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 개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1906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 가입하여 경력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그는 당에서 주요 직책을 맡으며 권력을 강화했고, 1964년 니키타 흐루쇼프를 실각시킨 후 소비에트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강경한 대외 정책을 펼쳤으며, 미국과의 데탕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소련 경제는 침체되었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브레즈네프는 1982년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 이름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
| 원어 이름 | Леонид Брежнев러시아어 |
| 출생일 | 1906년 12월 19일 |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에카테리노슬라프 현 카멘스코예 (현재의 우크라이나 카미얀시케) |
| 사망일 | 1982년 11월 10일 |
| 사망지 |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모스크바 주 자레치예 |
| 안장 장소 | 모스크바 크렘린 공동 매장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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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 | 우크라이나인 |
|---|
| 직업 | 야금 기술자 공무원 |
|---|---|
| 소속 정당 | CPSU(1929–1982) |
| 거주지 | 자레치예, 모스크바 |
| 충성 | 소비에트 연방 |
| 군 복무 | 붉은 군대 소련군 |
| 복무 기간 | 1941–1982 |
| 계급 | 소비에트 연방 원수(1976–1982) |
| 지휘 | 소비에트 연방군 |
|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 배우자 | 빅토리아 데니소바(1928년 결혼) |
|---|---|
| 자녀 | 갈리나 브레즈네바 (딸) 유리 브레즈네프 (아들) |
| 종교 | 무신론 |
| 훈장 | 소비에트 연방 영웅(4회) 사회주의 노동 영웅 전체 수상 및 훈장 목록 |
|---|
| 직책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제1서기 1964년 10월 14일 ~ 1966년 4월 8일) |
|---|---|
| 임기 시작 | 1964년 10월 14일 |
| 임기 종료 | 1982년 11월 10일 |
| 이전 서기장 | 니키타 흐루쇼프 (제1서기) |
| 후임 서기장 | 유리 안드로포프 |
| 총리 | 알렉세이 코시긴 니콜라이 티호노프 |
| 직책 | 소련 최고 소비에트 연방 간부회 의장 |
|---|---|
| 임기 시작 | 1977년 6월 16일 |
| 임기 종료 | 1982년 11월 10일 |
| 이전 의장 |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
| 후임 의장 | 바실리 쿠즈네초프 (대행), 유리 안드로포프 |
| 부의장 | 바실리 쿠즈네초프 |
| 임기 시작 | 1960년 5월 7일 |
|---|---|
| 임기 종료 | 1964년 7월 15일 |
| 이전 의장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
| 후임 의장 | 아나스타스 미코얀 |
| 직책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
| 임기 시작 | 1964년 7월 15일 |
| 임기 종료 | 1964년 10월 14일 |
| 이전 서기 | 플로르 코즐로프 |
| 후임 서기 |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
| 직책 |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
|---|---|
| 임기 시작 | 1955년 5월 8일 |
| 임기 종료 | 1956년 3월 6일 |
| 이전 서기 | 판텔레이몬 포노마렌코 |
| 후임 서기 | I. 야코블레프 |
| 직책 | 몰다비아 공산당 제1서기 |
|---|---|
| 임기 시작 | 1950년 11월 3일 |
| 임기 종료 | 1952년 4월 16일 |
| 이전 서기 | 니콜라에 코발 |
| 후임 서기 | 드미트리 글라드키 |
| 다른 직책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 (1956년 2월 27일 – 1982년 11월 10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 정회원 (1957년 6월 29일 – 1982년 11월 10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 후보 (1952년 10월 16일 – 1953년 3월 5일, 1956년 2월 27일 - 1957년 6월 29일) |
|---|---|
| 우크라이나 공산당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 위원회 제1서기 | 임기 시작: 1947년 11월 27일 임기 종료: 1950년 6월 이전 서기: P. 나이데노프 후임 서기: A. 키릴렌코 |
| 우크라이나 공산당 자포로제 주 위원회 제1서기 | 임기 시작: 1946년 8월 30일 임기 종료: 1947년 11월 22일 이전 서기: F. 마튜신 후임 서기: G. 에뉴틴 |
