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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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중사학은 연구의 신뢰성보다 대중의 믿음을 중시하며, 억압받는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역사관이다. 1980년대 초 한국에서 '민중적 민족주의사학'으로 시작되어, 노동운동과 주민운동의 활성화와 함께 민중의 역할과 가치를 강조했다.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등이 민중사학을 연구하고 보급했으며, 주요 연구 분야는 민중의 삶과 사회 운동 등이다. 서양에서는 '역사는 아래로부터'라는 구절로 대표되며,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계급투쟁 사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민중사학은 '민중'에 대한 이상화된 개념에 의존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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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사학 | |
---|---|
개요 | |
유형 | 역사 서술 |
특징 | |
관점 | 일반 대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 |
초점 | 사회의 소외된 집단, 즉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 문화, 사회 운동 등에 초점을 맞춤 |
방법론 | 구전 역사, 개인적인 기록, 대중 문화 등의 자료를 활용하여 역사를 재구성 |
목표 | 기존의 엘리트 중심 역사관에 도전하고 대안적인 역사 해석을 제시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장려 |
배경 | |
발전 배경 | 20세기 후반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와 관련 신좌파 운동과 시민권 운동의 영향 |
영향 | 역사 연구의 민주화에 기여 |
관련 개념 | |
관련 개념 | 사회사 문화사 구술사 |
비판 | |
비판 | 자료의 부족 주관적인 해석의 가능성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논쟁 |
2. 특성
민중사학의 역사 서술 방법은 대중의 숫자만큼 다양하며, 이를 창시하거나 선전하는 주체가 반드시 민중 출신인 것은 아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민중사학은 이론과 실증 양면에서 아직 하나의 정립된 학문 체계라고 보기 어렵다고 하며, 학술적인 가치는 보통 높지 않다.[16] 고대에도 민중사학적 믿음이 있어서 유자여를 사칭한 무증이나 왕랑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귀족들이 중국의 성씨를 따랐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신라와 제주 같은 진짜 귀족 가문들은 자신들을 신이나 부처로 칭할 정도로 신분적 자부심이 있어서 굳이 중국의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에서도 왕랑의 사례처럼 이런 믿음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믿지 않았으며, 인도처럼 귀족 세력이 강한 지역들에선 이러한 성씨 날조나 사칭이 힘들었다.
많은 국가들에서 민중적 정체성을 지니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불쾌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민중사학을 탄압하기도 했으나, 민중의 힘이 강해진 근현대에는 민중사학이 승리하거나 전성기를 얻은 국가들도 있다. 주로 귀족이나 젠트리들을 격멸했거나 원래 없었던 중국, 러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이런 국가들이 분포한다. 따라서 다른 국가들에선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같은 역사관이 민중들에게서만 발견되기도 하며, 심지어 정규 학술 포털에서 학술지를 검색해도 전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민중사학은 대중 운동과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로, 과거의 다른 역사 저술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개인들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는 선거권이 박탈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비순응주의자, 서발턴, 그리고 잊혀진 사람들이 포함된다. 또한, 이 이론은 압도적인 소규모 사건의 물결이 특정 발전을 일으키는 시점, 즉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은 영웅사관과는 정반대이다. 민중사학은 역사의 추진력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그들의 사회적 지위 및 직업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위대한 인물이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사건을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여론을 "밀고 당기며" 추세를 발전시키는 요인이다.
