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야마 돈오
1. 개요
스야마 돈오는 쓰시마 번의 유의(儒医)의 아들로 태어나, 학문과 실천을 연마하고 쓰시마 번의 군봉행을 역임했다. 울릉도 쟁계에서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멧돼지 구제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쓰시마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또한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1924년 정5위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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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의 농학자 -
가이바라 에키켄
가이바라 에키켄은 에도 시대의 유학자이자 본초학자로서, 주자학을 강의하고 조선 통신사 대응 등 중책을 맡았으며, 《징비록》 등을 일본에 소개하여 임진왜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고, 60부 27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
에도 시대의 농학자 -
사토 노부히로
사토 노부히로는 에도 시대 후기의 실학자이자 의사로, 농업 중심 경제 정책과 교육 개혁을 주장하며 자주화선 등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국수주의적 성향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
쓰시마 후추번 사람 -
아메노모리 호슈
아메노모리 호슈는 1668년에 태어나 1755년에 사망한 일본의 학자이자 외교관으로, 쓰시마 번에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며 조선어와 주자학을 배우고 《교린수지》를 저술하여 성신을 강조하며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을 보였다. -
쓰시마 후추번 사람 -
니치오
니치오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승려이자 니치렌종의 한 분파인 불수불시파의 시조로, 권력자에게 시주를 받거나 설법을 베풀지 않는 불수불시 사상을 주장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두 차례 유배를 겪었고 그의 사상은 막부의 종교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
17세기 학자 -
미야케 간란
미야케 간란은 에도시대 후기의 유학자로, 《대일본사》 편찬에 참여하고 쇼코칸 총재를 역임했으며, 《지기간담》, 《열사보경록》 등의 저술을 통해 사상을 펼쳤고, 그의 사상은 일본 국체와 국가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
17세기 학자 -
진제 (명)
진제는 명나라 시대의 무관으로, 1603년 타이완을 방문하여 왜구 토벌에 참여하고 타이완 원주민의 생활상을 기록한 《동번기》를 저술하여 17세기 타이완 사회 연구와 동아시아 해상 교역 연구에 기여했다.
2. 생애
쓰시마 번의 유의(儒医)인 스야마 겐리쿠(陶山玄育)의 아들로 쓰시마 후추 (이즈하라)에서 태어나 11세에 기노시타 준안의 문하에서 학문과 실천의 합일을 배웠다. 쓰시마 섬으로 귀향한 후 겐로쿠 12년에 쓰시마 후추번 제3대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眞) 아래에서 쓰시마 번 군봉행(郡奉行)으로 취임하였다.
조선과의 국경 분쟁인 울릉도쟁계에서 대조선 교섭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던 스야마는 조선과의 교섭에서 '죽도'(竹島)와 '울릉도'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쓰시마 번의 강경파들에 반대하여, 실상을 에도 막부에 있는 그대로 보고해야 하며, 일본으로서는 울릉도가 엄연히 조선의 영토임에도 7, 80년 동안 일본 어부들이 그 섬에 들어가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조선측의 책임도 부각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스야마가 울릉도 쟁계에 관해서 은퇴한 번사(藩士) 가시마 효스케(賀島兵助)와 주고받은 왕복문서를 수록한 것이 《죽도문담》(竹島文談)으로 『일본경제총서』(日本經濟叢書) 권13(日本經濟叢書刊行會, 1915년)에 수록되어 있다.
스야마 돈오는 쓰시마 섬의 농작물을 멧돼지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멧돼지 구제 계획인 이지카오이쓰메(猪鹿追詰)를 단행하였다. 쓰시마 섬 전체를 9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울타리를 세워 한 지구마다 멧돼지를 몰살시키는 방법으로 호에이 6년 쓰시마 섬 전체의 멧돼지를 전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당시는 에도 막부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 의해 겐로쿠 살생 금지령이 나와 있던 때였으므로, 스야마 돈오로써는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실행한 것이었다. 당시 쓰시마 사람들은 그를 쓰시마 성인(対馬聖人)이라고 추앙하였다고 한다.
1924년(다이쇼 13년), 정5위를 추증받았다.
