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왕정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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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왕정복고는 1874년 알폰소 12세의 부르봉 왕가 복귀로 시작되어,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불평등으로 특징지어졌다. 보수주의의 강화와 양당 체제가 유지되었지만, 실업과 인플레이션, 소수 엘리트의 자원 독점, 사회주의 및 아나키즘 운동의 성장, 지역 갈등 심화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식민지를 잃고, 모로코와의 분쟁을 겪으며 국론이 분열되었다. 알폰소 13세 시기에는 국제적 지위 회복을 위한 노력과 함께 모로코 문제,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고,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를 거쳐 1931년 알폰소 13세가 퇴위하고 스페인 제2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왕정은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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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정복고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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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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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Plus Ultra (더 멀리) |
국가 (國歌) | Marcha Real (왕실 행진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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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스페인 왕국) |
통칭 | 스페인 |
존속 기간 | 1874년 12월 29일 ~ 1931년 4월 14일 |
수도 | 마드리드 |
공용어 | 스페인어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국교) |
통화 | 스페인 페세타 |
구성 국가 | 스페인 |
현재 국가 | 스페인 |
별칭 | (왕정복고), (부르봉 왕정복고) |
정치 | |
정치 체제 | 단일 의회 입헌 군주국 |
특징 | 과두적 파티크라시 (1881–1916) 하의 군사 독재 (1923–1930; 1930–1931) |
국왕 | 알폰소 12세 (1874–1885) 알폰소 13세 (1886–1931) |
섭정 | 마리아 크리스티나 (1885–1902) |
총리 | 안토니오 카노바스 (1874–1875, 첫 번째) 후안 B. 아스나르 (1931, 마지막) |
입법부 | 코르테스 헤네랄레스 |
상원 | 상원 |
하원 | 하원 |
역사적 사건 | |
주요 사건 | 프로운시아미엔토: 1874년 12월 29일 헌법 채택: 1876년 6월 30일 미국-스페인 전쟁: 1898년 4월 ~ 8월 제2차 멜리야 캠페인: 1909년–1910년 리프 전쟁: 1920년–1926년 산 세바스티안 협정: 1930년 8월 17일 제2공화국 수립: 1931년 4월 14일 |
이전 | 스페인 제1공화국 |
이후 | 스페인 제2공화국 |
기타 정보 | |
ISO 3166 코드 | 생략 |
데몬 | 스페인, 스페인인 |
2. 정치적 특징
복고 시대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1][2]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소수 부유층의 자원 독점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했다.[1][2]
사회주의 및 아나키스트 운동은 이러한 불평등에 맞서 성장했으나, 보수 정부와 충돌했다.[1][2] 카탈루냐와 바스크에서는 자치 요구 운동이 일어나 지역 갈등이 심화되었다.[1][2]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패배로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등 식민지를 상실하며 국가적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고, 경제와 정치에도 악영향을 미쳤다.[1][2] 모로코와의 분쟁(리프 전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1][2]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스페인에서는 문화 부흥이 일어나 미술, 문학, 음악 분야에서 새로운 관심과 중요한 인물들이 등장했다.[1][2] 경제적으로는 유럽에 비해 뒤처졌지만, 국가 근대화가 대규모로 진행되었고, 보호 무역 정책으로 생산이 확대되었다.