| 주요 사건 |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브레즈네프 독트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냉전 데탕트 1977년 소련 헌법 브레즈네프의 개인 숭배 브레즈네프의 삼부작 불도저 전시회 바이칼-아무르 철도 식량 계획 소련 반체제 운동 시니아프스키-다니엘 재판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소련 정신의학의 정치적 남용 암살 시도 그림자 경제 정체 시대 1965년 소련 경제 개혁 1973년 소련 경제 개혁 1979년 소련 경제 개혁 |
| 사망과 장례 | 사망과 국장 |
| 유산 | 유산 |
-
카미얀스케 출신 -
베라 브레즈네바
베라 브레즈네바는 우크라이나 출신 가수로, 걸 그룹 누 비르고스 멤버 활동 후 솔로 데뷔 및 배우 활동을 했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며 라트비아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어로 노래를 발표하며 활동하고 있다. -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영웅 -
토도르 지프코프
토도르 지프코프는 불가리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국가 원수로서, 1954년부터 1989년까지 불가리아를 통치하며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의 전환을 추진했으나, 1980년대 후반 경제 침체와 민족 동화 정책으로 비판받아 실각했다. -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영웅 -
표도르 톨부힌
표도르 톨부힌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발칸 반도 공세 등에서 활약한 소련의 군인이자 소련 원수이다. -
카자흐스탄 공산당의 정치인 -
겐나디 콜빈
겐나디 콜빈은 소련의 정치인이자 공산당 간부로서, 니즈니타길 공장 기술자에서 출발하여 스베르들롭스크와 울리야놉스크 지역의 당 책임자를 거쳐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로 임명되었으나 젤토크산 시위로 논란을 겪었고, 이후 모스크바로 전출되어 소련 최고 소비에트 부대표 및 인민통제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다 모든 정치적 직위에서 사임 후 사망했다. -
카자흐스탄 공산당의 정치인 -
딘무하메드 코나예프
딘무하메드 코나예프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제1서기를 지내며 공화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고 소련의 3대 경제 대국으로 부상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이후 해임되어 알마티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2. 인물과 경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독재 정치 비판, 스탈린 대숙청 희생자 명예 회복, 소비에트 연방의 지적·문화적 정책의 신중한 장려를 지지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뒤에는 즉시 반대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1965년 5월 대독일 전승 20주년 기념 연설에서 처음으로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언급했고, 1966년 제1서기를 스탈린의 직함인 서기장으로 개칭했다. 1966년 작가 율리 다니엘과 안드레이 시냡스키의 재판은 억압적인 문화 정책 회귀의 상징이었다. 유리 안드로포프 지휘 아래 국가보안위원회는 1930년대와 1940년대 같은 정치 숙청을 반복하지 않았지만, 스탈린 시절 영향력을 대부분 회복했다.
그는 1906년 러시아 제국 카멘스코예(지금의 우크라이나 카미얀스케)에서 태어나, 1931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 입당하여, 1964년 흐루쇼프 실각 이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서기장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개혁은 브레즈네프 정권 최초의 위기를 불러왔다. 브레즈네프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을 투입해 프라하의 봄을 강경 진압했다. 이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알려졌다.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 관계는 1960년대 초부터 대립이 시작돼 악화되었다. 1969년 우수리강 전바오섬에서 양국 군대가 무력 충돌하여 중소국경분쟁이 발생했다. 한편 베트남 전쟁 중 북베트남을 지원했다. 1962년 베오그라드 명예 시민이 되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 국가 원수인 닉슨과 브레즈네프는 제1차 전략 무기 제한 협정에 조인했다. 1979년 6월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을 진행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브레즈네프 정권의 치명적인 결정이었다.
1982년 3월 심장 발작을 일으켜 건강이 악화되었고, 1982년 11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해 붉은 광장 원훈 무덤에 매장되었다.
2.1. 성장 과정과 권력 장악 (1906년 ~ 1964년)
1906년 12월 19일, 러시아 제국 카멘스코예(지금의 우크라이나 카미얀스케)에서 금속 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 일리야 야코블레비치 브레즈네프와 어머니 나탈리야 데니소브나 마잘로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1년 가족과 함께 쿠르스크로 이주해 15세 때부터 그곳의 제철소에서 근무하였다.
