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라 데 라 플라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시에라 데 라 플라타는 남아메리카 내륙에 존재한다고 전해지던 전설 속의 은 산맥으로, 16세기 초 스페인 정복자들이 찾고자 했던 부유한 지역이었다. 이 전설은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의 탐험에서 시작되었으며, 알레이수 가르시아에 의해 내륙의 은 산에 대한 이야기가 유럽에 전해지면서 더욱 널리 퍼졌다. 세바스티안 카보트, 페드로 데 멘도사, 후안 데 아욜라스 등 여러 탐험가들이 시에라 데 라 플라타를 찾아 탐험을 시도했으나, 원주민과의 충돌, 질병, 자원 부족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 결국 시에라 데 라 플라타는 볼리비아의 세로 리코 데 포토시와 동일시되었으며, 스페인 제국은 남아메리카를 총독령으로 나누어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려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남아메리카 탐험 - 엘도라도
엘도라도는 16세기 유럽인들이 남아메리카에서 찾았던 황금 도시 또는 왕국에 대한 전설로, 무이스카 문명의 황금 의식에 대한 과장된 소문과 유럽인들의 황금에 대한 기대 심리가 결합되어 탄생했으며, 현재는 대중문화에서 유토피아 또는 탐험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 남아메리카의 역사 - 잉카 제국
15세기부터 16세기 남아메리카 안데스 지역에 존재했던 잉카 제국(타완틴수유)은 쿠스코를 중심으로 네 지역으로 나뉘어 급속히 확장되었으나, 스페인 침략과 내전으로 몰락 후에도 남아메리카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 남아메리카의 역사 - 카우디요
카우디요는 스페인어로 '지도자'를 뜻하며, 19세기 초 스페인 아메리카 독립 후 혼란기에 나타나 폭력을 통해 질서를 확립하고 추종자들의 충성을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한 강력한 군사적·정치적 지도자를 지칭하며, 공화국 대통령과 같은 칭호로 통치를 정당화하려 했던 인물들을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의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멕시코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등이 있다. - 신화의 산 - 수미산
수미산은 불교, 힌두교 등 여러 종교에서 세계의 중심 또는 신성한 장소로 묘사되는 산으로, 종교에 따라 위치, 크기, 형태 등에 대한 묘사가 다르며 건축 및 창작물의 모티브로 활용되기도 한다. - 신화의 산 - 아라라트산
터키 동부 아나톨리아에 위치한 아라라트산은 대아라라트산과 소아라라트산으로 이루어진 성층 화산으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민족의 상징이자 노아의 방주가 정착한 곳으로 알려진 종교적 중요성을 지닌 약 5,137m 높이의 산이다.
시에라 데 라 플라타 | |
---|---|
지리 정보 | |
일반 정보 | |
이름 | 시에라 데 라 플라타 (Sierra de la Plata) |
별칭 | 은의 산 |
관련 강 | 라플라타 강 (Río de la Plata, 은의 강) |
언어 | 스페인어 |
로마자 표기 | Siera de la Peullata |
역사적 맥락 | |
탐험 동기 | 은의 원천 탐색 |
관련 인물 | 세바스티안 카보토 알레호 가르시아 |
탐험 시기 | 16세기 초 |
지역 |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
전설 및 신화 | |
전설의 내용 | 막대한 은이 매장된 산맥 원주민들이 은을 거래하는 곳 |
탐험 실패 이유 | 존재하지 않았거나 발견하지 못함 |
라플라타 강과의 관계 | |
이름의 유래 | 시에라 데 라 플라타 전설에서 유래 |
역사적 의미 | 은을 찾아 탐험한 항로 |
현대적 의미 | |
문화적 영향 | 남아메리카 역사와 문화에 깊이 각인된 전설 |
탐험의 교훈 | 환상과 현실의 괴리 식민지 시대 탐험의 어두운 면 |
2. 전설의 기원
시에라 데 라 플라타 전설은 남아메리카 탐험 초기부터 전해져 내려온다. 이 전설은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와 알레이수 가르시아의 탐험과 관련이 있다. 솔리스는 남아메리카 해안을 탐험하며 라플라타강을 발견했고, 가르시아는 내륙 깊숙이 빛나는 금속으로 된 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탐험에 나섰다. 이들의 탐험은 시에라 데 라 플라타 전설의 기원이 되었다.
