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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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드 퍼지는 1940년대 후반 일본에서 공산주의자, 좌익 성향의 인물들을 공직과 기업에서 추방한 사건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점령 기간 동안, 미국은 일본의 민주화를 추진했으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하여 정책을 전환했다. 1949년 이후 미국은 일본 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억제하기 위해, 언론, 교육, 기업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인물들을 해고하는 숙청 작업을 벌였다. 이러한 조치는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50년대 초 일본 공산당의 세력 약화와 함께 관련 소송이 제기되었으나, 법원은 대부분 GHQ의 지시였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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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퍼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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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퍼지 | |
개요 | |
명칭 | 레드 퍼지 |
로마자 표기 | reddo pāji |
영어 표기 | Red Purge |
발생 시기 | 1948년~1952년 |
지역 | 일본 |
대상 |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자 공산주의 동조자로 의심되는 자 좌파 |
유형 | 대량 해고 공직 해임 정치 활동 금지 |
피해자 수 | 27,000명 이상 |
가해자 | 연합군 최고사령부 (SCAP) 일본 정부 일본 기업 일본 대학 |
동기 | 고조되는 냉전 긴장 전후 적색 공포 중국 국공 내전에서 공산주의 승리 한국 전쟁 발발 |
배경 | |
관련 사건 | 역코스 하의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 |
상세 내용 | |
설명 | "레드 퍼지"는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 시기, 역코스 정책 하에서 진행된 반공산주의 운동이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공산당이 '법의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공산당 비합법화를 시사했다. 1949년 중반부터 긴축 재정으로 인해 기업 정리 및 행정 정리라는 명목으로 대량 해고가 시작되었으며, 좌익 사상이 의심되는 직원의 해고도 포함되었다. 민간 기업에서 12,000명, 정부 기관에서 1,200명, 교육 기관에서 1,200명이 해고되었다. 전국적으로 12,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공산당 및 지지자로 간주되어 해고되었다. 1950년 6월부터 12월까지 맥아더 서한에 의해 공산당 중앙위원 공직 추방을 시작으로, 언론, 방송에서 전 산업으로 확대되었다. 공무원은 '공산주의자 등의 공직에서의 배제에 관한 건'(9월 5일 각의 결정)에 따라 약 1,200명이 추방되었다. |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의 점령 정책을 담당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민정국(GS)을 중심으로 치안유지법, 특별고등경찰, 내무성과 사법성의 폐지 및 해체 등 일본의 민주화를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요 간부가 형무소에서 석방된 일본공산당도 처음으로 합법적인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노동 운동이 과격해지고 대규모 데모나 파업이 일어났다.
한편, 중국에서는 국공 내전이 진행 중이었는데,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공산주의가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한 미국의 태도 변화로 인해 GHQ의 주도권이 GS에서 참모 제2부(G2)로 옮겨가고 공산주의 세력을 탄압하는 방침으로 전환되었다.[28] 이는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과 맞물린 역코스의 일환이었다.
1950년 2월 13일 일본공산당은 회합 내용을 허위로 신고하여 단체등규정령(파괴활동방지법의 전신) 위반으로 고발당했다. 5월 30일 메모리얼 데이에는 황거외원에서 일본공산당의 지휘 아래 인민결의대회가 열렸으나, 사복경찰과의 충돌이 인민광장 사건으로 확대되어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GHQ의 민주화 정책으로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한 노동운동이 과격해졌고, 일본공산당은 1949년 1월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35석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일본국유철도 3대 미제 사건이 국철노동조합과 공산당의 계획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공산당과 공산주의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1950년 미국에서도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선동으로 매카시즘이라 불리는 공산주의자 추방이 이루어졌다.
