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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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458년 소도성의 맏손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배혜소(裴惠昭)였다. 유송에서 보국장군(輔國將軍)과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지냈다. 476년 아버지 소색을 따라 형주로 내려갔다. 477년 아버지 소색이 분성에 주둔하여 심유지를 토벌할 때 종군하여 장수들의 응접을 맡았다. 비서랑에 임명되었지만 받지 않았고, 보국장군의 호를 받고 진희왕(晋熙王) 무군 주부에 임명되었다. 478년 심유지의 난이 진압되자 아버지 소색의 명을 받아 건강으로 돌아갔다. 이후 소도성의 명을 받아 동재에 부를 두고 문무의 빈객과 교제했다. 건강성 안의 군대는 모두 그의 절도를 받았다. 비서승에 임명되었지만, 증조부 소승지의 휘를 범하고 있다는 이유로 취임하지 않고 중서랑에 임명되었다. 황문시랑으로 전임되었지만 받지 않았다.[4]
479년 소도성이 유송을 멸망시키고 남제(南齊)를 건국하면서 고제가 황위에 오르자 소장무는 남군왕(南郡王)에 봉해졌는데, 이는 남조 시대에 생존한 황태자의 아들이 황족으로 봉해진 첫 사례였다. 더불어 정로장군의 호를 받았다. 소도성이 선양을 받을 준비를 하고, 아버지 소색이 건강으로 귀환했지만, 양양을 군사상의 요충지로 타족에게 맡길 수 없다고 하여, 지절·도독 옹량 2주 형주지경릉 사주지 수군 제군사·좌중랑장·녕만교위·옹주자사에 임명되어 부임했다.[4]
같은 해, 량주 자사 범백년이 진수군의 이오노를 항복시키고, 저족의 양성·소도치를 토벌하여 위명이 있었다. 송 말에 조정은 왕현막을 새로운 량주 자사로 파견했지만, 범백년은 이오노의 권유를 받아 한중에 웅거한 채 명령을 받지 않았다. 왕현막이 오자 범백년은 늦게나마 위흥군으로 옮겼지만, 소환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그가 병란을 일으킬 것을 걱정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범백년을 설득하고 부 장사에 임명하여 양양에 출두한 것을 붙잡아 처형했다.[4]
480년 건강으로 소환되어 시중·중군장군의 지위를 받고 부를 두고 석두에 주둔했다. 어머니 배혜소가 사망하자, 시중의 임을 해임하고 상을 치렀다. 애통해하며 병에 걸렸기 때문에, 석두산에서 서주로 옮겨졌다. 482년 사지절·도독 남서 연 2주 제군사·정북장군·남서주 자사에 임명되었다.[4]
아버지 무제(소색)가 즉위하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485년 숭정전에서 『효경』을 강의했고, 소부 왕검은 그 강의 기록에서 태자복 주옹에게 『효경의소』를 편찬하게 했다. 487년 겨울, 스스로 국학에서 제생에게 시험을 보였다. 그는 오랫동안 국학의 교단에 섰지만, 황태자로는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또한 경릉왕 소자량과 함께 불교를 좋아하여 육질관을 세워 궁민을 양육했다.[4]
그는 호방하고 사치스러운 성격을 지녔다. 궁성의 복식과 장식들이 지나치게 호사하여 무제가 보고 크게 화를 냈다. 무제가 태자궁의 동전을 지나가다가 그곳의 장대하고 화려함을 보고 크게 노하여서 감작주수(監作主帥, 작업을 감독하는 책임을 진 지휘자)들을 모두 체포하게 하였는데 그가 그들을 모두 숨겨주었다가 이로 말미암아 크게 책망을 받았다.[4]
또 무제의 총애를 받는 사람인 서문경(徐文景)으로 하여금 연(輦)과 승여(乘輿)에 딸린 어용물건들을 만들게 하였는데 무제가 갑자기 동궁에 행차하자 황급하여 그것들을 감출 겨를이 없었으므로 서문경이 마침내 불상을 연 안에 넣었으며, 이 때문에 무제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에 서문경은 결국 죽음이 내려졌다.[4]
