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 (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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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양은 진나라 말기 인물로, 하구 현령을 지내다 조나라 장이의 신하가 되었다. 기원전 207년 초나라에 항복했으며,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하남왕에 봉해져 낙양을 수도로 삼았다. 기원전 206년 한나라에 투항하여 하남은 한나라에 편입되었고, 이후 행적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사기》에는 한왕을 도와 초나라를 공격한 다섯 제후 중 하나로 신양이 언급된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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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양 (진나라) | |
---|---|
기본 정보 | |
시호 | 양군(陽君) |
성 | 희(姬) |
이름 | 양(陽) |
작위 | 군(君) |
봉국 | 하남국(河南國) |
봉지 | 하구(瑕丘) |
생몰 기간 | |
활동 시기 | 초한쟁패기(楚漢爭覇期) |
사망 장소 | 팽성 전투(彭城) |
사인 | 전사 |
가계 | |
선조 | 주나라(周) |
부친 | 미상 |
기타 | |
관련 인물 | 항우(項羽) |
2. 생애
신양은 진나라의 지방관으로 현령을 지내다가 조나라 상 장이의 신하가 되었다. 이세황제 3년 7월(기원전 207년) 하남으로 들어가 초나라에 항복했다.[1][2]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각지에 제후들을 책봉할 때 하남왕에 봉해져 서울을 낙양에 두었다.[1][2]
한왕 2년 9월(기원전 206년)에 한나라에 투항했으며, 한나라는 하남을 군으로 되돌려 한나라의 판도에 편입시켰다.[3][4] 이후 행적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사기》 항우본기에서 한왕이 다섯 제후의 병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초나라를 쳤다는 구절에 나오는 다섯 제후 중 하나가 신양이라는 설이 있다.
2. 1. 진나라 관리 시절
원래는 진나라의 지방관으로 하구(瑕丘)현령을 지냈으나, 조나라 상 장이의 신하가 되어 총애를 받았으며, 이세황제 3년 7월(기원전 207년) 먼저 하남으로 들어가서 초나라에 항복했다.[1][2]2. 2. 조나라 신하 시절
신양은 원래 진나라의 지방관으로 하구(瑕丘) 현령을 지내고 있었으나, 조나라 상 장이의 신하가 되어 총애를 받았다. 이세황제 3년 7월(기원전 207년) 먼저 하남으로 들어가서 초나라에 항복했다.[1][2]2. 3. 하남왕 시절
원래는 진나라의 지방관으로 하구(瑕丘) 현령을 지내고 있었으나, 조나라 상 장이의 신하가 되어 총애를 받았으며, 이세황제 3년 7월(기원전 207년) 먼저 하남으로 들어가서 초나라에 항복했다.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옛 진 제국령 각지에 제후들을 책봉할 때 하남왕에 봉해졌으며, 서울을 낙양에 두었다.[1][2]
2. 4. 한나라 투항
한왕 2년(기원전 206년) 9월, 신양은 한나라에 투항했다. 한나라는 하남군을 다시 설치하여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3][4]2. 5. 투항 이후
한왕 2년(기원전 206년) 9월에 한나라에 투항했으며, 한나라는 하남을 군으로 되돌려 한나라의 판도에 편입시켰다.[3][4]이후 사적은 기록에 남지 않았으며, 《사기》 항우본기에서 “한왕이 다섯 제후의 병사를 거느리니 56만이었고 동쪽으로 초나라를 쳤다.”에서 말하는 다섯 제후 중 하나가 신양이라는 설이 남아 있다.
참조
[1]
서적
사기 권7 항우본기제7
[2]
서적
사기 권16 진초지제월표
[3]
서적
사기 권8 고제본기
[4]
서적
한서 권13 이성제후왕표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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