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케 간란
1. 개요
미야케 간란은 1674년 교토에서 태어난 유학자로, 주자학을 배우고 미토 번에서 《대일본사》 편찬에 참여했다. 아라이 하쿠세키의 추천으로 에도 막부에 등용되었으나, 실각한 하쿠세키와 연좌될 것을 우려하여 기노시타 준안의 제자임을 부정했다. 그는 《중흥감언》, 《지기간담》, 《열사보경록》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718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종4위가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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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학자 -
스야마 돈오
스야마 돈오는 19세기 쓰시마 번의 군봉행으로, 러시아 군함의 쓰시마 내항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재정 개혁과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며, 개항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울릉도 개척을 시도한 인물이다. -
17세기 학자 -
진제 (명)
진제는 명나라 시대의 무관으로, 1603년 타이완을 방문하여 왜구 토벌에 참여하고 타이완 원주민의 생활상을 기록한 《동번기》를 저술하여 17세기 타이완 사회 연구와 동아시아 해상 교역 연구에 기여했다. -
18세기 학자 -
이시다 바이간
이시다 바이간은 에도 시대 사상가이자 석문심학 창시자로, 사농공상의 평등을 주장하며 신분과 성별에 관계없이 무료 강좌를 통해 사상을 전파했고, 그의 사상은 기업 윤리와 사회적 책임에 영향을 미쳤다. -
18세기 학자 -
혼다 도시아키
혼다 도시아키는 에도 시대 후기 가가 번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사회 문제와 북방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급진적인 서구화, 에조치 개발, 해외 영토 획득, 막부 주도 교역, 중상주의적 개혁론을 주장했고, 그의 사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주의 발흥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
1718년 사망 -
윤지완
윤지완은 조선시대 외교관으로 1682년 숙종의 명령을 받아 일본에 파견되어 조선과 일본 간 무역을 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고 양국 관계 정상화에 기여했으며, 이조판서 윤강의 아들이다. -
1718년 사망 -
도쿠가와 쓰나에다
도쿠가와 쓰나에다는 에도 시대 미토 번의 3대 번주로, 선대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양자였으나, 재정난 속에서 개혁을 추진하다 농민 반발로 실패했고, 노가쿠에 심취했으며 쇼군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2. 생애
미야케 간란은 1674년(엔포 2년) 교토의 조닌 유학자인 미야케 미치요시(또는 미야케 도에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사미 게이사이와 기노시타 준안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1698년(겐로쿠 11년) 에도로 가서 이듬해 구리야마 센보의 추천으로 미토번에 등용되었다. 쇼코칸 총재 우카이 렌사이가 간란이 쓴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대한 글을 도쿠가와 미쓰쿠니에게 보인 것을 계기로 《대일본사》 편찬에 참여했다.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나와 나가토시 등 난보쿠초 시대 인물들의 전기를 썼고, 1700년(겐로쿠 13년)에는 200석을 받았다. 1708년(호에이 5년) 진물번으로 승진했고, 1710년(호에이 7년) 쇼코칸 총재가 되었다.
1711년 아라이 하쿠세키의 추천으로 에도 막부에 등용되었으나,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장군직을 계승한 후 하쿠세키가 실각하자 연좌될 것을 우려하여 "참회서"(회서)를 쓰고 기노시타 준안의 제자임을 부정했다. 고다이고 천황의 실각을 소재로 난초 정부의 정당성을 논한 저서 《중흥감언》은 쇼와 천황을 가르쳤던 노기 마레스케가 자살 직전 쇼와 천황에게 전달한 책이다. 그 외에도 조선통신사 수행 학자와 함께 필담집인 《지기간담》, 아코 낭인들을 소재로 한 《열사보경록》을 남겼다.
1718년(교호 3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야나다 테이가(梁田蛻巖) 등 많은 문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묘소는 분쿄구 류코지에 있다. 1907년(메이지 40년), 종4위를 추증받았다.