1923년 콤소몰에 가입하였고, 1931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5년 드니프로제르진스크 야금 교육원을 졸업하고 우크라이나 동부의 제철소 기사가 되었다.
1935년 소비에트 연방 육군에 입대, 1936년 말 드니프로제르진스크 야금 교육원 교장이 되었다. 193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간부, 몰도바 당 위원회 제1서기, 1939년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현재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주 당위원회 서기에 올라 방위 산업을 조직하였다.
그는 러시아 혁명 이전에 성인이 아니었던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원의 첫 세대였고,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 공산당 주도권 다툼에는 너무 젊어 참가할 수 없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시기,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많은 젊은 공산당원이 순수한 스탈린주의자로서 성장하였다.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당과 국가 요직을 차지했다.
1941년 6월 독소 전쟁 발발 후,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가 독일군에 점령당했지만, 브레즈네프는 도시 산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군 정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0월 여단 인민 위원으로 승진, 남부 방면 군정치지도부 차장이 되었다.
1942년 우크라이나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캅카스 전선 정치 지도부 차장으로 캅카스에 파견되었다. 1943년 4월 제18군 정치 부장이 되었고, 같은 해 말 붉은 군대가 주도권을 회복하며 제18군은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에 편입, 우크라이나를 되찾고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전선군 상급 정치 위원은 니키타 흐루쇼프였으며, 그는 이후 브레즈네프의 중요 후원자가 된다. 유럽 전선 종전 후, 제4우크라이나 방면 군정치지도부 부장으로 프라하에 입성했다.
1946년 8월 소장 계급으로 소련군에서 전역, 군사령관이 아닌 정치 위원으로 대조국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재건 계획에 종사,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 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50년 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취임하였다. 1952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및 최고 회의 간부 회의 일원이 되었다.
브레즈네프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 몰도바, 카자흐스탄 등에서 쌓은 인맥을 권력 강화에 이용하였는데, 콘스탄틴 체르넨코, 딘무하메드 코나예프, 니콜라이 티호노프 등이 대표적이다.
2.2. 흐루쇼프와의 관계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사망한 후, 당 중앙위원회가 폐지되고 규모가 축소된 정치국이 재구성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원이 되지는 못했지만, 중장 계급과 함께 소련군 정치총국 제1차장에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후원자인 니키타 흐루쇼프의 인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1955년에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어 카자흐스탄의 개척 사업을 지휘했다.
1956년 2월,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후보 겸 서기로서 방위산업, 우주 계획, 중공업 및 수도 건설 지휘 임무를 맡았다. 1957년 6월에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이끄는 스탈린의 원로 그룹(게오르기 말렌코프, 라자리 카가노비치 등)과 흐루쇼프 사이의 당 지도권 다툼에서 흐루쇼프를 지지했다. 원로 그룹을 제거한 후 브레즈네프는 정식으로 정치국원이 되었다.
1959년 브레즈네프는 소비에트 연방 최고 회의 간부회 부의장이 되었고, 1960년 의장에 취임해 명목상의 국가 원수가 되었다. 실제 권력은 당의 제1서기인 흐루쇼프에게 있었지만, 의장의 지위는 해외 여행을 가능하게 했다. 그는 값비싼 서구 의류와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이는 후에 그에 대한 악평으로 이어졌다.
1962년까지 흐루쇼프의 당 지도자로서의 지위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이가 들면서 지도력 저하가 다른 지도부의 신뢰를 약화시켰고, 그의 지위도 불안정해졌다. 또한 소련 경제 문제의 악화가 흐루쇼프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켰다. 표면적으로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에게 충실했지만, 1963년 흐루쇼프 축출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결국 흐루쇼프는 1964년 10월 13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정으로 실각하였고, 브레즈네프는 소비에트 공산당 제1서기, 알렉세이 코시긴은 수상에 올랐다. 흐루쇼프와 친했던 아나스타스 미코얀도 1965년에 사실상 실각해, 그 자리를 니콜라이 포드고르니가 대신하였다.
