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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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우디요(Caudillo)는 스페인어로 지도자 또는 두목을 뜻하며, 19세기 초 스페인 아메리카 독립 이후 이 지역에서 나타난 강력한 권력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카우디요 시대에는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와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등이 등장했으며, 20세기에는 후안 페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피델 카스트로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군사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쳤으며, 때로는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적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역시 '엘 카우디요'로 불렸다.
19세기 초 스페인 아메리카 독립 이후, 이 지역은 정치적 혼란과 권력 공백을 겪었다. 스페인 식민지 정부가 사라지면서 각 지역에서는 일종의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이 공백을 메운 것은 카우디요와 카우디요가 이끄는 가우초나 자네로 등이었다. 그들은 토지에서 얻는 이익으로 사병을 이끌고, 권위적이고 독재적으로 폭력을 배경으로 한 정치를 했다.
19세기 후반, 스페인 아메리카의 정권은 안정화되고 군인들의 지배는 줄어들었다. 특히 영국을 비롯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철도, 전신선, 항만 시설 등 인프라 구축에 투자하여 운송 및 통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외국인 투자는 자원 추출과 농작물 생산을 용이하게 하는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필요로 했다.[5] 몇몇 국가에서는 소비재 생산을 위한 산업화도 진행되었다. 외국 정부와 기업가들은 히스패닉 아메리카 국가를 직접 관리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며, 이는 종종 신식민주의로 여겨졌다.[5] 니카라과의 소모사 가문과 같이 대통령이 헌법 개정 등을 통해 권력을 연장하는 continuismoes의 예도 있었다.
2. 이스파노아메리카의 카우디요
스페인 아메리카의 취약한 국민 국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카우디요주의''의 지속을 촉진했다. 1929년 멕시코의 국민혁명당 결성은 사실상 ''카우디요주의''를 종식시켰다. 쿠바(헤라르도 마차도, 풀헨시오 바티스타, 피델 카스트로), 파나마(오마르 토리호스, 마누엘 노리에가), 도미니카 공화국(데시데리오 아리아스, 시프리아노 벤코스메), 파라과이(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너), 아르헨티나(후안 페론 및 기타 군사 강경파), 칠레(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등에서 ''카우디요''로 묘사되는 인물들이 통치했다.[5] ''카우디요''는 스페인 아메리카 문학의 주제가 되어왔다.[18][19]
가난한 배경에서 출발하여 토착 집단이나 기타 소외된 농촌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거나, 그러한 집단과 강하게 동일시되는 강력한 지도자들이 소수 있었는데, 역사가 E. 브래드포드 번스는 그들을 "민속 ''카우디요''"라고 불렀다. 그의 분석에서 그들은 낮은 계급을 경멸하는 유럽화된 엘리트와 대조되었다. 그는 후안 파쿤도 키로가,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와 같은 아르헨티나 ''카우디요''를 예시로 들었는데, 그들은 대중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카우디요''였다. 번스는 이러한 민속 ''카우디요''의 추종자들에 대한 도시 엘리트들의 당혹감과 경멸이 ''카우디요''에게 부여된 많은 부정적인 역할의 원인이라고 본다.[23]
폭력과 정치적 혼란 이후, 새로운 국가들은 광범위한 재산 파괴, 무역 붕괴, 그리고 정치적 권위가 부족한 상황에 직면했다. 독립 후 수십 년 동안 군대에 뿌리를 둔 강자들이 부상했다. 스페인 아메리카는 군주제 외에는 다른 형태의 정권을 알지 못했고, 멕시코는 왕당파 출신 반란군 출신 장군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 아래 군주제를 수립했다. 스페인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주권 국가들은 전통적인 엘리트가 장악한 중앙 권력과 공화국의 새로운 "시민"의 대표성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문제와 씨름했다. 권력 분립을 명시하는 헌법이 작성되었지만, 개인주의적 강자인 ''카우디요''의 통치가 지배적이었다. 독재 권력은 일부 ''카우디요''에게 헌법상 대통령으로 명목상 통치하는 "헌법적 독재자"로서 부여되었다.[28]
2. 1. 카우디요의 등장 배경
19세기 초 스페인 아메리카 독립 이후, 이 지역은 많은 수의 ''카우디요''(caudillos)와 그들의 통치 기간으로 유명했다.[15] 19세기 초는 때때로 "카우디요 시대"라고 불린다.[5]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아르헨티나의 독재자,[16] 그리고 멕시코의 동시대 인물인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17] 국가 정치를 지배했다.
