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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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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복은 중국 진시황제의 명을 받아 불로불사의 영약을 찾아 동쪽으로 떠났다는 전설 속 인물이다. 《사기》 등 역사서에는 서복이 3천 명의 동남동녀와 함께 항해를 떠났으나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일본과 한반도로 전해지면서 다양한 전승이 생겨났다. 한국에서는 서귀포시 정방폭포의 '서복과차' 글씨, 제주도와 관련된 전설이 유명하며, 일본 각지에서도 서복과 관련된 지명, 유적, 전설이 전해진다. 학계에서는 서복 전설을 허구로 간주하며, 특히 일본에서 서복을 신격화하거나 일본 역사의 기원과 연결시키는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인다. 서복 전설은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상징으로 문화 콘텐츠, 관광 산업 등에서 활용되고 있다.

2. 역사적 기록과 전승

서복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사기》의 「진시황본기」와 「회남형산열전」에 등장한다.

불로장생의 약을 찾아 떠나는 원정


기원전 219년에서 기원전 210년 사이, 서복은 진 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찾기 위해 두 번에 걸쳐 항해를 시작했다. 그의 행적은 진황도를 출발하여 지금의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60척의 배와 5,000명의 일행, 3,000명의 동남동녀,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동반했다고 한다. 기원전 210년, 진황도를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기》 「회남형산열전」에 따르면, 서복은 진 시황제에게 "동방의 삼신산에 불로불사의 영약이 있다"고 말하며, 3,000명의 동남동녀와 기술자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떠났으나 삼신산에 도착하지 못하고 "평원광택(넓은 평야와 습지)"을 얻어 왕이 되었다고 한다.

동방의 삼신산은 발해 앞바다에 있는 신선이 사는 섬으로, 봉래산, 방장산, 영주를 말하며, 봉호, 방호, 영호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삼호"라고도 불리며,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져 『고사기』에도 "동쪽 바다에 봉래산이라는 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20]

《사기》 권6 「진시황본기」에는 서복이 불사의 약을 핑계로 황제에게서 금품을 갈취한 사기꾼으로 묘사되어 있다.[21] 기원전 210년, 진 시황에게 거대한 바다 괴물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고 거짓 보고를 하고, 괴물을 처치할 궁수를 요청하여, 진시황의 지원을 받아 다시 항해를 떠났으나,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역사 기록에는 서복의 최종 목적지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삼국지》, 《후한서》, 《괄지지》에는 그가 "단주"(亶州)에 상륙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후주 시대의 승려 의초는 서복이 일본에 상륙하여 후지산을 봉래산이라 불렀다고 기록했다.

서복 전설은 중국에서 일본한반도로 전해졌으며, 내용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모두 "회남형산열전"의 기록에 기반한다.[22] 옛 중국인들은 서복이 어디로 갔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일본으로 갔다는 추측을 기록했고, 이는 일본에서 여러 전승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서복의 일본 도래가 허구이며, 실제로는 일본에 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승은 중국과 일본에서 서복이 천황의 선조라거나 야마토 정권을 건설했다는 등의 허구적인 이야기로 이어졌다.[23][24]

2. 1. 중국 기록

기원전 255년 제나라에서 태어난 서복은,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에 천하를 통일한 후 불로장생을 위해 영약을 찾도록 명령받은 인물이다. 기원전 219년(진시황 28년), 서복은 황제에게 바다 건너 삼신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에 신선이 살고 있으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상소를 올렸다.[21]

사기》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은 서복의 요청을 허락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내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게 하였다.[21] 그러나 서복은 돌아와 바다의 신을 만났는데, 진왕의 예가 부족하여 영약을 얻지 못하고 봉래산으로 인도되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는 영지초로 된 궁궐과 구릿빛 용 형상의 사자를 보았으며, 해신에게 예물을 바치면 영약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시황에게 보고했다. 진시황은 크게 기뻐하며 동남동녀 3천 명과 오곡 종자, 여러 장인이 만든 것을 주어 서복을 다시 보냈다. 하지만 서복은 평원광택(넓은 평야와 습지)을 얻어 왕이 되고 돌아오지 않았다.[21]

기원전 210년, 서복은 진황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행적은 지금의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이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서복이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주(夷洲)를 지금의 타이완으로, 단주(亶洲)를 일본으로 보기도 한다.