2. 1.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는 남아메리카 해안을 탐험하면서 백색왕의 전설과 시에라 데 라 플라타를 시작하였다. 1512년 첫 번째 항해에서[1] 솔리스는 브라질 해안을 따라 항해하던 중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1501-02년 원정에서 요르단강[2]이라 이름 붙였고, 현지 주민들이 파라나과주("바다와 같은 강" 또는 "큰 물")라고 불렀던 라플라타강이라는 거대한 강어귀를 발견했다.[1] 솔리스는 그 크기 때문에 마르 둘세("담수해")라고 불렀다. 그는 이 지역을 탐사하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해협일 가능성을 추측하여, 정복자이자 이 지역의 총독으로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1] 1516년, 대장군 칭호를 받고 돌아왔지만, 솔리스와 일행은 라플라타 강 동쪽 기슭에 상륙했을 때 과라니족에게 공격받아 살해당했다. 이를 지켜본 배에 남아있던 선원들은 닻을 올리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1]
2. 2. 알레이수 가르시아
엔히케 데 소자 탐험대의 배 한 척이 유럽으로 돌아가는 길에 현재 브라질에 위치한 상타카타리나 섬 해안에서 난파되어 18명의 선원이 고립되었다. 그들 중 한 명인 포르투갈 탐험가 알레이수 가르시아는 현지 투피-구아라니족과 친분을 맺었고, 그들을 통해 내륙 깊숙이 빛나는 금속으로 된 거대한 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가르시아는 다른 난파자들과 함께 상당수의 원주민들을 이끌고 시에라 데 라 플라타를 찾아 상타카타리나를 떠나 남아메리카 대부분을 횡단하여 안데스 고원 지대에 도달했다. 이곳은 은으로 완전히 장식된 왕좌를 가진 백색 왕의 고향으로 추정되었다. 몇 점의 귀중한 물건을 얻은 후, 탐험가들은 브라질 해안으로 돌아갔지만, 도중에 알레이수 가르시아와 다른 유럽인들은 파야과족의 매복 공격으로 사망했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소수의 투피-구아라니족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백색 왕의 영토에서 얻은 은 조각들을 자랑했다.
3. 시에라 데 라 플라타 탐색
1526년 베네치아 출신 탐험가 세바스티안 카보트는 마젤란 해협을 거쳐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제도(향신료 제도)로 가려 했다. 브라질 페르남부쿠에서 그는 내륙 깊숙한 곳에 귀금속이 풍부한 땅, 즉 시에라 데 라 플라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찾기로 결심했다.[1]
산타 카타리나에서 난파된 멜초르 로드리게스와 엔리케 모랄레스는 이 이야기를 확인해 주었고, 카보트는 라플라타 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프란시스코 델 푸에르토를 만나 전설을 확인하고 안내를 받았다. 원정대는 파라나 강과 우루과이 강으로 나뉘어 이동했고, 카보트는 1527년 산티 스피리투 요새를 건설했다.[1]
1529년 2월, 카보트는 산타 아나라는 원주민 마을에서 다른 "백인"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파라과이 강을 따라 계속 항해했다. 강한 조류로 인해 미겔 데 리포스가 이끄는 브리간틴을 보냈으나, 원주민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카보트는 디에고 가르시아 데 모게르와 힘을 합쳐 시에라 데 라 플라타를 찾기로 했다.[1]
1534년, 카를로스 1세는 페드로 데 멘도사에게 라 플라타 지역 정복을 명령했다. 1536년, 멘도사는 산타 마리아 데 로스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를 건설했다.[3] 그러나 식량 부족과 원주민과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멘도사는 후안 데 아욜라스를 파견하여 파라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했고, 아욜라스는 코르푸스 크리스티 요새를 건설하고 시에라 데 라 플라타에 대한 소식을 가져왔다. 멘도사는 아욜라스와 함께 요새로 갔지만,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고 유럽으로 돌아가던 중 사망했다.[3]
후안 데 아욜라스는 파라과이 강을 따라 탐험을 계속하여 칸델라리아 항구를 건설하고, 도밍고 마르티네스 데 이랄라에게 임시 부지사 직을 맡겼다. 아욜라스는 귀금속이 있는 산악 지역에 도달했지만, 귀환길에 원주민과의 교전으로 사망했다.[1]
스페인은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를 멘도사의 후계자로 임명했다. 카베사 데 바카는 1541년 산타 카탈리나를 출발하여 1542년 이구아수 폭포를 지나 아순시온에 도착했다. 그는 1543년 시에라 데 라 플라타 탐험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1544년 포로로 잡혀 스페인으로 보내졌다.
