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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제도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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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솔로몬 제도 전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통칭한다. 일본은 남방 자원 지대 확보를 위해 솔로몬 제도 점령을 시도했고, 이에 연합군은 워치타워 작전을 통해 반격에 나섰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를 시작으로 중부 솔로몬 제도, 부건빌 섬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연합군은 일본의 해상 및 항공 우위를 무력화하고 라바울을 고립시켰다. 솔로몬 제도 전역은 미드웨이 해전과 함께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일본군의 패배와 연합군의 반격의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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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제도 전역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1943년 연합군의 진격과 주요 공군 및 해군 기지를 보여주는 솔로몬 제도 지도.
1943년 연합군의 진격과 주요 공군 및 해군 기지를 보여주는 솔로몬 제도 지도.
분쟁태평양 전쟁의 일부
기간1942년 1월 – 1945년 8월 21일
위치영국령 솔로몬 제도/뉴기니 준주, 남태평양
결과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

솔로몬 제도
피지
통가

지휘관
연합군 지휘관체스터 니미츠
더글러스 맥아더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
로버트 고믈리
윌리엄 홀시
알렉산더 패치
프랭크 플레처
리치먼드 K. 터너
로이 가이거
시오도어 스타크 윌킨슨
오스카 그리즐
윌리엄 루퍼투스
에릭 펠트
스탠리 새비지
해럴드 배로클로
윌리엄 시드니 머천트}}
일본군 지휘관야마모토 이소로쿠
나구모 주이치
이노우에 시게요시
쓰카하라 니시조
구리타 다케오
시마 기요히데
구사카 진이치
니시무라 쇼지
미카와 군이치
다나카 라이조
이마무라 히토시
햐쿠타케 하루키치
사사키 미노루
아다치 하타조
전력
연합군 피해사망자 10,600명, 침몰 함선 40척 이상, 파괴 항공기 800대
일본군 피해사망자 86,000명, 침몰 함선 50척 이상, 파괴 항공기 1,500대 (일본군 사망자의 대부분은 질병 또는 기아로 인한 사망)

2. 배경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군은 서태평양을 제압하고 남방 자원 지대를 확보했다. 이후 일본군은 제2단계 작전을 구상했는데, 육군은 중국·인도 점령을, 해군은 오스트레일리아 점령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점령에는 20만 명의 병력이 필요했고, 육군은 중국 전선을 우선시하여 이를 거부했다. 이에 일본 해군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간 교통을 차단하여 오스트레일리아를 고립시키는 FS 작전을 계획하고 육군의 승인을 얻었다. 1942년 4월경 일본 해군의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9]

순서작전명내용
5월 상순포트모르즈비 공략 작전포트모르즈비 공략
6월 상순미드웨이, 알류샨 작전미드웨이섬, 알류샨 열도 공략
7월FS 작전피지, 사모아, 뉴칼레도니아 공략



산호해 해전 직전인 1942년 5월 3일,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 북쪽 플로리다 섬의 툴라기를 점령하고 수상기를 배치했다. 툴라기 부대는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 적지가 있음을 보고했다. 미드웨이 해전 패배 후, 일본군은 FS 작전을 연기했지만,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942년 7월 6일, 비행장 설영대가 상륙하여 건설을 시작했고, 8월 5일에 완성되어 16일에 전투기를 파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솔로몬 제도보다 뉴기니의 포트모르즈비 재공략에 더 집중했다.

1942년 7월 2일, 연합군은 워치타워 작전을 발동, 8월 7일에 미국 해병대 제1해병사단을 주력으로 과달카날 섬의 일본군 비행장과 툴라기의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상륙했다.