북송구양수는 『일본도가』(日本刀歌)에서 서복이 진나라 백성을 속여 동남동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했으며, 그 후손들이 정교한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1982년 중국의 지명사전 편찬 과정에서 장쑤성 롄윈강시 간위현 금산진(金山鎮)의 서부(徐阜)라는 마을이 청나라 건륭제 이전에는 '서복촌'(徐福村)으로 불렸고, 서복 관련 전승과 유적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 현지 주민들은 명나라 때 이주했다는 전승을 가지고 있어, 서복의 실존 여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2. 2. 한국 전승

서복이 지나갔다고 전하는 서귀포의 정방폭포. 이곳에 '서복과차'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한국에서는 특히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와 관련된 서복 전설이 유명하다. 정방폭포에는 '서복과차(徐福過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고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는 의미에서 서귀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37]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 및 조선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는 삼신산이 각각 한국의 금강산, 한라산, 지리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36]

제주시 용담동 산지항에서는 전한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 등이 발굴되어, 서복 일행의 제주도 방문 가능성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서복 전설을 한중 교류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서복 관련 유적을 보존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3. 일본 전승

일본 각지에는 서복과 관련된 다양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특히 규슈, 와카야마현, 미에현 등지에 서복 관련 유적과 전승이 많이 남아있다.

사가현 사가시에는 서복이 아리아케 해에 도착하여 잔을 띄워 상륙지를 정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가 상륙한 곳은 "부바이"(뜬 잔)라는 지명으로 불린다.[6] 와카야마현 신구시에는 조후쿠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공원 내에는 서복의 묘로 추정되는 곳도 있다.[5] 미에현 구마노시 하다스초는 서복이 상륙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하다스역 근처에는 서복노궁이라는 신사가 있는데, 서복이 가져왔다는 절구를 신체(神體)로 모시고 있다.

일본의 일부 전승에서는 서복이 일본에 농업, 의술, 비단 기술 등을 전파한 "문화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후지요시다시의 미야시타가 고문서(《후지문헌》)에는 서복이 이 문서를 편찬했다는 전승이 있으나,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일부 극우 인사들은 서복을 일본 최초의 천황인 진무 천황과 동일시하거나,[3] 야요이 시대의 시작을 서복의 도래와 연결시키기도 하지만,[4] 이는 역사적 근거가 부족한 주장이다.

3. 출항지와 목적지 논쟁

기원전 255년 제나라에서 태어난 서복은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위해 영약을 구하려 할 때, 바다 건너 삼신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에 신선이 산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진시황은 서복에게 동남동녀 수천 명을 주어 신선을 찾아오게 하였다.[20]

사기》 회남형산열전에는 서복이 진시황에게 바다의 신에게 바칠 예물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동남동녀 3천 명과 오곡 종자, 기술자들을 받아 평원에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0]

기원전 219년에서 210년 사이에 서복은 두 번에 걸쳐 항해를 떠났는데, 60척의 배와 5,000명의 일행, 3,000명의 동남동녀,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동반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복은 두 번째 항해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사기》에는 서복이 "평원광택"(넓은 평야와 습지)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어, 그 정확한 목적지는 알 수 없다.

3. 1. 출항지

기원전 219년의 첫 번째 출항은 허베이성친황다오시가, 기원전 210년의 두 번째 출항은 저장성 닝보시츠시시가 유력하다고 여겨진다.[33] 그러나 이는 모두 회남형산열전을 근거로 한 추측이다. 회남형산열전은 진나라의 진시황을 속인 사기꾼 이야기로 옛 중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전설이었다. 옛 중국인들은 서복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타이완이나 일본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서복이 일본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창작되기 시작했다.

1982년 중국의 『중화인민공화국 지명사전』 편찬을 위한 조사 중, 장쑤성 롄윈강시 간위현 금산진(金山鎮)에 있던 서부(徐阜)라는 마을이 청나라 건륭제 시대 이전에는 「서복촌」(徐福村)이라 불렸고, 서복과 관련된 전승과 유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21] 다만 1980년대까지 현지 옛 집에는 「우리 선조는 명나라 때 이 땅에 이주하였다」는 전승이 있었고, 서복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의문이 제기되면서, 이는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조성한 마을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실제로 서부촌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데, 명물 「서복차(徐福茶)」도 호평을 받고 있다.

