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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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효석은 1907년 강원도 평창 출생으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단편 《도시와 유령》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초기에는 사회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이후 구인회에 참여하여 순수문학으로 전환했다. 대표작으로는 《메밀꽃 필 무렵》이 있으며, 숭실전문학교와 대동공업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2년 결핵수막염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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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 - 메밀꽃 필 무렵
메밀꽃 필 무렵은 이효석의 단편 소설로, 장돌뱅이 허 생원이 봉평 장에서 만난 젊은 장돌뱅이 동이와 대화 장으로 이동하며 혈육의 정을 느끼는 과정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 대한제국의 소설가 - 육용정
육용정은 1842년에 태어나 1917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 문인으로, 동도서기론적 입장을 견지하며 보수와 개화의 조화를 주장했고, 《의전합고》 등 다양한 저술과 소설 작품을 남겼다. - 수막염으로 죽은 사람 - 주공삼
주공삼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시기를 거치며 월남을 시도하고 피난 생활을 하다가 1953년 뇌수막염으로 사망한 인물이며, 주요 자녀로 주요한, 주요섭, 주영섭 등이 있다. - 수막염으로 죽은 사람 - 스레치코 코소벨
슬로베니아의 시인이자 작가인 스레치코 코소벨은 짧은 생애 동안 다양한 예술 사조를 섭렵하며 슬로베니아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파시즘 저항 정신과 사회 비판적 시각을 담은 작품으로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며 사후에도 재평가받고 있다.
이효석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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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이효석 |
출생일 | 1907년 4월 5일 |
출생지 | 봉평면, 강원도, 대한제국 |
사망일 | 1942년 5월 25일 |
묘지 | 평창군 |
직업 | 작가 |
학력 | |
모교 | 경성제국대학 |
작품 활동 | |
장르 | 소설 |
문학 사조 | 모더니즘 |
주요 작품 | 메밀꽃 필 무렵 |
개인 정보 | |
국적 | 대한제국 |
2. 생애
이효석은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후는 한성사범학교 출신으로 경성에서 교편을 잡았고, 어머니 강홍경은 진부 성결교회 공로자였다. 아버지 직장 때문에 잠시 경성에 살았지만, 5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이효석은 기억력이 뛰어나 마을 사람들에게 신동이라 불렸다.[3]
1913년, 8세 때 외학을 하게 되어 봉평에서 100리가 떨어진 평창공립보통학교(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강릉 김씨 집에 하숙했다. 1919년 평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무시험으로 입학하였다. 192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조선인 학생회 "문우회"에 가입했다. 1927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에 진학했다. 이효석은 체호프와 토마스 만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1930년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2]
경성제대 졸업 후 1, 2년 동안 직업을 구하지 못하다가,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잠시 근무했으나, 곧 아내의 친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으로 이주하여 경성농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4년에는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부임하여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에 몰두했으며, 1936년에는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했다.[3]
1940년 부인 이경원이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만주, 중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1942년 5월, 병으로 쓰러져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3]
연도 | 사건 |
---|---|
1907년 |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출생 |
1910년 | 부친의 직장 때문에 경성부로 이사 |
1912년 |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에서 한학을 배움 |
1913년 | 평창공립보통학교 입학, 강릉 김씨 가문에 하숙 |
1919년 | 평창공립보통학교 졸업 |
1920년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 |
1925년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 문우회 가입 |
1927년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 진학 |
1930년 | 경성제국대학 졸업 |
1931년 | 이경원과 결혼,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 근무(한 달), 함경북도 경성으로 이주, 경성농업학교 교편 |
1932년 | 장녀 나미 출생 |
1934년 |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 |
1935년 | 차녀 루미 출생 |
1937년 | 장남 우현 출생 |
1940년 | 부인 이경원 사망, 만주, 중국 여행 |
1942년 | 사망 |
2. 1. 경성제국대학 시절과 문단 데뷔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때 만난 친구로는 영문학자이자 법학자이며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하는데 참여한 유진오, 해방 후 초대~5대 국회의원을 연임한 5선 국회의원이자 자유당의 온건파 정치인 이재학이 있었다. 이들은 그의 경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동문으로 학사 학위 취득 후에도 그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2]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로 데뷔하였다. 이후 《행진곡》, 《기우》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에서 벗어나 구인회에 참여, 《돈》, 《수탉》 등 향토색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구인회를 결성했다.