같은 시기, 뉴기니에서도 일본군의 포트모르즈비 육로 공략 작전이 진행되었지만,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에 전력을 우선 투입했다. 일본 해군은 인도양 작전도 중지했다.[10]

2. 1. 전략적 배경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통해 미국 태평양 함대를 공격했고, 이는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1] 이와 거의 동시에 영국령 말라야, 홍콩 등 태평양의 영국 영토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면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네덜란드령 동인도도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1] 일본의 초기 목표는 미국과 영국 해군을 무력화하고, 풍부한 천연 자원을 가진 영토를 점령하며, 광대한 제국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군사 기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1]

일본은 전쟁 초기 6개월 동안 홍콩, 필리핀, 태국, 말라야,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여러 지역을 점령하며 초기 전략 목표를 달성했다.[2] 이후 일본은 서쪽의 영국령 인도에서 남쪽의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거쳐 남부 및 중부 태평양의 섬 기지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2] 1942년 1월, 일본군은 라바울을 점령하여 남태평양 방어 거점으로 삼았고, 3월과 4월에는 부카와 부인에 비행장과 해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2]

1942년 4월, 일본 육군과 해군은 모 작전을 통해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하고, 남부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를 확보하려 했다.[3] 이 작전은 일본의 남부 방어선을 확장하고 호주와 미국 간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3] 그러나 일본 해군은 툴라기를 점령했지만, 산호해 해전에서 포트모르즈비 침공은 저지되었다.[4]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 연합 함대는 4척의 항공모함을 잃게 되었다.[4]

한편, 연합군은 호주에 대한 위협에 대응하고 필리핀 공격 및 재탈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병력과 항공기를 증강했다.[5] 1942년 3월, 어니스트 킹 제독은 뉴헤브리디스에서 솔로몬 제도를 거쳐 비스마르크 제도까지 공격을 주장했다.[6]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라바울에 대한 기습 공격을 제안했지만, 미국 해군은 뉴기니에서 시작하여 솔로몬 제도 열도를 따라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선호했다.[7] 결국 킹 제독과 조지 C. 마셜 장군의 합의로 세 가지 임무 계획이 채택되었고, 그 첫 번째 임무인 워치타워 작전이 솔로몬 제도 전역으로 이어졌다.[7]

일본 해군은 FS 작전을 통해 피지, 사모아, 뉴칼레도니아를 공략하여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교통을 분단하고 오스트레일리아를 고립시키려 했다.[9]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 패배 직후, FS 작전은 2개월 연기되었고,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9] 1942년 7월 6일, 비행장 설영대가 섬에 상륙하여 건설을 시작했고, 8월 5일에는 비행장이 완성되었다.[9]

1942년 7월 2일, 연합군은 워치타워 작전을 발동하여 과달카날 섬에서 일본군이 건설 중인 비행장과 툴라기의 일본군 기지를 공략하기 위해 미국 해병대 제1해병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미군을 상륙시켰다.

2. 2. 솔로몬 제도 진출

1942년 4월, 일본 육군과 해군은 모 작전을 개시하여 남부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를 점령하고 비행장 건설을 시작했다.[3] 일본 해군은 툴라기를 점령하고,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 건설을 시작했으나,[4] 연합군의 워치타워 작전으로 저지당했다.[7]

1942년 당시 전선


산호해 해전 직전인 1942년 5월 3일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 바로 북쪽에 위치한 플로리다 섬의 툴라기를 점령하고, 수상기를 배치하여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 적지가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다. 미드웨이 해전 패배 직후, 1942년 7월 6일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 설영대를 상륙시켜 건설을 시작했다. 비록 일본군의 관심은 솔로몬 제도보다 뉴기니의 포트모르즈비를 재공략하는 데 집중되었지만, 8월 5일에는 비행장이 완성되어 8월 16일에 전투기를 파견할 예정이었다.[9]

1942년 7월 2일, 연합군은 워치타워 작전을 발동하여, 8월 7일에 미국 해병대 제1해병사단을 주력으로 과달카날 섬에서 일본군이 건설 중인 비행장 탈취와 플로리다 제도의 툴라기에 있는 일본군 기지 공략을 위해 미군이 양 섬에 상륙했다.[9]