2. 1. 일본의 항복과 초기 개혁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일본의 민주화를 추진했다. GHQ는 민정국(GS)을 중심으로 치안유지법 폐지, 특별고등경찰 해체, 내무성과 사법성 해체 등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28] 이 과정에서 주요 간부들이 석방된 일본 공산당도 처음으로 합법적인 활동을 시작했다.GHQ는 군축, 자이바쓰 해체, 언론의 자유 보장, 정치범 석방,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3가지 노동법(노동조합법, 노동기준법, 노사관계조정법) 제정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개혁을 추진했다.[7]
1945년 10월 4일,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시민 자유 지령을 통해 일본 정부에 천황, 천황제도 및 일본 제국 정부에 대한 제한 없는 논의를 포함하여 사상, 종교, 집회 및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법률과 조례를 폐지할 것을 명령했다. 더 나아가, SCAP(연합군 최고사령부)은 지정된 법률에 따라 투옥된 모든 사람(많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 포함, 특히 일본 공산당(JCP)이 다시 합법적인 정당이 되도록 허용)을 1주일 이내에 석방할 것을 명령했다. 곧이어 석방된 많은 공산주의자들과 좌익 활동가들은 일본 공산당을 재조직하고 1926년 이후 첫 총회를 개최했다. 당원 수는 급속도로 증가하여 1946년 7,500명, 1947년 7만 명, 1950년 15만 명에 달했다.
포츠담 선언에 기반하여, 더글러스 맥아더는 1946년 1월 4일 일본 정부에 "공직에서의 부적절 인물 제거 및 배제" 문서를 보냈는데, 이는 전범과 극우단체 지도자들의 숙청을 명령하는 것이었다. 1948년 5월까지 지속된 이 숙청은 나중에 "붉은 숙청"(Red Purge)과 비교하여 "백색 숙청"(White Purge)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90만 명 이상이 조사를 받았고, 20만 명 이상의 전직 군인, 정치인, 관료, 교육자 및 여론 주도층이 숙청되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과격해지고 대규모 데모나 파업이 일어나면서, 중국 공산당의 국공 내전 승리와 냉전 심화로 인해 미국의 정책은 변화했다. GHQ 내 주도권이 민정국(GS)에서 참모 제2부(G2)로 넘어가면서 공산주의 세력 탄압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는 '역코스'의 일환이었다.[28]
1950년 5월 30일, 황거외원에서 일본공산당 지휘 아래 열린 인민결의대회가 점령군과 충돌하는 인민광장 사건이 발생했다. 6월 6일, 도쿠다 규이치, 미야모토 겐지 등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24명과 기관지 신문 아카하타 간부들이 공직에서 추방되고, 신문 아카하타는 정간 처분을 받았다.[19][20] 같은 해 7월, 공직 추방된 중앙위원 중 9명은 단체등규정령 위반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이들은 지하 활동을 하거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7월 18일에는 신문 아카하타가 무기한 발행 정지되었고, 7월 24일에는 언론기관에서 처음으로 레드 퍼지가 시행되었다.
1950년 1월 6일 코민포름의 기관지 『항구평화와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는 노사카 산조의 '점령하 평화적 명론'을 비판했다. 이후 일본공산당은 도쿠다 규이치를 중심으로 부분적 자기비판 논평만으로 충분하다는 소감파(所感派)와 미야모토 겐지를 중심으로 코민포름의 비판을 수용하자는 국제파(国際派)로 분열되어 조직적인 저항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후 공직추방령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와 함께 해제되었지만 레드 퍼지로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재취업에도 지장을 주었다.
1950년 9월 1일, 일본 정부도 각의 결정[29]을 통해 공공기관에서 공산당 계열 인사를 추방하기 시작했다. 1950년 12월까지 민간기업에서 19,702명, 공공기관에서 1,196명이 추방되었다.[30]
2. 2. 냉전과 역코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 점령 정책을 담당한 GHQ는 민정국(GS)을 중심으로 치안유지법 폐지, 특별고등경찰 해체, 내무성과 사법성 해체 등 일본 민주화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주요 간부가 석방된 일본 공산당도 처음으로 합법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노동 운동이 격화되고 대규모 데모와 파업이 발생하면서, 일본 공산당은 1949년 1월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35석을 획득했다. 같은 해, 중국에서는 국공 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해졌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의 대일 로비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일본에서 GHQ의 주도권이 GS에서 참모 제2부(G2)로 옮겨가고, 공산주의 세력을 탄압하는 방침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냉전 발발에 따른 “역코스”의 일환이었다.
