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테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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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스테롱은 프랑스 알프 드 오트 프로방스에 위치한 도시로, 4,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중세 시대에는 프로방스 백작의 북쪽 경계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여러 차례의 역병과 종교 전쟁을 겪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었다. 뒤랑스 강과 뷔에크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며, '프로방스의 문'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관광업이 발달했으며, 시스테론 대성당, 시타델, 박물관 등 다양한 명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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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테롱 | |
---|---|
지도 | |
일반 정보 | |
명칭 | Sisteron 시스테롱 |
오크어 표기 (미스트랄 철자법) | Sisteroun 시스테룬 |
고대 오크어 표기 | Sestaron 세스타론 |
행정 | |
국가 | 프랑스 |
레지옹 |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
데파르트망 | 알프드오트프로방스 |
아롱디스망 | 포르칼키에 아롱디스망 |
캉통 | Sisteron 시스테롱 |
INSEE 코드 | 04209 |
우편 번호 | 04200 |
면적 | 50.25 km² |
해발 고도 | 485 m |
최소 해발 고도 | 448 m |
최대 해발 고도 | 1145 m |
인구 | |
2007년 인구 | 7,288명 |
인구 밀도 | 145명/km² |
정치 | |
시장 | 다니엘 스파뉴 |
임기 | 2020년 - 2026년 |
지방 자치 단체 | Sisteronais Buëch 시스테로네 부에슈 |
추가 정보 | |
위치 | 리옹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곳 |
위치 | 마르세유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곳 |
위치 | 니스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곳 |
위치 | 디뉴레뱅에서 남서쪽으로 떨어진 곳 |
공식 웹사이트 | Sisteron 공식 웹사이트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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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시스테롱은 4,000년 동안 사람이 거주해 왔다.[1] 11세기에 포르칼키에 백작에 의해 처음으로 요새화되었으며, 이후 프로방스 백작 영지의 북쪽 경계가 되었다.[1] 1483년 루이 11세 통치 기간에 프랑스 왕국에 다시 합류했다.[1]
이 무렵 일곱 번의 역병이 발생하여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다.[1] 1562년에서 1594년 사이에는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간의 전투(위그노 전쟁)가 벌어졌고, 이 기간 동안 도시의 성벽이 건설되었다.[1] 1630년에 역병이 다시 발생했고,[1] 1639년, 리슐리외 추기경은 폴란드 왕자 얀 카지미에시 (후의 얀 2세)를 프랑스에 대한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시스테롱의 시타델에 투옥했다.[7] 1744년에는 발진티푸스가 발생하여 많은 시민들이 사망했다.[1]
프랑스 혁명 동안 이 도시는 왕당파로 남았다.[1] 나폴레옹이 1815년 엘바에서 탈출하여 북쪽으로 행군해 왔을 때, 도시는 그를 무시하고 통과시켰다.[1] 1790년, 시스트론 주교좌가 폐지되었다.[7] 1792년 5월 17일 왕당파에 의해 폭동이 일어났지만, 주민 대다수는 혁명 정부를 지지했다.[7]
1884년, 시스트론은 콜레라 유행으로 큰 피해를 입어, 8월 23일부터 9월 5일까지 주민 18명이 사망했다.[7] 1889년, 요새가 폐지되었다.[7]
1944년 8월 15일, 프랑스의 B-26과 미국 공군 폭격기가 시스트론의 철도교와, 뷔에크 강과 뒤랑스 강을 가로지르는 도로교를 파괴하려 했다.[1] 기상 조건이 좋지 않아 목표물 파괴는 실패했다.[1] 8월 17일, 프랑스 폭격기와 미국 공군기는 시스트론을 폭격하여 마을 대부분을 파괴하고, 시타델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로 인해 10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했다.[1]
2. 1. 고대