플로리다 제도 입구에 있는 3개의 작은 섬(툴라기, 타남보고, 가부츠)에는 일본 해군의 요코하마 해군 항공대 (수상기 부대)와 육전대(제84경비대) 800명 미만이 주둔하고 있었으며,[11], 1942년 8월 7일, 미국 해병대가 상륙하여 격전이 벌어졌지만 다음날 8일에 점령되었다. 일본군은 소수의 포로를 제외하고 전멸했다.[11]

3. 전개 과정

1942년 8월 7일, 미국 해병대과달카날에 상륙하면서 과달카날 전역이 시작되었다.[12] 연합군은 칵투스 항공대를 창설하여 낮 시간 동안 제공권을 확보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뉴 조지아 해협(일명 "슬롯")을 통해 도쿄 익스프레스| "쥐 수송"]] (연합군은 "도쿄 익스프레스"라고 불렀다)라고 불리는 야간 보급 작전에 의존했다. 일본군의 보급을 막기 위한 많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과달카날 전역 동안 양측 모두 너무 많은 함선을 잃어 뉴 조지아 해협 남쪽 끝, 즉 이전에 사보 해협이라고 불리던 과달카날 북쪽 지역은 "아이언바텀 사운드"로 알려지게 되었다.

솔로몬 제도 전역에서 연합군의 성공은 일본군이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를 미국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을 막았다. 카트휠 작전은 1943년 6월 30일에 시작되어 라바울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했으며 일본의 해상 및 항공 우위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다. 이는 연합군이 필리핀을 탈환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중요한 자원 지역으로부터 일본을 차단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솔로몬 전역은 부건빌 전역의 격렬한 전투로 절정에 달했다.

3. 1. 과달카날 전투

1942년 7월 6일,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 섬에 룽가 비행장(후의 헨더슨 비행장, 호니아라 국제공항)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정보를 입수한 미군은 8월 7일 과달카날해병대 10,000명[12]을 상륙시켜 별다른 저항 없이 비행장을 점령했다. 워치타워 작전으로 불리는 이 작전은 태평양 전선의 미군에게는 첫 번째 공세였다. 이로써 과달카날 섬은 일본과 연합군(주력은 미군)의 격전지가 되었다.

연합군은 칵투스 항공대(Cactus Air Force)Cactus Air Force영어라는 연합 항공 부대를 창설하여 낮 시간 동안 제공권을 확보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뉴 조지아 해협(일명 "슬롯")을 통해 도쿄 익스프레스| "쥐 수송"]] (연합군은 "도쿄 익스프레스"라고 불렀다)라고 불리는 야간 보급 작전에 의존했다. 일본군의 보급을 막기 위한 많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과달카날 전역 동안 양측 모두 너무 많은 함선을 잃어 뉴 조지아 해협 남쪽 끝, 즉 이전에 사보 해협이라고 불리던 과달카날 북쪽 지역은 "아이언바텀 사운드"로 알려지게 되었다.

1942년 12월 31일 일본은 과달카날 섬으로부터의 철수를 결정했고, 이듬해 1943년 2월 9일 과달카날 섬으로부터의 "전진"(철수)을 알리는 대본영 발표가 행해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는 24,000명, 미군의 사상자는 6,000명에 달했다.

3. 1. 1. 주요 전투 (과달카날)

1942년 8월 7일, 미국 해병대과달카날에 상륙하면서 과달카날 전역이 시작되었다.[12] 미군의 과달카날 상륙에 일본 해군은 즉시 반격하여 제1차 솔로몬 해전이 발생했다. 8월 12일에는 육군도 탈환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13]

과달카날 전역은 이후 일본군과 연합군 간의 격전지가 되었으며, 양측 모두 많은 함선을 잃었다. 특히 일본군은 공업 생산력의 열세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고, 라바울 항공대는 장거리 비행으로 인해 많은 항공기와 숙련된 조종사를 잃었다.