젊은 시절의 그는 '가난뱅이 작가[12]'였다. 그는 돈 없이 자신의 가난하고 빈한한 처지를 스스로 '가난뱅이 작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작가였던 이효석은 경성 토호 집안이었던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백방으로 직업을 구했다. 중학 시절 은사가 주선해준 취직 자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다.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는 곳이다.[12] 동료들의 지탄이 빗발쳤다. 결국 이효석은 열흘 만에 조선총독부를 그만뒀다.[12]
2. 2. 초기 작품 활동과 사회주의적 경향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되면서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2] 이후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며 동반작가에서 벗어나 구인회(九人會)에 참여, 《돈(豚)》, 《수탉》 등 향토색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젊은 시절 그는 '가난뱅이 작가[12]'였다. 가난 때문에 경성 토호 집안이었던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백방으로 직업을 구했다. 중학 시절 은사가 주선해준 취직 자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다.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는 곳이라[12] 동료들의 지탄이 빗발쳤고, 결국 열흘 만에 조선총독부를 그만뒀다.[12] 1933년에는 구인회를 결성했다.
'기우', '깨뜨려지는 홍등', '노령 근해' 등 초기 작품들은 그의 사회주의적 성향을 반영했다.[2] 이효석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정치적이었으며, 불행한 여성들이 매춘에 내몰리는 삶에 자주 초점을 맞췄고, 종종 그의 정치적 메시지를 성적 탐구와 결합했다.[4] 그러나 1933년 일본 점령자들의 문학의 정치성 금지 압력이 커지자, 구인회 결성을 돕고 정치 문학을 버리고 심미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2]
2. 3. 구인회 가입과 순수문학으로의 전환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나왔다. 이 시기 유진오, 이재학 등과 교류하였다.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동반자작가로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행진곡》, 《기우》 등을 발표하며 동반자작가에서 벗어나 구인회에 참여, 《돈》, 《수탉》 등 향토색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2]젊은 시절 이효석은 가난 때문에 스스로를 '가난뱅이 작가[12]'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했지만, 동료들의 비판을 받고 열흘 만에 그만두었다.[12] 1933년에는 구인회를 결성했다.[2]
1933년, 일제의 압력으로 정치 문학을 버리고 심미적인 접근을 택한 이효석은 구인회 결성을 도왔다. 구인회에는 정지용, 이상, 김기림, 이태준 등이 참여했다.[2] 이효석은 에로티시즘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자연에 대한 관심 또한 커졌다. 소설 《돈》에서는 돼지 농장을 건설하려는 남자가 암퇘지를 키우는 과정을 통해 돼지의 발정기에 인간의 성행위를 겹쳐 묘사했다.
