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야 (방호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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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야 (방호순양함)는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 해군이 미국에 건조를 의뢰한 방호순양함이다. 1901년 러시아 해군에 인도되어 러일 전쟁 발발 직전 제물포(인천)에 파견되었으나, 제물포 해전에서 패배 후 자침되었다. 이후 일본 해군에 의해 인양되어 소야로 명명, 연습함으로 활용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러시아에 반환되었으나 영국으로 수리차 이동 중 소비에트 정부의 재정 문제로 영국에 몰수되었다. 헐크로 사용되다 독일로 매각되었지만, 예인 중 좌초되어 1923년부터 1925년까지 현지에서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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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 (방호순양함) | |
---|---|
군함 정보 | |
이름 | 바략 Varyag |
함종 | 순양함 |
![]() | |
제작자 | 윌리엄 크램프 앤 선즈 |
운영자 | 러시아 제국 해군 일본 제국 해군 |
깃발 그림 | Naval ensign of the Empire of Japan.svg |
발주 | 1898년 |
기공 | 1889년 10월 31일 |
진수 | 1900년 1월 2일 |
취역 | 1901년 1월 14일 |
최후 | 1904년 일본에 노획 |
노획 국가 | 일본 제국 해군 |
노획일 | 1907년 7월 9일 재취항 |
이름2 | 소야 (宗谷) |
최후2 | 1916년 4월 5일 러시아로 반환 |
제원 | |
배수량 | 6,604 t |
전장 | 126.8 m |
선폭 | 15.8 m |
흘수 | 6.1 m |
추진 | |
추진 방식 | 2축 4왕복 VTE 엔진 |
보일러 | 30개 수관 |
마력 | 2만 마력 (15,000 kW) |
성능 | |
속력 | 23 노트 (43 km/h; 26 mph) |
거리 | 10노트(19 km/h; 12 mph)로 8,300 km |
정원 | 571명 |
무장 | |
주포 | 12 X 152mm 단장 속사포 |
부포 | 10 X 75mm 단장 속사포 |
대공포 | 2 × 47mm 단장 속사포 |
어뢰 발사관 | 4 × 18인치 어뢰발사관 |
장갑 | |
갑판 | 50–75 mm |
사령탑 | 150 mm |
기타 정보 |
2. 건조 배경 및 제원
Варяг|바략ru는 러시아 제국 해군의 1등 방호순양함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시의 윌리엄 크램프 앤 선즈사에서 건조되었다. 1904년 초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제물포 해전에서 패배한 후 2월 9일[8] 승무원들은 배를 적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자침시켰다. 1905년 8월 22일 일본에 의해 인양되어 "소야"로 이름이 바뀌었다.[9][7]
2. 1. 건조 배경
러시아 제국 해군은 극동 지역에서의 해군력 증강을 위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윌리엄 크램프 앤 선즈 사에 1등 방호순양함 건조를 발주하였다. 이 함선이 바로 '바략'이다. 1904년 초, 바략은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제물포 해전에서 패배한 후 2월 9일[8] 승무원들은 배를 적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자침시켰다.[8]2. 2. 주요 제원
Варяг|바랴크ru는 러시아 제국 해군의 1등 방호순양함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시의 윌리엄 크럼프 앤드 선즈사에서 건조되었다. 1905년 8월 22일 일본에 의해 인양되어 "소야"로 이름이 바뀌었다.[9][7]3. 러시아 해군 복무 (1901년 ~ 1904년)
러시아 제국 해군의 1등 방호순양함이었던 바략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시의 윌리엄 크램프 앤 선즈 사에 발주되었다. 1904년 초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제물포 해전에서 패배한 후, 2월 9일 승무원들은 배를 적의 손에 넘기는 것을 거부하고 제물포항에서 자침시켰다.[8] 바략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파된 상태로 제물포항에 버려져 있었다.