히스패닉 아메리카에서 혼란기에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그들의 등장은 일반적으로 독립 전쟁 이후 스페인 식민 국가 구조의 파괴와, 국민 국가가 형성되는 독립 이후 시대에 정부를 제공하는 데 있어 독립 투쟁 지도자들의 중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존 린치는 "1810년 이전에는 카우디요가 알려지지 않았다. … 카우디요는 더 큰 사건이 군사 지도자로 승격시킨 지역 영웅으로 역사에 등장했다."라고 말한다.[20] 국가 제도가 전혀 없는 농촌 지역에서 폭력과 무정부 상태가 만연한 환경에서 ''카우디요''는 종종 폭력을 사용하여 질서를 부과할 수 있었다. 강력한 지도자로서의 그의 지역 통제는 추종자들의 충성을 확보함으로써 유지되어야 했고, 따라서 그가 물질적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카우디요''는 또한 지역 엘리트의 이익을 보호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21] 지역 기반을 구축한 지역의 강자는 국가를 통제하면서 국가 ''카우디요''가 되기를 열망할 수 있었다.[22] 이러한 상황에서 ''카우디요''는 충성을 바치는 대규모 측근에게 후원을 베풀 수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스파노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 식민지 정부가 사라지자 각지에서 일종의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이 카우디요와 카우디요가 이끄는 가우초나 자네로 등이었으며, 그들은 토지에서 얻는 이익으로 사병을 이끌고, 권위적이고 독재적으로 폭력을 배경으로 한 정치를 했다.
2. 2. 카우디요의 통치 방식과 특징
카우디요는 종종 폭력을 사용하여 질서를 유지하고, 추종자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물질적 보상을 제공했다.[21] 이들은 지역 엘리트의 이익을 보호하는 동시에, 대중 계급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권력을 강화했다.[21] 일부 카우디요는 빈곤층과 소외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며 포퓰리즘적인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는데,[23] 이들은 유럽화된 엘리트와 대조되는 "민속 카우디요"로 불리기도 했다.[23]
국가 카우디요는 종종 "공화국 대통령"과 같은 권위의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헌법상의 제약을 무시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관행을 continuismoes라고 한다.[24]
이념적으로 카우디요는 자유주의자 또는 보수주의자일 수 있었다. 자유주의는 독립 이후 시대에 유리했는데, 해방자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서면 헌법을 통해 새로운 국민 국가의 제도적 틀을 만들었다. 경제 정책으로서의 자유 무역은 시장 지향적인 경제를 창출했다. 이러한 국민 국가가 종종 채택한 모델은 연방주의였지만, 구성 지역에 권력을 유지하는 연방주의는 원심력과 파편화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고, 중앙 정부가 취약한 특징을 보였다.[25] 1830년경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전통적인 가치를 지지하는 엘리트들의 지원을 받은 보수적인 카우디요가 등장하여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움직였다.[26]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스파노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 식민지 정부가 사라지자 각지에서 일종의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은 카우디요와 카우디요가 이끄는 가우초나 자네로 등이었으며, 그들은 토지에서 얻는 이익으로 사병을 이끌고, 권위적이고 독재적으로 폭력을 배경으로 한 정치를 했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로 대표되는 것처럼, 카우디요의 정치는 대부분 명분 없는 힘만이 법인 정치였다. 그러나 카우디요는 그렇기 때문에 민중의 문화를 체현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고, 민중을 만족시키는 카리스마와 용기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지지의 배경에는, 카우디요와 가우초가 당시 진행되고 강요되던 근대화・서구화의 흐름에 저항하며, 민족적인 문화를 지키려고 하는 존재였다는 면이 있었다.