2.1. 초기 생애와 수학
미야케 간란은 1674년(엔포 2년) 교토의 조닌 유학자인 미야케 미치요시(또는 미야케 도에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사미 게이사이와 기노시타 준안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1698년(겐로쿠 11년) 에도로 가서 이듬해 구리야마 센보의 추천으로 미토번에 등용되었다. 쇼코칸 총재 우카이 렌사이가 간란이 쓴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대한 글을 도쿠가와 미쓰쿠니에게 보인 것을 계기로 《대일본사》 편찬에 참여했다.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나와 나가토시 등 난보쿠초 시대 인물들의 전기를 썼고, 1700년(겐로쿠 13년)에는 200석을 받았다. 1708년(호에이 5년) 진물번으로 승진했고, 1710년(호에이 7년) 쇼코칸 총재가 되었다. 1711년 아라이 하쿠세키의 추천으로 에도 막부에 등용되었으나,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장군직을 계승한 후 하쿠세키가 실각하자 연좌될 것을 우려하여 "참회서"(회서)를 쓰고 기노시타 준안의 제자임을 부정했다.
2.2. 미토 번에서의 활동
미야케 간란은 교토의 조닌 유학자인 미야케 미치요시의 차남으로, 아사미 게이사이와 기노시타 준안에게서 수학했다. 1698년 에도로 이주한 후, 이듬해 구리야마 센보의 추천으로 미토번에서 일하게 되었다. 쇼코칸 총재 우카이 렌사이가 간란이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대해 쓴 문장을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에게 보인 것을 계기로 《대일본사》 편찬에 참여하여,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나와 나가토시 등 난보쿠초 시대 인물들의 이야기를 썼다. 1710년 우카이의 뒤를 이어 쇼코칸 총재가 되었다. 1711년 아라이 하쿠세키의 추천으로 막부에 등용되었으나, 아라이가 실각하자 연좌제로 처벌받을 위기에 처해 "참회서"를 써서 해명해야 했으며, 이 글에서 기노시타 준안의 제자였다는 사실 또한 부정해야 했다. 1718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다이고 천황의 실각을 소재로 난초 정부의 정당성을 논한 저서 《중흥감언》은 쇼와 천황을 가르쳤던 노기 마레스케가 자살 직전 쇼와 천황에게 전달한 책이다. 그 외에도 조선통신사 수행 학자와 함께 필담집인 《지기간담》, 아코 낭인들을 소재로 한 《열사보경록》을 남겼다.
1907년 종4위가 추증되었다.
2.3. 막부 등용과 시련
미야케 간란은 교토의 조닌 유학자 미야케 미치요시(또는 미야케 도에쓰)의 차남으로, 아사미 게이사이와 기노시타 준안에게서 수학했다. 1698년 에도로 와 이듬해 구리야마 센보의 추천으로 미토번에서 일하게 되었다. 쇼코칸 총재 우카이 렌사이가 간란이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대해 쓴 문장을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에게 보인 것을 계기로 《대일본사》 편찬에 참여했다.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나와 나가토시 등 난보쿠초 시대 인물들의 전기를 썼다. 1710년 쇼코칸 총재가 되었고, 1711년 아라이 하쿠세키의 추천으로 에도 막부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쇼군이 되면서 하쿠세키가 실각하자, 간란은 연좌될 것을 우려하여 "참회서"(또는 회서)를 써서 해명해야 했다. 이 글에서 간란은 기노시타 준안의 제자였다는 사실 또한 부정해야 했다. 1718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의 죽음에 많은 문인들이 애도했다.
2.4. 사망
1718년(교호 3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야나다 테이가(梁田蛻巖) 등 많은 문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묘소는 분쿄구 류코지에 있다. 1907년(메이지 40년), 종4위를 추증받았다.
3. 저서
* 『중흥감언』: 고다이고 천황의 건무 신정에 대한 득실을 논하고, 남조 정통론을 주장하였다.
* 『지기간담』: 조선 사신을 수행한 학사 서기와 창화 필담한 문장을 모은 책이다.
* 『열사보수록』: 아코 낭사를 논한 책이다.
3.2. 《지기간담》(識疑間談)
조선 사신을 수행한 학사 서기와 창화 필담한 문장을 모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