조르주 르페브르는 1932년 알베르 마티에즈가 histoire des masses et non de vedettes프랑스어 (스타가 아닌 대중의 역사)를 말하려고 한 것을 칭찬하면서 histoire vue d'en bas et non d'en haut프랑스어 (위에서가 아닌 아래에서 본 역사)라는 문구를 처음 사용했다.[3] 이는 A. L. 모턴의 1938년 저서 《영국 인민사》의 제목으로도 사용되었다.[4] E. P. 톰슨은 《The Times Literary Supplement》 (1966)에 '역사는 아래로부터'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썼는데,[5][6][7] 이는 익명의 편집자가 붙인 제목이었다.[8] 하워드 진의 1980년 저서 《미국 인민사》는 역사학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민중사학을 대중화시켰다.[9]
하워드 진은 그의 저서 ''미국 민중사''에서 "어떤 국가의 역사가 한 가족의 역사로 제시될 때, 정복자와 피정복자, 주인과 노예, 자본가와 노동자, 인종과 성별에서의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격렬한 이해관계의 갈등(때로는 폭발하고, 대부분 억압됨)을 숨긴다. 그리고 희생자와 사형 집행자의 세상에서, 알베르 카뮈가 시사했듯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임무는 사형 집행자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10]
2. 1. 비판
민중사학은 연구의 신뢰성보다 대중을 중시하며, 증거의 논리성이나 연관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그 근거가 단순히 대중의 믿음인 경우도 흔하게 발견된다. 역사 검증 방법은 다수가 쓰이지 않으며,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학적 근거나 연구 요소는 일반적으로 없다. 환단고기 추종자들처럼 물리적 공간이나 시간 관계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사상이나 개념의 존재 여부나 정확성도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시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 근현대와 전근대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특징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민중의 성격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적 성격이 있으며, 민중의 역할을 중시하고, 편견과 달리 그들 역시 ‘실천적·과학적 역사학’의 수립을 표방하거나 조직적인 학술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역사학자 가이 베이너는 "하향식 역사의 신(新) 마르크스주의 기수들은 때때로 '민중'에 대한 이상화되고 충분히 정교하지 못한 개념에 의존하여, 그들에게 내재적인 진보적 가치를 부당하게 부여해 왔다. 실제로 민주적 역사는 결코 평등주의적이지 않다"라고 썼다.[11]
3. 한국의 민중사학
한국에서 근현대적 민중사학은 1980년대 초 '민중적 민족주의사학'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7][18] 이는 1970년대 제3공화국(유신정권)의 한계로 노동운동과 주민운동 등이 활성화되면서 대중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확산된 결과였다.[19]
역사문제연구소, 망원한국사연구실(1984년), 한국근대사연구회(1987년), 한국역사연구회(1988년),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 등 여러 단체가 민중사학 연구와 보급에 참여했다. 그러나 일부 단체는 민중사학과 거리를 두기도 했다.
민중사학은 대중 운동과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선거권을 박탈당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등 기존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개인들을 조명한다. 영웅사관과 달리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사회적 지위, 직업이 역사의 추진력이라고 본다.
한국민중사연구회의 『한국민중사』, 한국역사연구회의 『한국사강의』·『한국역사』, 구로역사연구소의 『바로보는 우리역사』 등이 민중사학적 자료로 꼽히지만, 몇몇 한계도 지적된다. 전성기에는 대학에서도 민중 출신을 중심으로 민중사학을 따르는 이들이 많았으며,[20] 민중은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 귀족과 양반은 이기적이고 미개한 존재로 묘사되기도 했다.[21][22]
3. 1. 전개 과정
1980년대 초반, 대한민국에서는 '민중적 민족주의사학'이 등장하면서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7][18] 1970년대 유신정권의 한계로 인해 노동운동과 주민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민중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는 민중사학이 힘을 얻는 배경이 되었다. 1984년에는 역사문제연구소와 망원한국사연구실이, 1987년에는 한국근대사연구회가, 1988년에는 한국역사연구회와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가 설립되어 민중사학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일부 단체는 민중사학과 거리를 두기도 했다.민중사학적 자료로는 한국민중사연구회의 『한국민중사』Ⅰ·Ⅱ, 한국역사연구회의 『한국사강의』·『한국역사』, 구로역사연구소의 『바로보는 우리역사』Ⅰ·Ⅱ 등이 있지만, 몇몇 한계가 지적되기도 했다.
전성기에는 대학에서도 민중 출신을 중심으로 민중사학을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20] 민중사학에서는 민중을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로, 귀족과 양반을 이기적이고 미개한 존재로 묘사했지만, 고위층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21][22]
전후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역사학에서 계급투쟁 사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근대주의와 시민주의 입장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정치사상사, 오츠카 히사오의 서구 경제사, 이시모다 쇼의 일본 고대·중세사가 나타났다. 고도 경제 성장과 안보 투쟁의 고조, 관 주도의 '메이지 100년' 축제에 대한 반감으로 계급 투쟁의 '변혁 주체'로서 민중에 주목하면서 민중사가 성립되었다.