특히 현재의 아르헨티나・우루과이에서는 토착주의의 대표와 같은 형태로 각 주의 권력 지배를 목표로 하고, 주로 연방 동맹에 관해 가우초를 이끌고, 영국과의 전쟁()과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 및 그 이후의 내전, 인디오 토벌(, ) 등에서 싸웠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 자세는 서구화, 특히 앵글로색슨화, 프랑스화를 목표로 하고, 스페인적인 것과 인디오와 같은 토착적인 것을 야만으로 잘라 버리는 와 를 비롯한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 특히 미움을 받았고, 국가 근대화를 목표로 하기 위해서는 지워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1862년 자유주의적인 아르헨티나 통일 이후에는 정부의 공세로 토착 세력이 패배했지만, 이러한 정부의 공세에 대해 잠시나마 카우디요가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 3. 이념적 성향: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카우디요는 이념적으로 자유주의자 또는 보수주의자일 수 있었다. 독립 초기에는 자유주의가 우세했는데, 이는 해방자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서면 헌법을 통해 새로운 국민 국가의 제도적 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경제 정책으로서 자유 무역은 시장 지향적인 경제를 창출했다. 이러한 국민 국가들이 종종 채택한 모델은 연방주의였지만, 이는 원심력과 파편화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고, 중앙 정부가 취약한 특징을 보였다.[25] 1830년경부터 보수적인 카우디요가 등장했다. 새로운 국민 국가들은 식민 시대의 제도를 거부해야 할 유산으로 여겼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전통적인 가치는 많은 지역에서 여전히 강력했으며, 새로운 질서에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았다. 교회와 엘리트의 지원을 받은 보수적인 카우디요는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움직였다.[26]
2. 4. 주요 카우디요
19세기 초, 스페인 아메리카 독립 이후 이 지역은 많은 수의 카우디요와 그들의 통치 기간으로 유명했다. 19세기 초는 때때로 "카우디요 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5]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등이 국가 정치를 지배했다.
역사가 존 린치는 "1810년 이전에는 카우디요가 알려지지 않았다. … 카우디요는 더 큰 사건이 군사 지도자로 승격시킨 지역 영웅으로 역사에 등장했다."라고 말한다.[20] 이들은 폭력과 무정부 상태가 만연한 환경에서 종종 폭력을 사용하여 질서를 부과할 수 있었다.
국가 카우디요는 종종 "공화국 대통령"과 같은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헌법이 대통령 권력과 임기에 공식적인 제한을 두는 경우, 카우디요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규칙을 구부리거나 깨뜨릴 수 있었는데, 이러한 관행을 continuismo|콘티누이스모es라고 칭했다.[24]
이념적으로 카우디요는 자유주의자 또는 보수주의자일 수 있었다. 독립 이후 시대에 자유주의는 해방자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서면 헌법을 통해 새로운 국민 국가의 제도적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연방주의는 파편화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고, 중앙 정부가 취약한 특징을 보였다.[25] 보수적인 카우디요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엘리트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움직였다.[26]
스페인 아메리카 독립 지도자들은 지역의 정치적 윤곽이 과거의 부왕령을 재구성하여 지역 자치를 유지하길 희망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기관으로서 여전히 강력했고 군대는 왕당파에 승리를 거두었다. 대부분 지역에서 국가는 기관으로서 약했다. 새로운 정부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이 만연했고, 독립 전쟁 참전 용사들은 스스로가 그들이 탄생시킨 국민 국가의 지도자라고 생각했다.[27]
독립 후 수십 년 동안 군대에 뿌리를 둔 강자들이 부상했다. 스페인 아메리카는 군주제 외에는 다른 형태의 정권을 알지 못했고, 멕시코는 왕당파 출신 반란군 출신 장군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 아래 군주제를 수립했다. 독재 권력은 일부 카우디요에게 헌법상 대통령으로 명목상 통치하는 "헌법적 독재자"로서 부여되었다.[28]
일부 카우디요들은 민중적 지지를 받았다. 역사가 E. 브래드포드 번스는 그들을 "민속 카우디요"라고 불렀으며, 후안 파쿤도 키로가,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와 같은 아르헨티나 카우디요를 예로 들었다.[23]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카우디요주의는 지속되었다. 1929년 멕시코의 국민혁명당 결성은 사실상 카우디요주의를 종식시켰다. 카우디요로 묘사되는 인물들은 쿠바(헤라르도 마차도, 풀헨시오 바티스타, 피델 카스트로), 파나마(오마르 토리호스, 마누엘 노리에가), 도미니카 공화국(데시데리오 아리아스), 파라과이(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너), 아르헨티나(후안 페론 및 기타 군사 강경파), 칠레(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서 통치했다.[5]