일찍이 서창후 소란을 미워하여 동생인 경릉왕 소자량에게 "나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데 그 연고를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당연히 그의 복이 박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소자량이 소란을 위해 풀어주려고 하였다. 훗날 소란이 정권을 잡자 자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4]
493년에 병으로 향년 36세로 사망하였다. 사후에 무제가 동궁으로 걸어가서 의복과 완구들을 보고서 크게 노하여 유사에게 명령해 이를 모두 부숴버리게했다. 또한 소자량이 사이좋게 잘 지냈으나 이를 알리지 않았다하여 아울러 그를 책망하였다.[4]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유송에서 벼슬하여 보국장군(輔國將軍)과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지냈다.[4] 유송 순제 재위 초반, 형주자사(荊州刺史) 심유지가 할아버지인 소도성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양주자사(揚州刺史) 범백년(范柏年)이 관망하다가 심유지와 서로 호응하려고 했다. 반란이 평정된 뒤 소장무가 범백년을 유인하여 양양으로 오게 했고 도착하자 곧 살해하였다.[4]남제 건국 후, 고제 재위 초기에 남군왕(南郡王)으로 봉해졌고, 거듭 승진하여 남서주자사(南徐州刺史)가 되었다.[4] 아버지 무제가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예로써 문사를 대우하고 무인들을 양성했다. 불교를 좋아해서 육질관(六疾館)을 세워 어려운 사람을 구제했다.[4]
성격이 호방하고 사치스러웠으며 궁성의 복식과 장식들이 지나치게 호사하여 무제가 보고 크게 화를 냈다.[4] 무제가 태자궁의 동전을 지나가다가 그곳의 장대하고 화려함을 보고 크게 노하여서 감작주수(監作主帥, 작업을 감독하는 책임을 진 지휘자)들을 모두 체포하게 하였는데 소장무가 그들을 모두 숨겨주었다가 이로 말미암아 크게 책망을 받았다.[4] 또 무제의 총애를 받는 사람인 서문경(徐文景)으로 하여금 연(輦)과 승여(乘輿)에 딸린 어용물건들을 만들게 하였는데 무제가 갑자기 동궁에 행차하자 황급하여 그것들을 감출 겨를이 없었으므로 서문경이 마침내 불상을 연 안에 넣었으며 이 때문에 무제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에 서문경은 결국 죽음이 내려졌다.[4]
일찍이 서창후 소란을 미워하여 동생인 경릉왕 소자량에게 "나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데 그 연고를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당연히 그의 복이 박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소자량이 소란을 위해 풀어주려고 하였다. 훗날 소란이 정권을 잡자 자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4]
493년 병으로 향년 36세에 사망하였다.[4] 사후에 무제가 동궁으로 걸어가서 의복과 완구들을 보고서 크게 노하여 유사에게 명령해 이를 모두 부숴버리게했다. 또한 소자량이 사이좋게 잘 지냈으나 이를 알리지 않았다하여 아울러 그를 책망하였다.[4]
458년 소도성의 맏손자로 태어났으며, 당시 유송의 장군이었던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어머니는 소저의 아내 배혜소(裴惠昭)였다. 477년 소도성은 유송 후폐제를 암살하고 유준을 황제로 옹립한 뒤 권력을 잡았다. 장군 심유지는 형주(荊州, 현대 후베이성 중부 및 서부)에서 그에게 반기를 들었고, 소저는 팽구(湓口, 현대 장시성 지우장)를 방어하며 심유지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는 소장무를 군대 검열의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심유지가 패배한 후, 소장무는 처음에 수도 건강으로 돌아가 할아버지 밑에서 일했지만, 이후 옹주(雍州, 현대 허난성 남서부 및 후베이성 북서부)의 자사가 되었다.[4]
