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쿠분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쿠분지는 쇼무 천황이 각 지방에 승려를 위한 고쿠분지와 수녀를 위한 고쿠분니지를 설립하도록 명령하여 시작되었다. 야마토국의 도다이지는 모든 고쿠분지의 수장 역할을, 홋케지는 고쿠분니지의 역할을 수행했다. 덴표 13년(741년)에 쇼무 천황은 '국분사 건립의 조칙'을 내려 각국에 7층탑을 세우고, 금광명경과 법화경을 베껴 쓰도록 했다. 율령 체제의 이완으로 재정 지원이 줄면서 대부분의 고쿠분지, 고쿠분니지는 쇠퇴했지만, 중세 이후에도 일부는 다른 종파의 사찰로 존속되었다. 현대에는 지명으로 남아 가가와현, 도쿄도, 토치기현 등에 고쿠분지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쇼무 천황 - 만간지 (가와니시시)
만간지는 일본 효고현 가와니시시에 위치한 사찰로, 쇼무 천황의 칙원으로 창건되어 겐지 일문, 고다이고 천황, 아시카가 쇼군가의 기원소로 번성했으며, 현재는 금당, 관음당, 석조 구중탑 등을 보유하고 있다. - 쇼무 천황 - 구니쿄
구니쿄는 740년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난 이후 쇼무 천황의 칙명으로 헤이조쿄에서 천도되어 사가라 지역에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743년 조영이 중단되고 오미 시가라쿠 궁으로 천도된 일본의 옛 수도이다. - 일본의 절 - 에마 (신토)
에마는 일본의 신사나 사찰에 봉납하는 그림이나 그림이 그려진 나무판으로, 소원을 적어 신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며, 학문, 건강, 사업 번창 등 다양한 기원을 담고 있다. - 일본의 절 - 주손지
주손지는 12세기 초 후지와라노 키요히라가 건립을 시작한 사찰로, 전구년의 역과 후삼년의 역에서 사망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곤지키도 등 주요 문화재가 보존되어 현재 일본의 국보와 중요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2. 역사
국사의 태만으로 인해 많은 고쿠분지의 조영은 지체되었다. 덴표 19년(747년) 11월, "국분사 조영 독촉 조칙"에 의해 조영 체제를 국사에서 군사층으로 이행시키고, 완성하면 군사의 세습을 인정하는 등의 은전을 보였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국분사에서 본격적인 조영이 시작되었다.[4]
고쿠분지 대부분은 고쿠후 구역 안 또는 그 주변에 위치해 국청과 함께 그 나라의 최대 건축물이었다. 또한 야마토국의 도다이지·호케지는 총국분사·총국분니사로 지정되어 전국 고쿠분지·고쿠분니사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율령 체제가 이완되어 관에 의한 재정 지원이 없어지면서, 고쿠분지·고쿠분니사 대부분은 쇠퇴했다.[5] 다만, 중세 이후에도 상당수의 고쿠분지가 최초의 고쿠분사와는 다른 종파 또는 성격을 가진 사찰로서 존속을 지속해왔음이 밝혀졌으며,[6] 고쿠분니사 대부분은 부흥되지 못했지만, 후세에 법화종 등으로 재흥되는 등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사찰도 있다. 옛 고쿠분지 터 근처의 절이나 공공 시설(발굴 조사 등)에서 고쿠분사의 유품을 보존하고 있는 곳도 있다.
2. 1. 건립 배경
쇼무 천황 (701년 ~ 756년?)은 각 지방에 승려를 위한 '''고쿠분지'''와 비구니를 위한 고쿠분니지(国分尼寺)를 설립하도록 명령했다.[2] 야마토국의 국사(国寺)인 도다이지는 모든 고쿠분지의 수장 역할을 했고, 홋케지는 고쿠분니지의 역할을 수행했다.일본의 국분사·국분니사의 선례로, 수나라를 건국한 문제에 의한 대흥국사(대흥선사)가 있었다. 그 후의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에 의한 대운사, 중종에 의한 용흥사관, 현종에 의한 개원사가 있었다.[2]
덴표 13년(741년) 2월 14일, 성무 천황은 '''「국분사 건립의 조칙」'''을 내렸다. 그 내용은 각국에 7층탑을 세우고, 『금광명최승왕경(금광명경)』과 『묘법연화경(법화경)』을 베껴 쓰며, 스스로도 금자로 된 『금광명최승왕경』을 베껴 각 탑에 납입할 것, 나라마다 국분승사(国分僧寺)와 국분니사(国分尼寺)를 하나씩 설치하고, 승사의 이름은 금광명사천왕호국지사(金光明四天王護国之寺), 니사의 이름은 법화멸죄지사(法華滅罪之寺)로 할 것 등이다.[3] 절의 재원으로 승사에는 봉호(封戸) 50호와 수전 10정, 니사에는 수전 10정을 하사하고, 승사에는 승려 20명·니사에는 비구니 10명을 두도록 하였다.[3]
2. 2. 건립 과정
쇼무 천황(701년 ~ 756년?)은 각 지방에 승려를 위한 '''고쿠분지'''와 고쿠분니지|국분니사일본어를 수녀를 위해 설립하도록 명령했다.[2] 야마토국의 국사(国寺)인 도다이지는 모든 '''고쿠분지'''의 수장 역할을 했고, 홋케지는 '''고쿠분니지'''의 역할을 수행했다.일본의 국분사·국분니사의 선례로, 수나라를 건국한 문제(양견)에 의한 대흥국사(대흥선사)가 있었다. 그 후의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에 의한 대운사, 중종에 의한 용흥사관, 현종에 의한 개원사가 있었다.