2.3. 공산당 지도자 (1964년 ~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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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 흐루쇼프의 실각 이후, 브레즈네프는 1964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18년간 소련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있었다. 그는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국가 원수) 니콜라이 포드고르니와 함께 트로이카 체제(집단 지도 체제)를 펼쳤지만, 1977년부터는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을 겸임했다. 소련 원수이기도 하다.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 시대에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 스탈린 대숙청 희생자 명예 회복, 소비에트 연방의 지적 및 문화 정책의 신중한 자유화를 지지했다. 하지만 지도자가 되자 즉시 반대로 행동했다. 1965년 5월 대독일 전승 20주년 기념식에서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언급했고, 1966년 제1서기를 스탈린의 직함인 서기장으로 개칭했다. 1966년 작가 유리 다니엘과 안드레이 시냐프스키의 재판은 억압적 문화 정책 회귀를 상징했다. 유리 안드로포프 지휘하의 KGB(국가안전위원회)는 1930년대와 1940년대 같은 대숙청은 하지 않았지만, 스탈린 시대 권력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 정치국 80% 이상을 자신과 같은 엔지니어 출신으로 채워 기술관료제를 실시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서기장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개혁은 브레즈네프 정권 최초의 위기였다.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는 기치 아래 언론 자유화 등 개혁을 추진했다. 이에 호응해 여러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른바 프라하의 봄으로 불렸다. 브레즈네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이 다른 공산국가에 파급되어 공산당 체제 기반이 무너질 것을 염려했고, 소련 블록 전체를 흔드는 위험을 방관할 수 없었다. 7월에 둡체크를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했으며, 8월 20일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을 투입해 프라하의 봄을 강경 진압하였다. 이는 공산주의 보호 명분으로 위성국 국내 문제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으로, 니키타 흐루쇼프가 1956년 헝가리에서 실시한 것처럼 소련의 기존 정책을 재확인한 것이지만, 브레즈네프 독트린 및 제한 주권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은 핵 확산 금지 조약을 체결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이 예정되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군사 개입에 대한 항의로 중지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NATO는 구두 비판 외에 구체적인 항의를 하지 않았고, 이는 유럽에서 소련 세력권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원칙 성립을 의미했다.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 관계는 1960년대 초부터 대립이 시작돼 악화되었다. 1964년 저우언라이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지만 관계 개선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1969년 우수리강 다만스키섬(중국명: 전바오섬)에서 양국 군대가 무력 충돌하여 중소국경분쟁이 발생했다. 브레즈네프는 베트남 전쟁 중 북베트남을 지원했다. 1962년 베오그라드 명예 시민이 되었다.
1971년 시작된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 간 관계 개선은 국제 관계에 새로운 과정이 되었다. 브레즈네프는 미중 동맹 구축을 막기 위해 미국과 교섭을 택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닉슨과 브레즈네프는 제1차 전략 무기 제한 협정에 조인했다. 1973년 파리 평화 협정에서 베트남 전쟁의 공식 종료로 미소 관계 장애가 제거되었고, 브레즈네프는 그해 5월 서독, 6월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1970년대 초부터 소비에트 연방 경제 침체가 시작되었지만 브레즈네프는 이를 무시했다. 당시 브레즈네프는 고급 외국차나 양복을 구입하는 취미에 빠져 있었다.
1976년 5월 7일 브레즈네프는 소련 원수가 되었고, 1977년 만장일치로 소련 국가 원수가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1979년 6월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에 조인하는 등 국제 정상 회담 운영에 집중했고, 소련 경제 침체는 무시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브레즈네프 정권의 치명적 결정이었다. 이 결정은 브레즈네프 측근 인물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데탕트 종말을 불렀고, 미국의 곡물 거래 정지로 소련 경제 침체는 심각해졌다. 미국은 지미 카터 정권 아래 재군비 프로그램을 개시해, 후임 로널드 레이건 아래 가속화했다. 소련과 미국은 군비 확장 경쟁을 하며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했다.
1974년 3월 중장에서 상장을 거치지 않고 상급상장으로 진급했고, 1976년 5월 소련 원수가 되었다. 스탈린 시대 이후 최초의 "정치적 원수"였다. 군 지휘 경험이 없던 브레즈네프의 원수 임명에 직업 군인들의 불만이 쌓였지만, 그들의 권력과 명성은 브레즈네프 정권의 지속적 지원으로 보장되었다. 국내외 훈장 수여 등 브레즈네프 자신의 권위도 강화되었다.
