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토가하마는 일본 아오모리현 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육지가 다하는 곳'을 의미한다. 아부라카와 이북을 가미이소, 아오모리 이동을 시모이소로 구분하며, 아오모리 부근을 합포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는 일본의 경계를 나타내는 관용구로 사용되었으며, 중세에는 유배 대상지로 여겨지기도 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여러 세력으로 분할되었다가 쓰가루 씨의 지배를 받았으며, 에도 시대에는 히로사키 번에 속했다. 2004년에는 카니타정, 히라타테촌, 미야마 촌이 합병하여 소토가하마 정이 되었다.
소토가하마(外ヶ浜)는 역사적으로 현재보다 더 넓은 지역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서쪽으로는 쓰가루 반도의 일본해 연안, 동쪽으로는 시모키타 반도의 시리야자키(尻屋崎)까지 포함하는 지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1]
중세 시대부터 "동쪽은 오슈 소토가하마, 서쪽은 친제이 키카이섬"[2]이라는 표현은 일본의 동쪽 경계를 나타내는 관용구로 사용되었다. 당시 중앙 권력의 영향력이 약했던 이 지역은 에미시 등 중앙 정부에 동화되지 않은 이들이 사는 땅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또한, 소토가하마는 우타마쿠라의 명소로 알려져 사이교나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등 여러 문인의 작품에 등장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쓰가루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행정 구역에 포함되지 않고 '소토하마' 또는 '니시하마'라는 특수한 지역으로 구분되었다.[3]가마쿠라 시대에는 호조 씨의 도쿠소령이 되었고, 쓰가루 안도 씨가 지토 대관으로서 지배했다. 이 시기 소토가하마는 유형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여러 세력이 각축을 벌이다 1585년(덴쇼 13년) 쓰가루 씨의 영지가 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히로사키 번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관리되었다. 이 시기 쓰가루 해협 연안에 거주하던 아이누 민족은 히로사키 번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민속학자 스가에 마스미는 이 지역을 답사하고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중세 시대 이래 소토가하마는 일본의 동쪽 경계를 상징하는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동쪽은 오슈 소토가하마, 서쪽은 친제이 키카이섬"[2]이라는 관용구는 일본의 끝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부정(穢れ)의 관념이 강해진 중세에는 중앙 조정에 동화되지 않은 에미시 등을 귀신으로 여기며, 소토가하마를 이들이 사는 땅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또한 소토가하마는 우타마쿠라의 땅으로도 알려져, 사이교나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와 같은 유명 시인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다.
헤이안 시대 말기, 율령제의 국군제가 혼슈 북단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쓰가루'라는 이름으로 불린 지역은 쓰가루 하나와군, 쓰가루 히라카군, 쓰가루 이나카군, 쓰가루 야마베군에 한정되었다. 쓰가루 반도 북부는 이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고, '''소토하마''' 또는 '''니시하마'''라는 별개의 특수한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당시에는 이 지역을 쓰가루 본토보다는 바다 건너 오시마(渡島, 당시 홋카이도 남부를 지칭하던 명칭 중 하나)의 일부로 여기기도 했다[3].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서 소토가하마는 싯켄 호조 씨의 도쿠소령이 되었으며, 쓰가루 지역 출신의 쓰가루 안도 씨가 지토 대관으로 임명되어 이 지역을 관리했다. 이 시기 소토가하마는 일본 동쪽의 경계 지역으로 인식되어 유형지로 활용되었다. 당시 교토의 검비위사에게 체포된 강도나 해적은 가마쿠라 막부로 보내져 에조가시마(현재의 홋카이도)로 유배되었는데, 그 길목에 있는 소토가하마 역시 유배 대상지 중 하나였다. 역사서 『아즈마카가미』에는 겐큐 4년(1193년) 7월 24일, 요코야마 도키히로라는 무사가 다리가 아홉 개 달린 기이한 말을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바쳤는데, 요리토모가 이 말을 소토가하마에 풀어주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소토가하마가 인간뿐만 아니라 일반적이지 않은 존재들을 풀어놓는 장소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센고쿠 시대에는 가키자키 씨, 기타바타케 씨, 난부 씨 세 가문이 소토가하마 지역을 나누어 지배했으나, 덴쇼 13년(1585년)에 쓰가루 다메노부가 이 지역을 통일하면서 쓰가루 씨의 영지가 되었다.
3. 2. 근세
센고쿠 시대에는 가키자키 씨, 기타바타케 씨, 난부 씨가 지역을 나누어 지배했으나, 1585년(덴쇼 13년)부터 쓰가루 씨의 영지가 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히로사키 번의 영지에 속했으며, 번의 행정 단위로 북부에는 '소토하마 카미이소야리'(外浜上磯遣일본어), 남부에는 '소토하마 시모이소야리'(外浜下磯遣일본어)가 설치되었다. 북부의 쓰가루 해협 연안 지역에는 1669년(간분 9년) 무렵 약 200명의 아이누 민족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히로사키 번은 1756년(호레키 6년, 번사 치치이 미츠구 등이 주도)과 1809년(분카 6년) 두 차례에 걸쳐 이들을 와진 호적에 편입시키는 동화 정책을 시행하여 아이누 공동체는 점차 사라졌다.
에도 시대의 민속학자 스가에 마스미는 이 지역을 여행하며 귀중한 민속 자료이자 기행문인 外が浜づたい|소토가하마즈타이일본어, 外が浜風|소토가하마카제일본어, 外が浜奇勝|소토가하마켄분일본어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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