2.1. 초기 생애와 수학
쓰시마 번의 유의(儒医)인 스야마 겐리쿠(陶山玄育)의 아들로 쓰시마 후추 (이즈하라)에서 태어나 11세에 기노시타 준안의 문하에서 학문과 실천의 합일을 배웠다. 쓰시마 섬으로 귀향한 후 겐로쿠 12년에 쓰시마 후추번 제3대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眞) 아래에서 쓰시마 번 군봉행(郡奉行)으로 취임하였다.
조선과의 국경 분쟁인 울릉도쟁계에서 대조선 교섭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던 스야마는 조선과의 교섭에서 '죽도'(竹島)와 '울릉도'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쓰시마 번의 강경파들에 반대하여, 실상을 에도 막부에 있는 그대로 보고해야 하며, 일본으로서는 울릉도가 엄연히 조선의 영토임에도 7, 80년 동안 일본 어부들이 그 섬에 들어가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조선측의 책임도 부각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스야마가 울릉도 쟁계에 관해서 은퇴한 번사(藩士) 가시마 효스케(賀島兵助)와 주고받은 왕복문서를 수록한 것이 《죽도문담》(竹島文談)으로 『일본경제총서』(日本經濟叢書) 권13(日本經濟叢書刊行會, 1915년)에 수록되어 있다.
스야마 돈오는 쓰시마 섬의 농작물을 멧돼지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멧돼지 구제 계획인 이지카오이쓰메(猪鹿追詰)를 단행한다. 쓰시마 섬 전체를 9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울타리를 세워 한 지구마다 멧돼지를 몰살시키는 방법으로 호에이 6년 쓰시마 섬 전체의 멧돼지를 전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당시는 에도 막부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 의해 겐로쿠 살생 금지령이 나와 있던 때였으므로, 스야마 돈오로써는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실행한 것이었다. 당시 쓰시마 사람들은 그를 쓰시마 성인(対馬聖人)이라고 추앙하였다고 한다.
1924년 (다이쇼 13년), 정5위를 추증받았다.
2.2. 쓰시마 번 군봉행 임명과 활동
쓰시마 번의 유의(儒医)인 스야마 겐리쿠(陶山玄育)의 아들로 쓰시마 후추 (이즈하라)에서 태어나 11세에 기노시타 준안의 문하에서 학문과 실천의 합일을 배웠다. 쓰시마 섬으로 귀향한 후 겐로쿠 12년(1699년)에 쓰시마 후추번 제3대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眞) 아래에서 쓰시마 번 군봉행(郡奉行)으로 취임하였다.
조선과의 국경 분쟁인 울릉도쟁계에서 대조선 교섭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던 스야마는 조선과의 교섭에서 '죽도'(竹島)와 '울릉도'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쓰시마 번의 강경파들에 반대하여, 실상을 에도 막부에 있는 그대로 보고해야 하며, 일본으로서는 울릉도가 엄연히 조선의 영토임에도 7, 80년 동안 일본 어부들이 그 섬에 들어가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조선측의 책임도 부각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스야마가 울릉도 쟁계에 관해서 은퇴한 번사(藩士) 가시마 효스케(賀島兵助)와 주고받은 왕복문서를 수록한 것이 《죽도문담》(竹島文談)으로 『일본경제총서』(日本經濟叢書) 권13(日本經濟叢書刊行會, 1915년)에 수록되어 있다.
스야마 돈오는 쓰시마 섬의 농작물을 멧돼지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멧돼지 구제 계획인 이지카오이쓰메(猪鹿追詰)를 단행하였다. 쓰시마 섬 전체를 9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울타리를 세워 한 지구마다 멧돼지를 몰살시키는 방법으로 호에이 6년(1709년)에 쓰시마 섬 전체의 멧돼지를 전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 당시는 에도 막부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 의해 겐로쿠 살생 금지령이 나와 있던 때였으므로, 스야마 돈오로써는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실행한 것이었다. 당시 쓰시마 사람들은 그를 쓰시마 성인(対馬聖人)이라고 추앙하였다고 한다.
1924년(다이쇼 13년), 정5위를 추증받았다.