2. 1. 보수주의의 강화와 양당 체제
아르세니오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의 프르눈시아미엔토로 알폰소 12세가 즉위하면서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리고 보수주의 정치 세력이 강화되었다. 1876년 스페인 헌법이 제정되어 왕정복고 시대 내내 시행되었다. 이 헌법은 스페인을 입헌군주제로 규정하고,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의회(스페인 국회)를 설치했다. 국왕은 상원의원 임명권, 법률에 대한 거부권, 군 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가졌다.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가 이끄는 보수당과 프락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가 이끄는 자유당은 '투르노 파시피코'라는 합의 하에 번갈아 정권을 담당했다.[3] 하지만, 이러한 정권 교체는 민주적인 방식이 아니라 카시케라고 불리는 지역 유지들이 선거를 조작하여 이루어진 과두제적 체제였다.[3] 이러한 체제에 대한 불만은 점차 커져 카탈루냐, 갈리시아, 바스크 등지에서 민족주의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3]
2. 2. 입헌군주제의 한계
1876년 스페인 헌법은 스페인을 입헌군주제로 규정하고,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입법부(코르테스 헤네랄레스)를 두었다. 하지만 국왕은 상원의원 임명권, 법률 거부권, 군 통수권 등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3] 이는 의회 정치의 발전을 제약하고, 국왕 중심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2. 3. 카시케와 선거 조작
카시케(cacique)라고 불리는 지방 유력자들은 관행적으로 선거 결과를 좌우했다.[1] 이들은 토지 소유, 경제적 영향력, 폭력 등을 통해 유권자들을 압박하고 매수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중앙 정부의 권력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 이는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고 정치적 부패를 심화시켰다. 그 결과, 체제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쌓였고, 카탈루냐, 갈리시아, 바스크의 강력한 민족주의 운동과 노동 조합 운동이 시작되었다.[1]3. 사회경제적 배경
스페인 왕정복고 시대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 시기 스페인은 여러 문제점에 직면했다.[1][2]
- '''보수주의''': 부르봉 왕정 복귀와 보수 정치의 부활로 특징지어진다. 알폰소 12세는 정치적 혼란을 종식시키고 안정성을 회복했지만, 이는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을 통해 유지되었다.
- '''경제적 어려움''':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등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소수의 부유한 엘리트가 스페인 자원의 대부분을 통제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했다.
- '''사회 불안''': 사회주의 및 아나키스트 운동의 성장으로 사회적 격변이 일어났다. 이들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고자 했으며, 보수 정부와 충돌했다.
- '''지역 간 긴장''':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 등에서 더 큰 자치를 요구하는 운동이 나타나면서 지역 간 긴장이 심화되었다.
- '''전쟁''':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배하여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을 포함한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이는 스페인의 경제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로코와의 분쟁(리프 전쟁)은 경제 상황과 사기를 더욱 악화시켰다.
- '''문화 부흥''':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미술, 문학,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문화 부흥을 경험했다.
3. 1. 경제적 발전과 불평등 심화
왕정복고 시대는 경제적 번영의 시대였다. 스페인 경제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쳐져 있었지만, 이 기간 동안 국가의 근대화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철저한 보호 무역 정책 덕분에 많은 분야에서 생산이 확대되었다.[2]하지만 이러한 경제 발전의 혜택은 소수에게 집중되었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여전히 빈곤과 낮은 생활 수준에 시달렸다. 이는 사회적 불만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사가스타가 이끄는 자유당과 카노바스가 이끄는 보수당은 "온건한 교대"(turno|투르노es)라고 불리는 시스템 속에서 교대로 정권을 담당했다. "카시케(Cacique)"라고 불리는 지방 유력자들이 관행적으로 선거 결과를 좌우한 결과, 이 체제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쌓였고, 카탈루냐, 갈리시아, 바스크의 강력한 민족주의 운동과 노동 조합 운동이 시작되었다.[3]
3. 2. 사회 불안과 노동 운동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만은 사회주의, 아나키스트 운동과 노동 운동의 성장을 촉진했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과 낮은 임금에 항의하며 파업과 시위를 벌였고, 이는 사회 불안을 더욱 심화시켰다.[1] 지방 유력자들인 "카시케(Cacique)"가 관행적으로 선거 결과를 좌우한 결과, 이 체제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쌓였고, 카탈루냐, 갈리시아, 바스크에서 강력한 민족주의 운동과 노동 조합 운동이 시작되었다.[1]3. 3. 지역 갈등과 민족주의 운동
제1공화국이 종말을 고하고 알폰소 12세가 왕위에 오른 후, 스페인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경제 발전이 더뎠다. 중앙 정부는 국가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철저한 보호 무역 정책으로 인해 지역 간 불균형 발전이 심화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카시케(Cacique)"라 불리는 지방 유력자들이 선거 결과를 좌우하는 관행이 만연했고, 중앙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카탈루냐, 갈리시아, 바스크 등지에서 강력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1] 이는 스페인의 정치적 불안정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4. 알폰소 12세 시대 (1874-1885)
1874년 12월 29일, 아르세니오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의 프르눈시아미엔토로 제1차 스페인 공화국이 무너지고 왕정이 복고되어,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 12세가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했다.