민간 정보 교육국(CIE) 교육 고문 월터 크로스비 윌즈는 1949년 7월 19일 니가타 대학 강연에서 “공산주의 교수는 대학을 떠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연설했다. 이후 오카야마 대학, 히로시마 대학, 오사카 대학에서도 같은 내용의 연설을 했다. 9월 14일 규슈 대학에서 적색 교수에게 사직이 권고되었고, 도야마 대학, 니가타 대학 등 많은 대학에서 같은 취지의 권고가 이루어졌다.[18] (윌즈 선언)
1949년 시모야마 사건, 미타카 사건, 마쓰카와 사건 등 국철 3대 미스터리 사건에서는 일본 공산당과 국철 노동조합이 꾸몄다는 정보가 흘러나왔다.
1950년 5월 3일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 공산당의 불법화를 시사했고, 5월 30일 황거외원에서 일본 공산당 지휘하의 대중과 점령군이 충돌하는 인민 광장 사건이 발생했다. 6월 6일 맥아더 서한을 받은 요시다 내각은 각의에서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 24명[19][20]과 기관지 「아카하타」 간부 17명의 공직 추방을 결정하고, 아카하타를 폐간 처분했다.[28] 6월 26일부터 도쿠다 큐이치, 노사카 산조 등 6명은 국회의원직을 잃었고, 타카쿠라 테루는 제2회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 공직 추방되어 당선 무효가 되었다.[21] 1950년 7월 9명의 일본 공산당 간부에 대해 단체등규정령 위반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된 단규령 사건이 발생했다. 체포 영장이 나온 9명의 일본 공산당 간부는 지하로 잠행했고, 일부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맥아더는 여러 차례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공산 분자 활동에 관한 서한”을 보냈다. 1950년 7월 28일부터 각 언론 기관은 서한의 취지에 따라 사내 공산당원, 동조자 등에게 해고 통고를 시작했다. 첫날 해고 인원은 아사히 신문 72명, 마이니치 신문 49명, 요미우리 신문 34명, 니혼게이자이 신문 10명, 도쿄 신문 8명, 일본 방송 협회 104명, 지지통신 16명, 교도 통신 33명이었다.[22] 영화 회사는 도호 13명, 쇼치쿠 66명, 다이에이 30명을 해고했으며, 영화 감독, 각본가, 배우 등이 포함되었다.[23]
같은 해 9월 일본 정부의 각의 결정[24]에 따라 언론, 관공서, 교육 기관, 대기업 등에서도 공산주의자 추방(해고)이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 공산당은 코민포름으로부터 평화 혁명론을 비판받아 소감파와 국제파로 분열된 상태였고, 조직적인 저항은 거의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공산주의의 위협”이 공공연히 언급되었다. 그 후, 일본 공산당은 51년 강령을 결정하고, 중핵자위대 등에 의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공직 추방 지령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와 함께 해제되었다. 직장에서 레드 퍼지를 당한 일반 노동자 중 복직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레드 퍼지를 당한 것이 밝혀지면 재취업에 영향을 미쳤다.[25]
3. 전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점령 하에 민주화 과정을 겪었다. GHQ는 민정국(GS)을 중심으로 치안유지법 폐지, 특별고등경찰 해체, 내무성 및 사법성 해체 등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산당이 합법화되면서 노동운동이 활발해지고,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949년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 공산당은 35석을 획득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미국의 대일 정책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GHQ 내 주도권은 참모 제2부(G2)로 넘어가고, 공산주의 세력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전환되었다. 이는 냉전 심화에 따른 역코스의 일환이었다.