2. 4. 1.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카리브해 지역
19세기 초 멕시코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와 과테말라의 라파엘 카레라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카우디요였다.[29] 멕시코는 1810년 스페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1821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독립 이후 멕시코의 정치적 분열은 약한 중앙 정부를 추구하며 자유주의와 관련된 연방주의자와, 강력한 중앙 국가와 전통적인 제도, 특히 멕시코 육군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호를 추구하는 중앙집권주의자로 나뉘었다. 많은 지역 강자들이 지역 통제를 지지하고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연방주의-자유주의 진영에 속했다. 수십 년 동안 전국적인 권력을 얻은 멕시코의 카우디요는 산타 안나였는데, 그는 원래 자유주의자였지만 보수주의자가 되어 중앙 정부 강화를 추구했다.[30]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 후안 알바레스와 산티아고 비다우리 같은 지역 카우디요들이 아유틀라 혁명에서 산타 안나를 몰아내고 자유주의자들을 권력에 복귀시켰다. 알바레스는 "민중 카우디요"의 전형을 따랐으며, 잠시 멕시코 대통령을 역임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자유주의자들이 라 레포르마 시대를 시작하도록 했다.[31]
멕시코 프랑스 개입 시대 동안, 마리아노 에스코베도, 라몬 코로나, 포르피리오 디아스 등 지역적인 개인적 추종자를 거느린 많은 장군들이 있었다. 1867년 프랑스의 패배 이후, 베니토 후아레스 정부와 그의 사망 이후 계승자인 세바스티안 레르도 데 테하타는 점점 더 중앙집권적인 행정에 반대하는 반대자들에 직면했다. 이 반대자들은 프랑스 개입의 군사적 영웅인 디아스를 지지하게 되었고, 그는 반란을 시도하여 후아레스와 레르도에게 도전했고, 두 번째 반란인 툭스테펙 계획은 1876년에 성공했다. 후아레스와 레르도는 일부 카우디요들을 해임했지만, 이는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32]
2. 4. 2. 볼리바르 공화국: 볼리비아,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는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을 대콜롬비아 국가에서 재건하려 했으나, 구심력에 의해 이 나라는 여러 개의 독립 국가로 분열되었다.[33] 볼리바르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종신 대통령과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828년 그의 지지자들은 그에게 독재 권력을 맡아 "공화국을 구원"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고, 볼리바르는 1830년에 스스로 물러나 망명길에 올랐으며 곧 사망했다. 그는 "스페인 아메리카 독립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로 존경받았으며, 노예제 반대와 미국에 대한 불신을 보인 좌파와 그의 권위주의를 존경하는 우파 모두에게 칭송받았다.[33]
독립 전쟁 참전 용사들은 새로운 헌법을 가진 새롭게 창설된 국가들을 이끌었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라는 헌법과 이념적 명칭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에는 개인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지도자들이 지배했다.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볼리바르 공화국의 정치적 혼란과 가난은 외국 투자자들이 그곳에 자본을 투자하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다.[34]
당시 진보적이었던 카우디요 중 한 명은 볼리비아의 마누엘 이시도로 벨주였으며, 1848년부터 1855년까지 14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전 대통령인 호세 미겔 데 벨라스코는 1848년 쿠데타를 일으켜 벨주에게 국방부 장관직을 약속했다. 벨주는 쿠데타가 완료되자 스스로 권력을 잡았고, 벨라스코의 반쿠데타를 진압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벨주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부의 보다 공정한 재분배를 위해 여러 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노고에 보상했다. 파라과이의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와 마찬가지로 벨주는 복지 프로그램을 시행했는데, 이는 사유 재산을 강조하는 다른 카우디요들과 달리 공동체주의가 토착민의 전통적 가치와 더 잘 부합했기 때문이다. 벨주는 또한 국가의 수익성 있는 광산업을 국유화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볼리비아 자원을 볼리비아에서 사용하기 위해 보호주의 정책을 시행하여 영국, 페루, 칠레의 해운 및 광산 이익을 자극했다. 