2000년 3월 30일 츠시 시에 서복기념관(徐福記念館)이 개관하면서 일본의 서복 연구자와 중국 현지인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이듬해 2001년 가을에는 같은 시 삼북진(三北鎮) 문완남로(文宛南路)에 「서복소학교(徐福小学校)」가 개교했는데, 학교의 휘호는 일본 서복회 명예회장을 지낸 하타 쓰토무가 썼다.[34][35]

3. 2. 목적지

사기》에는 서복이 도착한 곳이 "평원광택"(넓은 평야와 습지)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그 정확한 목적지는 알 수 없다.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는 각국의 전승을 바탕으로 자국이 서복의 목적지였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삼국지》와 《후한서》 기록에는 서복이 중국을 떠나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하였다고 나온다. 중국에서는 이주(夷洲)는 지금의 타이완을, 단주(亶洲)는 일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북송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구양수가 지은 『일본도가』(日本刀歌)에는 "그 조상은 서복이 진의 백성을 꾀어서는/약을 캐러 간다고 동남동녀를 그곳에서 늙게 했지"라는 구절이 있어, 일본을 목적지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0]

조선 왕조의 신숙주가 지은 《해동제국기》에는 서복이 고령천황 시대에 불로불사의 약을 구하러 일본기슈에 왔으며, 숭신천황 시대에 죽어 신이 되어 사람들에게 제사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서복의 목적지가 특정 장소가 아니라, 불로불사의 영약을 찾아 떠난 상징적인 여정이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4. 서복 전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서복 전설은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여, 학계에서는 대체로 후대에 창작된 허구로 간주한다. 《사기》의 기록[22] 외에 서복의 행적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거의 없으며, 일본에서 서복을 신격화하거나 일본 역사의 기원과 연결시키는 주장은 역사 왜곡의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예를 들어, 일본의 역사가 이노 오키후는 진무 천황을 서복과 동일인물로 여기기도 하며[3], 야요이 시대가 서복의 도착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4] 그러나 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현대 일본인은 토착 조몬인동북아시아(아마도 한반도)에서 이주해온[10][11] 야요이인의 유전적 혼합으로 나타난다.[9] 야요이 시대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300년경부터 서기 300년경까지로 받아들여지지만,[12][13][14][15][16] 논란이 많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증거는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800년 사이로 최대 500년 더 앞선 시기를 나타낼 수도 있다.[17][18][19] 즉, 서복의 일본 도래 시기와 야요이 시대의 시작 시점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서복의 일본 정착 전설을 역사적 가능성으로 보기도 하지만,[8] 다른 학자들은 이 이야기에 수많은 모순과 설득력 있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8] 결론적으로, 서복 전설은 흥미로운 이야기이지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일본에서 서복 전설을 자국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5. 현대적 의의와 활용

서복 전설은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상징적인 이야기로, 문화 콘텐츠, 관광 산업 등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국가지역 및 내용
한국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복전시관(서복공원)과 정방폭포, 남해 이동면 양아리 금산 금석문. 2013년 6월 6일, 제10차 한중 여성지도자 포럼에 참가했던 중국 대표단이 서귀포시의 서복전시관을 방문해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황칠나무 두 그루를 기념 식수했다.[37]
중국장쑤성 롄윈강시 간위현 금산진(金山鎮) : 청나라 건륭제 시대 이전에 "서복촌"으로 불렸던 서부(徐阜) 마을에 서복 관련 전승과 유적이 존재한다.[33], 저장성 츠시시 : 2000년 3월 30일에 서복기념관(徐福記念館)이 개관, 2001년 가을에는 삼북진(三北鎮)의 문완남로(文宛南路)에 서복소학교(徐福小学校)가 개교하였다.
일본와카야마현 신구시 : 조후쿠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5], 사가현 사가시 : 2008년 10월, 사가 서복 국제 심포지엄이 개최되어 요시노가리 유적과의 관련성에 대한 강연도 있었다.



쉬저우에는 쉬저우 사범대학 부설 서복연구소가 있다.[2]

6. 관련 작품


  • 박인로의 가사 '선상탄'에서 서복 전설이 언급된다.[20]
  • 심청가의 일부 내용에서 서복 이야기가 나온다.
  • 일본의 여러 소설, 만화, 게임 등에서 서복 전설을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 사토 하루오가 작사한 신구시가 (1951년 제정) 1절에 "서복도 이곳에 왔다고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 곤노 빈의 소설 『봉래』는 서복 전설을 다룬다.
  • 마루야마 텐쥬의 소설 『랑야의 귀신』, 『랑야의 호랑이』, 『함양의 어둠』은 서복의 제자들이 고대 중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미스터리 시리즈이다.
  • 마쓰나미 타로의 소설 『서기 2011년』 (『LIFE』수록)은 구마노 지방의 서복 전설과 중국의 서복촌을 다룬다.
  •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 『도불의 연회』는 일본에서의 서복의 전승을 다룬다.
  •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단편 코믹스 『서복 전설』에서는 서복이 데리고 온 동자는 3000명이 아니라 남자 23명, 여자 23명, 총 46명으로 묘사하고 있다. 문고 『암흑 신화』에도 수록되어 있다.
  • 모토미야 히로시의 만화 『고운류수〈서복〉』는 불로불사가 된 서복이 그 후의 역사를 지켜본다.
  • 스와 미도리의 만화 『비취의 나라 - 서복과 시황제 기전-』은 시황제와 서복을 소재로 한 역사 만화이다.
  • 원작 오오마 쿠로, 만화 와타나베 타카시의 만화 『맛있는 밥 엘프와 유목 생활』에서는 서복과 동자들이 도착한 이세계에서 만든 나라와 아직 불로불사를 추구하는 후예들의 집단인 별 보기 무리가 등장한다.
  • 『이상한 던전 풍래의 시렌3: 장치 저택의 잠자는 공주』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나가 실제로 영약을 찾아 불로불사가 되었다고 여겨지는 서복이 이야기의 핵심 인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참조