곧이어 1876년 스페인 헌법이 제정되어 복고 시대 내내 시행되었다. 이 헌법은 스페인을 입헌군주제로 규정하고,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입법부(코르테스 헤네랄레스)를 두었다. 국왕은 상원의원을 임명하고 법률을 거부할 권한을 가졌으며, 육군 최고사령관 직함을 받았다.
알폰소 12세는 1885년 11월 이질이 재발하여 사망했다.[4] 당시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임신 중이었다. 1886년 5월 17일, 그들의 아들 알폰소 13세가 태어났고,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을 수장으로 하는 섭정이 구성되었다.
4. 1. 왕정 복고와 정치적 안정
아르세니오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의 프르눈시아미엔토로 알폰소 1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제1 공화국은 막을 내렸다.[3] 이후 1876년 스페인 헌법이 제정되어 왕정복고 시대 내내 시행되었다. 이 헌법은 스페인을 입헌군주제로 규정하고,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의회(코르테스 헤네랄레스)를 설치했다. 국왕은 상원의원을 임명하고 법률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으며, 군 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가졌다.[3]이 시기는 경제적으로 번영한 시기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스페인 경제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처져 있었으나, 이 기간 동안 상당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고도의 보호주의 정책에 힘입어 국내 생산이 크게 확대되었다.
프락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가 이끄는 자유당과 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가 이끄는 보수당은 ''엘 투르노 파시피코''(''el turno pacífico'')라는 통제된 과정을 통해 권력을 교대했다.[3] 카시케로 알려진 지역 유력자들은 선거 결과를 조작하여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키웠고,[3] 이는 카탈루냐, 갈리시아, 바스크에서 주요 민족주의 운동과 노동 조합의 형성을 이끌었다.
4. 2. 경제적 번영과 근대화
이 시기는 경제적 번영의 시기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1815년에 종결된 이후 스페인의 경제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더욱 뒤처져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국가는 상당한 근대화를 겪었다. 고도의 보호주의 정책에 힘입어 대부분의 분야에서 국내 생산이 확대되었다.4. 3. 사회적 불만과 지역주의 대두
이 시기는 경제적 번영기였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경제력이 한참 뒤져있었던 스페인은 이 시기 동안 근대화를 거쳐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했다. 공산품 생산량이 증대되었고, 극단적인 보호주의 조치를 통해 국가 산업이 육성됐다.[3]프락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가 이끄는 자유당과 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가 이끄는 보수당은 ''엘 턴노 파시피코''라는 통제된 과정을 통해 권력을 교대했다. 카시케로 알려진 지역 유력자들은 선거 결과를 조작하여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3] 이는 카탈루냐, 갈리시아, 바스크 지방에서 주요 민족주의 운동과 노동 조합의 형성을 이끌었다.[3]
5. 마리아 크리스티나 섭정 시대 (1885-1902)
Regencia de María Cristina de Habsburgoes
1885년 알폰소 1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내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섭정을 시작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1886년 아들 알폰소 13세를 낳았다. 이 시기 스페인은 정치,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스페인은 쿠바, 괌,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등 대부분의 식민지를 상실했다.