원휘 4년(476년) 아버지 소칙을 따라 형주로 내려갔다. 승명 원년(477년) 소칙이 분성에 주둔하여 심유지를 토벌하자 장무는 종군하여 장수들의 응접을 맡았다. 비서랑에 임명되었지만 받지 않았다. 보국장군의 호를 받고, 진희왕(晋熙王) 무군 주부에 전임되었다. 승명 2년(478년) 심유지의 난이 진압되자 소칙의 명을 받아 건강으로 돌아갔다. 소도성의 명을 받아 동재에 부를 두고, 문무의 빈객과 교제했다. 건강의 성 안의 군대는 모두 장무의 절도를 받았다. 비서승에 임명되었지만, 증조부 소승지의 휘를 범하고 있다는 이유로 취임하지 않고, 중서랑에 임명되었다. 황문시랑으로 전임되었지만 받지 않았다. 승명 3년(479년) 소도성이 선양을 받을 준비를 하고, 소칙이 건강으로 귀환했지만, 양양을 군사상의 요충지로 타족에게 맡길 수 없다고 하여, 장무는 지절·도독 옹량 2주 형주지경릉 사주지 수군 제군사·좌중랑장·녕만교위·옹주자사에 임명되어 부임했다.[4]
같은 해(건원 원년) 소도성이 황위에 오르자 남군왕에 봉해졌다. 남조에서 적황손이 왕으로 봉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한, 정로장군의 호를 받았다. 일찍이 량주 자사인 범백년이 진수군의 이오노를 항복시키고, 저족의 양성·소도치를 토벌하여 위명이 있었다. 송 말에 조정은 왕현막을 새로운 량주 자사로 파견했지만, 범백년은 이오노의 권유를 받아 한중에 웅거한 채 명령을 받지 않았다. 왕현막이 오자 범백년은 늦게나마 위흥군으로 옮겼지만, 소환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장무는 범백년이 병란을 일으킬 것을 걱정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범백년을 설득하고, 부 장사에 임명하여, 양양에 출두한 것을 붙잡아 처형했다. 건원 2년(480년) 건강으로 소환되어 시중·중군장군의 지위를 받고, 부를 두고, 석두에 주둔했다. 어머니 배혜소가 사망하자, 시중의 임을 해임하고 상을 치렀다. 애통해하며 병에 걸렸기 때문에, 석두산에서 서주로 옮겨졌다. 건원 4년(482년) 사지절·도독 남서 연 2주 제군사·정북장군·남서주 자사에 임명되었다.[4]
무제(소칙)가 즉위하자, 황태자에 세워졌다. 영명 3년(485년) 숭정전에서 『효경』을 강의했고, 소부 왕검은 그 강의 기록에서 태자복 주옹에게 『효경의소』를 편찬하게 했다. 영명 5년(487년) 겨울, 스스로 국학에서 제생에게 시험을 보였다. 장무는 오랫동안 국학의 교단에 섰지만, 황태자로는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또한 장무는 경릉왕 소자량과 함께 불교를 좋아하여 육질관을 세워 궁민을 양육했다.[4]
2. 2. 남제 건국과 남군왕 책봉
479년, 소도성이 유송을 멸망시키고 남제(南齊)를 건국하면서 고제가 황위에 올랐다. 이때 소장무는 남군왕(南郡王)에 봉해졌는데, 이는 남조 시대에 생존한 황태자의 아들이 황족으로 봉해진 첫 사례였다.[4] 이후 정로장군(征虜將軍) 칭호를 받았다.량주 자사 범백년(范柏年)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소장무는 사자를 보내 그를 설득하고 부 장사에 임명하여 양양(襄陽)으로 오게 한 뒤 처형했다.[4] 480년에는 건강(建康)으로 소환되어 시중, 중군장군(中軍將軍) 지위를 받고 석두(石頭)에 주둔했다. 어머니 배혜소(裵惠昭)가 사망하자 시중 직에서 물러나 상을 치렀으며, 슬픔으로 병을 얻어 석두산에서 서주(西州)로 옮겨졌다. 482년에는 사지절(使持節), 도독 남서 연 2주 제군사(都督南徐兗二州諸軍事), 정북장군(征北將軍), 남서주 자사에 임명되었다.[4]
2. 3. 황태자 책봉과 활동
유송에서 벼슬하여 보국장군(輔國將軍)과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지냈다. 남제가 건국된 후 고제 초기에 남군왕(南郡王)으로 봉해졌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남서주자사(南徐州刺史)가 되었다. 고제 재위 초반, 남군왕으로 봉해졌으며 거듭 승진하여 남서주자사가 되었다.[4] 아버지인 무제가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4]황태자가 된 후, 예로써 문사를 대우하고 무인들을 양성했다. 불교를 좋아해서 육질관(六疾館)을 세워 어려운 사람을 구제했다.[4] 485년(무제 영명 3년)에는 숭정전에서 『효경』을 강의했고, 487년(영명 5년) 겨울에는 국학에서 제생에게 시험을 보였다. 이는 황태자로서는 전대미문의 일이었다.[4] 소자량 경릉왕(蕭子良)과 함께 불교를 신봉하여 육질관을 세워 백성을 양육하였다.[4]