1950년 5월 3일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 공산당의 불법화를 시사했고, 5월 30일 황거외원에서 발생한 인민 광장 사건을 계기로, 6월 6일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 24명과 기관지 아카하타 간부들이 공직에서 추방되고, '아카하타'는 정간 처분을 받았다.[19][20] 6월 26일에는 도쿠다 큐이치 등 6명이 국회의원직을 잃었고, 타카쿠라 테루는 참의원 당선 직후 공직 추방으로 당선 무효가 되었다.[21] 7월에는 단규령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공산당 간부 9명에게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고, 이들은 지하로 잠적하거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1950년 7월 28일부터는 언론기관에서 레드 퍼지가 시작되어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요미우리 신문, 닛케이 신문, 도쿄 신문, 일본 방송 협회(NHK), 지지통신사, 교도통신사 등에서 많은 직원들이 해고되었다.[22] 영화 회사에서도 도호, 쇼치쿠, 다이에이 등에서 영화 감독, 각본가, 배우 등이 해고되었다.[23]
1950년 9월, 일본 정부는 각의 결정[24]을 통해 공공기관, 교육기관, 대기업 등에서도 공산주의자 및 동조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1950년 12월까지 민간기업에서 19,702명, 공공기관에서 1,196명이 추방되었다.[30]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주의의 위협”이 현실화되었다. 이후 일본 공산당은 51년 강령을 결정하고, 중핵 자위대 등을 통해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레드 퍼지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와 함께 해제되었지만,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재취업에도 어려움을 겪었다.[25]
3. 1. 초기 갈등 (1946년 ~ 1947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미국의 지원으로 빠르게 경제를 회복했지만, 급속한 경제 성장은 노동자와 자본가 계급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6]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 사이에는 물가가 700% 이상 상승하는 등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사회적 불안이 커졌다.
1946년 12월까지 약 500만 명의 노동자가 노동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 숫자는 1948년 말 670만 명으로 증가했다.[6] 초기에는 노동 조합 결성과 노동 조건 개선을 목표로 했으나, 점차 일본 공산당(JCP)과 좌익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정치 체제 변화를 요구하는 파업으로 발전했다.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급진적인 노동 운동을 비난하고 생산 증진을 위한 협력을 강조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는 "점령 목표에 해로운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경찰력을 동원했지만, 파업은 계속되었다.

1947년 2월 1일, 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산베츠)를 중심으로 총파업이 계획되었다. 이들은 노동 문제, 식량 부족, 인플레이션 해결과 요시다 내각의 사퇴를 요구했다. 맥아더는 총파업을 금지하는 지시를 내렸고, 결국 파업 지도자들은 파업을 취소했다.
이후 1947년 총선에서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하여 요시다 내각이 사퇴했다. 그러나 카타야마 데쓰의 새 연립 내각은 내부 갈등을 겪었고, 일본 공산당도 새 내각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다.