벨주의 많은 정책은 오랫동안 고통받던 볼리비아 원주민들에게 호감을 샀지만, 부유한 크리올 볼리비아인과 볼리비아 광산 자원 사용을 원했던 영국과 같은 외국 국가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벨주는 자신의 리더십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으며, 한때 민주적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많은 분야에서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벨주는 강력한 적들이 많았고 40번의 암살 시도를 살아남았다. 그의 적들은 민족주의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동시에 빈곤층이 의존하는 공공 영역을 개선한 국영 프로젝트를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카우디요들 사이에서 만연한 전제주의는 벨주에게도 나타났다. 1850년대 초부터 1855년 권력을 포기할 때까지 그는 전제적으로 통치했으며, 그 과정에서 매우 부유해졌다고 한다. 벨주는 1861년에 다시 대통령직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려했지만,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을 때 그의 라이벌 중 한 명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는 유산을 남길 수 없었고, 그의 포퓰리즘 프로그램은 그와 함께 사라졌다. 볼리비아가 독립한 후, 볼리비아는 전쟁과 침략 위협 하에 체결된 협정을 통해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브라질을 포함한 인접 국가에 영토의 절반을 잃었다.[35]
2. 4. 3. 남미 남부: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스파노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 식민지 정부가 사라지자 각지에서 일종의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은 카우디요와 카우디요가 이끄는 가우초나 자네로 등이었으며, 그들은 토지에서 얻는 이익으로 사병을 이끌고, 권위적이고 독재적으로 폭력을 배경으로 한 정치를 했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로 대표되는 것처럼, 카우디요의 정치 대부분은 아무런 명분도 없는 힘만이 법인 정치였다. 그러나 카우디요는 그렇기 때문에 민중의 문화를 체현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고, 민중을 만족시키는 카리스마와 용기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지지의 배경에는, 카우디요와 가우초가 당시 진행되고 강요되던 근대화·서구화의 흐름에 저항하며, 민족적인 문화를 지키려고 하는 존재였다는 면이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특히 현재의 아르헨티나·우루과이에서는 토착주의의 대표와 같은 형태로 각 주의 권력 지배를 목표로 하고, 주로 연방 동맹에 관해 가우초를 이끌고, 영국과의 전쟁과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 및 그 이후의 내전, 인디오 토벌( 황야 정복 작전, 사막 정복 작전) 등에서 싸웠지만, 그 정치 자세는 서구화, 특히 앵글로색슨화, 프랑스화를 목표로 하고, 스페인적인 것과 인디오와 같은 토착적인 것을 야만으로 잘라 버리는 바르톨로메 미트레,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를 비롯한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 특히 미움을 받았고, 국가 근대화를 목표로 하기 위해서는 지워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1862년 자유주의적인 아르헨티나 통일 이후에는 정부의 공세로 토착 세력이 패배했지만, 이러한 정부의 공세에 대해 잠시나마 카우디요가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3. 19세기 말 ~ 20세기의 카우디요
19세기 이스파노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 식민 정부가 사라지면서 각지에서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이를 카우디요와 가우초 등이 메웠는데, 이들은 사병을 이끌고 폭력을 배경으로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정치를 했다. 아르헨티나의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카우디요는 민중 문화를 체현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으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카우디요와 가우초가 근대화와 서구화에 저항하며 민족 문화를 지키려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톨로메 미트레와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를 비롯한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카우디요를 국가 근대화를 위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1862년 자유주의적인 아르헨티나 통일 이후, 정부는 토착 세력을 공격했고, 카우디요는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저항했다.