1976년부터 소련 경제 침체로 브레즈네프의 국내 권력은 쇠퇴했다. 소련 경제 침체 원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 스탈린의 대규모 공업화 정책에도 불구, 농업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밀·보리·호밀 생산량은 세계 제일이었지만, 1970년대 초 대가뭄으로 국제 시장에서 대량 곡물을 매입, 대곡물 강탈이라 불렸다. 스탈린의 강제 농업 집단화는 독립 자영농을 없앴다. 1930년대와 2차 대전 후 스탈린에 의해 부흥, 건설된 소련 산업 경제는 국가 관리로 시장 반응에 대응할 수 없었고, 기술 혁신 부재도 영향을 미쳤다. 대숙청은 조직 혁신 인적 자원을 잃게 했고, 당 관료와 국가·산업 관료는 제로토크라시화되어 세대 교체가 안 됐다.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경제는 석유 파동에서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서방보다 번영했지만, 천연자원 의존으로 외화 대부분을 서방 첨단 기기·곡물·사치품 수입에 낭비, 중공업 중심 산업 구조의 전환은 지연되었다. 이 두 요인은 결합, 악화되었다. 냉전 군사력 유지를 위한 군비, 우주 개발 등 국위 선양 프로젝트, 파이프라인·콤비나트 건설 등 중후장대 산업에 막대한 지출이 투입, 부족한 식량은 시장 가격보다 높게 수입, 부담이 국민에게 돌아가 생활 수준 향상 투자액은 감소했다. 이는 고르바초프 정권에서 컨버시아 정책화 원인이 되었다. 아파라치키와 노멘클라투라가 수요자인 "비공식 경제(암시장)"에는 제한된 소비재와 서비스가 우선 공급, 소련 초기에는 없었던 대규모 부정부패를 조장했다.
브레즈네프는 영국산 롤스로이스, 서독산 메르세데스-벤츠 W100, 프랑스산 시트로엥 SM, 미국산 링컨 컨티넨탈 등 서방 고급차와 양복을 좋아하는 취미를 가진 부정부패 체질 소유자였고, 친척에게도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딸 갈리나 브레즈네바의 교우 관계와 화려한 사생활, 제1내무차관 남편 유리 추르바노프는 우즈베크 공화국 면화 증산 계획 관련, 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 샤라프 라시도프와 공모했다. 아들 유리 브레즈네프도 횡령 혐의로 KGB 조사를 받았다.
이런 브레즈네프 일가 스캔들은 측근이자 이데올로기 담당 서기 미하일 수슬로프가 은폐해 드러나지 않았지만, 1982년 1월 수슬로프 사망 후 더는 감출 수 없었다. 수슬로프 후임 이데올로기 담당(제2서기) 유리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 사후 최고 지도자가 되자 브레즈네프 친족, 유족을 부정부패 혐의로 체포, 단속했다.
브레즈네프 지배는 1976년 12월 70세 생일을 정점으로 했다. 스탈린 지배와 달리 존경도 공포도 얻지 못했다. 브레즈네프는 1979년 6월 지미 카터와 SALT II 조약 등 국제 정상 회담 운영에 열중, 국내 문제는 무시했다. 국내 문제는 농업 담당 서기 미하일 고르바초프처럼 근본 개혁이 필요하다고 확신한 이들에게 남겨졌다. 고르바초프는 브레즈네프에 대한 지도권 책략을 펼치지 않았다.
건강 악화로 브레즈네프 지도력은 약해졌다. 1977년 6월 포드고르니 은퇴를 강요,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직을 당 서기장과 동등하게 해 복귀, 명실상부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코시긴은 1980년 12월 사망 직전까지 수상이었지만, 브레즈네프는 코시긴 담당 경제 정책에 간섭, 영향력을 확대했다. 하지만 경제 정책 골격은 흐루쇼프 시대 (1961년) 채택된 에서 이미 정해졌다. 1961년 당강령은 "20년간(1980년까지) 광공업 생산량 6배, 농업 생산량 3.5배 증가, '미국 추월'"을 목표로 품목별 생산 목표를 설정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숫자였고, 당강령 채택 후 경제 성장률이 10%를 밑도는 등 소련 경제는 하강했다. 1980년 (1976년~1980년) 종료 시점, 1961년 당강령의 "장밋빛 미래"는 냉혹한 현실에 산산조각났다. 결국 브레즈네프는 1981년 에서 당강령 개정을 제기했다.