근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에도 시대의 봉기에서 메이지 유신의 자유민권운동, 다이쇼 시대의 민중운동까지가 연구 대상이었다. 하야시 하지메, 호리에 에이이치, 쇼지 키치노스케, 츠다 히데오, 야마다 타다오 등에 의해 백성 봉기 연구가 이루어져 계급 투쟁사가 성립되었다. 호리에 에이이치는 근세의 봉기를 대표 월소형 봉기·총백성 봉기·세상 바로잡기 봉기라는 세 단계로 발전했다는 도식을 제시했다. 이후 아오키 미치오, 이누마루 요시카즈 등은 이를 계급 간 대립의 계급 투쟁사에서 국가 대 민중의 인민 투쟁사로 발전시켰다. 사사키 준노스케는 농민층 분해의 결과로 생긴 호농과 '반 프로'(빈농)의 계급 투쟁을 논하며, 세상 바로잡기 소동이나 마을 소동이 발생하는 마을의 상태를 '세상 바로잡기 상황'이라고 불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후카야 카츠미는 인민 투쟁사를 근세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했고, 사토 세이로는 메이지 시대까지 확장했다. 이후 백성 봉기 연구는 후카야, 나카지마 아키라, 요코야마 토시오, 야부타 칸, 마스다 히로미, 카와나베 사다오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민중 사상사에서는 이로카와 다이키치가 '정점 사상가' 외에 '지하 수맥'으로서 민중의 사상이 존재한다고 보고 기타무라 토코쿠 등을 다룬 『메이지 정신사』를 저술했으며, 치바 타쿠사부로에 의해 기안된 '이츠카이치 헌법 초안'을 발견했다. 카노 마사나오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여성, 오키나와의 사상을 연구했다. 히로타 마사키는 후쿠자와 유키치 연구에서 출발하여 피차별 민 연구로 향했다. 야스마루 요시오는 일본이 근대화하는 가운데 곤궁한 민중이 '통속 도덕'을 구축하고, 그것이 심학이나 교파 신도 등의 민중 사상으로 성립하여, '세상 바로잡기 염원'이 되었다고 하는 『일본의 근대화와 민중 사상』을 저술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쇠퇴와 함께, 아미노 요시히코나 서양사 연구자들은 사회사의 방향성을 개척해 갔고, 민중사는 한때의 기세를 잃었다.
3. 2. 주요 연구 분야
민중사학은 연구의 신뢰성보다는 대중을 중시하며, 증거의 논리성이나 연관성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그 근거가 단순히 대중의 믿음인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역사 검증 방법은 잘 쓰이지 않으며,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학적 근거나 연구 요소도 특별히 없다. 환단고기 추종자들처럼 물리적 공간이나 시간 관계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사상이나 개념의 존재 여부나 정확성도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시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 근현대와 전근대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특징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민중의 성격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적 성격이 있으며, 민중의 역할을 중시한다. 민중사학 연구자들은 편견과 달리 '실천적·과학적 역사학' 수립을 표방하거나 조직적인 학술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민중의 사학적 관점은 항상 존재해 왔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근현대적 민중사학은 1980년대 초반에 등장한 ‘민중적 민족주의사학’에서 본격적으로 출발했다.[17][18] 대한민국의 민중사학도 민중사학의 보편적인 성질에 따라 좌파나 민중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19] 1970년대 제3공화국(유신정권)의 한계로 노동운동·주민운동 등이 활성화되면서 대중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여 민중적 입장이 힘을 얻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역사문제연구소(1984년), 망원한국사연구실(1984년), 한국근대사연구회(1987년), 한국역사연구회(1988년), 구로역사연구소(1988년. 현 역사학연구소) 등이 민중사학을 연구하고 보급했다. 그러나 민중사학과 거리를 두는 단체들도 있다고 한다. 민중사학적 자료로는 한국민중사연구회의 『한국민중사』Ⅰ·Ⅱ, 한국역사연구회의 『한국사강의』·『한국역사』, 구로역사연구소의 『바로보는 우리역사』Ⅰ·Ⅱ가 있으며, 몇몇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전성기에는 대학에서 민중 출신들이 민중사학을 주로 추종할 정도로 양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20] 민중사학의 역사관에서는 민중은 위대하거나 고귀한 존재로, 귀족과 양반들은 이기적이고 미개한 존재로 묘사되었으나, 고위층은 당연히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21][22]
민중사학은 대중 운동과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이다. 선거권이 박탈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비순응주의자, 서발턴 등 과거의 다른 역사 저술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개인들이 민중사학의 주요 대상이 된다. 또한, 이 이론은 압도적인 소규모 사건의 물결이 특정 발전을 일으키는 시점, 즉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영웅사관과는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민중사학은 역사의 추진력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그들의 사회적 지위 및 직업이라고 주장한다. 즉, 위대한 인물이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사건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을 "밀고 당기며" 추세를 발전시키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하워드 진은 그의 저서 ''미국 민중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국가의 역사가 한 가족의 역사로 제시될 때, 정복자와 피정복자, 주인과 노예, 자본가와 노동자, 인종과 성별에서의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격렬한 이해관계의 갈등(때로는 폭발하고, 대부분 억압됨)을 숨긴다. 그리고 희생자와 사형 집행자의 세상에서, 알베르 카뮈가 시사했듯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임무는 사형 집행자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10]
전후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융성에 따라 역사학에서 계급투쟁 사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근대주의·시민주의 입장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정치사상사, 오츠카 히사오의 서구 경제사, 이시모다 쇼의 일본 고대·중세사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 고도 경제 성장에 따른 사회 변화와 안보 투쟁의 고조, 관 주도의 '메이지 100년' 축제에 대한 반감을 받아 계급 투쟁의 '변혁 주체'로서 민중에게 주목이 쏠리면서 민중사가 성립되었다.