3. 2. 1948년의 갈등
트루먼 독트린 도입과 함께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에 맞서 아시아에 거점이 필요했고, 일본이 자연스러운 선택 대상이 되었다.[1] 역코스와 미국의 계획에 따라 일본과 그 경제는 대한민국과 미국과 연결될 예정이었다.[2] 1948년 3월, 미국 국무부는 계획가 중 한 명인 조지 케넌을 일본에 파견하여 SCAP의 정책과 일본의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3] 맥아더가 매우 온건한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믿은 케넌은 자신의 그룹을 조직하고 맥아더의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4] 케넌의 노력과 워싱턴의 압력 하에, GHQ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고, 먼저 자이바츠의 추가 해체를 중단했다.[5]케넌의 정책과 맥아더의 변화는 많은 일본 민간인들에게 당연히 인기가 없었고, 1948년 봄부터 여름 사이에 재일 한국인, 노동자, 학생, 교사들의 일련의 투쟁과 시위가 발생했다. 점령 당국과 미 제8군은 워싱턴의 지원과 정책 변화를 바탕으로 이러한 시위를 매우 공격적으로 탄압했다.[6]
점령 당국에 의한 좌익 운동의 탄압과 아시다 내각 내부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아시다 내각은 1948년 10월에 결국 붕괴되었다. 게다가 9월에는 아시다 내각 관료들이 뇌물과 압력 자금을 받은 혐의로 체포되었고, 아시다는 12월에 체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시다는 10월 15일 다시 내각을 구성하여 1954년까지 집권했다. 그의 장기 집권은 케넌의 정책과 사상이 일본에서 더욱 실행될 수 있도록 했다. 케넌 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전범 청산 중단, 일본의 주요 반대 세력 20개 그룹 열거, 정부와 경찰의 권력 강화를 포함한 NSC-13/2였다.[7] NSC-13/2 제정 후, 정부 관리들은 이 법안을 근거로 과격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고, 한 관리가 파업은 "애국적이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8] 1948년 말, 트루먼 대통령은 NSC-13/2 시행 후 극동위원회를 우회하여 경제 안정을 강조하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요시다는 긴축 계획을 통과시켰다.[9] 또한 GHQ는 이 계획이 "일본에서 가능한 한 빨리 재정, 통화, 물가, 임금 안정을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이 계획은] 일본 생활의 모든 단계에서 긴축을 요구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10] 긴축과 경기 침체는 교육 분야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에도 기여했는데, 1948년 9월 일본 전역의 학생회가 당시 캠퍼스에 확산되고 있던 공산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전학련을 결성했고, 이후 일본 공산주의 운동의 일부가 되었다.[11]
3. 3. 1949년의 갈등
1949년 일본 총선거에서 일본 공산당(JCP)은 9.76%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다.[1] 선거 승리 후, 노사카 산조 일본 공산당 지도자는 일본 공산당이 평화적인 혁명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카시즘과 요시다 내각의 반좌파 정책은 일본 공산당을 겨냥했다.[3]1949년 2월, 조지프 도지가 일본에 도착하면서 "도지 라인"으로 알려진 긴축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는 공공 지출 삭감, 공공 소비 제한, 수출 지향적인 산업 생산으로의 전환 등을 포함했다.[4] 이 정책들은 일본 경제를 강화하고 대기업 소유주와 일본 보수 정당 간의 유대를 형성했지만,[5] 동시에 생산성 급락과 노동자 및 공무원의 대량 실업을 야기했다.[6]
1949년 6월, 요시다 내각은 노동조합법과 노동관계조정법을 개정하여 일본의 노사 관계를 재편했다. 개정된 법률은 파업 중인 노동자의 임금 지급을 금지하고, 고용주에게 유리한 단체교섭을 강화했으며, 파업 간 최소 30일의 냉각 기간을 요구했고, 사회적 또는 정치적 운동을 강조하는 노동조합은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도록 했다.[7]
일본 노동자들은 도지와 요시다의 긴축 정책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1949년 3월부터 파업과 시위를 통해 지속적으로 반대해왔다.[8] 같은 해 4월, 맥아더의 사주를 받은 요시다는 ''단체 등 통제 조례''를 발표하여, 각 정치 조직이 명칭, 회원, 목적 및 활동을 등록하도록 했다.[9] 일본 공산당은 10만 명이 넘는 회원을 등록했고, 이는 나중에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10] 6월, 공산당 지도자들은 "9월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같은 달, 다이라와 다른 도시들이 500명의 노동자들에 의해 점령되었다.[11]
4월, 요시다는 SCAP(연합군 최고사령부)에 긴축 프로그램 준수를 위해 10만 명 이상의 철도 노동자를 해고할 계획이라고 통보했다. 그 직후 요시다는 공식적인 해고를 시작했는데, 이는 노동자와 철도 노조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수많은 업무 중단, 파업, 점거가 발생했다. 일본 공산당도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12]
철도 노동자와 정부 간의 충돌 과정에서 세 건의 미해결 사건이 발생했다.[13] 1949년 7월 5일, 일본국유철도 회장 시모야마 사다노리가 의문의 실종을 당한 후 기타센주역 인근 선로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14] 10일 후, 도쿄에 주차되어 있던 무인 63계열 열차가 갑자기 출발하여 6명이 사망하고 20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15] 8월 17일에는 630명을 태운 열차가 탈선하여 차내 승무원 3명이 사망했다.[16]
3. 4. 1950년: 레드 퍼지의 본격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은 GHQ의 점령 하에 민주화 과정을 겪었다. GHQ는 민정국(GS)을 중심으로 치안유지법 폐지, 특별고등경찰 해체, 내무성 및 사법성 해체 등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산당이 합법화되면서 노동운동이 활발해지고,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949년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 공산당은 35석을 획득하며 세력을 확장했다.그러나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미국의 대일 정책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GHQ 내 주도권은 참모 제2부(G2)로 넘어가고, 공산주의 세력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전환되었다. 이는 냉전 심화에 따른 역코스의 일환이었다.