5. 1. 미국-스페인 전쟁과 식민지 상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스페인은 쿠바, 괌,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등 대부분의 식민지를 상실했다.[14][12] 이는 스페인 사회에 큰 재앙과 같았으며, 정부와 정치 이념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카밀로 폴라비에하는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고, 전국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었다.[14]6. 알폰소 13세 시대와 체제 위기 (1902-1923)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은 쿠바, 괌,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등 주요 해외 식민지를 잃었다. 이는 스페인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정부와 관련 이념의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카밀로 가르시아 데 폴라비에하 장군의 군사 쿠데타 미수 사건은 국가 쇠퇴의 시작을 알렸으며, 지방 및 국가 수준에서 수많은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5]
알폰소 13세는 1902년 5월 17일에 즉위하여 섭정을 끝내고 친정을 시작했다.[6]
스페인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켜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8] 1918-1920년 인플루엔자 유행으로 인해 인구의 1%인 20만 명이 사망했다.[9][10]
6. 1. 국제적 지위 회복 노력

알폰소 13세는 1902년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하면서 스페인의 국제적 지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6] 1906년 알헤시라스 회의에 참여하여 국제적 재건을 시작했으며,[7] 1907년에는 영국, 프랑스와 카르타헤나 조약을 체결하여 삼국 동맹에 대항하는 삼국 협상 세력에 접근했다.
6. 2. 모로코 문제와 사회 불안 심화
리프 전쟁이 스페인의 모로코 침공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스페인 국내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14] 바르셀로나에서는 세마나 트라지카(비극의 주) 사태가 일어나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공화주의자들이 징병제에 대해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전쟁 상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시위를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사망하고 프란시스코 페레르가 주동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사회주의자 연맹(UGT)과 아나키스트 연맹(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 CNT)은 전국적인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도시 단위에서만 성공하고 전국으로 확대되지는 못했다.[14]안누알 전투에서 모로코 군대가 스페인 군대를 공격하여 대다수를 볼모로 붙잡으면서 모로코에서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압드 엘 크림이 이끄는 모로코 군대는 뛰어난 지휘를 통해 스페인 군대를 거의 전멸시키고 멜리야로 몰아냈다. 이 패배는 잘못된 전술 계획으로 인한 것이었기에 스페인 군부 수장들은 문책당했다. 그러나 군부 입장에서는 영토 확장이 어렵고 재원도 부족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려 했기 때문에 문책과 비난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14]
6. 3. 비극의 주간과 사회 갈등 격화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쿠바, 괌,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등 주요 해외 식민지를 잃었다. 이는 스페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14]1909년, 모로코에서의 제2차 멜리야 원정 실패는 국내 불만을 더욱 키웠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비극의 주간이라 불리는 반란이 일어났다. 하층민,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공화주의자들이 징병제의 불공정함에 항의하며 봉기했다. 정부는 군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프란시스코 페레르가 처형되었다.[5] 사회주의 성향의 노동 총연합(UGT)과 아나키스트 성향의 전국 노동 연맹(CNT)은 전국적인 총파업을 시도했지만, 도시 노동자들만 참여하여 실패했다.
1921년, 모로코에서 리프 전쟁이 발발했다. 모로코 지도자 압드 엘-크림이 이끄는 모로코군은 안누알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이 패배는 스페인 군부의 잘못된 전술 계획 때문이었고, 군부는 큰 비난을 받았다.
7.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1923-1930)
군부의 반감, 아나키스트 테러와 혁명에 대한 불안감, 민족주의의 성장은 시민과 군부의 타협을 촉발했다. 1923년 9월 13일, 카탈루냐 총사령관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 체제를 비난하고 알폰소 13세의 지지를 받아 총리로 임명되었다.[15] 그는 헌법을 중지시키고 독재 권력을 행사하며 스페인 애국 연합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산했다.