1982년 메이데이부터 퍼레이드에 자신의 초상화를 장식하는 등 개인숭배를 시작했다. 1981년 브레즈네프 건강은 비교적 양호해 제26차 당대회, 당중앙위 총회, 외유 등 중요 행사를 소화했다. 11월 회고록 출판, 12월 75세 생일에 동유럽, 몽골 수뇌부도 참석하는 대규모 축하 행사가 열렸다.
1982년 1월, 브레즈네프를 옹호해 온 미하일 수슬로프가 사망했다. 이후 서방 언론은 브레즈네프 친척 스캔들을 보도했고, 브레즈네프가 우는 모습이 소련 TV에 방영되는(2월 그루시포이 모스크바 군관구 정치부장 고별식) 등 주목할 현상이 발생했다. 브레즈네프는 권력 추락설을 부정하듯 과밀 일정을 소화했지만, 공개석상에서 모습을 감췄고, 중태설까지 나돌았다. 사실 심장 발작으로 치료 중이었다. 4월 22일 레닌 탄생 기념 행사까지 공식 행사에 불참했다. 이 시기, 포스트 브레즈네프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후 공개석상에 거의 안 나타났지만, 휴식하며 연중 행사를 마쳤다.
2.3.1. 국내 정책
브레즈네프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독재 정치 비판, 스탈린 대숙청 희생자 명예 회복, 소비에트 연방의 지적·문화적 정책의 신중한 장려를 지지했다. 그러나 지도자가 되면서 즉시 이와 반대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1965년 5월 대독일 전승 20주년 기념 연설에서 브레즈네프는 처음으로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언급했고, 1966년 제1서기를 스탈린의 직함인 서기장으로 개칭하였다. 1966년 작가 율리 다니엘과 안드레이 시냡스키의 재판은 억압적인 문화 정책 회귀의 상징이었다. 유리 안드로포프 지휘하의 국가보안위원회는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정치 숙청을 반복하지 않았지만, 스탈린 시대의 영향력을 대부분 회복하였다.
침체기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사용한 용어로, 냉전(군비 경쟁) 지속, 소련의 국제 무역 참여(경제적 고립 개념 포기), 서구 사회 변화 무시, 소련 사회의 권위주의 강화, 아프가니스탄 침공, 관료주의의 정체된 세습 지배로의 변질, 경제 개혁 부재, 만연한 정치 부패 등 여러 요인의 복합적인 결과로 설명된다. 국내적으로는 비숙련 노동자 요구 증가, 노동력 부족, 생산성 및 노동 규율 저하로 사회적 침체가 심화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알렉세이 코시긴을 통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걸쳐 산발적으로 소련 경제 개혁을 시도했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코시긴이 시작한 1965년 소련 경제 개혁은 흐루쇼프 시대로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지만,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취소되었다. 그러나 중앙위원회는 경제 문제의 존재를 인정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지도자가 된 후 브레즈네프 통치하의 경제를 "사회주의의 최저 단계"로 규정했다.
CIA 감시에 따르면, 소련 경제는 1970년대에 미국 GNP의 57%에 도달하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1975년경부터 중공업과 군사비 지출을 소비재보다 우선시한 정책으로 경제 성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소련 농업은 도시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고, 정부가 약속한 "성숙한 사회주의"의 결실과 산업 생산성이 의존하는 삶의 질 향상을 제공할 수 없었다. GNP 성장률은 연간 1~2%로 둔화되었고, 1970년대 GNP 성장률은 1950년대와 1960년대보다 감소했으며, 서유럽과 미국의 성장률에도 뒤처졌다. 결국 소련의 침체는 미국이 소련보다 연평균 1%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코시긴의 5차 정부의 마지막 중요 개혁은 1979년 소련 경제 개혁으로, 중앙위원회와 각료회의의 공동 결정으로 "계획 개선 및 경제 메커니즘의 효과 강화를 통한 생산 효율성 향상 및 작업 품질 개선"을 목표로 했다. 이 개혁은 부처의 임무와 책임을 강화하여 중앙 정부의 경제 개입을 확대하려 했지만, 1980년 코시긴 사망과 니콜라이 티호노프의 보수적 경제 접근으로 인해 대부분 실행되지 않았다.