2.3. 울릉도 쟁계와 외교적 노력
스야마 돈오는 쓰시마 번의 유의(儒医)인 스야마 겐리쿠(陶山玄育)의 아들로 이즈하라에서 태어나 11세에 기노시타 준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쓰시마 섬으로 귀향 후 1699년에 쓰시마 후추번 제3대 번주 소 요시자네 아래에서 군봉행(郡奉行)으로 취임하였다.
조선과의 국경 분쟁인 울릉도쟁계에서 대조선 교섭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던 스야마는 '죽도'(竹島)와 '울릉도'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쓰시마 번의 강경파들에 반대하였다. 그는 에도 막부에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해야 하며, 일본으로서는 울릉도가 엄연히 조선의 영토임에도 7, 80년 동안 일본 어부들이 그 섬에 들어가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조선측의 책임도 부각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스야마가 울릉도 쟁계에 관해서 은퇴한 번사(藩士) 가시마 효스케(賀島兵助)와 주고받은 왕복문서를 수록한 것이 《죽도문담》(竹島文談)으로 『일본경제총서』(日本經濟叢書) 권13(日本經濟叢書刊行會, 1915년)에 수록되어 있다.
2.4. 이지카오이쓰메(猪鹿追詰)와 멧돼지 구제
1699년(겐로쿠 12년), 소 요시자네 아래에서 쓰시마 번 군봉행(郡奉行)으로 취임하였다.
스야마 돈오는 쓰시마 섬의 농작물을 멧돼지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멧돼지 구제 계획인 이지카오이쓰메(猪鹿追詰)를 단행하였다. 쓰시마 섬 전체를 9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울타리를 세워 한 지구마다 멧돼지를 몰살시키는 방법으로 1709년(호에이 6년), 쓰시마 섬 전체의 멧돼지를 전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당시는 에도 막부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 의해 겐로쿠 살생 금지령이 나와 있던 때였으므로, 스야마 돈오로써는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실행한 것이었다. 당시 쓰시마 사람들은 그를 쓰시마 성인(対馬聖人)이라고 추앙하였다고 한다.
2.5. 쓰시마 성인과 사후 추증
쓰시마 번의 유의(儒医)인 스야마 겐리쿠(陶山玄育)의 아들로 쓰시마 후추 (이즈하라)에서 태어나 11세에 기노시타 준안의 문하에서 학문과 실천의 합일을 배웠다. 쓰시마 섬으로 귀향한 후 1699년(겐로쿠 12년)에 쓰시마 후추번 제3대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眞) 아래에서 쓰시마 번 군봉행(郡奉行)으로 취임하였다.
조선과의 국경 분쟁인 울릉도쟁계에서 대조선 교섭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던 스야마는 조선과의 교섭에서 '죽도'(竹島)와 '울릉도'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쓰시마 번의 강경파들에 반대하여, 실상을 에도 막부에 있는 그대로 보고해야 하며, 일본으로서는 울릉도가 엄연히 조선의 영토임에도 7, 80년 동안 일본 어부들이 그 섬에 들어가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조선측의 책임도 부각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스야마가 울릉도 쟁계에 관해서 은퇴한 번사(藩士) 가시마 효스케(賀島兵助)와 주고받은 왕복문서를 수록한 것이 《죽도문담》(竹島文談)으로 『일본경제총서』(日本經濟叢書) 권13(日本經濟叢書刊行會, 1915년)에 수록되어 있다.
스야마 돈오는 쓰시마 섬의 농작물을 멧돼지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멧돼지 구제 계획인 이지카오이쓰메(猪鹿追詰)를 단행하였다. 쓰시마 섬 전체를 9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울타리를 세워 한 지구마다 멧돼지를 몰살시키는 방법으로 1709년(호에이 6년), 쓰시마 섬 전체의 멧돼지를 전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 당시는 에도 막부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 의해 겐로쿠 살생 금지령이 나와 있던 때였으므로, 스야마 돈오로써는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실행한 것이었다. 당시 쓰시마 사람들은 그를 쓰시마 성인(対馬聖人)이라고 추앙하였다고 한다.
1924년(다이쇼 13년), 정5위를 추증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