근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에도 시대의 봉기에서 메이지 유신의 자유민권운동, 다이쇼 시대의 민중운동까지가 대상이 되었다. 하야시 하지메, 호리에 에이이치, 쇼지 키치노스케, 츠다 히데오, 야마다 타다오 등에 의해 백성 봉기 연구가 이루어져 계급 투쟁사가 성립되었다. 호리에 에이이치는 근세의 봉기를 대표 월소형 봉기·총백성 봉기·세상 바로잡기 봉기라는 세 단계로 발전했다는 호리에 도식을 제기했다. 이후 아오키 미치오, 이누마루 요시카즈 등은 이를 계급 간 대립의 계급 투쟁사에서 국가 대 민중의 인민 투쟁사로 발전시켰다. 사사키 준노스케는 농민층 분해의 결과로 생긴 호농과 '반 프로'(빈농)의 계급 투쟁을 논하며, 세상 바로잡기 소동이나 마을 소동이 발생하는 마을의 상태를 통칭하여 '세상 바로잡기 상황'이라고 불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후카야 카츠미는 인민 투쟁사를 근세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했고, 사토 세이로는 메이지 시대까지 확장했다. 이후 백성 봉기 연구는 후카야, 나카지마 아키라, 요코야마 토시오, 야부타 칸, 마스다 히로미, 카와나베 사다오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민중 사상사에서는 이로카와 다이키치가 '정점 사상가' 외에 '지하 수맥'으로서 민중의 사상이 존재한다고 보고 기타무라 토코쿠 등을 다룬 『메이지 정신사』를 저술했으며, 또한 치바 타쿠사부로에 의해 기안된 '이츠카이치 헌법 초안'을 발견했다. 카노 마사나오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여성, 오키나와의 사상을 연구했다. 히로타 마사키는 후쿠자와 유키치 연구에서 출발하여 피차별 민 연구로 향했다. 야스마루 요시오는 일본이 근대화하는 가운데 곤궁한 민중이 '통속 도덕'을 구축하고, 그것이 심학이나 교파 신도 등의 민중 사상으로 성립하여, '세상 바로잡기 염원'이 되었다고 하는 『일본의 근대화와 민중 사상』을 저술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쇠퇴와 함께, 아미노 요시히코나 서양사 연구자들은 사회사의 방향성을 개척해 갔고, 민중사는 한때의 기세를 잃었다.
3. 3. 주요 쟁점
민중사학은 연구의 신뢰성보다는 대중을 중시하며, 증거의 논리성이나 연관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 근거가 단순히 대중의 믿음인 경우도 흔하다. 일반적인 역사 검증 방법은 잘 쓰이지 않으며,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학적 근거나 연구 요소는 보통 없다. 환단고기 추종자들처럼 물리적 공간이나 시간 관계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사상이나 개념의 존재 여부나 정확성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시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 근현대와 전근대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특징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민중의 성격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적 성격이 있으며, 민중의 역할이 중요시된다. 이들 역시 '실천적·과학적 역사학' 수립을 표방하거나 조직적인 학술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17][18]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근현대적 민중사학은 1980년대 초반에 등장한 ‘민중적 민족주의사학’에서 본격적으로 출발했다.[19] 대한민국의 민중사학도 좌파나 민중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 1970년대 제3공화국(유신정권)의 한계로 노동운동·주민운동 등이 활성화되면서 대중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여 민중적 입장이 힘을 얻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역사문제연구소(1984년)·망원한국사연구실(1984년)·한국근대사연구회(1987년)·한국역사연구회(1988년)·구로역사연구소(1988년. 현 역사학연구소) 등이 민중사학을 연구하고 보급했다. 그러나 민중사학과 거리를 두는 단체들도 있다고 한다. 민중사학적 자료로는 한국민중사연구회의 『한국민중사』Ⅰ·Ⅱ, 한국역사연구회가 출간한 『한국사강의』·『한국역사』, 구로역사연구소의 『바로보는 우리역사』Ⅰ·Ⅱ가 있으며, 몇몇 한계가 지적되기도 했다.