3. 1. 초기 활동
1905년 8월 8일 일본 제국은 제물포 해전에서 대파되어 침몰한 바략을 인양하였고,[9] 같은 해 8월 22일에 '소야'로 이름을 바꾸었다.[7] 원래 천황에게 요청한 다른 함명 후보에는 '하카타', '하세', '말랑'이 있었다.[7] 같은 해 8월 27일에는 2등 순양함으로 분류되었고,[10] 그해 가을 사세보 항으로 회항하여 11월부터 요코스카 조병창에서 복구 공사를 시작했다. 1907년 7월 9일 정비를 완료하고 11월에 취역했다.그 후, '소야'는 주로 연습선으로만 사용되었다. 일본 해군에서는 드문 미국식 함선이었고, 동급함이 없었던 것도 운용상 지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909년 3월 14일부터 8월 7일까지는 사관학교 생도의 원양 항해 훈련을 위해 하와이섬과 북아메리카까지 원정을 갔다. 이때는 원래 러시아 군함이었던 1등 순양함 '아소'와 연습 함대를 편성했다. 이와 같은 훈련 항해는 1913년까지 매년 반복되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해군에는 '소야'에서 원양 항해 훈련을 경험한 많은 지휘관이 있었다. 이노우에 시게요시, 쿠사카 미노루, 오자와 지사부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코가 미네이치가 대표적이다.
3. 2. 제물포 해전 (1904년 2월 9일)
1904년 초 러시아 제국 해군의 1등 방호순양함 바략은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2월 9일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제물포 해전을 치른 후, 승무원들은 배를 적의 손에 넘기는 것을 거부하고 제물포항에서 배를 자침시켰다.[8]4. 일본 해군 복무 (1905년 ~ 1916년)
러일 전쟁에서 패배 후 자침한 바략은 1905년 일본에 의해 인양되어 '소야'로 이름이 바뀌었고, 수리 후 일본 해군에서 복무하게 되었다.[9][7] 일본 해군은 소야를 주로 연습함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는 일본 해군에서 드문 미국식 함선이었고, 동형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09년부터 1913년까지는 매년 사관 후보생들의 원양 항해 훈련을 위해 하와이와 북아메리카로 원정을 가기도 했으며, 아소와 함께 연습함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러일 전쟁 때 노획한 함선들을 러시아에 반환하기로 결정했고, 소야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1916년 4월 4일 러시아에 반환되면서 일본 해군에서 제적되었다.[12]
4. 1. 인양 및 수리
1904년 제물포 해전에서 패배하여 제물포항에 자침한 바략은 종전 때까지 파괴된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1905년 8월 8일, 일본 제국은 바략을 인양했고,[9] 같은 해 8월 22일에 '소야'로 개명했다.[7] 천황에게 요청한 다른 함명 후보로는 '하카타', '하세', '후와'가 있었다.[7] 같은 해 8월 27일, 소야는 2등 순양함으로 분류되었고,[10] 가을에 사세보 항으로 회항하여 11월부터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서 수리 공사를 시작했다. 1907년 7월 9일, 정비를 완료하고 11월에 취역했다.4. 2. 연습함으로 활용
1905년 8월 8일 일본 제국은 제물포 해전 이후 제물포항에 침몰한 바략을 인양했다.[9] 같은 해 8월 22일 "소야"로 명명되었고,[7] 8월 27일에는 2등순양함으로 분류되었다.[10] 이후 요코스카 조병창에서 복구 공사를 거쳐 1907년 7월 9일에 정비를 완료하고 11월에 취역했다.그 후 "소야"는 주로 연습함으로 사용되었다. 일본 해군에서는 드문 미국식 함선이었고, 동형함이 없었던 것이 운용상 지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909년 3월 14일부터 8월 7일까지 사관 후보생의 원양 항해 훈련을 위해 하와이와 북아메리카까지 원정을 갔다. 이때 같은 러시아 출신 1등 순양함 아소와 연습함대를 편성했다. 이러한 훈련 항해는 1913년까지 매년 반복되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해군에는 "소야"에서 원양 항해 훈련을 경험한 다수의 지휘관이 있었다. 이노우에 시게요시, 쿠사카 미노루, 오자와 지사부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코가 미네이치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4. 3. 함장 (일본 해군)