2. 4. 숭실전문학교 교수 생활과 작품 활동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국문학과 영문학 교수가 된 후, 강의 활동과 동시에 《산》, 《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다.[3] 1936년에는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아름답게 묘사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3] 하지만, 정작 이효석의 삶은 시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양 영화를 즐겨 보았고, 서양에서 온 가수나 무용단의 공연을 보며 넋을 잃기도 했던 도시인의 삶이 그의 삶이었다.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한 뒤 이를 승계한 대동공업전문학교가 신설되면서 이효석은 대동공업전문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이어갔다.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2. 5. 서구적 취향과 성(性) 탐구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국문학과 영문학 교수가 된 후, 강의 활동과 동시에 《산》, 《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아름답게 묘사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효석의 삶은 시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양 영화를 즐겨 보았고, 서양에서 온 가수나 무용단의 공연을 보며 넋을 잃기도 했던 도시인의 삶이 그의 삶이었다.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한 뒤 이를 승계한 대동공업전문학교가 신설되면서 이효석은 대동공업전문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이어갔다.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 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2] 이효석은 계속해서 에로티시즘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초점은 또한 주로 자연으로 향했다. 그의 소설 '돼지'에서 이효석은 돼지 농장을 건설할 의도로 암퇘지를 키우는 남자에 대해 쓰고, 돼지의 발정기에 인간의 성행위를 겹쳐 묘사한다. '분녀'에서 이효석은 성적으로 방탕한 인물을 탐구했다. 이효석의 가장 유명한 소설인 ''메밀꽃 필 무렵''은 떠돌이 장수와 하룻밤의 실수로 낳은 아들, 즉 젊은 남자에 대한 그의 사랑을 따라간다. 이 소설은 "뛰어난" 작품[5]이자 "현대 고전"[6]으로 묘사되었으며, 1967년 이성구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다.[7]
2. 6. 결혼과 가정 생활
이효석의 파트너 중 한 명은 가수 왕수복이었다.[8]2. 7. 최후
1940년 부인 이경원과 차녀를 잃은 후 실의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못하다가 1942년 5월 25일 결핵수막염으로 35세에 세상을 떠났다.[2],[3]3. 사후
이효석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모친과 함께 묻혔으나, 1972년 영동고속도로 건설로 용평면 고속도로 변으로 이장되었다. 1998년 영동고속도로 확장 공사로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동화경모공원으로 옮겨졌고, 2021년 고향인 평창군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3. 1. 이효석 문학관과 효석문화제
평창군 봉평면에는 이효석의 생가와 이효석 문학관, 효석문화마을이 있으며, 창동리와 원길리 일대에 이효석길이 있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그의 고향인 평창군 봉평면을 배경으로 하며, 이 지역은 여전히 메밀 생산으로 유명하다.[9] 이 마을은 1500m 높이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http://www.lifeinkorea.com/Travel2/411 이효석 문학관]은 1990년 문화관광부에 의해 '최초의 국가 문화 마을'로 지정된 이효석 문화마을 내에 있다. 이 부지에는 작은 강, 물레방앗간, 작은 초가집, 그리고 소설의 미니어처 디오라마가 있다.[9]매년 8월 말에서 9월 초(날짜는 매년 다름)에 열리는 이효석 문화제는 메밀을 주제로 하며, 백일장, 사진 콘테스트, 다채로운 퍼레이드, 《메밀꽃 필 무렵》과 관련된 다양한 영화 및 공연 등이 포함된다. 훌륭한 국수와 전을 포함하여 메밀을 기반으로 한 음식도 풍부하게 제공된다.[9]

4. 주요 작품 목록
이효석은 70편이 넘는 소설을 썼다. 다음은 출판된 작품 일부이다.[2]
제목 | 연도 |
---|---|
도시와 유령 | 1928년 |
기우 | 1929년 |
행진곡 | 1929년 |
한가한 하루 | 1930년 |
약령기 | 1930년 |
서점에 비치는 도시의 일면상 | 1930년 |
러시아령 근해 | 1931년 |
북국통신 | 1931년 |
첫눈 | 1931년 |
전주곡 | 1932년 |
오리온과 사과 | 1932년 |
북국점경 | 1932년 |
돼지 | 1933년 |
요리사 | 1933년 |
가을과 서정 | 1933년 |
성수부 | 1935년 |
성화 | 1936년 |
분녀 | 1936년 |
산 | 1936년 |
~등 | 1936년 |
메밀꽃 필 무렵 | 1936년 |
석류 | 1936년 |
천사와 산문시 | 1936년 |
주을의 지협 | 1937년 |
성찬 | 1937년 |
게사르그 | 1937년 |
장미가 앓다 | 1938년 |
가을과 염소 | 1938년 |
해바라기 | 1938년 |
코리의 목가 | 1938년 |
산정 | 1939년 |
황제 | 1939년 |
역사 | 1939년 |
푸른 하늘 무한 | 1940년 |
창공 | 1940년 |
북경 좋은 날 | 1940년 |
산협 | 1941년 |
사랑의 판도 | 1941년 |
프루이프 | 1942년 |
일요일 | 1942년 |
푸른 포도 사상 | 1942년 |
4. 1. 단편 소설
이효석의 단편 소설 목록은 다음과 같다.- 도시와 유령 (1928년)[13]
- 돈(豚)
- 수탉
- 장미 병들다 (1938년)
- 산
- 들
- 메밀꽃 필 무렵 (1936년)
- 화분(花粉) (1939년)
- 행진곡(行進曲) (1929년)
- 기우 (1929년)