7. 1. 쿠데타와 독재 정권 수립
1923년 9월 13일, 카탈루냐 총독이던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의회 제도가 스페인의 여러 문제의 원인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15][11][13] 알폰소 13세는 쿠데타를 지지하고 리베라를 총리로 임명했다.[15][11][13]
리베라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독재자로서 절대 권력을 장악했다.[15][11][13] 그는 자신이 만든 스페인 애국 연합을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 삼고, 다른 모든 정당을 해산했다.[15][11][13] 그는 기업 및 공공 서비스에 대한 정부 지출을 크게 늘렸지만, 이로 인해 정부는 파산 상태에 직면했다.[15][11][13] 군부의 지지를 잃고 건강까지 악화되자, 알폰소 13세는 리베라의 사임을 요구했고, 1930년 1월 리베라는 사임했다.[15][11][13]
7. 2. 경제 정책 실패와 몰락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경제 및 서비스 부문에 대한 정부 지출을 크게 늘렸지만, 이는 정부를 파산 상태에 직면하게 만들었다.[15] 군부의 지지를 잃고 건강까지 악화되자 리베라 정권에 대한 반대는 극에 달했고, 결국 알폰소 13세도 1930년 1월 30일 리베라에게 사임을 요구했다.[15]8. 왕정의 몰락과 제2공화국 (1930-1931)
알폰소 13세는 다마소 베렝게르를 총리로 임명하여 이전 체제를 점진적으로 복원하고 자신의 위신을 높이려 했으나, 국왕이 독재를 지지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실패했다. 공화국 수립 요구가 높아지자 1930년 8월 17일, 여러 공화주의 단체들은 산 세바스티안 협약을 체결하고 혁명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이 위원회는 이후 스페인 제2공화국의 지도부가 되었다.[1]
베렝게르가 사임하자, 국왕은 후안 바우티스타 아스나르 제독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1931년 4월 12일, 아스나르는 민주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을 달래고 독재 체제의 지방 정부 기구를 교체하며 점진적으로 복고를 추진하기 위해 지방 선거를 실시했다.[1]
군주주의자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공화당과 사회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의 승리는 거리 폭동과 군주제 폐지 요구 시위로 이어졌다. 1931년 4월 14일, 군대가 국왕을 지키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국왕은 스페인을 떠났다. 이후 니세토 알칼라-사모라가 이끄는 임시 정부가 즉시 스페인 제2공화국을 수립했다.[1]
8. 1. 베렝게르, 아스나르 내각의 실패
알폰소 13세는 다마소 베렝게르를 총리로 임명하여 왕정 복고를 시도했으나, 이미 국왕이 독재를 지지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실패했다. 국민들은 공화국 수립을 강력하게 원했고, 1930년 8월 17일 여러 공화주의 단체들은 산 세바스티안 협약을 체결, 혁명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훗날 스페인 제2공화국의 지도부가 된다.[1]베렝게르가 사임하자, 알폰소 13세는 후안 바우티스타 아스나르 제독에게 내각을 맡겼다. 아스나르는 1931년 4월 12일 지방 선거를 실시하여 민주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을 달래고, 독재 체제의 지방 정부를 교체하며 점진적으로 왕정 복고를 추진하려 했다.[1]
그러나 군주주의자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공화파와 사회당이 지방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거리 곳곳에서는 군주제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군대마저 국왕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알폰소 13세는 결국 스페인에서 피신했다. 니세토 알칼라-사모라가 이끄는 임시 정부는 즉시 스페인 제2공화국을 수립했다.[1]
8. 2. 알폰소 13세 퇴위와 제2공화국 선포
알폰소 13세는 다마소 베렝게르를 총리로 임명하여 이전 체제를 점진적으로 복원하고 자신의 위신을 높이려 했으나, 국왕이 독재를 지지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실패했다. 공화국 수립 요구가 높아지자 베렝게르는 사임했고, 국왕은 후안 바우티스타 아스나르 제독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1931년 4월 12일, 아스나르는 민주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을 달래고 독재 체제의 지방 정부 기구를 교체하며 점진적으로 복고를 추진하기 위해 지방 선거를 실시했다.왕정주의자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공화당과 사회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의 승리는 거리 폭동과 군주제 폐지 요구 시위로 이어졌다. 1931년 4월 14일, 군대가 국왕을 지키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국왕은 스페인을 떠났다. 이후 니세토 알칼라-사모라가 이끄는 임시 정부가 즉시 스페인 제2공화국을 수립했다.
참조
[1]
서적
Spain, 1808-1975
https://archive.org/[...]
1982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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