1942년 12월 31일, 일본은 과달카날 섬에서 철수를 결정했고, 1943년 2월에 철수가 완료되었다.

다음은 과달카날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 목록이다. (괄호 안은 연합군의 호칭)

연도주요 전투
1942년제1차 솔로몬 해전(사보섬 해전) (8월 9일)
일루 강 도하 전투(테나루 강 전투) (8월 21일)
제2차 솔로몬 해전(동부 솔로몬 해전) (8월 24일)
일본군 제1차 총공격(가와구치 부대) (9월 12일~14일)
사보섬 야간 해전(에스페란스 곶 해전) (10월 11일~12일)
헨더슨 기지 함포 사격 (10월 13일~14일)
일본군 제2차 총공격(제2사단) (10월 24일~26일)
남태평양 해전(산타크루즈 제도 해전) (10월 26일)
1942년제3차 솔로몬 해전(과달카날 해전) (11월 12일~15일)
룬가 해전(타사파롱가 해전) (11월 30일)
1943년
1943년렌넬섬 해전 (1월 29일~30일)
케호 작전(일본군 과달카날 철수) (2월 1일~7일)


3. 2. 중부 솔로몬 제도 전투

1942년 8월 7일, 미국 해병대과달카날에 상륙하면서 과달카날 전역이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칵투스 항공대를 창설하여 낮 시간 동안 제공권을 확보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뉴 조지아 해협(일명 "슬롯")을 통해 도쿄 익스프레스라고 불리는 야간 보급 작전에 의존했다. 과달카날 전역 동안 양측 모두 너무 많은 함선을 잃어 뉴 조지아 해협 남쪽 끝은 "아이언바텀 사운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군의 과달카날 섬 철수 이후, 연합군은 카트휠 작전 준비와 휴식을 위해 소강상태에 들어갔고[14], 일본군은 중부 솔로몬 제도(뉴 조지아 제도)와 동부 뉴기니의 방위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 기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라바울에서 뉴기니로 향하던 일본 수송 부대의 괴멸(비스마르크 해 해전), 일본군에 의한 연합군에 대한 대규모 항공 작전(이호 작전),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전사(해군 갑 사건)이다.

연합군은 소강 상태 이후, 남태평양 방면의 일본군 거점 라바울을 향해 솔로몬 제도와 뉴기니 양쪽에서 전진을 시작했다(카트휠 작전). 솔로몬 제도 방면 연합군의 첫 번째 행동은 중부 솔로몬의 뉴 조지아 섬 문다 비행장 탈취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후 이 해역의 전투는 솔로몬 제도 연안을 따라 라바울로 향하는 미군이 비행장을 확보하기 위해 실시한 작전과, 이에 반격하는 일본군 사이에서 발생한 전투이다.

1942년 12월,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에서의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뉴조지아 섬의 문다에 비행장을 건설했다.[15][16] 과달카날 섬 철수 후, 일본군은 솔로몬 방면의 방어선을 중부 솔로몬으로 하기로 결정하고, 뉴조지아 섬과 그 바로 북쪽에 있는 콜롬방가라 섬의 전력 증강을 계속했다.

3. 2. 1. 뉴조지아/렌도바

1942년 12월,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에서의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뉴조지아 섬의 문다에 비행장을 건설했다.[15][16] 과달카날 섬 철수 후, 일본군은 솔로몬 방면의 방어선을 중부 솔로몬으로 하기로 결정하고, 뉴조지아 섬과 그 바로 북쪽에 있는 콜롬방가라 섬의 전력 증강을 계속했다.

1943년 6월 30일, 미국군은 뉴조지아 섬의 일본군 문다 비행장을 점령하여 자군의 비행장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 작전으로 문다 맞은편 렌도바 섬에 상륙했다. 이어서 7월 5일 뉴조지아 섬에 상륙하여 8월 5일 문다를 점령했다. 잔존 일본군은 같은 달 하순에 콜롬방가라 섬으로 철수했다.