3. 1. 멕시코
19세기 말 멕시코의 근대화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은 포르피리아토라고 불리는 시대를 통치한 포르피리오 디아스(1876–1911 재임)였다. 그의 슬로건은 "질서와 진보"였으며, 대통령이 통제하는 무장 세력인 ''Rurales''에 의해 강요되었다. 디아스는 투스테펙 계획에 따른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았으며 1876–1880년 멕시코 대통령이 되었고, 그의 군사적 및 정치적 동료 마누엘 곤잘레스(1880–1884)가 그 뒤를 이었고, 그는 1911년 멕시코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대통령직에 복귀했다.[42] 디아스는 스스로 장군이자 쿠데타 지도자였기 때문에, 군대의 정치 개입 가능성을 알고 멕시코 군대에 의존하는 것을 꺼렸다. 그는 자신의 정권에 대한 지역 반대를 포섭하거나 억압하여, 현대 멕시코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추진하는 정치 기구를 만들었다. 외국인 투자를 통한 경제 발전을 열망한 디아스는 미국에 대한 견제를 위해 유럽 강국(영국, 프랑스, 독일)으로부터 자본과 전문 지식을 구했다. 멕시코에서 정기적으로 선거가 치러졌지만, 본질적으로 민주적이지 않았다. 거대한 농촌 인구, 문맹자, 그리고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정권 지지의 원천이라기보다는 정부가 두려워해야 할 존재였다. 디아스가 자신의 후계자에 대한 정치적 해결책을 찾지 못하자, 1910년 멕시코 총선의 부정 선거 이후 멕시코 혁명이 발발했다.[42]
10년에 걸친 내전 동안, 여러 지역 카우디요들이 등장했다. 파스쿠알 오로스코는 혁명 초기에 디아스를 축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1911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프란시스코 I. 마데로를 반대했다. 판초 비야 또한 디아스를 축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마데로를 지지했으며, 1913년 그의 살해 이후, 민간인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지휘하는 헌법주의군의 장군이 되었다.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모렐로스주 출신의 농민 지도자로서, 디아스와 이후 모든 멕시코 정부에 반대하다가 1919년 카란사의 요원에게 살해되었다. 알바로 오브레곤은 북부 멕시코 출신의 또 다른 뛰어난 장군으로 부상하여, 비야가 카란사와 결별한 후 1915년 비야의 북부 사단을 격파했다. 오브레곤과 동료 소노라주 출신 장군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와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는 1920년 아구아 프리에타 계획에 따라 카란사를 전복시켰으며, 1920년대의 대통령직은 데 라 우에르타에서 오브레곤, 카예스, 다시 오브레곤으로 이어졌다. 카예스의 대통령 재임 기간(1924–1928) 동안, 그는 멕시코 1917년 헌법의 반성직주의 법을 엄격하게 시행하여, 크리스테로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산 루이스 포토시의 사투르니노 세디요를 포함한 일부 지역 카우디요들의 지도하에 일어난 실패한 주요 봉기였다. 오브레곤은 1928년에 다시 선출되었지만, 다시 대통령직을 맡기 전에 암살되었다. 1929년,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는 정당을 창당했고, 당시 파르티도 나시오날 레볼루시오나리오(PNR)로 알려졌으며, ''최고 지도자''라는 뜻의 jefe máximo|헤페 막시모es가 되었고, 막시마토(1928–1934)로 알려진 기간 동안 대통령 뒤에 숨은 권력이었다. PNR은 제도혁명당으로 재편되어 2000년까지 멕시코 정치를 지배했으며 멕시코의 지역 카우디요들의 개인주의적 권력에 제동을 걸었다.[5][43]
3. 2. 중앙 아메리카
과테말라에서는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가 자유주의적 독재자로 통치하며 커피 재배를 확대했다.[44]
3. 3. 20세기 주요 카우디요 (갤러리)
4. 스페인의 카우디요: 프란시스코 프랑코
스페인 내전에서 반란군을 지휘한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1936년 10월 1일, 반란군의 총수(Generalísimo, 헤네라리시모)이자 반란군 측 국가 원수(Jefe de Estado, 헤페 데 에스타도)에 취임했다.[52] 프랑코는 홍보 선전을 위해 국가 원수로서 특별한 호칭으로 '카우디요'를 채택하고, 자신을 "'''엘 카우디요 데 에스파냐'''" ('''El Caudillo de España''')로 칭했다. 이는 아돌프 히틀러의 "퓌러", 베니토 무솔리니의 "두체"에 상당하는 것으로, 다소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용어 사용으로 여겨진다.[52] 이 경우 프랑코가 칭한 "카우디요"는 일본에서 "총통"으로 번역된다. 이후 프랑코는 1939년 4월 1일 내전에서 승리하여 정식으로 스페인 국가 원수 지위에 올랐고, 1975년 11월 20일 사망할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며 총통(El Caudillo, 엘 카우디요)으로 불렸다.
