soviet Withdrawal Oxford University Press (US)
[6] 서적 Conflict in Afghanistan: Studies in Asymetric Warfare (1) Routledge
[7] 서적 Afghanistan: A Cultural and Political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8] 서적 The Main Enemy: The Inside Story of the CIA's Final Showdown with the KGB Presidio
[9] 웹사이트 Главный вывод Бориса Громова http://www.mk.ru/soc[...] 2017-05-07
[10]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defac.ac.[...] 2008-02-12
[11] 뉴스 How Not to End a War http://www.washingto[...] 2007-07-1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