전성기에는 대학에서 민중 출신들이 주로 민중사학을 추종했다.[20] 그들의 역사관에서 민중은 위대하거나 고귀한 존재로, 귀족과 양반들은 이기적이고 미개한 존재로 묘사되었으나, 고위층의 사고방식은 달랐다.[21][22]
민중사학은 대중 운동과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이다. 과거 역사 저술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선거권이 박탈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비순응주의자, 서발턴 등 개인들이 주요 대상이 된다. 또한, 이 이론은 압도적인 소규모 사건의 물결이 특정 발전을 일으키는 시점, 즉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영웅사관과 정반대이다. 민중사학은 역사의 추진력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사회적 지위, 직업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위대한 인물이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사건을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여론을 "밀고 당기며" 추세를 발전시키는 요인이다.
하워드 진은 ''미국 민중사''에서 "어떤 국가의 역사가 한 가족의 역사로 제시될 때, 정복자와 피정복자, 주인과 노예, 자본가와 노동자, 인종과 성별에서의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격렬한 이해관계의 갈등(때로는 폭발하고, 대부분 억압됨)을 숨긴다. 그리고 희생자와 사형 집행자의 세상에서, 알베르 카뮈가 시사했듯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임무는 사형 집행자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10] 역사학자 가이 베이너는 "'민중'에 대한 이상화되고 충분히 정교하지 못한 개념에 의존하여, 그들에게 내재적인 진보적 가치를 부당하게 부여해 왔다. 실제로 민주적 역사는 결코 평등주의적이지 않다"라고 썼다.[11]
전후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융성에 따라 역사학에서 계급투쟁 사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근대주의·시민주의 입장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정치사상사, 오츠카 히사오의 서구 경제사, 이시모다 쇼의 일본 고대·중세사가 나타났다. 고도 경제 성장에 따른 사회 변화와 안보 투쟁 고조, 관 주도의 '메이지 100년' 축제에 대한 반감을 받아 계급 투쟁의 '변혁 주체'로서 민중에게 주목이 쏠리면서 민중사가 성립되었다.
근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에도 시대의 봉기에서 메이지 유신의 자유민권운동, 다이쇼 시대의 민중운동까지가 대상이 되었다. 하야시 하지메, 호리에 에이이치, 쇼지 키치노스케, 츠다 히데오, 야마다 타다오 등에 의해 백성 봉기 연구가 이루어져 계급 투쟁사가 성립되었다. 호리에 에이이치는 근세의 봉기를 대표 월소형 봉기·총백성 봉기·세상 바로잡기 봉기라는 세 단계로 발전했다는 호리에 도식을 제기했다. 이후 아오키 미치오, 이누마루 요시카즈 등은 이를 계급 간 대립의 계급 투쟁사에서 국가 대 민중의 인민 투쟁사로 발전시켰다. 사사키 준노스케는 농민층 분해의 결과로 생긴 호농과 '반 프로'(빈농)의 계급 투쟁을 논하며, 세상 바로잡기 소동이나 마을 소동이 발생하는 마을의 상태를 통칭하여 '세상 바로잡기 상황'이라고 불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후카야 카츠미는 인민 투쟁사를 근세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했고, 사토 세이로는 메이지 시대까지 확장했다. 이후 백성 봉기 연구는 후카야, 나카지마 아키라, 요코야마 토시오, 야부타 칸, 마스다 히로미, 카와나베 사다오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민중 사상사에서는 이로카와 다이키치가 '정점 사상가' 외에 '지하 수맥'으로서 민중의 사상이 존재한다고 보고 기타무라 토코쿠 등을 다룬 『메이지 정신사』를 저술했으며, 치바 타쿠사부로에 의해 기안된 '이츠카이치 헌법 초안'을 발견했다. 카노 마사나오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여성, 오키나와의 사상을 연구했다. 히로타 마사키는 후쿠자와 유키치 연구에서 출발하여 피차별 민 연구로 향했다. 야스마루 요시오는 일본이 근대화하는 가운데 곤궁한 민중이 '통속 도덕'을 구축하고, 그것이 심학이나 교파 신도 등의 민중 사상으로 성립하여, '세상 바로잡기 염원'이 되었다고 하는 『일본의 근대화와 민중 사상』을 저술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쇠퇴와 함께, 아미노 요시히코나 서양사 연구자들은 사회사의 방향성을 개척해 갔고, 민중사는 한때의 기세를 잃었다.