5. 문학 속의 카우디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족장의 가을'[45]과 '미궁 속의 장군'[46],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의 소설 '엘 세뇨르 프레지덴테'[47], 아우구스토 로아 바스토스의 소설 '나는 최고다'[48] 등 많은 문학 작품에서 카우디요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18][19]
6. 결론
카우디요는 스페인 아메리카와 스페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독재자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시행했으며, 때로는 민족주의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카우디요의 등장은 해당 지역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이들의 통치는 해당 국가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52]
19세기 초 스페인 아메리카 독립 이후, 이 지역은 많은 수의 카우디요와 그들의 통치 기간으로 유명했다.[15] 19세기 초는 때때로 "카우디요 시대"라고 불리며,[5]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아르헨티나의 독재자),[16] 멕시코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17] 국가 정치를 지배했다. 스페인 아메리카의 취약한 국민 국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카우디요주의의 지속을 촉진했다. 1929년 멕시코의 국민혁명당 결성은 사실상 카우디요주의를 종식시켰다. 카우디요로 묘사되는 인물들은 쿠바(헤라르도 마차도, 풀헨시오 바티스타, 피델 카스트로), 파나마(오마르 토리호스, 마누엘 노리에가), 도미니카 공화국(데시데리오 아리아스, 시프리아노 벤코스메), 파라과이(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너), 아르헨티나(후안 페론 및 기타 군사 강경파), 칠레(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서 통치했다.[5]
히스패닉 아메리카에서 혼란기에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그들의 등장은 일반적으로 독립 전쟁 이후 스페인 식민 국가 구조의 파괴와, 국민 국가가 형성되는 독립 이후 시대에 정부를 제공하는 데 있어 독립 투쟁 지도자들의 중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존 린치는 "1810년 이전에는 카우디요가 알려지지 않았다. … 카우디요는 더 큰 사건이 군사 지도자로 승격시킨 지역 영웅으로 역사에 등장했다."라고 말한다.[20] 국가 제도가 전혀 없는 농촌 지역에서 폭력과 무정부 상태가 만연한 환경에서 카우디요는 종종 폭력을 사용하여 질서를 부과할 수 있었다.
가난한 배경에서 출발하여 토착 집단이나 기타 소외된 농촌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거나, 그러한 집단과 강하게 동일시되는 강력한 지도자들이 소수 있었다. 역사가 E. 브래드포드 번스는 그들을 "민속 카우디요"라고 불렀다. 그의 분석에서 그들은 낮은 계급을 경멸하는 유럽화된 엘리트와 대조되었다. 그는 후안 파쿤도 키로가, 마르틴 구에메스,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와 같은 아르헨티나 카우디요를 예시로 들었는데, 그들은 대중적이고 포퓰리스트 카우디요였다.[23]
국가 카우디요는 종종 "공화국 대통령"과 같은 권위의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헌법이 대통령 권력과 임기에 공식적인 제한을 두는 경우, 카우디요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규칙을 구부리거나 깨뜨릴 수 있었는데, 이러한 관행을 continuismo|콘티누이스모es라고 칭했다.[24]
이념적으로 카우디요는 자유주의자 또는 보수주의자일 수 있었다. 자유주의는 독립 이후 시대에 유리했는데, 해방자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서면 헌법을 통해 새로운 국민 국가의 제도적 틀을 만들었다. 경제 정책으로서의 자유 무역은 시장 지향적인 경제를 창출했다. 연방주의는 원심력과 파편화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었고, 중앙 정부가 취약한 특징을 보였다.[25] 보수적인 카우디요도 1830년경에 등장했다. 새로운 국민 국가들은 식민 시대의 제도를 거부해야 할 유산으로 간주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전통적인 가치는 많은 지역에서 여전히 강력했으며, 새로운 질서에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았다. 교회와 엘리트의 지원을 받은 보수적인 카우디요는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움직였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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