이효석은 70편이 넘는 소설을 썼으며, 1928년 소설 도시와 유령이 잡지 《조선지광》에 발표되면서 문단에 처음 주목을 받았다.[2] 그는 기우, '깨뜨려지는 홍등', '노령 근해'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그의 사회주의적 성향을 반영했다.[2] 이효석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정치적이었으며, 불행한 여성들이 매춘에 내몰리는 삶에 자주 초점을 맞췄고, 종종 그의 정치적 메시지를 성적 탐구와 결합했다.[4] 그러나 1933년, 일본 점령자들의 문학의 정치성을 금지하라는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이효석은 구인회 결성을 도왔고, 정치 문학을 버리고 보다 심미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2]
이효석은 계속해서 에로티시즘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초점은 또한 주로 자연으로 향했다. 그의 소설 '돼지'에서 이효석은 돼지 농장을 건설할 의도로 암퇘지를 키우는 남자에 대해 쓰고, 돼지의 발정기에 인간의 성행위를 겹쳐 묘사한다. 분녀에서 이효석은 성적으로 방탕한 인물을 탐구했다. 이효석의 가장 유명한 소설인 메밀꽃 필 무렵(영어 제목으로는 ''The Buckwheat Season''으로도 알려져 있음)은 떠돌이 장수와 하룻밤의 실수로 낳은 아들, 즉 젊은 남자에 대한 그의 사랑을 따라간다. 이 소설은 "뛰어난" 작품[5]이자 "현대 고전"[6]으로 묘사되었으며, 1967년 이성구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다.[7]
5. 작품 세계
이효석은 1928년 잡지 《조선지광》에 소설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며 문단에 처음으로 주목받았다.[2] 초기에는 사회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주로 발표했으나, 1933년 구인회 결성에 참여하면서 순수문학과 자연주의적 경향으로 변화했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가 된 후, 《산》, 《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아름답게 묘사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5][6]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한 뒤에는 대동공업전문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이어갔다.
이 시기, 이효석은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화분》 등을 발표하며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하는 새로운 작품 경향을 보였다. 이태준, 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받았다.
이효석은 에로티시즘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유지하면서도, 자연에 대한 관심 또한 작품에 담아냈다. 소설 '돼지'에서는 돼지의 발정기에 인간의 성행위를 겹쳐 묘사했고, '분녀'에서는 성적으로 방탕한 인물을 탐구했다.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은 떠돌이 장수와 하룻밤의 실수로 낳은 아들과의 관계를 다룬 작품으로, "뛰어난" 작품[5]이자 "현대 고전"[6]으로 평가받으며, 1967년 이성구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다.[7]
5. 1. 초기 (1928-1933): 사회주의적 경향
이효석은 1928년 소설 '도시와 유령'을 잡지 《조선지광》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처음으로 주목받았다.[2] 이후 '기우', '깨뜨려지는 홍등', '노령 근해' 등 여러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사회주의적 경향을 반영했다.[2] 그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정치적이었으며, 불행한 여성들이 매춘에 내몰리는 삶에 자주 초점을 맞췄고, 종종 정치적 메시지를 성적 탐구와 결합했다.[4]그러나 1933년, 일본 점령자들의 문학의 정치성을 금지하라는 압력이 거세지자, 이효석은 구인회 결성을 도왔고, 정치 문학을 버리고 보다 심미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2] 구인회에는 정지용, 이상, 김기림, 이태준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이효석에게 영향을 미쳤다.[2]
발표 연도 | 작품 제목 |
---|---|
1928년 | 『도시와 유령』 |
1929년 | 『기우』, 『행진곡』 |
1930년 | 『한가한 하루』, 『약령기』, 『서점에 비치는 도시의 일면상』 |
1931년 | 『러시아령 근해』, 『북국통신』, 『첫눈』 |
1932년 | 『전주곡』, 『오리온과 사과』, 『북국점경』 |
1933년 | 『돼지』, 『요리사』, 『가을과 서정』 |
5. 2. 중기 (1933-1936): 순수문학과 자연주의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국문학과 영문학 교수가 된 후, 강의 활동과 동시에 《산》, 《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아름답게 묘사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5][6] 하지만, 정작 이효석의 삶은 시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양 영화를 즐겨 보았고, 서양에서 온 가수나 무용단의 공연을 보며 넋을 잃기도 했던 도시인의 삶이 그의 삶이었다.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한 뒤 이를 승계한 대동공업전문학교가 신설되면서 이효석은 대동공업전문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이어갔다.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화분》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 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1933년, 일본 점령자들의 문학의 정치성을 금지하라는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이효석은 구인회 결성을 도왔고, 정치 문학을 버리고 보다 심미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2] 구인회에는 정지용, 이상, 김기림, 이태준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이효석에게 영향을 미쳤다.[2]