미국군의 뉴조지아 섬 상륙에서 문다 비행장 점령까지의 경과는 순조롭지 않았고, 사전 계획보다 많은 날짜와 손해를 봐야 했다. 정글을 통해 적 비행장에 접근하여 점령한다는 어려운 문제(과달카날 섬에서 일본군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17])를 경험한 미국군은 이 뼈아픈 경험으로 인해 그 후의 작전 계획을 수정하게 된다.

3. 2. 2. 베라라베라/콜롬방가라

미국군의 최초 계획은 일본군의 코론반가라 섬의 빌라 비행장 점령이었지만, 뉴 조지아 섬 공략의 쓴 경험으로 일본군의 방비가 두터운 코론반가라 섬으로의 침공은 중단하고, 대신 방비가 얇은 베라라베라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했다.[19][20] 1943년 8월 15일, 미국군은 동 섬의 남부에 상륙했다. 섬에는 소수의 일본군밖에 없었고, 증원 부대가 파견되었지만 큰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다.

베라라베라 섬이 미국군에게 점령됨으로써, 코론반가라 섬의 일본군은 연합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었고, 9월 28일~10월 2일에 일본군의 코론반가라 섬으로부터의 철수 작전(세 작전)이 실행되었다.

베라라베라 섬에 있던 약 600명의 일본군은 10월 6일에 섬에서 철수했다. 이로 인해 연합군은 중부 솔로몬으로의 진격을 달성하고, 다음은 북부 솔로몬의 부건빌 섬을 목표로 하게 된다.

3. 3. 북부 솔로몬 제도 (부건빌) 전투

1942년 8월, 미국 해병대과달카날에 상륙하면서 과달카날 전역이 시작되었다. 이후 솔로몬 제도 전역에서 연합군의 성공은 일본군이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를 미국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을 막았다. 카트휠 작전은 라바울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했으며 일본의 해상 및 항공 우위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다.

솔로몬 전역은 부건빌 전역의 격렬한 전투로 절정에 달했다.

북부 솔로몬의 부건빌섬에서 일본군은 부인 등에 비행장을 건설하여 과달카날섬 전투의 중계 기지로 활용했다. 콜롬방가라섬에서 철수가 이루어졌을 무렵 수립된 절대 국방권 구상에서는 솔로몬 방면의 전위선을 부건빌섬으로 했다.[21]

미국군은 라바울로 더 진격하기 위해 부건빌섬에 비행장이 필요했지만, 뉴조지아섬 공략의 경험을 바탕으로 부건빌섬의 일본군 비행장을 점령하는 대신 섬에 새로운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943년 11월 1일, 미국군은 비행장 건설지로 결정된 타로키나 곶에 상륙했다.[22] 일본군은 상륙한 미국군을 공격했지만(제1차 타로키나 공격) 실패했고, 12월에 타로키나 곶에 비행장을 완성한 미국군은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라바울 공습을 했다.[23] 이듬해 3월 일본군은 다시 타로키나 곶을 공격했지만(제2차 타로키나 공격) 이 역시 실패했다. 이후 일본군은 식량 부족과 열대병으로 인해 그 상황은 "묘도(墓島)"라고 불릴 정도였다. 전투는 종전까지 계속되었고, 일본군은 1945년 9월 3일에 항복했다.

3. 3. 1. 그린 제도

1944년 2월, 연합군은 그린 섬(라바울 동쪽, 부건빌 섬 북서쪽)에 상륙하여 비행장을 건설했다. 섬에는 약 100명의 일본군이 있었지만 전멸했다. 비행장은 3월 4일에 완성되었고, 연합군 항공기지에서 라바울까지의 거리는 부건빌 섬의 타로키나에 비해 절반인 약 200km가 되었다.[24]

3. 3. 2. 주요 전투 (중/북부 솔로몬)

1943년 3월, 비스마르크 해 해전에서 일본 수송 부대가 괴멸되고, 이호 작전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전사(해군 갑 사건)가 발생했다.[14] 이후, 솔로몬 제도 해역의 전투는 미군이 비행장 확보를 위해 실시한 작전과 이에 반격하는 일본군 사이에서 벌어졌다.