대 | 성명 | 재임 기간 | 출신교·기수 | 전임 | 후임 | 비고 |
---|---|---|---|---|---|---|
0 | 오타 모리자네 | 1905년 9월 9일 - 1905년 12월 20일 | 대본영 해군부 부속 | 대기 | 회항 위원장 | |
1 | 야시로 요시노리 | 1907년 5월 17일 - 1907년 9월 28일 | 해병 10기 | 만주 함장 | 마쓰시마 함장 | |
2 | 자이부 히로시 | 1907년 9월 28일 - 1908년 9월 15일 | 해병 15기 | 군령부 참모 | 후지 함장 | |
3 | 사토 데쓰타로 | 1908년 9월 15일 - 1909년 10월 1일 | 해병 14기 | 해대 교관 | 아소 함장 | |
4 | 스즈키 간타로 | 1909년 10월 1일 - 1910년 7월 25일 | 해병 14기 | 아카시 함장 | 수뢰교장 | |
5 | 니시가키 도미타 | 1910년 9월 28일 - 1910년 12월 1일 | 해병 13기 | 나니와 함장 | 시키시마 함장 | 겸임 |
6 | 히라오카 데이이치 | 1911년 4월 1일 - 1912년 4월 20일 | 해병 16기 | 도요하시 함장 | 사가미 함장 | |
7 | 호리우치 사부로 | 1912년 4월 20일 - 1913년 5월 24일 | 해병 17기 | 해대 교관 | 쓰쿠바 함장 | |
8 | 마쓰무라 준이치 | 1913년 5월 24일 - 1913년 12월 1일 | 해병 18기 | 프랑스 주재 대사관 부속 무관 | 시종무관 | |
9 | 사이토 한로쿠 | 1913년 12월 1일 - 1915년 9월 1일 | 해병 17기 | 아카시 함장 | 구라마 함장 | |
10 | 나카가와 시게우시 | 1915년 9월 1일 - 1915년 12월 13일 | 해병 19기 | 마콩 요항부 참모장 | 이부키 함장 | |
11 | 이주인 슌 | 1915년 12월 13일 - 1916년 4월 4일 | 해병 21기 | 군령부 참모 | 쓰가루 함장 |
5. 러시아 해군 재복무 및 최후 (1916년 ~ 1925년)
1916년 4월 5일 ‘소야’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제국 해군에 재편입되었고, 함명도 원래의 ‘바략’으로 변경되었다.[13] 이후 바략은 6월 18일 북극해 소함대 사령관기를 게양하고 무르만스크로 향했으며, 같은 해 11월 콜라 반도에 도착했다.
5. 1. 러시아 반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연합국의 일원이 된 러시아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제국은 러일 전쟁 때 노획한 일부 함선을 러시아에 매각 또는 양도하기로 결정했다.[11] '소야' 역시 이러한 함선 중 하나로 선정되어 1916년 4월 4일 러시아에 반환되었고, 일본 해군 함적에서 제적되었다.[12]1916년 4월 5일, '소야'는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제국 해군에 다시 편입되었으며, 함명도 원래 이름인 '바략'으로 되돌아갔다.[13]
5. 2. 러시아 혁명과 영국 몰수
1917년 3월 4일, 바략은 수리를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지만,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소비에트 정부는 수리비 지불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바략은 영국에 몰수되었다.[11] 1918년 2월에 영국 해군에 배속되었으나, 예인 도중 아일랜드 해역에서 좌초되었다. 그 후 인양되어 헐크로 사용된 후, 1920년에 독일로 매각되었지만, 예인 도중 스코틀랜드 해역에서 다시 좌초되어, 1923년부터 1925년에 걸쳐 현지에서 해체되었다.5. 3. 해체
1920년 독일로 매각되었으나, 예인 중 스코틀랜드 해역에서 다시 좌초되어 1923년부터 1925년까지 현지에서 해체되었다.[8]6. 갤러리
7. 같이 보기
참조
[1]
문서
5月10日
[2]
문서
10月19日
[3]
문서
40 口径41年式 6 インチ砲
[4]
문서
1908年
[5]
문서
2.5 ポンド速射砲
[6]
문서
152 mm
[7]
문서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海軍大臣官房
1905-08-10
[8]
문서
1月27日
[9]
문서
官報
1905-08-10
[10]
문서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05-08-27
[11]
문서
北極海
[12]
문서
3月21日
[13]
문서
3月2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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