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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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예는 진나라 말기에 봉기하여 형산왕과 장사왕을 역임한 인물이다. 장강과 포양호 일대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번군'으로 불렸으며, 진승·오광의 난 이후 영포를 사위로 삼아 진나라에 대항했다. 항우에게 형산왕으로 봉해졌으나, 이후 장사왕으로 봉해졌지만 실질적인 통치력은 미미했다. 오예는 백월족 출신으로, 유방을 도와 진나라와 항우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으며, 사후 문왕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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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02년 사망 - 항우
항우는 초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진나라에 대항하여 봉기하여 서초 패왕이 되었으나, 유방과의 초한전쟁에서 패배하여 자결한 인물이다. - 기원전 202년 사망 - 장이
장이(張耳)는 진나라 말기 초한쟁패기에 활약한 위나라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헌하여 조왕에 봉해졌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 십팔제후왕 - 전한 고제
진나라 말기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워 초한쟁패에서 승리하고 한나라를 건국한 전한 고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서 민생 안정에 힘썼다. - 십팔제후왕 - 전광
전광은 기원전 205년 제나라 왕으로 옹립되었으나 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배신과 연합을 반복하다가 한신에게 패하여 살해당했다. - 초한전쟁 관련자 - 장량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초한쟁패기를 거쳐 전한 초기에 활약한 한나라 귀족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유후에 봉해진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사이다. - 초한전쟁 관련자 - 소하
소하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군수 보급, 내정 담당, 한신 천거, 승상으로서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한 인물이다.
오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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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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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어 병음 | Wú Ruì |
웨이드-자일스 | Wu Jui |
생몰년 | 기원전 202년 |
다른 이름 | 번군 |
인물 정보 | |
왕조 | 전한 |
칭호/직책 | 장사왕 |
사망지 | 미상 |
시호 | 장사문왕 (没後) |
관직 | 번양현령 (秦) → (지방 군벌) |
주군 | 항우 → 유방 |
자 | 미상 |
가족 관계 | |
자녀 | 아들: 오신, 오천, 손자: 오회 |
의붓자녀 | 영포 (사위) |
후손 | 오강 |
2. 생애
오예는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고제는 오예의 공적을 인정하여 장사군, 예장군·상군·계림군·남해군을 주고 장사왕에 봉했다. 그러나 당시 상군, 계림군, 남해군에는 남월왕 조타가 있었기 때문에, 이는 명목상의 봉지에 불과했다.[6] 장사국의 서울은 임상(지금의 창사 시)에 두었다.
고제는 오예를 장사왕에 봉하면서 올린 표문과 조서에서, 오예가 항우에게 봉국을 빼앗기고 번군으로 낮춰졌다고 언급하며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4][7]
오예는 장사왕에 봉해진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 오신이 왕위를 계승했다.[7]
2. 1. 초기 생애와 반진 봉기
진나라 파양현의 현령으로, 장강과 포양호 사이 지역의 민심을 얻어 '번군'이라고 불렸다.[4]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을 기점으로 진나라에 대항하는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영포가 오예에게 귀의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고, 오예는 월인들을 지휘하며 거병해 진나라에 대항해 일어선 제후들과 함께했다.[4] 오예의 장수 매현(梅鋗)은 남양군을 공격하던 초의 패공 유방과 합류해 함께 남양의 두 속현인 석현과 역현을 항복시켰다.[4]
기원전 206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각지에 제후들을 새로 봉건하면서, 오예는 백월을 거느리고 진나라와 맞서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형산왕에 봉해졌다.[4] 서울은 형산군의 치소인 주(邾, 지금의 황강 시)에 그대로 두었다.[4] 오예는 항우의 명령을 받아 임강왕 공오, 구강왕 영포와 함께 초 의제를 공격해 침현에서 죽였다.[5]