4. 외국의 민중사학
민중사학의 역사 서술 방법은 매우 다양하며, 이를 주도하는 주체가 반드시 민중 출신인 것은 아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민중사학은 이론과 실제 양면에서 아직 하나의 정립된 학문 체계로 보기 어렵다고 하며, 학술적 가치는 보통 높지 않다고 평가한다.[16] 고대에도 민중사학적 믿음이 존재하여 유자여를 사칭한 무증이나 왕랑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귀족들이 중국 성씨를 따랐다는 주장이 있지만,[16] 신라와 제주와 같은 실제 귀족 가문들은 자신들을 신이나 부처로 칭할 정도로 신분적 자부심이 강해 굳이 중국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왕랑의 사례처럼 이러한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인도처럼 귀족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이러한 성씨 날조나 사칭이 어려웠다.
많은 국가에서 민중적 정체성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불쾌한 부분이 많다는 이유로 민중사학을 탄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중의 힘이 강해진 근현대에는 민중사학이 승리하거나 전성기를 얻은 국가들도 나타났다. 주로 귀족이나 젠트리를 격멸했거나 원래 없었던 중국, 러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이러한 국가들이 분포한다. 따라서 다른 국가들에서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같은 역사관이 민중들에게서만 발견되기도 하며, 심지어 정규 학술 포털에서 학술지를 검색해도 전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4. 1. 서양
조르주 르페브르는 1932년 알베르 마티에즈가 "스타가 아닌 대중의 역사"를 말하려고 한 것을 칭찬하면서 "위에서가 아닌 아래에서 본 역사"라는 문구를 처음 사용했다.[3] 이는 A. L. 모턴의 1938년 저서 《영국 인민사》의 제목으로도 사용되었다.[4] 그러나 1970년대부터 이 구절을 역사학의 전면에 등장시킨 것은 E. P. 톰슨의 에세이 《The Times Literary Supplement》(1966)에 실린 '역사는 아래로부터'였다.[5] 톰슨은 TLS 기사에서 이 문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역사는 아래로부터'는 익명의 편집자가 붙인 톰슨 기사의 제목으로 등장했다.[8] 이는 하워드 진의 1980년 저서 《미국 인민사》에 의해 역사학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대중화되었다.[9]민중사학은 대중 운동과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이다. 과거의 다른 역사 저술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개인들이 민중사학의 주요 초점 대상이 되며, 여기에는 선거권이 박탈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비순응주의자, 서발턴, 그리고 잊혀진 사람들이 포함된다. 또한, 이 이론은 압도적인 소규모 사건의 물결이 특정 발전을 일으키는 시점, 즉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은 영웅사관이라고 불리는, 역사의 단일한 위대한 인물을 강조하는 방식과는 정반대이다. 민중사학은 역사의 추진력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그들의 사회적 지위 및 직업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위대한 인물이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사건을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여론을 "밀고 당기며" 추세를 발전시키는 요인이다.