성격이 호방하고 사치스러웠으며, 궁성의 복식과 장식들이 지나치게 호사하여 무제가 보고 크게 화를 냈다.[4] 무제가 태자궁의 동전을 지나가다가 그곳의 장대하고 화려함을 보고 크게 노하여서 감작주수(監作主帥, 작업을 감독하는 책임을 진 지휘자)들을 모두 체포하게 하였는데 소장무가 그들을 모두 숨겨주었다가 이로 말미암아 크게 책망을 받았다.[4]
무제의 총애를 받는 서문경(徐文景)으로 하여금 연(輦)과 승여(乘輿)에 딸린 어용물건들을 만들게 하였는데, 무제가 갑자기 동궁에 행차하자 황급하여 그것들을 감출 겨를이 없었으므로 서문경이 불상을 연 안에 넣었고, 이 때문에 무제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에 서문경은 결국 죽음이 내려졌다.[4]
소란 서창후(蕭鸞)를 미워하여 동생인 소자량 경릉왕에게 "나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데 그 연고를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당연히 그의 복이 박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소자량이 소란을 위해 변호하려 했지만, 소장무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4]
무제의 통치 후반기에 그는 연회와 순행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선호했고, 종종 태자 장무에게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하게 했으며, 그로 인해 태자의 권위는 제국 내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종종 병을 앓았고, 아마도 뚱뚱한 체격으로 인해 악화되었을 것이다. 493년 봄, 3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4]
2. 4. 소자향과의 갈등과 죽음
소자량 경릉왕(蕭子良)과 친밀했으며, 두 사람 모두 불교 신자였다. 그러나 소장무는 불교 신앙에도 불구하고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황제에게만 합당한 많은 물품을 사용했지만, 친절하고 호의적이라는 칭찬도 받았다. 그는 충동적이지만 군사적 재능이 있는 동생 소자향 파동왕(蕭子響)을 불안해했고, 소자향이 490년에 그의 많은 측근들을 처형하여 무제의 분노를 사 그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소장무는 비밀리에 장군 소순지(양 무제의 아버지)에게 소자향이 살아있는 채로 건강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4] 소자향이 소순지에게 항복하고 죄를 자백하기 위해 아버지와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순지는 소자향을 목 졸라 죽였다.소장무는 양 고제의 조카인 소란 서창후(蕭鸞)를 싫어했고, 언젠가 소자량에게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복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만 말할 수 있네."라고 말했다. 소란과 친했던 소자량은 소란을 변호하려 했지만, 소장무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493년에 병으로 향년 36세로 사망하였다.
3. 평가
사마광은 소장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1]
太子風姿和令|태자풍자화령중국어하고, 而帝末年好嬉戲|이제말년호희희중국어하여, 分尚書曹事|분상서조사중국어를, 付太子省|부태자성중국어하니, 由是威權內外|유시위권내외중국어라.