  • 3월: 비스마르크 해 해전 (뉴기니 방면)
  • 3월: 빌라 스탄모어 야간 해전
  • 4월: 이호 작전, 해군 갑 사건 (야마모토 이소로쿠 전사)
  • 7월: 클라 만 야간 해전 (클라 만 해전)
  • 7월: 콜롬방가라 섬 해전
  • 8월: 베라 만 야간 해전 (베라 만 해전)
  • 10월: 제2차 베라라베라 해전 (베라라베라 해전)
  • 11월: 부건빌 섬 해전 (엠프리스 오거스타 만 해전)
  • 11월: 로호 작전 (부건빌 섬 해상 항공전)
  • 11월: 라바울 공습
  • 11월: 세인트조지 곶 해전
  • 1944년 2월: 그린 제도 전투


1943년 11월 1일, 미군은 부건빌 섬의 타로키나 곶에 상륙하여 비행장을 건설하려 했고, 일본군은 이에 맞서 1차, 2차에 걸쳐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부건빌섬 전투)[22][23] 1944년 2월 15일에는 연합군이 그린 제도(라바울 동쪽, 부건빌 섬 북서쪽)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비행장을 건설했다.[24]

4. 결과

과달카날 전역미드웨이 해전태평양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1942년 8월 7일, 미국 해병대과달카날에 상륙하면서 과달카날 전역이 시작되었고, 연합군은 칵투스 항공대를 창설하여 제공권을 확보했다. 일본군은 뉴 조지아 해협을 통한 야간 보급 작전("쥐 수송", 연합군은 "도쿄 익스프레스"라고 불렀다)에 의존해야 했다. 과달카날 전역 동안 양측은 많은 함선을 잃었고, 뉴 조지아 해협 남쪽 끝은 "아이언바텀 사운드"로 알려지게 되었다.[12]

솔로몬 제도 전역에서 연합군은 일본군이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를 미국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했다. 1943년 6월 30일에 시작된 카트휠 작전은 라바울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했으며, 일본의 해상 및 항공 우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이는 연합군이 필리핀을 탈환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로부터 일본을 차단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13]

솔로몬 전역은 부건빌 전역의 격렬한 전투로 절정에 달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2년 12월 31일 일본은 과달카날 섬으로부터의 철수를 결정했고, 1943년 2월 9일 과달카날 섬으로부터의 "전진"(철수)을 알리는 대본영 발표가 행해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는 24,000명, 미군의 사상자는 6,000명에 달했다.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후 전황은 악화되었다.

참조

[1] 서적 A Priceless Advantage
[2] 서적
[3] 서적 A Priceless Advantage, Guadalcanal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문서 大日本帝国政府では大東亜戦争、連合国では第二次世界大戦太平洋戦線(The Pacific War)と呼称されていた
[9] 서적 戦史叢書
[10] 문서 p.29『(一)八月一日戰艦一、航空母艦二、巡洋艦又ハ駆逐艦九隻ヨリナル敵ノ機動部隊「ツリンコマリ」ノ北東方海面ニ出現セル等ノ爲B作戰ヲ一時延期セラレ「メルギー」ニ待機中ノ処外南洋方面ノ情勢急迫セシヲ以テB作戰ヲ取止メ同部隊ノ大部ヲ外南洋方面作戰ニ参加セシメラル』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戦史叢書, 平塚柾緒
[14] 서적
[15] 서적 戦史叢書
[16] 서적 戦史叢書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戦史叢書
[21] 서적 戦史叢書
[22] 서적
[23] 서적 戦史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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