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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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성철은 제주도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재일 조선인 관련 활동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노동조합총동맹 등에서 활동했으며, 일본 화학 노동조합 오사카 지부에 가입하여 김문준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제주혁우동맹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고,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해방 후에는 조선인 정치범 석방 연맹을 조직하고 재일본조선인연맹 결성에 참여했다.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미군정 하의 남조선에서 재일 조선인의 상황을 알리는 연설을 하였으며, 민전의 간부로 활동했다. 이후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일본과장, 조선로동당 기관지 '근로자'에 일본 관련 논설을 기고했으며, 한국 전쟁 발발 후에는 주 북경 조선 대사관 참사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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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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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송성철 |
한자 이름 | 宋性徹 |
출생일 | 1913년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제주도 |
사망일 | 미상 |
사망지 | 미상 |
사망 원인 | 미상 |
매장지 | 미상 |
거주지 | 미상 |
성별 | 남성 |
국적 | 미상 |
직업 | 미상 |
본관 | 미상 |
별칭 | 미상 |
학력 | 미상 |
부모 | 미상 |
형제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동거인 | 미상 |
가족 | 미상 |
친척 | 미상 |
병역 | 미상 |
사회 운동 |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노동운동 |
활동 기간 | 미상 |
주요 활동 | 미상 |
활동 이념 | 미상 |
영향을 줌 | 미상 |
영향을 받음 | 미상 |
경력 | 미상 |
상훈 | 미상 |
서명 | 미상 |
웹사이트 | 미상 |
기타 | 미상 |
각주 | 미상 |
2. 생애
송성철은 제주도 출신으로, 1923년부터 제주도와 오사카 간 직통 정기 항로가 열리면서 일본 내 조선노동조합총동맹 등 조직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193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조선인 노동자 조직인 일본 화학 노동조합 오사카 지부에 가입, 김문준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제주혁우동맹)에 가입, 1931년 검거되어 징역형과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1933년 석방되었다.
1935년 도쿄에서 조선신문일본어 편집국원으로 재일 조선인의 생활 문제를 다루었으나, 1936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 출옥 후에도 재검거되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조선인 정치범 석방 연맹, 재일본조선인연맹 결성에 관여하고, 일본공산당 재건 후 간토 지방 담당, 미군정 하 남조선 파견, 민주주의민족전선 활동 등을 펼쳤다. 1946년 황거 앞 광장 생활옹호대회 후 체포, 군사 재판을 거쳐 1947년 남조선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여운형의 딸과 결혼, 여운형 암살 후 추도사를 낭독했으며, 1948년 평양 전 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외무성 일본과장으로 임명되었고, 조선로동당 기관지 '근로자'에 일본 관련 논설을 집필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에는 주 북경 조선 대사관 참사를 맡았다.
2. 1. 일제강점기 활동
제주도 출신으로, 193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조직한 일본 화학 노동조합 오사카 지부에 가입하여, 같은 고향 출신인 김문준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제주도로 돌아와 공산주의 그룹 제주혁우동맹(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에 가입했다. 1931년에 검거되어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았다. 1933년 6월에 석방된 후 도쿄로 건너가, 1935년에는 김두용 등과 함께 조선신문일본어 편집국원이 되어, 오사카의 『민중시보』와 마찬가지로 재일 조선인의 생활 문제(조선어 사용 금지, 임금 격차, 실업·주택 문제 등)를 다루었다. 김천해의 지원을 받으면서, 조선인 노동자가 많은 토목 작업원의 밥집 등을 돌며 구독자 모집과 지원금 획득에 힘썼지만, 1936년에 도쿄의 관계자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제 검거되었고, 송성철도 징역 2년 6개월의 판결을 받았다. 1939년에 출옥했지만, 조선 문제 시국 연구회를 조직한 혐의로 다시 검거되었다.2. 2. 해방 이후 활동
1945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 후, 송성철은 김두용 등과 함께 조선인 정치범 석방 연맹을 조직하고, 1945년 10월 후추 형무소 내 예방구금소에서 출소한 김천해를 맞이하여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결성에 참여했다. 일본공산당 재건 후, 조선인부 간토 지방 담당이 되었고, 이듬해 2월 일본공산당 제5회 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미군정 하 남조선에 파견되어 서울과 광주에서 재일 조선인의 상황에 대해 연설했다.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활동했다. 1946년 12월 20일 조련이 조직한 생활옹호위원회가 황거 앞 광장에서 생활옹호대회를 열었지만, 요청을 위해 총리 관저에 갔다가 체포되어 레드 퍼지에 의한 연합군 군사 재판에서 징역 판결을 받고, 1947년 3월 남조선으로 강제 송환되었다.이후 민전 간부로 활동하며 여운형의 딸과 결혼했다. 같은 해 7월 여운형 암살 후, 다음 달 인민장에서 추도사를 낭독했다.
2. 3. 북한 정권 수립 이후
1948년 4월, 북한 평양에서 열린 전 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외무성 일본과장으로 임명되었고, 조선로동당 기관지 '근로자'에 일본 관련 논설을 집필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주 북경 조선 대사관 참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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