브레즈네프의 농업 정책은 집단농장 조직의 기존 방식을 강화하고, 생산 할당량을 중앙에서 부과했다. 크루시초프의 농장 합병 정책은 브레즈네프에 의해 계속되었는데, 더 큰 콜호즈가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는 믿음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브레즈네프는 농업에 대한 국가 투자 증가를 추진했는데, 1970년대에는 모든 국가 투자의 27%에 달하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1981년 한 해에만 33000(당시 환율 기준)가 농업에 투자되었다.
브레즈네프는 1977년과 1981년 두 개의 법령을 발표하여 소련 내 개인 소유 토지 규모를 0.5헥타르로 늘렸지만, 농업 생산량 확대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그쳤다. 브레즈네프 시대 개인 소유지는 토지의 4%만 경작했지만, 전국 농업 생산량의 30%를 생산했다. 이는 소련 농업 붕괴를 막기 위해 집단화 해체가 필요하다는 증거로 인식되었지만, 주요 정치인들은 이념적, 정치적 이익 때문에 과감한 조치를 지지하지 않았다.
브레즈네프 통치 18년 동안 1인당 평균 소득은 두 배로 증가했으며, 이 성장의 4분의 3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이루어졌다. 집권 후반기에는 1인당 평균 소득이 4분의 1 증가했다. 1인당 소비는 약 70% 증가했지만, 성장의 4분의 3은 1973년 이전, 4분의 1은 집권 후반기에 발생했다. 초기 소비재 생산량 증가는 코시긴 개혁 덕분이었다.
브레즈네프 시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의 생활 수준은 조지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GSSR)과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ESSR)보다 뒤처졌는데, 이는 많은 러시아인들이 소련 정부 정책이 러시아 인구를 해치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정부는 노동자들을 한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이동시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소련 산업의 근절할 수 없는 특징이 되었다.
브레즈네프 통치 말년에는 심해지는 개인숭배가 특징이었다. 1966년 12월 60세 생일에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고, 레닌 훈장과 금성을 포함한 이 훈장을 생일 기념으로 세 번 더 받았다.
브레즈네프는 제2차 세계 대전 군 복무를 회상하는 서투른 회고록에서 소규모 전투를 노보로시스크 근처의 결정적 군사 무대로 묘사하며 부당한 영광을 추구했다. 이 책은 레닌 문학상을 수상하고 소련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다른 두 권의 책도 출판되었는데, 하나는 처녀지 개간 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브레즈네프의 국내 권력은 1976년부터 시작된 소련 경제 침체로 쇠퇴했다. 소련 경제 침체의 원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 스탈린의 대규모 공업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농업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밀, 보리, 호밀 생산량은 세계 제일이었지만, 1970년대 초 대가뭄으로 국제 시장에서 대량의 곡물을 매입하여 대곡물 강탈이라 불렸다. 아파라치키와 노멘클라투라가 수요자가 된 "비공식 경제(암시장)"에는 제한된 소비재와 서비스가 우선 공급되어, 소련 초기에는 볼 수 없었던 대규모 부정부패를 조장했다.
무엇보다 브레즈네프는 영국산 롤스로이스, 서독산 메르세데스-벤츠 W100, 프랑스산 시트로엥 SM, 미국산 링컨 컨티넨탈 등 서방 고급차와 양복을 좋아하는 취미를 가진 부정부패 체질의 소유자였고, 친척에게도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딸 갈리나의 교우 관계와 화려한 사생활, 제1내무차관인 남편 추르바노프는 우즈베크 공화국 면화 증산 계획 관련, 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 샤라프 라시도프와 공모했다. 아들 유리도 횡령 혐의로 KGB 조사를 받았다.
