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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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축민란은 19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가혹한 세금 징수와 천주교 세력의 횡포에 반발한 민중들이 일으킨 무력 봉기이다. 이재수가 주도하여 제주성 점령을 시도했으나, 프랑스 군함과 조선 조정군의 진압으로 실패했다. 이재수 등 주동자들은 처형되었고, 천주교 측에 배상금이 지급되었다. 이 사건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민중 항쟁 또는 교난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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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민란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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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 1901년 |
발생 장소 | 제주도 |
원인 | 과도한 세금 징수 천주교 신자들의 횡포 |
주요 인물 |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
배경 | |
시대적 상황 |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대 |
사회적 불만 | 탐관오리의 부정부패 가렴주구 (苛斂誅求) |
종교 갈등 | 천주교와 유교 간의 갈등 동학 세력의 영향 |
전개 과정 | |
봉기 시작 | 이재수를 중심으로 민중 봉기 시작 |
세력 확장 | 제주도 전역으로 확산 |
일본군 개입 | 일본군의 진압 작전 개시 |
진압 | 일본군에 의해 진압됨 |
결과 및 영향 | |
관련 인물 처벌 | 이재수 사형 관련자 다수 처벌 |
사회적 영향 | 제주도민들의 반일 감정 고조 갑오개혁 이후 사회 혼란 심화 |
역사적 의의 | 민중 봉기의 한 형태 사회 모순 표출 |
관련 사건 | |
관련 사건 | 이재수의 난 (영화) |
2. 호칭
이 사건은 다양한 관점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이재수의 난, 제주도 신축교난(濟州島辛丑敎難), 신축민란(辛丑民亂), 신축년 난리, 신축성교난(辛丑聖敎亂), 제주민란(濟州民亂), 제주교란(濟州敎亂), 신축교안(辛丑敎案) 등으로 불린다.[3] 민족사학과 민중사학에서는 반봉건주의, 반제국주의 '민중 항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며,[3] 천주교 측에서는 천주교도 희생에 주목하여 교난으로 보기도 한다.[3]
3. 배경
3. 1. 간접적 원인: 가혹한 세금 징수
1900년(광무 4년) 한성에서 파견된 봉세관 강봉헌은 각종 명목으로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여 제주도민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이미 폐지된 민포(民布)를 다시 징수하고, 가옥, 수목, 가축, 어장, 어망, 염분, 노위, 심지어 잡초에까지 세금을 매기는 등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다.
3. 2. 직접적 원인: 천주교의 횡포
프랑스 신부들과 천주교인들은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이용하여 각종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4] 이들은 대한제국 고종이 지급한 "여아대(如我對, 짐을 대하듯이 하라)"라는 패를 이용하여 제주 목사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4]
천주교도들은 염전에 나가 주인 허락 없이 소금을 가져가고, 성당에 형틀을 갖춰 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사형(私刑)을 가했다.[4] 심지어 살인, 부녀자 강간 및 강탈, 도둑질 등의 범죄를 저질러도 관가에서 체포하지 못했다.[6] 이들은 땅을 빼앗거나 이미 팔았던 땅을 강제로 되돌려받는 등 재산 강탈을 일삼았다.[6]
천주교도들은 "천주교를 모독했다"며 사람들을 성당에 끌고 가 매질하거나 가두었고, 관에서 체포한 사람을 천주교도라고 하여 빼돌리거나 강제로 풀어주기도 했다.[6] 또한, 제주도의 오래된 신당을 파괴하여 토속 신앙을 유린했다.[6]
이러한 천주교도들의 불법 행위는 프랑스 신부의 방관 또는 비호 아래 이루어졌으며, 한국의 주권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6] 제주도는 천주교인들에 의해 무법천지로 전락했고, 일반 도민들은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6] 당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김윤식의 《속음청사》에도 천주교 신도들의 행패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다.[5]