[1] 문서 Note: Not to be confused with the character Wiktionary:市
[2] 서적 Japan--between Myth and Reality: Between Myth and Reality World Scientific publishing
[3] 서적 The Chinese Overseas: Routledge Library of Modern China Taylor & Francis
[4] 서적 Japan--between Myth and Reality: Between Myth and Reality World Scientific publishing
[5] 웹사이트 Jofuku Park | Wakayama Attractions | Travel Japan | JNTO https://www.jnto.go.[...]
[6] 웹사이트 Legend of Xu Fu https://www.saga-tri[...] 2020-10-03
[7] 웹사이트 徐福国際シンポジウム http://inoues.net/st[...] 2020-10-03
[8] 논문 Christy G. TurnerII, "Dental Evidence on the Origins of the Ainu and Japanese." Science193 (3 091976):911–913. - Marvin J. Allison, "Paleopathology in Peru". Natural History88.2 (02, 1978):74–82. 1978
[9] 논문 A partial nuclear genome of the Jomons who lived 3000 years ago in Fukushima, Japan 2017-02
[10] 서적 Ruins of Identity Ethnogenesis in the Japanese Islands University Hawai'i Press
[11] 논문 Japanese Roots http://discovermagaz[...] 1998-06-01
[12] 웹사이트 Yayoi people, life, and culture (400 B.C.-A.D. 300) https://factsanddeta[...]
[13] 웹사이트 Yayoi Period (300 BCE – 250 CE) https://www.japanpit[...] Pitt
[14] 웹사이트 Timelines: Japan http://afe.easia.col[...] Columbia University
[15] 웹사이트 Bronze mirror http://web.prm.ox.ac[...] Oxford
[16] 웹사이트 Yayoi Culture http://www.t-net.ne.[...] Charles T. Keally 2006-06-03
[17] 논문 A Comment on the Yayoi Period Dating Controversy http://www.seaa-web.[...]
[18] 논문 Radiocarbon and Archaeology in Japan and Korea: What has Changed Because of the Yayoi Dating Controversy? Cambridge University Press (CUP)
[19] 논문 Physical Anthropology and the Reconstruction of Japanese Identity in Postcolonial Japan http://ssjj.oxfordjo[...]
[20] 서적 海からの世界史 角川学芸出版
[21] 서적 トンデモ日本史の真相 と学会的偽史学講義 文芸社
[22] 서적 消された古代東ヤマト 蓬莱の国東三河と徐福 彩流社
[23] 웹사이트 https://www.toutiao.[...]
[24] 웹사이트 https://www.163.com/[...]
[25] 서적 同文通考 勉誠社
[26] 서적 南留別志
[27] 뉴스 たき火の煙で「徐福」弔う 八女で「童男山ふすべ」 児童が紙芝居 https://www.nishinip[...] 2021-01-22
[28] 서적 丹後王国ものがたり 丹後は日本のふるさと 丹後建国1300年記念事業実行委員会
[29] 서적 北佐久口碑伝説集佐久編限定復刻版 長野県佐久市教育委員会 1978-11-15
[30] 논문 医のことば:その百二十四:徐福 http://med2.astellas[...] 山之内製薬
[31] 서적 日本に生きる徐福の伝承 謙光社
[32] 서적 徐福渡来伝説考, 日本に生きる徐福の伝承 謙光社
[33] 서적 異色中国短篇傑作大全 講談社
[34] 뉴스 日前首相羽田愛穿中山装 http://news.cri.cn/g[...] 中国国際放送 2007-11-20
[35] 서적 徐福さん 伝承地に見る徐福像と徐福伝説 ネスト企画
[36] 뉴스 서불과 동남동녀는 어디로 갔을까?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3-10-14
[37] 저널 서복이 한반도에 남긴 유적과 문명의 성과 200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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