太子性奢華|태자성사화중국어하여, 修宮殿園囿|수궁전원유중국어가, 過於上宮|과어상궁중국어이라, 費以千萬數|비이천만수중국어인데, 帝畏遠望見|제외원망견중국어하고, 乃夾道樹竹|내협도수죽중국어하며, 服玩多僭侈|복완다참치중국어라. 奏於東田作小苑|주어동전작소원중국어하여, 更番役使東宮將吏|경번역사동궁장리중국어하고, 築城引巷|축성인항중국어하니, 周遍華遠|주변화원중국어이라. 帝性雖嚴察多耳目|제성수엄찰다이목중국어이나, 而太子所爲|이태자소위중국어는, 人莫敢言|인막감언중국어이라.[1]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태자는 풍채와 운치가 온화하였는데, 황제(소색)가 말년에 놀고 잔치 베풀기를 좋아하여 상서조(尙書曹)의 사무를 나누어 태자에게 보내 처리하도록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태자의 위세가 안팎으로 더해졌다. 태자는 성격이 사치스럽고 화려하여 궁전과 동산을 수리하는데 황제가 사는 궁전보다 더 나았고, 비용은 전을 헤아렸는데 황제가 멀리서 그것을 볼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길가에 대나무를 줄지어 심었으며, 모든 의복과 장난감들은 대부분 참람(僭濫)하게 사치스러웠다. 동쪽 밭(동궁 소속 밭)에 작은 정원을 만들겠다고 상주하고 동궁의 장리(將吏)들을 건축공사에 교대로 참여시키고 성벽을 쌓고 골목길을 끌어들였는데 골고루 화려하고 멀리까지 뻗쳐있었다. 황제의 성격이 비록 엄하고 눈과 귀를 많이 펼쳐놓았으나 태자가 한 일을 사람들이 감히 알리지 않았다.
4. 가족 관계
5. 가계도
| 난릉 소씨 가계도 | |
|---|---|
| 소정(蕭整) | 소준(蕭雋), 소괄(蕭鎋), 남조 제(南朝斉), 남조 량(南朝梁) |
| 소락자(蕭楽子), 소부자(蕭副子) | |
| (추존)선제 소승지(蕭承之), 소도사(蕭道賜) | |
| (추존)경제 소도생(蕭道生), (1)고제 소도성(蕭道成), (추존)문제 소순지(蕭順之) | |
| (5)명제 소란(蕭鸞), (2)무제 소색(蕭賾), 장사왕 소의(蕭懿), (1)무제 소연(蕭衍), 임천왕 소굉(蕭宏) | |
| (6)동혼후 소보권(蕭宝巻), 제황제 소보은(蕭宝寅), (7)화제 소보융(蕭宝融), (추존)문제 소장무(蕭長懋), 민제 소연명(蕭淵明), (추존)소명제 소통(蕭統), (2)간문제 소강(蕭綱), (3)원제 소익(蕭繹), 무릉왕 소기(蕭紀), 임하왕 소정덕(蕭正徳) | |
| (3)울림왕 소소업(蕭昭業), (4)해릉왕 소소문(蕭昭文), (추존)안제 소환(蕭歓), (서1)선제 소찰(蕭詧), 애태자 소대기(蕭大器), 무열세자 소방등(蕭方等), 민회태자 소방거(蕭方矩), (4)경제 소방지(蕭方智) | |
| 예장왕 소동(蕭棟), (서2)명제 소궤(蕭巋), 하간왕 소엄(蕭巌), 영가왕 소장(蕭荘) | |
| (수)양민소황후 소씨(蕭氏), (서3)후주/정제 소종(蕭琮), 하간왕 소선(蕭璿) | |
| 량황제 소선(蕭銑) | |
- 소소업(蕭昭業) (울림왕, 폐제)
- 소소문(蕭昭文) (해릉왕, 폐제)
- 소소수(蕭昭秀) (파릉왕)
- 소소찬(蕭昭粲) (계양왕)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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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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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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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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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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