4. 전개
4. 1. 상무사 조직과 천주교와의 갈등
제주 대정군(大靜郡) 내 유지들은 오리(汚吏)와 불량한 교도들의 불법 행위에 대항하기 위해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하였다. 상무사의 대표는 당시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이 맡았고, 이성교, 송희수, 오대현, 강우백, 강백, 강철호 등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대정군내 향색 선비와 백성이 상무사에 대거 참여하면서, 봉세관의 토색과 남징(濫徵) 행위를 폭로하고 규탄했으며, 교인들의 비행과 폭력에 대해서도 완력으로 맞섰다. 이는 양측의 잦은 마찰과 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7]1901년(광무 5년), 대정군에서 천주교도들이 훈장 현유순의 집을 습격하여 현유순과 그 아버지, 동료를 잡아다 교당에 가두고 고문하였고, 이 과정에서 동료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천주교인들은 그가 목매달아 죽었다고 했고, 사망자의 두 아들은 천주교도들에게 매 맞아 죽었다고 하여 증언이 엇갈렸는데, 대정군수가 검시관을 데리고 시신을 검시하였으며 범인을 잡고자 하였으나 교당에 은신하여 잡을 수 없었다.[8]
이후 대정군 신평리의 상무사 위원 송희수의 집이 천주교도 수십 명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천주교도들은 송희수를 대정 읍내로 끌고 가려고까지 했으나, 신평리 동민들의 항의로 저지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상무사 위원 등이 대정의 천주교당을 습격, 교당을 부수고 교인 몇 명을 폭행했다. 이 사건은 뮈텔(한국명 민덕효) 주교를 통해 한성 주재 프랑스 공사에 보고되었고, 신축민란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9]
4. 2. 민중대회와 충돌
5월 6일, 오대현과 강우백이 주도하여 상무사원들은 천주교도에 대한 성토민중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천주교도의 횡포와 봉세관과의 결탁을 폭로하고, 주성으로 가서 목사에게 호소하자고 제창하여 군중의 지지를 얻었다. 오대현은 장두로 추대되었고, 이는 무력 봉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10] 한편, 강봉헌은 제주에 정박한 화륜선을 타고 한성으로 도주했다. 천주교도들은 상무사의 민중대회에 맞서 산방산 뒤에 모여 대정성으로 들어와 민중과 충돌,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오대현은 평화적 호소를 원했기 때문이다.이틀 뒤, 천주교도인 대정군 관아의 부이방 김옥돌이 향장 오대현의 기첩과 간음한 죄로 태형을 받고 갇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천주교인 김진사 등 50여 명이 군수 채구석에게 항의하며 김옥돌을 풀어주고 상무사 회민을 잡아갔다. 이에 상무사 회민들도 무리를 이끌고 잡혀가던 상회민을 구출하고 김옥돌과 김진사를 구타했다.[11]
오대현을 장두로 한 수천 명의 진정단이 주성으로 향하자, 제주 천주교회는 이를 난으로 판단, 마르셀 라크루와 무세 신부가 화기로 무장한 교도 3백 명을 이끌고 명월진에서 진정단과 충돌했다. 라크루 신부의 위협 사격으로 진정단이 잠시 해산한 사이, 천주교도들은 오대현 등 다섯 명을 납치해 주목으로 넘겼다. 이후 천주교도들은 대정군으로 몰려와 무기고를 탈취하고 주민들을 위협했으며, 이 과정에서 신도리 주민 김봉년이 천주교도들의 총격에 즉사했다.
4. 3. 이재수의 난: 무력 봉기의 시작
관노 출신 이재수는 천주교도들의 만행에 분노하여 무력 봉기를 결심하고 장두(지도자)가 되었다.[12] 그는 각 리에 격문을 보내 장정을 모으고 동지를 소집하여, 이틀 만에 수천 명의 민군을 조직하였다. 각 리에서도 40여 명의 포수가 총포를 들고 참가하였다.[12]1901년 5월 15일,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은 총, 검, 봉, 죽창 등으로 무장하고 식량을 넣은 전대를 차고 척사기(斥邪旗)를 앞세워 제주성으로 향했다. 이들은 프랑스 신부와 교도들을 타도하고 악질 봉세관이 다시는 발호하지 못하도록 모든 민원 대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민군은 동, 서 두 개의 진으로 나뉘어 동진은 강우백이, 서진은 이재수가 맡아 제주섬을 동서로 돌아 제주성으로 향했다. 민군은 진군 도중 천주교도들의 은거처를 찾아 소탕하며 진격했는데, 이때 천주교도들의 횡포와 세금 남징에 분노한 고을 주민들이 가는 곳마다 민군에 가담, 성원하였다.[13]
5월 16일, 이재수가 이끄는 서진 민군은 제주성 가까이 도달, 황사평에 진을 쳤다. 동진의 강우백도 정의현(旌義縣)을 거쳐 제주성에 도달해 동서 양진이 제주성을 포위하고 양곡 반입은 물론 교통과 육지로 오가는 모든 길을 봉쇄했다. 제주성 안의 천주교인들도 군기고와 탄약고에서 무기와 탄약 등을 탈취해 제주성의 3대 성문을 모두 닫은 채 성벽 위에 각종 포를 가설하고 민군에 맞섰다. 민군에서 동원된 포수들이 성 안의 화기 공격에 응사해 나날이 사격전이 이어졌다.