이후 유방이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한왕 5년(기원전 202년) 오예는 다른 제후왕(초왕 한신, 한왕 신, 회남왕 영포, 조왕 장오, 연왕 장도)과 함께 유방을 황제로 추대했다.[6]
2. 2. 형산왕 시대
진나라 파양현의 현령으로, 장강과 포양호 사이 지역의 민심을 얻어 파군(番君)이라고 불렸다.[4]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을 기점으로 진나라에 대항하는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영포의 귀의를 받아 사위로 삼고, 월인들을 지휘하며 거병해 진나라에 대항해 일어선 제후들과 함께했다. 또 자신의 장수 매현(梅鋗)은 남양군을 공격하던 초의 패공 유방과 합류해 함께 남양의 두 속현 석현과 역현을 항복시켰다.[1]
기원전 206년, 항우가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각지에 제후들을 새로 봉건하면서 백월을 거느리고 진나라와 맞서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형산왕에 봉해졌다. 서울은 형산군의 치소인 주(邾, 지금의 황강 시)에 그대로 두었다.[4] 그리고 항우의 명령을 받아 임강왕 공오, 구강왕 영포와 함께 초 의제를 공격해 침현에서 죽였다.[5]
이후 전한 고제가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항우에게 봉국을 침탈당하고 파군으로 낮춰졌다고 한다.[4]
2. 3. 장사왕 시대와 최후
진나라 파양현의 현령으로, 장강과 포양호 사이 지역의 민심을 얻어 파군(番君)이라고 불렸다.[4]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을 기점으로 진나라에 대항하는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영포가 오예에게 귀의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고, 오예는 월인들을 지휘하며 거병해 진나라에 대항해 일어선 제후들과 함께했다.[4] 기원전 206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각지에 제후들을 새로 봉건하면서, 백월을 거느리고 진나라와 맞서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오예를 형산왕에 봉했다.[4] 그리고 항우의 명령을 받아 임강왕 공오, 구강왕 영포와 함께 초 의제를 침현에서 죽였다.[5]
전한 고제가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한왕 5년(기원전 202년) 다른 제후왕(초왕 한신, 한왕 신, 회남왕 영포, 조왕 장오, 연왕 장도)과 함께 고제를 황제로 추대했고, 고제는 오예가 진나라를 멸할 때 공이 있다고 인정해 장사왕에 봉했다.[6] 장사국의 서울은 임상(지금의 창사 시)에 두었다. 이때 올린 표문과 내린 조서에 따르면, 항우가 망했을 무렵 이미 왕국을 잃어 '''옛 형산왕'''(故衡山王)이라 불렸다. 조서에서는 항우에게 봉국을 침탈당하고 파군으로 낮춰졌다고 지적했다.[4][7]
1년 만에 오예가 죽고, 아들 오신이 뒤를 이었다.[7]
3. 가계
오예의 가계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죽음과 계승: 오예는 장사 근처에 묻혔으며, 사후 아들 오신(吳臣)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후손들은 그에게 '문왕'(文王)이라는 시호를 추존했다.[1] 오예의 가문은 유방 통치 하에서도 살아남은 유일한 비(非) 유씨 왕족이었다.
- 묘 훼손 사건: 삼국 시대 초기, 손견을 위한 사찰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얻기 위해 오예의 묘가 훼손되었다. 묘 안의 시신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했으며, 당시 '남만 교위'였던 오예의 후손 오강(吳綱)은 조상과 매우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2]
- 진나라 시기: 오예는 진나라 번양현령으로 재직하며 장강과 파양호 일대에서 '번군'으로 칭송받았다. 진승·오광의 난 당시 영포가 오예를 따랐고, 오예는 딸을 영포에게 시집보내고 월나라 사람들을 이끌며 반란에 가담했다. 패공 유방이 남양을 공격할 때 오예의 장수 매견과 협력하여 함락시켰다.
- 항우와의 관계: 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관중 함락 후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가 의제를 받들어 왕들을 세울 때, 오예는 형산왕에 봉해졌고 매견은 10만 호 제후가 되었다. 이후 항우의 명으로 영포와 함께 의제를 살해했다(《사기》항우본기).
- 유방과의 관계: 오예는 항우에게서 형산왕 지위를 박탈당하고 번군으로 강등된 후 유방에게 투항했다. 영포와의 관계는 불분명하나, 유방은 오예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고조 5년(기원전 202년), 유방이 항우를 멸망시킨 후 여러 왕들과 함께 유방에게 황제 칭호를 바쳤다. 같은 해 오예는 장사왕(이성 칠왕 중 하나)에 봉해졌으나 곧 사망했고, '문왕'으로 시호되었다. 유방은 오예의 충성을 칭찬하며 율령에 기록하게 했다.
- 장사국 계승: 장사왕은 아들 성왕 오신이 계승했다. 오신은 영포를 죽였으며, 장사국은 유방의 '비 유씨 왕 불가' 맹약에도 불구하고 애왕 오회, 공왕 오우, 정왕 오저로 이어졌다. 장사국은 문제 7년 (기원전 157년) 오저가 후사 없이 사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4. 평가 및 유산
오예는 진나라 말기부터 한나라 초기까지 활약한 인물로, 사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남겼다.