성무 천황은 덴표 9년(737년)에는 나라마다 석가불상 1구와 협시보살상 2구를 조성하고 『대반야경』을 베끼라는 조서를, 덴표 12년(740년)에는 『법화경』 10부를 베끼고 7층탑을 세우라는 조서를 내렸다.
『속일본기』『유취삼대격』에 따르면, 덴표 13년(741년) 2월 14일(날짜는 『유취삼대격』에 따름), 성무 천황으로부터 '''「국분사 건립의 조칙」'''이 내려졌다.[3] 그 내용은, 각국에 7층탑을 세우고, 『금광명최승왕경(금광명경)』과 『묘법연화경(법화경)』을 베껴 쓰며, 스스로도 금자로 된 『금광명최승왕경』을 베껴 각 탑에 납입할 것, 나라마다 국분승사(国分僧寺)와 국분니사(国分尼寺)를 하나씩 설치하고, 승사의 이름은 금광명사천왕호국지사(金光明四天王護国之寺), 니사의 이름은 법화멸죄지사(法華滅罪之寺)로 할 것 등이다. 절의 재원으로, 승사에는 봉호(封戸) 50호와 수전 10정, 니사에는 수전 10정을 하사할 것, 승사에는 승려 20명·니사에는 비구니 10명을 둘 것도 정해졌다.
국사의 태만으로 인해, 많은 국분사의 조영은 지체되었다. 덴표 19년(747년) 11월의 "국분사 조영 독촉의 조칙"에 의해, 조영 체제를 국사에서 군사층으로 이행시키는 동시에, 완성하면 군사의 세습을 인정하는 등의 은전을 보였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국분사에서 본격적인 조영이 시작되었다.[4]
2. 3. 쇠퇴와 존속
율령 체제가 이완되어 관의 재정 지원이 없어지면서, 국분사와 국분니사는 대부분 쇠퇴했다.[5] 다만, 중세 이후에도 상당수의 국분사가 최초의 국분사와는 다른 종파 또는 성격을 가진 사찰로서 존속을 지속해왔음이 밝혀졌다.[6] 국분니사의 대부분은 부흥되지 못했지만, 후세에 법화종 등으로 재흥되는 등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사찰도 있다. 옛 국분사 터 근처의 절이나 공공 시설(발굴 조사 등)에서 국분사의 유품을 보존하고 있는 곳도 있다.3. 입지 선정
이시다 시게사쿠의 여러 나라 국분사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한 『도다이지와 국분사』에 의해 국분사 건설지 선정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7]
4. 구조 및 특징
일본의 국분사·국분니사의 선례로, 수를 건국한 문제에 의한 대흥국사(대흥선사)가 있었다. 그 후의 당에서는 측천무후에 의한 대운사, 중종에 의한 용흥사관, 현종에 의한 개원사가 있었다[2]。
덴표 13년(741년) 2월 14일(날짜는 『유취삼대격』에 따름), 성무 천황으로부터 '''「국분사 건립의 조칙」'''이 내려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각국에 7층탑을 세우고, 『금광명최승왕경(금광명경)』과 『묘법연화경(법화경)』을 베껴 쓴다.
- 스스로도 금자로 된 『금광명최승왕경』을 베껴 각 탑에 납입한다.
- 나라마다 국분승사(国分僧寺)와 국분니사(国分尼寺)를 하나씩 설치한다.
- * 승사의 이름은 금광명사천왕호국지사(金光明四天王護国之寺)로 한다.
- * 니사의 이름은 법화멸죄지사(法華滅罪之寺)로 한다.
- 절의 재원으로, 승사에는 봉호(封戸) 50호와 수전 10정, 니사에는 수전 10정을 하사한다.
- 승사에는 승려 20명·니사에는 비구니 10명을 둔다.[3]
국사의 태만으로 인해, 많은 국분사의 조영은 지체되었다. 덴표 19년(747년) 11월의 "국분사 조영 독촉의 조칙"에 의해, 조영 체제를 국사에서 군사층으로 이행시키는 동시에, 완성하면 군사의 세습을 인정하는 등의 은전을 보였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국분사에서 본격적인 조영이 시작되었다[4]。
국분사의 대부분은 고쿠후 구역 내 또는 그 주변에 위치해, 국청과 함께 그 나라의 최대 건축물이었다. 또한, 야마토국의 도다이사·호케지는 총국분사·총국분니사로 지정되어, 전국 국분사·국분니사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되었다.
5. 현대의 국분사
国分寺|고쿠분지일본어라는 이름을 가진 현대 지명은 다음과 같다.
- 고쿠분지
- 고쿠분지
- 고쿠분지
5. 1. 목록
国分寺|고쿠분지일본어의 어원을 바탕으로 한 현대 지명은 다음과 같다.- 고쿠분지
- 고쿠분지
- 고쿠분지
741년 쇼무 천황의 조칙에 의해 건립된 일본 각지의 국분사 목록은 다음과 같다.[8]
참조
[1]
백과사전
Kokubunji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5-04
[2]
서적
国分寺の創建 組織・技術編
吉川弘文館
[3]
웹사이트
国分寺建立の詔(武蔵国分寺跡資料館)
http://www.city.koku[...]
[4]
서적
国分寺の創建 組織・技術編
吉川弘文館
[5]
문서
국분니사의 쇠퇴
[6]
문서
鎌倉時代 이후 국분사의 보호 및 재건
[7]
서적
東大寺と国分寺
至文堂
[8]
문서
국사대사전을 바탕으로 한 국분사 목록
[9]
문서
대화국분사 논의
平凡社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