1950년 5월 3일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 공산당의 불법화를 시사했고, 5월 30일 황거외원에서 발생한 인민 광장 사건을 계기로, 6월 6일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 24명과 기관지 아카하타 간부들이 공직에서 추방되고, '아카하타'는 정간 처분을 받았다.[19][20] 6월 26일에는 도쿠다 큐이치 등 6명이 국회의원직을 잃었고, 타카쿠라 테루는 참의원 당선 직후 공직 추방으로 당선 무효가 되었다.[21] 7월에는 단규령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공산당 간부 9명에게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고, 이들은 지하로 잠적하거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1950년 7월 28일부터는 언론기관에서 레드 퍼지가 시작되어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 요미우리 신문, 닛케이 신문, 도쿄 신문, 일본 방송 협회(NHK), 지지통신사, 교도통신사 등에서 많은 직원들이 해고되었다.[22] 영화 회사에서도 도호, 쇼치쿠, 다이에이 등에서 영화 감독, 각본가, 배우 등이 해고되었다.[23]
1950년 9월, 일본 정부는 각의 결정[24]을 통해 공공기관, 교육기관, 대기업 등에서도 공산주의자 및 동조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1950년 12월까지 민간기업에서 19,702명, 공공기관에서 1,196명이 추방되었다.[30]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주의의 위협”이 현실화되었다. 이후 일본 공산당은 51년 강령을 결정하고, 중핵 자위대 등을 통해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레드 퍼지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와 함께 해제되었지만,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재취업에도 어려움을 겪었다.[25]
3. 4. 1. 일본 공산당의 변화와 충돌
코민포름은 1950년 1월 6일 기관지 『항구평화와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를 통해 일본 공산당 지도자 노사카 산조의 '점령하 평화적 명론'을 비판했다.[31] 이에 일본 공산당은 도쿠다 규이치를 중심으로 한 소감파(所感派)와 미야모토 겐지를 중심으로 한 국제파(国際派)로 분열되었다.[31] 소감파는 부분적인 자기비판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 반면, 국제파는 코민포름의 비판을 전면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러한 분열 상황에서 일본 공산당은 조직적인 저항을 거의 할 수 없었다. 1950년 1월 25일, 노사카 산조는 중의원 예비회의에서 1950년이 일본의 운명을 결정할 해가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모든 교전국과의 평화 조약 체결을 위한 대규모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월에 노사카는 당의 공식 신문인 신문 아카하타(아카하타)에서 자기 비판을 했고, 그 이후 일본 공산당은 보다 과격하고 투쟁적인 전략으로 전환했다.[10] 1월 17일, 인민일보 또한 "일본 인민 해방의 길"(日本人民解放的道路|일본 인민 해방의 길중국어)이라는 제목으로 노사카의 전략을 비판하며 일본 공산당이 이전 전략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0년 7월, 스탠퍼드 대학교의 월터 C. 엘스 박사는 SCAP 산하 민정정보교육부(CIE)의 파견으로 일본에 왔다. 그는 강연을 통해 좌익을 비난하고, 특히 일본 공산당이 장악한 전학련을 겨냥했다.[8] 7월 19일 니가타 대학교에서 "공산주의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이념이며... 일본 대학은 가능한 한 빨리 공산주의 교수들을 해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9] 엘스 선언은 전국적인 여론이 되었고 일본 신문에서 널리 인용되었다.