5월 23일 제주군수 김창수가 민군과 교도 사이의 중재를 시도하였다. 그는 구마슬 신부와 교섭해 감금되었던 오대현을 풀어주어 민군을 무마하려 했지만,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은 군수의 정전 제의를 거부하고, 오히려 풀려나온 오대현과 강우백이 각각 동, 서진의 대장이 되면서 전력을 강화시켰다.[14]
4. 4. 제주성 포위와 함락
주성 안 주민들은 식량과 땔감 공급이 끊기고, 총탄이 민가에 날아드는 상황에 공포에 떨었다. 황사평과 오라리에 집결한 민군은 제주성 3대문 바깥 1리 거리에서 성을 칠 듯한 기세를 보이며 성을 향해 통문을 보내거나 궐기를 호소했다.[15] 이에 제주성 안의 민심은 크게 동요하였다.5월 25일, 김남혁의 주도로 관덕정(觀德亭) 광장에 모인 제주 주민들(대부분 부녀자)은 즉시 성문을 열어 민군을 들일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 신부 마르셀 라크루는 사흘만 말미를 주면 성문을 열겠다고 약속하며 민중을 해산시켰는데, 이는 프랑스 함대의 지원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라크루 신부는 장윤성을 몰래 목포(木浦)로 보내 프랑스 공사관에 연락, 인천 주둔 본국 군함 파견을 요청했으나, 약속한 사흘째, 프랑스 군함은 오지 않았다(프랑스 군함은 5월 30일에야 제주에 도착).[16]
제주 주민들은 다시 몰려와 성문 개방을 요구했다. 흰 수건을 머리에 쓴 돼지 장수 부녀자 1천 명이 몽둥이를 들고 성으로 올라가, 성을 지키던 교인들을 묶고 총포를 모두 내던진 뒤, 3대 성문을 열어 민군을 주성으로 들였다. 마르셀 라크루 등 프랑스 신부들은 정의군수 김희주의 도움으로 동헌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16]
4. 5. 진압과 결과
5월 31일, 프랑스 군함 두 척이 제주 앞바다에 정박하여 제주성으로 들어왔다.[17] 이때 프랑스 군함을 타고 신임 제주목사 이재호와 진압군인 강화진위대 100명, 궁내부 고문관 미국인 샌드(W.Sand, 조선명 산도) 등이 함께 왔다.[17] 프랑스 해군은 천주교도를 학살한 민군에 대한 복수로 천주교도를 제외한 제주 도민을 모두 죽이겠다고 했지만, 신임 제주목사 이재호가 말려 중지되었다.[17]프랑스 군함이 왔다는 소식에 이재수는 다시 궐기할 것을 호소, 민군 1만 명이 다시 모였다.[17] 프랑스 해군과 조선 조정군과의 담판으로 프랑스 군함은 자국 신부와 교도 40명을 데리고 돌아갔지만, 강화진위대 중대장 홍순명은 민란이 아직 진압된 것이 아니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17]
조선 조정은 안핵사 박용원을 해임하고,[18] 황기연을 제주찰리사로, 제주군수로 홍희를 임명하고 강화진위대와 수원진위대를 제주로 보냈다.[19] 6월 10일, 제주에 도착한 황기연은 교폐와 세폐 시정을 명한 황제의 고유가 담긴 방문을 붙여 민심을 달랬다.[20] 이재수는 스스로 민군을 해산시키고 자수하였고, 강우백과 오대현도 자수하였다.[20] 제주 유배객 중 천주교도로 지목된 이들과 전임 봉세관 강봉헌도 구속되었다.[20] 제주 백성들은 다시 모여 장두를 풀어달라고 요청했지만, 황기연과 윤철규는 약속과 달리 세 장두를 서울로 압송하였다.[20]
5. 이후
6월 13일 수원 진위대 2백 명이 제주에 도착했다. 프랑스 군함과 궁내부 고문관 샌드, 참리관 고의경도 한성으로 귀환했으며, 7월 10일 김윤식 등 제주에 있던 유배인들에 대한 한국 법부의 타지역으로의 이배 조치가 처해졌다.[21]
7월 18일 이재수 등 세 장두는 경성부로 압송되어 평리원에서 열린 재판에 회부되었고, 재판 끝에 사형이 언도되어 10월 9일 한성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가담자로써 김남혁, 조사성, 고영수, 이원방 등 11인은 외역형에 처해졌고, 대정군수 채구석은 처음에는 사형이 구형되었다가 사면되었다. 강봉헌은 한성 압송 뒤 석방되어 고향 평북으로 낙향해 있었는데, 무죄 방면은 부당하다는 목소리에 따라 다시 체포해 의법처리하고자 하였으나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21]