오예는 문왕(文王, "문명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1], 그의 가문은 유방의 통치를 넘어 살아남은 유씨가 아닌 유일한 왕족이었다.
삼국 시대 초기에 오예의 묘는 손견을 위한 새로운 사찰 건립을 위해 훼손되기도 했다. 이때 오예의 시신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오예의 후손인 오강(吳綱)이 조상과 매우 닮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
4. 1. 긍정적 평가
진나라 번양현령으로, 장강과 파양호 일대의 사람들에게 칭송받아 "번군"이라고 불렸다. 진승·오광의 난으로 시작된 진말의 난 때, 영포는 오예를 따랐고, 오예는 자신의 딸을 영포의 아내로 삼았으며, 월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진나라에 대한 반란에 가담했다. 패공 유방이 남양을 공격했을 때, 유방은 오예의 장수 매견과 조우하여 함께 남양의 현을 함락시켰다.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관중이 유방과 항우에 의해 함락되어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가 의제를 받들어 각지에 왕을 세우자, 월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공을 세운 오예는 형산왕에 봉해졌고, 매견은 10만 호의 제후에 봉해졌다. 그 후, 항우는 구강왕 영포와 형산왕 오예에게 명하여 의제를 살해하게 했다(《사기》항우본기).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오예는 항우에 의해 형산왕에서 박탈되어 번군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이반하여 유방에게 투항했다. 영포와 같은 시기인지, 아니면 오예가 영포를 꾀어 유방 진영에 붙게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유방은 오예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고조 5년(기원전 202년), 한왕 유방이 항우를 멸망시키자, 초왕 한신, 한왕 한왕 신, 회남왕 영포, 양왕 팽월, 조왕 장이, 연왕 장도와 함께 유방에게 "황제"의 존호를 바쳤다. 같은 해, 오예는 유방에 의해 '''장사왕'''("이성 칠왕" 중 한 명)에 봉해졌고, 그 해에 사망했다. '''문왕'''으로 시호되었다. 고조 유방은 후에 오예의 충성을 칭찬하며 율령에 기록하게 했다.
장사왕은 아들 성왕 오신이 계승했다. 오신은 재위 중,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여 도망쳐 온 영포를 죽였다. 그 후에도 장사국은 유방이 "유씨가 아니면 왕으로 삼지 않는다"는 맹약을 맺은 것의 예외가 되어, 애왕 오회, 공왕 오우, 정왕 오저로 계승되었고, 장사국은 문제 이후 7년 (기원전 157년)에 오저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4. 2. 유산
오예의 무덤은 장사 근처에 묻혔다. 오예가 죽은 후 왕국은 그의 아들 오신에게 넘어갔다. 오예의 후손들은 중국 조상 숭배에 따라 그를 문왕(文王, "문명왕")이라는 시호로 기렸다.[1] 오예의 가문은 유방의 통치를 넘어 살아남은 유씨가 아닌 유일한 왕족이었다.삼국 시대 초기에 오예의 묘는 손견을 위한 새로운 사찰의 목재를 공급하기 위해 훼손되었다. 시신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참여자 중 한 명이 오예의 살아있는 후손이자 당시 "남만 교위"(南蠻校尉)였던 오강(吳綱)에게 그가 그의 조상과 특히 닮았다고 언급할 정도였다.[2]
장사왕은 아들 오신이 계승했다. 오신은 재위 중,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여 도망쳐 온 영포를 죽였다. 그 후에도 장사국은 유방이 "유씨가 아니면 왕으로 삼지 않는다"는 맹약을 맺은 것의 예외가 되어, 애왕 오회, 공왕 오우, 정왕 오저로 계승되었다. 장사국은 문제 이후 7년 (기원전 157년)에 오저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참조
[1]
서적
Book of Han
[2]
서적
Commentary on the Water Classic
[3]
서적
魏書
[4]
서적
한서
[5]
서적
사기
[6]
서적
한서
[7]
서적
한서
[8]
문서
옛 위나라 땅 일부 포함
[9]
문서
여나라가 도중에 제천나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유명 (제천왕)|유명]]이 봉해진 [[진류군|제천나라]]와는 연관이 없다.
[10]
문서
작위만 추증된 것으로, 봉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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