도밍고 마르티네스 데 이랄라는 시에라 데 라 플라타를 찾기 위한 원정을 조직했지만, 페드로 데 라 가스카의 명령으로 중단해야 했다. 이랄라는 엘도라도 등을 탐험했지만 실패했고, 1556년 사망했다.[1]
3. 1. 세바스티안 카보트

1526년, 베네치아 출신 탐험가 세바스티안 카보트는 마젤란 해협을 거쳐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제도(향신료 제도)에 도달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스페인을 떠났다. 브라질 북부의 페르남부쿠에서 잠시 체류하는 동안 그는 내륙 깊숙한 곳에 귀금속이 풍부한 땅이 있으며, 남쪽의 거대한 하구를 통해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 하구는 보물로 가는 자연스러운 관문 역할을 한다고 여겨져 결국 라플라타 강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전설에 매료된 카보트는 임무를 포기하고 시에라 데 라 플라타를 찾기로 결심했다. 그는 충분한 은을 발견한다면 왕실 당국이 관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
산타 카타리나에서 난파된 멜초르 로드리게스와 엔리케 모랄레스는 이 이야기를 확인하며 알렉시오 가르시아의 원정대에 대해 카보트에게 이야기하고 그들이 가져온 금속을 보여주었다. 카보트는 라플라타 강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폭풍으로 손상된 두 척의 배를 수리하기 위해 상륙했다. 그곳에서 원정대는 솔리스의 상륙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인 전직 선실 소년 프란시스코 델 푸에르토를 만났다. 과라니족과 함께 살고 있던 델 푸에르토는 전설을 확인해 주고 안내자 겸 통역으로 자원했다.[1]
라플라타 강에 들어선 후, 원정대는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카보트는 파라나 강을 따라 계속 항해하고 안톤 데 그라헤다는 우루과이 강을 따라 이동했다. 1527년, 파라나 강과 카르카라냐 강의 합류 지점에서 카보트는 산티 스피리투 요새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라플라타 강 유역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이자 백색 왕의 땅으로 가는 원정대의 미래 기지가 되었다. 일행은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렸고, 육로로 이동할 수 없었기에 강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항해하여 아뇨 누에보("새해")라는 섬에 상륙했다. 그들은 팀부족과 음식을 교환하기 위해 색깔 있는 유리를 거래했지만, 카보트는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그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음식을 빼앗으라고 명령했다.[1]
1529년 2월, 그들은 산타 아나라는 원주민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환대를 받고, 음식을 잘 먹고, 그들 뒤에서 강을 따라 내려오는 다른 "백인"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카보트는 계획대로 파라과이 강을 따라 계속 항해했지만 강한 조류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곳에서 그는 미겔 데 리포스의 지휘 하에 브리간틴을 앞서 보냈다. 필코마요 강의 합류 지점 근처에서 리포스는 해안에서 몇몇 원주민들의 환영을 받은 후 몇몇 부하들과 함께 하선하기로 결정했다. 유럽인들은 숲을 지나 마을로 향했지만 예상치 못한 매복 공격을 받았다. 추정컨대, 그것은 지역 추장과 델 푸에르토가 약탈물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꾸민 함정이었다.[1]
브리간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간신히 탈출했고, 카보트에게 돌아왔을 때 그는 산티 스피리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가는 길에 그는 "다른 백인"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디에고 가르시아 데 모게르를 만났다. 가르시아는 카보트와 마찬가지로 몰루카로 항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백색 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탈영했다. 잠시 다툼 끝에 두 선장은 힘을 합쳐 시에라 데 라 플라타를 찾기로 결정했고, 카보트가 통합된 함대를 지휘했다.[1]
산티 스피리투에서 프란시스코 세사르 선장이 다른 15명의 병사들과 함께 지역 탐험을 위해 선택되었다. 3개월 후 세사르는 부하의 절반과 함께 돌아와 그 근처에 풍요로운 도시가 있으며, 그 도시가 그 후 시우다드 데 로스 세사레스("카이사르의 도시")로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소문을 가져왔다.[1]
3. 2. 페드로 데 멘도사

1534년, 카를로스 1세는 페드로 데 멘도사에게 "솔리스 강 주변의 땅과 지방을 정복하고 정착시키라, 어떤 이들은 그곳을 라 플라타라고 부른다"라고 명령했다. 14척의 배와 약 1,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떠난 이 원정은 당시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떠난 원정 중 가장 크고 중요한 규모였다.[3]