하워드 진은 그의 저서 《미국 민중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국가의 역사가 한 가족의 역사로 제시될 때, 정복자와 피정복자, 주인과 노예, 자본가와 노동자, 인종과 성별에서의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격렬한 이해관계의 갈등(때로는 폭발하고, 대부분 억압됨)을 숨긴다. 그리고 희생자와 사형 집행자의 세상에서, 알베르 카뮈가 시사했듯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임무는 사형 집행자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10]
4. 2. 일본
전후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역사학에서 계급투쟁 사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고도 경제 성장에 따른 사회 변화와 안보 투쟁의 고조, 관 주도의 '메이지 100년' 축제에 대한 반감으로, 계급 투쟁의 '변혁 주체'로서 민중에게 주목하면서 민중사가 성립되었다.[3]근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에도 시대의 봉기에서 메이지 유신의 자유민권운동, 다이쇼 시대의 민중운동까지가 대상이 되었다. 하야시 하지메, 호리에 에이이치, 쇼지 키치노스케, 츠다 히데오, 야마다 타다오 등에 의해 백성 봉기 연구가 이루어져 계급 투쟁사가 성립되었다. 호리에 에이이치는 근세의 봉기를 대표 월소형 봉기·총백성 봉기·세상 바로잡기 봉기라는 세 단계로 발전했다는 호리에 도식을 제기했다. 이후 아오키 미치오, 이누마루 요시카즈 등은 이를 계급 간 대립의 계급 투쟁사에서 국가 대 민중의 인민 투쟁사로 발전시켰다. 사사키 준노스케는 농민층 분해의 결과로 생긴 호농과 '반 프로'(빈농)의 계급 투쟁을 논하며, 세상 바로잡기 소동이나 마을 소동이 발생하는 마을의 상태를 통칭하여 '세상 바로잡기 상황'이라고 불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후카야 카츠미는 인민 투쟁사를 근세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했고, 사토 세이로는 메이지 시대까지 확장했다. 이후 백성 봉기 연구는 후카야, 나카지마 아키라, 요코야마 토시오, 야부타 칸, 마스다 히로미, 카와나베 사다오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민중 사상사에서는 이로카와 다이키치가 '정점 사상가' 외에 '지하 수맥'으로서 민중의 사상이 존재한다고 보고 기타무라 토코쿠 등을 다룬 『메이지 정신사』를 저술했으며, 치바 타쿠사부로에 의해 기안된 '이츠카이치 헌법 초안'을 발견했다. 카노 마사나오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여성, 오키나와의 사상을 연구했다. 히로타 마사키는 후쿠자와 유키치 연구에서 출발하여 피차별 민 연구로 향했다. 야스마루 요시오는 일본이 근대화하는 가운데 곤궁한 민중이 '통속 도덕'을 구축하고, 그것이 심학이나 교파 신도 등의 민중 사상으로 성립하여, '세상 바로잡기 염원'이 되었다고 하는 『일본의 근대화와 민중 사상』을 저술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쇠퇴와 함께, 아미노 요시히코나 서양사 연구자들은 사회사의 방향성을 개척해 갔고, 민중사는 한때의 기세를 잃었다.[3]
5. 영향 및 의의
민중사학은 대중 운동과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이다. 과거 역사 서술에서 다루지 않았던 선거권이 박탈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비순응주의자, 서발턴 등 잊혀진 개인들이 주요 대상이다.[10] 이 이론은 소규모 사건의 물결이 특정 발전을 일으키는 시대의 흐름 속 사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영웅사관과 반대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사회적 지위, 직업이 역사의 추진력이라고 주장한다. 즉, 위대한 인물이 아닌 여론이 추세를 발전시키는 요인이다.
조르주 르페브르는 1932년 알베르 마티에즈가 histoire des masses et non de vedettes프랑스어 (스타가 아닌 대중의 역사)를 언급한 것을 칭찬하며, histoire vue d'en bas et non d'en haut프랑스어 (위에서가 아닌 아래에서 본 역사)라는 문구를 처음 사용했다.[3] 이는 A. L. 모턴의 1938년 저서 《영국 인민사》 제목으로도 사용되었다.[4] 1970년대부터 E. P. 톰슨의 에세이 《The Times Literary Supplement》(1966)에 실린 '역사는 아래로부터'라는 구절이 역사학 전면에 등장했다.[5][6][7] ('역사는 아래로부터'는 편집자가 붙인 제목[8]) 하워드 진의 1980년 저서 《미국 인민사》는 이 구절을 대중화했다.[9]
전후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융성에 따라 역사학에서 계급투쟁 사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근대주의·시민주의 입장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정치사상사, 오츠카 히사오의 서구 경제사, 이시모다 쇼의 일본 고대·중세사가 나타났다. 고도 경제 성장에 따른 사회 변화와 안보 투쟁 고조, '메이지 100년' 축제에 대한 반감으로 계급 투쟁의 '변혁 주체'로서 민중에게 주목하며 민중사가 성립되었다.