엘스의 연설 5일 후, 일본 정부는 교사와 교수들이 정치 단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발표했지만, 교육부와 대학은 그들을 사임하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무관한 이유를 사용했다.[10]
일본 공산당 내부의 변화는 SCAP과 일본 정부 모두를 매우 경계하게 만들었고, 일본 공산당이 소련과 중국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3. 4. 2. 한국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하면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은 일본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였고, 일본 경제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28]
다음 날, 맥아더는 일본 정부에 '아카하타'의 30일간 정간을 요구했고,[29] '아카하타'는 무기한 폐간되었다.[30] 일본 경찰은 일본 전역에 배치되어 일본 공산당(JCP) 세포들을 색출했다.[31] 7월에는 노사카 산조와 도쿠다 큐이치를 포함한 9명의 공산주의자들이 '결사 및 기타 통제 조례' 위반으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32] 이들 중 다수는 지하로 잠적하여 일본 정부에 대한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려 했지만, 일본 공산당 자체는 금지되지 않았다.[33]
이러한 숙청은 NHK를 포함한 다른 7개의 주요 전국 신문으로 확산되었다.[34] 노동성 문서에 따르면 NHK는 119명, 아사히 신문은 104명, 마이니치 신문은 98명을 해고했다. 8월부터는 민간 기업으로 확대되어, 궁극적으로 수천 명이 정치적 신념 때문에 해고되었다. 1950년 공공 부문에서는 약 1만 1천 명, 민간 부문에서는 약 1만 1천 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다.
많은 대학들이 공산주의자 또는 공산주의 성향의 교직원들을 공개적으로 해고하기 시작했다. 1950년 8월 법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약 180명의 공산주의 성향 교수 중 10명이 해고되었고, 18명이 추가 조사 중이었다.
8월에는 코민포름이 일본 공산당에 전국적인 봉기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 공산당은 51년 강령을 결정하고, 중핵 자위대 등에 의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4. 비판
레드 퍼지에 대한 비판은 직접적인 항의보다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50년 9월 20일에는 <삼계절>이라는 멜로디에 다음과 같은 가사를 붙인 노래를 방송하였다.
니가타현에 전해지는 민요인 佐渡おけさ|사도오케사일본어의 멜로디에 다음과 같은 가사를 붙인 노래도 유행하였다.[33]
5. 재판
이후 레드 퍼지로 해고된 사람들은 고용주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최고재판소는 'GHQ의 지시에 의한 초헌법적 조치로써 해고나 면직은 유효'하다고 판단하여 원고 측이 패소했으며, 이는 이후 여러 판결의 판례가 되었다.[34]
1950년 전기통신성, 아사히글라스, 가와사키제철에서 추방(해고)된 3명이 사상·양심의 자유 침해를 이유로 2004년 인권 구제를 신청했고, 2008년까지 70명이 비슷한 신청을 했다. 이들은 일본변호사연합회의 도움을 받아 고베지방법원에 국가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 측은 '언론기관이나 민간 중요 산업에서의 레드 퍼지는 GHQ가 시사(示唆)했지만 지시한 것은 아니며, 일본 정부가 주도했다'고 주장했으나, 재판소는 'GHQ 문서 중 시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실제로는 GHQ의 지시로 일본 정부는 따를 의무가 있었다'고 하며, '레드 퍼지는 GHQ의 지시에 의한 초헌법적 조치이며, 해고나 면직은 유효하다'는 종래의 판례를 답습하여 2011년 5월 26일 청구를 기각했다. 오사카고등법원도 2012년 10월 24일 항소를 기각했고,[26] 2013년 4월 25일 대법원 제1소법정에서 상고 불수리 결정을 내려 판결이 확정되었다.