1536년, 페드로 데 멘도사는 산타 마리아 데 로스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를 건설했는데, 아마도 현재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파르케 레사마에 위치했을 것이다.[3] 그 규모의 인구를 부양할 자원이 부족했고, 스페인인들이 현지 퀘란디족을 학대하자 퀘란디족은 정착지에 식량 공급을 중단했다. 멘도사는 식량을 찾아 두 함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 함대는 그의 조카 곤살로 데 멘도사가 이끌고 브라질로 향했고, 두 번째 함대는 후안 데 아욜라스가 이끌고 세 척의 배와 270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라나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편, 멘도사는 그의 형제 디에고에게 300명의 병사와 30명의 기병을 이끌고 퀘란디족과 싸우라고 명령했다. 전투는 실패로 끝났다. 디에고 데 멘도사가 사망했고, 퀘란디족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한 장기간의 포위를 시작했다. 보급품이 끊긴 정착민들은 말과 죽은 사람들을 먹기 시작했다. 마침내 퀘란디족이 물러났고, 며칠 후 후안 데 아욜라스 원정대가 강 상류의 현대 도시인 가보토 근처에 코르푸스 크리스티라는 요새를 건설했고, 시에라 데 라 플라타에 대해 이야기하는 원주민들을 만났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페드로 데 멘도사는 아욜라스와 약 4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요새로 가기로 결정했다.
항해 중 약 200명의 병사가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했고, 코르푸스 크리스티에 도착한 멘도사는 카보트의 지도를 참고하여 목적지에서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주요 좌절과 그가 감염된 매독으로 인해 멘도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잠시 들른 후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페드로 데 멘도사는 1537년 6월 23일 공해상에서 사망했다.[3]
3. 3. 후안 데 아욜라스

페드로 데 멘도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기 전, 아욜라스 원정대에 대한 소식이 없자 후안 데 살라사르 에스피노사를 파견하여 그를 찾아 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1537년 8월 15일, 에스피노사는 파라과이 강과 필코마요 강의 합류 지점에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 아순시온 요새(현재 파라과이 아순시온)를 세웠다.[1]
한편, 후안 데 아욜라스는 파라과이 강을 따라 파야과족 영토로 더 올라가서 알레이소 가르시아의 옛 동료 중 한 명을 만났다. 그는 아욜라스에게 금과 은이 풍부하지만, 그곳까지의 여정이 매우 어려웠다고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욜라스는 그 자리(현재 코룸바 근처)에 칸델라리아 항구를 건설하고, 도밍고 마르티네스 데 이랄라에게 130명의 군인과 함께 육로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임시 부지사 직을 맡겼다. 얼마 후 아욜라스에 대한 소식이 없자, 이랄라는 부지사 직을 포기하고 아순시온 요새로 강을 따라 내려갔다.[1]
후안 데 아욜라스 원정대는 귀금속이 채굴되는 산악 지역에 성공적으로 도달했다. 그러나 귀환길에 원주민과의 교전으로 피해를 입었고, 파라과이 강에 도착하기 전에 운반하던 보물의 대부분을 묻어야 했다. 칸델라리아 항구로 돌아온 아욜라스는 항구가 버려진 것을 보고 실망하여 파야과족의 초대를 받아 그들의 마을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스페인 사람들과 현지인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후안 데 아욜라스를 포함한 거의 모든 원정대가 죽었다.[1]
3. 4.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
스페인은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를 페드로 데 멘도사의 '아델란타도' 지위를 공식적으로 계승할 인물로 선택했다. 현대 텍사스와 북부 멕시코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오랜 기간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진 카베사 데 바카는 리오 데 라 플라타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이동하는 대신, 파라과이를 도보로 횡단하기로 결정했다. 1541년 10월, 그의 탐험대는 산타 카탈리나를 출발하여 정글, 산, 강을 건너 아순시온에 도착했다. 1542년 1월에는 이구아수 폭포를 지나, 1542년 3월 11일, 도밍고 마르티네스 데 이라라를 만나는 아순시온에 도착했다.