한편 프랑스 정부는 한국 정부에 천주교도 피해에 대한 배상금 5,160원을 요구하였고 이 배상금은 3년 뒤인 광무 8년(1904년) 6월, 제주 삼읍에서 6,315원(이자 포함)을 거두어 모두 갚을 수 있었다.[22]
6. 관련 자료
6. 1. 사서
김윤식의 일기인 《속음청사》는 김윤식이 1897년 12월 21일부터 1901년 7월 16일까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의 기록으로, 권8, 권9, 권10의 상 부분에 난 당시 제주도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 주재 프랑스 신부 라크루(구마슬)가 작성한 《신축교안 보고》는 신축민란에 대한 교안(敎案)이다. 이재호는 1901년 4월 제주 목사 이상규(李庠珪)의 후임으로 부임(~1906.6)했고 5월 27일 프랑스 해군 270명과 프랑스 군함 두 척과 제주에 들어왔으며, 《이재호 제주목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봉기 당시 장두 세 명 중 한 명이었던 오대현의 최후 진술 기록은 《평리원 판결문》에 기록되어 있다. 재한일본공사관 보고서인 《제주도민봉기의 건》, 《삼군교폐사실성책》,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 등도 사서로 참고할 수 있다.6. 2. 논픽션
《이재수실기》(李在守實記)는 장두 이재수의 여동생 이순옥(順玉)이 오빠의 거사를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한 결과, 1932년 일본 오사카에서 조무빈(趙武彬)이 출판한 국한문 서적이다. 이 책에는 기자의 증언과 이재수의 출생, 이재수의 기세, 구한말의 정치와 천주교도의 횡포, 이재수의 의거와 천주교회의 섬멸, 영주십경(瀛洲十景), 프랑스 함대의 내침과 관군의 진압, 이재수를 위시한 의사(義士) 3인의 상경담판사실(上京談判事實), 이순옥의 탄원서·경력 등이 실려 있다.6. 3. 소설
6. 4. 영화
박광수 감독, 현기영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99년 영화로 이재수의 난이 있다.참조
[1]
뉴스
오마이뉴스-1910년 이재수의 난 당시 사망자 명단 확인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
서적
제주도지
제주특별자치도
2006
[3]
서적
제주도지
제주특별자치도
2006
[4]
서적
대하실록 제주30년사
태광출판사
1984
[5]
간행물
속음청사
1905-03-18
[6]
뉴스
황성신문
1901-06-21
[7]
서적
제주도지
2006
[8]
뉴스
황성신문
1901-02-30
[9]
서적
제주도지
2006
[10]
서적
제주도지
2006
[11]
서적
속음청사
1905-05-08
[12]
서적
제주도지
2006
[13]
서적
제주도지
2006
[14]
서적
제주도지
2006
[15]
서적
제주도지
2006
[16]
서적
제주도지
2006
[17]
서적
제주도지
2006
[18]
서적
제주도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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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제주도지
2006
[20]
서적
제주도지
2006
[21]
서적
제주도지
2006
[22]
서적
제주도지
2006
[23]
서적
필수역사용어해설사전
도서출판 타오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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