일본공산당은 이러한 판결에 대해 '일본변호사연합회도 권고했듯이, 일본국 헌법 제19조가 보장하는 사상·양심의 자유를 유린하는 인권 침해이며 극히 부당한 것'이라는 항의 담화를 발표했다.[27]
6. 영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 일본 공산당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1949년 1월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35석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일본국유철도 3대 미제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과 공산주의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1950년 5월 3일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 공산당의 불법화를 시사했고, 5월 30일 인민 광장 사건이 발생했다. 6월 6일 맥아더 서한을 받은 요시다 내각은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 24명[19][20]과 기관지 아카하타 간부 17명의 공직 추방을 결정하고, 아카하타를 폐간 처분했다. 6월 26일 도쿠다 큐이치 등 6명은 국회의원직을 잃었고, 타카쿠라 테루는 제2회 참의원 선거 당선 직후 공직 추방되어 당선 무효가 되었다.[21] 7월에는 단규령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공산당 간부 9명이 지하 잠행 및 중국 망명을 하게 되었다.
1950년 7월 28일부터 각 언론 기관은 공산당원 및 동조자들에게 해고 통고를 시작했다. 첫날 아사히 신문사 72명, 마이니치 신문사 49명, 요미우리 신문사 34명, 닛케이 신문사 10명, 도쿄 신문사 8명, 일본 방송 협회 104명, 지지통신사 16명, 교도통신사 33명이 해고되었다.[22] 영화 회사는 도호 13명, 쇼치쿠 66명, 다이에이 30명을 해고했으며, 영화 감독, 각본가, 배우 등이 포함되었다.[23]
같은 해 9월 일본 정부의 각의 결정[24]에 따라 언론, 관공서, 교육 기관, 대기업 등에서도 공산주의 계열 인사들에 대한 추방(해고)이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 공산당은 코민포름의 평화 혁명론 비판으로 소감파와 국제파로 분열된 상태여서 조직적인 저항은 거의 없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와 함께 공직 추방 지령은 해제되었으나, 레드 퍼지로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재취업에도 지장을 주었다.[25]
1960년 4월 18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중외제약 사건 판결에서 레드 퍼지가 "GHQ의 지시에 따른 초헌법적인 조치로 해고나 면직은 유효하다"고 판결하여 이후 관련 소송 판결의 판례가 되었다.
2004년 이후 레드 퍼지 피해자들의 인권 구제 신청이 이어졌으나, 2011년 고베지방법원은 "GHQ의 지시에 일본 정부는 따를 의무가 있었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2심 오사카고등법원도 2012년 항소 기각[26], 2013년 대법원은 상고 불가를 결정하여 판결이 확정되었다.
일본 공산당은 일본국 헌법 제19조가 보장하는 사상·양심의 자유를 유린하는 인권 침해라며 항의 담화를 발표했다.[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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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The notorious "Red Purge" was instituted nationwide in the final phase of the occupation, from July 1947 to March 1951, and proved to be a critical test for the survival of academic freedom.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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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d Purge was a series of arbitrary layoffs by government agencies and corporations aimed at heavy-handedly eliminating from the workplace those workers who had been unilaterally branded 'Red'. [...] The purge occurred during the US occupation of Japan from 1949 to 1951.
[3]
논문
From 1947, the Japanese government, supported by MacArthur, unleashed a Red Purge that targeted those Japanese considered to have left-wing views.
[4]
논문
Eells's anticommunist speeches echoed America's Cold War policy [...] during the ideological struggle of the Cold Wa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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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Eells's address in July 1949, the dilemma over communist teachers had become a national obsession, verging in some quarters on hyst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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