카베사 데 바카는 아순시온에서 식민주의자들과 충돌했으며, 각 식민주의자들이 여러 명의 원주민 여성을 아내로 삼고 있는 마을을 "무어인의 낙원"이라고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베사 데 바카는 백색 왕의 땅으로 탐험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시에라 데 라 플라타로 이어지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라라를 파라과이 강으로 보냈다. 이라라는 판타날 지역의 라 가이바 호수에 도달하여 푸에르토 데 로스 레예스를 건설했다. 1543년 9월, 카베사 데 바카는 자신의 탐험대를 이끌고 숲을 통과했지만, 질병과 이라라의 부하들과의 충돌로 인해 수색을 포기하고 아순시온으로 돌아가도록 설득당했다.
권위가 약화되고 식민주의자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 이 대장군은 곧 전복되었다. 1544년 4월 25일, 이라라의 부하들이 카베사 데 바카의 집에 들어가 그를 포로로 잡았다. 11개월 후, 그는 곤살로 데 멘도사의 지휘하에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보내졌다. 항해 중 거센 폭풍이 몰아쳤고, 미신적인 선원들은 이를 신의 징벌로 해석하여 모든 포로를 풀어주기로 결정했다. 스페인에서 카베사 데 바카는 식민주의자들의 행동을 궁정에 고발했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고, 그는 다시는 아메리카로 돌아가지 못했다.
3. 5. 도밍고 마르티네스 데 이랄라 (재등장)
도밍고 마르티네스 데 이랄라는 권한이 확정되자 시에라 데 라 플라타를 찾기 위해 300명의 스페인 병사와 3,000명의 원주민으로 구성된 원정대를 조직했다. 원주민들과 몇 차례 전투 후, 이랄라의 부대는 마카시 부족에 도달했는데, 그들은 즉시 스페인어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그들의 영주가 페드로 안수레스이며,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관할 구역 밖에 있다고 말했다. 이랄라는 페루 총독 페드로 데 라 가스카에게 사절단을 보내 대화를 요청했고, 페드로 데 라 가스카는 이랄라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더 이상 원정을 진행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결국 이랄라와 원정대는 아순시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1]이랄라는 "부의 땅", "엘도라도 호수", "파이티티"와 같은 전설적인 장소를 탐험하기 위해 여러 차례 원정을 조직했지만, 이 모든 원정은 인명과 물적 자원의 큰 손실만 입은 채 실패로 끝났다.[1] 한편, 국왕은 이 지역의 새로운 ''아델란타도''(아델란타도)로 후안 데 사나브리아를 임명했다. 그러나 후안 데 사나브리아는 원정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사망했고, 그의 아들 디에고가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디에고는 이미 여러 척의 배가 출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머물렀다. 마침내 왕실은 이랄라의 사실상의 권력을 공식화하기로 결정했다. 이랄라가 다음 원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 왕실 사절이 아순시온에 도착하여 이랄라에게 더 이상 원정을 이끌지 말라는 명시적인 명령과 함께 누에바 안달루시아 총독부(리오 데 라 플라타 및 파라과이 총독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음을 알렸다.[1] 부에노스아이레스가 파괴되고 시에라 데 라 플라타가 다른 관할 구역으로 넘어가면서, 파라과이는 이랄라 치하에서 오랫동안 고립되었고, 이랄라는 1556년 10월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4. 세로 리코 데 포토시
시에라 데 라 플라타의 전설은 아마도 볼리비아의 세로 리코 데 포토시에 해당하며, 백색 왕은 잉카의 와이나 카팍에 해당한다. 16세기 초 알레이소 가르시아가 이 지역을 탐험하여 귀금속을 발견했을 때, 스페인은 파나마와 콜롬비아 해안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은 브라질 해안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두 왕국은 1528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태평양 연안에서 이동하면서 잉카 제국의 존재를 알게 될 때까지 몰랐다.[1]
카를로스 1세는 남아메리카를 여러 총독령으로 나누어 정복자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려 했다.
총독령 | 담당 지역 | 총독 |
---|---|---|
누에바 카스티야 | 에콰도르의 산티아고 강에서 페루의 피스코까지 | 프란시스코 피사로 |
누에바 톨레도 | 피스코에서 칠레의 탈탈까지 | 디에고 데 알마그로 |
누에바 안달루시아 | 남쪽으로 200 레구아 | 페드로 데 멘도사 |
참조
[1]
서적
Historia General de las Indias
http://www.cervantes[...]
Medina del Campo; Zaragoza
1553
[2]
뉴스
Había un Río Jordan al sur del Nuevo Mundo... y era el Río de la Plata
http://www.lanacion.[...]
La Nación
2001-05-06
[3]
웹사이트
Fundaciones de Ciudades
http://www.elhistori[...]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