고대 로마 시대에 로마인들은 시스테롱을 통과하는 길을 이용했는데, 이는 오통으로 가는 길 근처 바위에 새겨진 라틴어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1] 로마 멸망 이후 야만족의 침입을 피했지만, 사라센족에게 유린당했다.[1]고대에 이 마을은 Segusterone 또는 Segusteronem이라고 불렀고, 나중에는 civitas Segesteriorum, 739년에는 Segisterico라고 불렸다.[1] 한때 골족의 일파인 소지온티족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1] 뒤랑스 강 합류 지점과 가까워 중요시되었으며, 로마인들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잇는 도미티아 가도를 시스트론과 몽주네브르 사이에 건설했다.[1]
1946년, 코뮌 내 공사에서 조각으로 장식된 (사방 풍신의 가면, 무사의 대리석상, 항아리 등) 1세기 후반의 묘지가 발견되었다.[1] 2세기에서 4세기 후반까지 마을은 로마 속주 알페스 마리티마에의 치비타스로 승격되었다.[1] 6세기에는 시스트론 주교좌가 설치되었다.[1]
2. 2. 중세
고대 로마 시대에 로마인들은 시스테롱을 통과하는 길을 이용했는데, 이는 오통으로 가는 길 근처 바위에 새겨진 라틴어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1] 로마 멸망 이후 야만족의 침입을 피했지만, 사라센족에게 유린당했다.[1] 11세기에 포르칼키에 백작에 의해 처음으로 요새화되었으며, 이후 프로방스 백작 영지의 북쪽 경계가 되었다.[1]중세 시스트론은 포르칼키에 백작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11세기부터는 프로방스 백작령에 편입되어 백작령의 북쪽 경계가 되었다.[6] 프랑스 국내에 처음으로 로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1425년).[6] 마을의 특권이 부여된 날짜는 불분명하지만, 역대 백작들이 이를 추인했다.[6]
시스트론에 있는 코르들리에 수도원 내에서, 프로방스 백작 레이몽 베랑제 4세는 프로방스 백작령을 막내딸 베아트리스 드 프로방스에게 주기로 결정했다.[6] 그녀는 앙주 백작 샤를 (후의 시칠리아 왕 카를로 1세)과 결혼했기 때문에, 이후 프로방스는 프랑스 왕국의 영향 아래에 들어갔다.[6]
시스트론에 정착했던 코르들리에 수도사들은 뷔에크 강에 놓인 다리의 보존을 수행했다.[6] 12세기 중반부터 코르들리에 수도사들은 시스트론의 자신들의 정착지를 템플 기사단에게 기부했고, 이후 기사단이 주둔하게 되었다.[6]
1483년 루이 11세 통치 기간에 시스테롱은 프랑스 왕국에 다시 합류했다.[1] 루이 11세가 1483년에 죽자, 프로방스는 정식으로 프랑스 왕국에 병합되었다.[6]
1562년부터 1594년까지의 위그노 전쟁에서, 시스트론과 그 요새는 가톨릭 동맹군과 위그노 동맹군이 빼앗으려고 격전을 벌인 곳이 되었다.[1][7] 이 기간 동안 도시의 성벽이 건설되었다.[1]
1639년, 프랑스에 대한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리슐리외추기경은 폴란드 왕자 얀 카지미에시 (후의 얀 2세)를 시스트론의 시타델에 투옥했다.[7]
2. 3. 근세
1483년 루이 11세 통치 기간에 시스테롱은 프랑스 왕국에 다시 합류했다.[1] 이 무렵 일곱 번의 역병이 발생하여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다.[1] 1562년에서 1594년 사이에는 이 도시와 요새는 두 차례의 포위를 포함하여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간의 전투(위그노 전쟁)가 벌어졌다.[1] 이 기간 동안 도시의 성벽이 건설되었다.[1] 1630년에 역병이 다시 발생했고,[1] 1639년, 리슐리외 추기경은 폴란드 왕자 얀 카지미에시 (후의 얀 2세)를 프랑스에 대한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시스테롱의 시타델에 투옥했다.[1] 1744년에는 발진티푸스가 발생하여 많은 시민들이 사망했다.[1]
2. 4. 근대
고대 로마 시대에 로마인들은 시스테롱을 통과하는 길을 이용했는데, 이는 오통으로 가는 길 근처 바위에 새겨진 라틴어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1] 로마 멸망 이후 야만족의 침입을 피했지만, 사라센족에게 유린당했다.[1] 11세기에 포르칼키에 백작에 의해 처음으로 요새화되었으며, 이후 프로방스 백작 영지의 북쪽 경계가 되었다.[1] 1483년 루이 11세 통치 기간에 시스테롱은 프랑스 왕국에 다시 합류했다.[1] 이 무렵 일곱 번의 역병이 발생하여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다.[1] 1562년에서 1594년 사이에는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간의 전투, 즉 위그노 전쟁으로 도시와 요새에서 두 차례의 포위가 있었다.[1] 이 기간 동안 도시의 성벽이 건설되었다.[1] 1630년에 역병이 다시 발생했고, 1744년에는 발진티푸스가 발생하여 많은 시민들이 사망했다.[1]프랑스 혁명 동안 이 도시는 왕당파로 남았다.[1] 그 결과, 나폴레옹이 1815년 엘바에서 탈출하여 북쪽으로 행군해 왔을 때, 도시는 그를 무시하고 통과시켰다.[1]
1944년 8월 15일, 프랑스 B-26 마라우더 폭격기와 미국 B-17 플라잉 포트리스 42 폭격 비행단은 뒤랑스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와 도로 다리를 파괴하려 했다.[1] 날씨가 좋지 않아 다리는 파괴되지 않았다.[1] 충돌을 피하기 위한 기동 중 한 폭격기가 실수로 도시, 심지어 교회를 포함한 여러 폭탄을 투하하여 약 100명의 사망자와 요새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다.[1] 8월 17일, 프랑스 항공기가 돌아와 다리를 파괴했다.[1]
