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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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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해는 삼국 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손량 폐위 후 손휴를 옹립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아버지 손소, 동생 손월과 함께 징커우를 지켰으며, 손호 시대에는 무위대장군을 역임했다. 이후 모함을 받아 서진으로 망명하여 차기장군, 단양후에 봉해졌으나, 오나라 멸망 후 도요장군으로 격하되었고, 304년에 사망했다. 손해는 엄격한 처신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평가받는다.

2. 생애

태평 3년(258년), 손침손량을 폐위시키자, 종정의 손해와 중서 랑의 동조를 사자로 세워, 황위에 오르기를 꺼리는 손휴를 설득하기 위해 맞이하도록 했다. 손해는 아버지 손소와 동생 손월과 함께 3대에 걸쳐 군사 요충지인 징커우를 지켰다. 손호 시대에는 무위 대장군·임성후가 되었고, 손월을 대신하여 경하독을 맡았다.[3]

보정 원년(266년), 오군의 영안현(절강성 지역)에서 시단이 손호의 동생 손겸을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켜 건업을 습격한 적이 있었다. 이때 정고제갈정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었지만, 손해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중성을 띠고 즉시 토벌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고발을 받았다. 이 때문에 손호로부터, 여러 번 징커우에 문책 사자를 파견받게 되었고, 손해는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손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관료에게 트집을 잡아 혹형에 처하는 일이 잦았고, 갑자기 수도로 소환되면 처벌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동격이었던 도독인 손일·손수·보천 등이 서진으로 망명하여 중용된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처자와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서진으로 망명했다.[3] 무제는 손해를 차기장군·단양후에 봉하고 후하게 대우했다.[3]

태강 원년(280년), 서진이 오를 멸망시키자, 손해는 도요장군으로 격하되었다.[1]

영안 원년(304년)에 사망했다. 손해는 엄격하게 처신했다는 점에서는 손수에 미치지 못했지만, 세상의 명성은 손수보다 높았다고 한다.

2. 1. 오나라 시절

태평 3년(258년), 손침손량을 폐위한 후, 손해는 종정의 관직으로 중서랑(中書郞) 동조와 함께 손휴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권했다.[3] 손해는 아버지 손소, 동생 손월과 함께 3대에 걸쳐 경구(京口)에 주둔했다.[3] 손호 대에는 무위대장군(武衛大將軍)이 되고, 동생 손월을 대신하여 경하독(京下督)이 되었다.[3]

보정 원년(266년), 영안(永安, 현 저장성 지역)에서 도적 시단(施但)이 손호의 동생 손겸을 옹립하고 건업을 공격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다.[3] 이 사건이후 손해는 모함을 받아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1] 천새 원년(276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임명되고 건업 근교의 궁하진(宮下鎭)을 지키라는 명을 받자, 자신을 해치기 위해 불러들이는 것으로 의심하고 그 해 6월에 진나라로 달아났다.[3]

2. 2. 서진으로의 망명

태평 3년(258년), 손량을 폐위한 손침종정 손해와 중서랑(中書郞) 동조를 손휴에게 보내 제위에 오를 것을 종용하였다.[3] 손해는 아버지·아우와 함께 삼대에 걸쳐 경구(京口)에 주둔하였고, 손호 때에는 무위대장군(武衛大將軍)이 되고 아우를 대신하여 경하독(京下督)이 되었다.[3]

보정 원년(266년), 영안(永安: 절강성 지역)의 도적 시단(施但)이 손호의 폭정에 괴로워하던 백성들을 선동하여 손호의 동생인 손겸(孫謙)을 받들고 건업까지 공격하려 했다가 제갈정에게 진압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경하독 손해는 누군가에게 다른 뜻을 품었기 때문에 반란군을 진압하지 않았다는 모함을 받았다. 이 때문에 언제 해를 입을지 몰라 불안해했는데, 천새 원년(276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임명되고 건업 근교의 궁하진(宮下鎭)을 지키라는 명을 받자, 자신을 해치기 위해 불러들이는 것으로 의심하고 그 해 6월에 진나라로 달아났다.[3] 무제는 손해를 거기장군으로 삼고 단양후(丹楊侯)로 봉했다[3].

천기 4년(280), 동오가 멸망하였다. 손해는 도료장군(度遼將軍)으로 강등되었고,[1] 영안 원년(304년)에 죽었다.[1] 손해는 엄격하게 처신했다는 점에서는 손수에 미치지 못했지만, 세상의 명성은 손수보다 높았다고 한다.

2. 3. 서진에서의 말년

태평 3년(258년), 손침손량을 폐위시키고, 종정 손해와 중서랑(中書郞) 동조를 보내 손휴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종용하였다.[3] 손해는 아버지·아우와 함께 삼대에 걸쳐 경구(京口)에 주둔하였고, 손호 때에는 무위대장군(武衛大將軍)이 되고 아우를 대신하여 경하독(京下督)이 되었다.[3]

보정 원년(266년), 영안(永安: 절강성 지역)의 도적 시단(施但)이 손호의 폭정에 괴로워하던 백성들을 선동하여 손호의 동생인 손겸(孫謙)을 받들고 건업까지 공격하려 했다가 제갈정에게 진압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경하독 손해는 누군가에게 다른 뜻을 품었기 때문에 반란군을 진압하지 않았다는 모함을 받았다.[3] 이 때문에 언제 해를 입을지 몰라 불안해했는데, 천새 원년(276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임명되고 건업 근교의 궁하진(宮下鎭)을 지키라는 명을 받자, 자신을 해치기 위해 불러들이는 것으로 의심하고 그 해 6월에 진나라로 달아났다. 무제는 손해를 거기장군으로 삼고 단양후(丹楊侯)로 봉했다.[3]

천기 4년(280년), 서진이 오를 멸망시키자, 손해는 도요장군으로 격하되었다. 영안 원년(304년)에 사망했다.[3] 손해는 엄격하게 처신했다는 점에서는 손수에 미치지 못했지만, 세상의 명성은 손수보다 높았다고 한다.

3. 평가

참조

[1] 서적 晋諸公賛
[2] 서적 呉録
[3] 문서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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