이효석은 계속해서 에로티시즘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초점은 또한 주로 자연으로 향했다. 그의 소설 '돼지'에서 이효석은 돼지 농장을 건설할 의도로 암퇘지를 키우는 남자에 대해 쓰고, 돼지의 발정기에 인간의 성행위를 겹쳐 묘사한다. '분녀'에서 이효석은 성적으로 방탕한 인물을 탐구했다. 이효석의 가장 유명한 소설인 ''메밀꽃 필 무렵''(영어 제목으로는 ''The Buckwheat Season''으로도 알려져 있음)은 떠돌이 장수와 하룻밤의 실수로 낳은 아들, 즉 젊은 남자에 대한 그의 사랑을 따라간다.
다음은 이효석이 1933년에서 1936년 사이에 발표한 작품들이다.
발표년도 | 작품명 |
---|---|
1933년 | 돼지 |
1933년 | 요리사 |
1933년 | 가을과 서정 |
1935년 | 성수부 |
1936년 | 성화 |
1936년 | 분녀 |
1936년 | 산 |
1936년 | ~등 |
1936년 | 메밀꽃 필 무렵 |
1936년 | 석류 |
1936년 | 천사와 산문시 |
5. 3. 후기 (1936-1942): 서구적 취향과 성(性) 탐구
1936년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아름답게 묘사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효석의 삶은 시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양 영화를 즐겨 보았고, 서양에서 온 가수나 무용단의 공연을 보며 넋을 잃기도 했던 도시인의 삶이 그의 삶이었다.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한 뒤 이를 승계한 대동공업전문학교가 신설되면서 이효석은 대동공업전문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이어갔다.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 《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 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이효석은 계속해서 에로티시즘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초점은 또한 주로 자연으로 향했다. 그의 소설 '돼지'에서 이효석은 돼지 농장을 건설할 의도로 암퇘지를 키우는 남자에 대해 쓰고, 돼지의 발정기에 인간의 성행위를 겹쳐 묘사한다. '분녀'에서 이효석은 성적으로 방탕한 인물을 탐구했다. 이효석의 가장 유명한 소설인 ''메밀꽃 필 무렵''(영어 제목으로는 ''The Buckwheat Season''으로도 알려져 있음)은 떠돌이 장수와 하룻밤의 실수로 낳은 아들, 즉 젊은 남자에 대한 그의 사랑을 따라간다. 이 소설은 "뛰어난" 작품[5]이자 "현대 고전"[6]으로 묘사되었으며, 1967년 이성구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다.[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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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 Who in Korean Literature
Korea Culture and Arts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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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Korean Cultural Service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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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torial Korea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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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Motion Picture Promotion Corp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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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은주의 시선] 최초의 대중가요 스타, 평양기생 왕수복
https://www.yna.co.k[...]
2017-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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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Hyo-seok (Buckwheat Blossoms) Memorial Village and Festival
http://www.ktli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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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李孝石)
http://encykorea.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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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http://www.up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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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평론가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 출간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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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삶
http://www.hyoseok.n[...]
이효석문학관
20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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