근세-근대 이행기 연구가 활발했으며, 에도 시대 봉기, 메이지 유신의 자유민권운동, 다이쇼 시대 민중운동까지가 대상이었다. 하야시 하지메, 호리에 에이이치, 쇼지 키치노스케, 츠다 히데오, 야마다 타다오 등이 백성 봉기 연구를 통해 계급 투쟁사를 성립했다. 호리에 에이이치는 근세 봉기를 대표 월소형 봉기·총백성 봉기·세상 바로잡기 봉기 3단계로 발전했다는 도식을 제기했다. 아오키 미치오, 이누마루 요시카즈 등은 이를 계급 간 대립에서 국가 대 민중의 인민 투쟁사로 발전시켰다. 사사키 준노스케는 농민층 분해로 생긴 호농과 '반 프로'(빈농)의 계급 투쟁을 논하며, 세상 바로잡기 소동, 마을 소동 발생 상태를 '세상 바로잡기 상황'이라 불렀다. 1970년대 후카야 카츠미는 인민 투쟁사를 근세 전기까지, 사토 세이로는 메이지 시대까지 확장했다. 이후 백성 봉기 연구는 후카야, 나카지마 아키라, 요코야마 토시오, 야부타 칸, 마스다 히로미, 카와나베 사다오 등이 이어갔다. 이로카와 다이키치는 '정점 사상가' 외 '지하 수맥'으로서 민중 사상이 존재한다고 보고 기타무라 토코쿠 등을 다룬 『메이지 정신사』를 저술, 치바 타쿠사부로가 기안한 '이츠카이치 헌법 초안'을 발견했다. 카노 마사나오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여성, 오키나와 사상을 연구했다. 히로타 마사키는 후쿠자와 유키치 연구에서 피차별 민 연구로, 야스마루 요시오는 곤궁한 민중이 '통속 도덕'을 구축, 심학이나 교파 신도 등 민중 사상으로 성립, '세상 바로잡기 염원'이 되었다는 『일본의 근대화와 민중 사상』을 저술했다. 마르크스주의 쇠퇴와 함께 아미노 요시히코나 서양사 연구자들이 사회사 방향을 개척, 민중사는 한때 기세를 잃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민중사학은 이론과 실증 양면에서 정립된 학문체계로 보기 어렵고 학술적 가치는 보통 높지 않다. 그러나 민중의 사학적 관점은 항상 존재했으며, 근현대 민중사학은 1980년대 초 '민중적 민족주의사학'에서 본격 출발했다.[17][18] 한국 민중사학도 좌파나 민중에 큰 영향을 받았다.[19] 1970년대 제3공화국(유신정권) 한계로 노동·주민운동이 활성화되며 대중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해 민중적 입장이 힘을 얻었다고 본다. 역사문제연구소(1984), 망원한국사연구실(1984), 한국근대사연구회(1987), 한국역사연구회(1988), 구로역사연구소(1988, 현 역사학연구소) 등이 민중사학을 연구, 보급했다(민중사학과 거리를 두는 단체도 존재).
전성기 때 대학에서까지 민중 출신들이 주로 민중사학을 추종했다.[20] 민중사학 역사 서술 방법은 다양하며, 창시·선전 주체가 민중 출신이 아닐 수 있다. 민중은 위대하거나 고귀한 족속으로, 귀족과 양반은 이기적이고 미개한 존재로 묘사됐으나 고위층 사고방식은 달랐다.[21][22]
6. 한계
민중사학은 이론 및 실제 증명 양면에서 아직 정립된 학문 체계로 보기 어렵고, 학술적 가치는 일반적으로 높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16] 연구의 신뢰성보다는 대중을 중시하며, 증거의 논리성이나 연관성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근거가 단순히 대중의 믿음인 경우도 흔하게 발견된다.
역사학자 가이 베이너는 "하향식 역사의 신(新) 마르크스주의 기수들은 때때로 '민중'에 대한 이상화되고 충분히 정교하지 못한 개념에 의존하여, 그들에게 내재적인 진보적 가치를 부당하게 부여해 왔다. 실제로 민주적 역사는 결코 평등주의적이지 않다"라고 비판했다.[11]
전후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역사학에서 계급투쟁 사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고도 경제 성장에 따른 사회 변화와 안보 투쟁의 고조, 관 주도의 '메이지 100년' 축제에 대한 반감으로 계급 투쟁의 '변혁 주체'로서 민중에게 주목하면서 민중사가 성립되었으나, 마르크스주의의 쇠퇴와 함께 민중사는 한때의 기세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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