2.3.2. 대외 정책
브레즈네프 정권 최초의 위기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서기장 알렉산데르 둡체크에 의한 개혁이었다.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는 기치 아래 언론 자유화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이에 호응해 여러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 움직임은 음악제 이름에서 유래된 이른바 프라하의 봄으로 불렸다. 브레즈네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 운동이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도 파급되어 공산당 체제의 기반이 무너질 것을 염려했고, 소련 블록 전체를 흔드는 위험을 방관할 수 없었다. 7월에 둡체크를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했으며, 한 달 후인 8월 20일에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을 투입해 프라하의 봄을 강경 진압하였다. 공산주의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위성국의 국내 문제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1956년 헝가리에서 실시한 것처럼 소련의 기존 정책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했지만, 이 행위는 브레즈네프 독트린 및 제한 주권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은 핵 확산 금지 조약을 체결하였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이 예정되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군사 개입에 대한 항의로 방문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NATO는 구두 비판 외에 구체적인 항의를 하지 않았고, 이는 유럽에서 소련의 세력권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원칙의 성립을 의미하였다.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1960년대 초부터 대립이 시작돼 계속 악화되었다. 1964년 저우언라이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지만 관계 개선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1969년에는 우수리강의 다만스키섬(중국명: 전바오섬)에서 양국 군대가 무력 충돌하여 중소국경분쟁이 발생했다. 브레즈네프는 베트남 전쟁 중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였다. 1962년에는 베오그라드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1971년 시작된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 간의 관계 개선은 국제 관계에 있어 새로운 과정이 되었다. 브레즈네프는 미중 동맹 구축을 막기 위해 미국과의 교섭을 택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닉슨과 브레즈네프는 제1차 전략 무기 제한 협정에 조인하였다. 1973년 파리 평화 협정에서 베트남 전쟁의 공식적인 종료가 이루어져 미소 관계의 장애가 제거되었고, 브레즈네프는 그 해 5월에 서독, 6월에는 미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1970년대 초부터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 침체가 시작되었지만 브레즈네프는 이를 무시했다. 당시 브레즈네프는 고급 외국차나 양복을 구입하는 취미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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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즈네프는 1976년 5월 7일 소비에트 연방 원수가 되었고, 1977년 만장일치로 소련의 국가 원수가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1979년 6월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 조인한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과 같은 국제적 정상 회담 운영에 집중했고, 소련의 경제 침체는 무시했다.
브레즈네프 정권의 치명적인 결정은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침공이었다. 이 결정은 브레즈네프의 측근 인물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데탕트의 종말을 불렀고, 미국의 곡물 거래 정지로 소련의 경제 침체는 심각해졌다. 미국은 지미 카터 정권 아래 재군비 프로그램을 개시해, 후임 로널드 레이건 아래에서 가속화했다. 소련과 미국은 군비 확장 경쟁을 하며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했다.
3. 사망과 유산
브레즈네프의 건강은 1981년 겨울부터 악화되었다. 1982년 3월, 타슈켄트의 한 공장을 시찰하던 중 사고로 뇌진탕과 오른쪽 쇄골 골절상을 입었다. 서구 언론에서는 브레즈네프가 뇌졸중을 겪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1982년 11월 7일, 10월 혁명 65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 및 노동자 시위에서 레닌 묘소 발코니에 선 것이 그의 마지막 공개 등장이었다. 사흘 후인 11월 10일, 브레즈네프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3일간의 전국적인 애도 기간 후 국장으로 엄수되었으며, 붉은 광장의 크렘린 성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쿠바, 니카라과, 모잠비크, 아프가니스탄, 인도 등 여러 국가가 국가 애도를 선포했다.
브레즈네프는 조셉 스탈린 다음으로 장기간 소련을 통치했다. 그는 평화주의자이자 상식적인 정치가로 기억되지만, 장기간의 침체 시대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시기에는 근본적인 경제 문제가 무시되었고, 소련 정치 시스템은 쇠퇴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브레즈네프가 국가를 현대화하고 시대에 맞춰 변화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개입은 소련의 국제적 위상과 내부적 강점을 약화시킨 결정이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브레즈네프 시대를 안정된 복지와 생활이 보장된 시대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1999년 여론조사에서는 20세기 최고의 러시아 지도자로 선정되었고, 2013년 여론조사에서도 블라디미르 레닌과 조셉 스탈린을 제치고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