2. 5. 현대
고대 로마 시대부터 4,000년 동안 사람이 거주해 온 시스테롱은 여러 차례의 역병과 전쟁을 겪었다. 1562년에서 1594년 사이에는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간의 전투가 벌어졌고, 이 기간 동안 도시의 성벽이 건설되었다.[1] 1630년과 1744년에는 역병과 발진티푸스로 많은 시민들이 사망했다.[1]프랑스 혁명 동안 시스테롱은 왕당파로 남았으며, 1815년 나폴레옹 1세가 엘바 섬에서 탈출하여 북쪽으로 행군했을 때 도시는 그를 무시하고 통과시켰다.[1]
1944년 8월 15일, 연합군은 뒤랑스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와 도로 다리를 파괴하려 했으나, 악천후로 실패했다.[1] 이 과정에서 한 폭격기가 실수로 도시와 교회를 포함한 여러 곳에 폭탄을 투하하여 약 100명이 사망하고 요새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1] 8월 17일, 프랑스 항공기가 다시 공격하여 다리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1]
3. 지리
시스테롱은 뒤랑스 강 기슭, 해발 485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뷔에크 강과 뒤랑스 강이 합류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가깝다. 시스테롱에 놓인 다리는 고대부터 19세기에 걸쳐 건설된 영구적인 다리로 유일하게 남아 있다.
시스테롱은 '프로방스의 문'(la Porte de la Provence)이라는 별칭을 가지며, 도피네와의 경계에 위치한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쥐라기 석회암인 보므 바위 반대편에는 시타델을 포함한 수많은 역사적 기념물이 있다.
4. 교통
시스테롱은 현재 시내를 우회하는 A51 고속도로가 지나가며, 교통의 악명 높은 '병목 현상'을 해소했다. 또한 마르세유에서 브리앙송과 그르노블로 이어지는 철도 노선에 기차역이 있다.
5. 인구
연도 | 인구 |
---|---|
1793 | 4000 |
1800 | 3891 |
1806 | 3642 |
1821 | 4125 |
1831 | 4429 |
1836 | 4546 |
1841 | 3844 |
1846 | 4392 |
1851 | 4576 |
1856 | 4509 |
1861 | 4338 |
1866 | 4210 |
1872 | 4575 |
1876 | 4280 |
1881 | 3974 |
1886 | 3864 |
1891 | 3996 |
1896 | 3905 |
1901 | 3874 |
1906 | 3702 |
1911 | 3575 |
1921 | 3341 |
1926 | 3354 |
1931 | 3302 |
1936 | 3378 |
1946 | 3432 |
1954 | 4070 |
1962 | 5325 |
1968 | 6289 |
1975 | 7243 |
1982 | 6470 |
1990 | 6594 |
1999 | 6964 |
2006 | 7251 |
2007 | 7288 |
2009 | 7427 |
2012 | 7360 |
2017 | 7460 |
6. 경제
관광업이 성행한다. 시스테롱 주변에서 사육되는 양은 시스테롱 램으로 품질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라벨 루즈()의 대상이 되고 있다.
7. 명소
시스테론 대성당(Cathédrale Notre Dame des Pommiers et Saint Thyrse)은 12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성모 마리아와 성 티르수스에게 헌정된 옛 성당이다. 시타델 박물관, 베이든-파월 스카우트 박물관, 테르 & 탕 박물관(지구와 시간의 측정에 관한)이 주목할 만한 박물관이다.[1]
관광 명소로는 교외, 암벽 등반, 리도, 바메유, 라 모트 뒤 케르, 샤토 아르누 생토방의 비행장이 있으며, 이곳은 글라이딩 스포츠에 전념하고 있다. 여름철 내내 많은 행사가 열리는 연례 축제도 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시장이 열린다. 장거리 도보 여행 코스인 GR 6 (''그랑드 란도네'')가 시스테론을 동서로 통과한다.[1]
8. 자매 도시
시스테롱의 자매 도시는 다음과 같다.
참조
[1]
웹사이트
Répertoire national des élus: les maires
https://www.data.gou[...]
2020-12-02
[2]
웹사이트
Canton de Sisteron
http://tresordesregi[...]
Le Trésor des régions
2013-06-09
[3]
서적
Louis Jullien, musique, spectacle et folie au XIXe siècle
Atlantica
[4]
웹사이트
Louis Antoine Julien
http://louisjullien.[...]
[5]
웹사이트
Daniel Spagnou's website
http://dspagnou.cele[...]
2011-07-22
[6]
간행물
Sisteron
Cassini-Ehess
[7]
웹사이트
Population en historique depuis 1968
https://www.insee.fr[...]
IN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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