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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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족사학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한국 민족의 정체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며 발전한 역사학이다. 19세기 말 실학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흐름 속에서,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등장하여 한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일제의 식민사관을 비판했다. 해방 이후 남북한 모두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하며, 북한은 주체사상을, 남한은 민족 독립 운동과 근대화 과정을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사학은 고대사 해석, 만주 영토 문제 등에서 논쟁을 겪고 있으며, 세계사적 보편성과 민족사의 특수성을 조화시키는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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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은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사를 왜곡한 역사 해석으로, 일선동조론, 정체성론, 타율성론 등을 통해 한국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부정하고 사회의 낙후성과 종속성을 강조하며, 만선사관으로 한국사를 만주사의 일부로 왜곡하는 데 활용되었고, 민족사학 및 사회경제사학계의 비판적 검토를 통해 서구 중심적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 역사관 - 휘그사관
휘그 사관은 역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과거를 현재의 시각으로 판단하고 단선적인 발전 단계로 파악한다는 비판을 받는 역사 해석 방식이다.
민족사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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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유형 | 유사역사학, 민족주의 역사학 |
영향 | 한국의 민족주의 식민사관 극복 시도 |
주요 특징 | 단군 신화 강조 고조선 중심의 고대사 연구 만주 지역에 대한 관심 식민사관 비판 |
주요 인물 |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손진태 최남선 이병도 (비판적 견해도 존재) 김성칠 노명호 박시형 윤내현 이만열 전해종 조동걸 채상식 신형식 서영수 김정배 |
역사 | |
기원 | 일제강점기 |
배경 | 민족주의 고취 항일운동의 역사적 기반 마련 식민사관에 대한 반발 |
발전 | 해방 이후, 국사 교육의 주류 형성 |
비판 | 실증주의 사학계의 비판 (비과학적, 낭만주의적 역사관) 지나친 민족주의적 관점 객관성 결여 |
주요 개념 및 주장 | |
단군 | 민족의 시조로 숭앙, 역사적 실존 인물로 간주 |
고조선 | 한국 역사의 기원으로 강조, 만주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영역 지배 주장 |
만주 | 고대 한국 민족의 활동 무대로 중요시, 고구려, 발해 등 만주 지역 국가들의 역사 연구 집중 |
식민사관 비판 | 한국사 왜곡의 원인으로 지목, 한국사의 독자성과 우수성 강조 |
논쟁점 | |
단군릉 | 북한의 단군릉 발굴 및 역사적 의미 부여에 대한 논쟁 |
고조선 강역 | 고조선의 실제 강역 및 만주 지역과의 관계에 대한 논쟁 |
식민사관 극복 | 식민사관의 잔재 극복 및 한국사의 주체적 해석 방향에 대한 논쟁 |
참고 문헌 | |
관련 서적 | 신채호, 《조선상고사》 박은식, 《한국통사》 정인보, 《조선사연구》 |
2. 역사적 배경
19세기 후반 조선은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 위협에 직면했다. 1860년대부터 과도한 세금 징수와 실정으로 인한 일련의 반란은 집권 왕조를 위협했고, 외국 열강들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개방하려 했다.[3]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불평등하게 개항했다.[4],[5] 이 시기 실학자들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조선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한국사를 태생에서부터 고대 중국의 식민 지배에서 출발했다는 관점으로 보는 식민사학을 강조하였다. 이에 맞서 실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민족사학자들이 민족사학을 내세웠다. 초기 민족사학은 왕과 장수 등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인 경향을 보였으나, 박은식이 일제의 침략 과정을 서술한 《한국통사》와 독립운동 사서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민족사학을 정립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을 통해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 국가의 민족적 패기를 강조하고, 사대주의를 비판하며 혁명적 역사관을 제시했다. 그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 역사 1천 년 래 제1대 사건'이라 평가하였다. 박은식, 신채호를 통해 정립된 민족사학은 정인보, 장도빈, 안재홍, 문일평 등에 의해 계승되어 식민사관에 맞섰다.
이기백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역사적 의의는 민족 개념의 발견에 있다. 민족주의 사학은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국가로서의 자각과 민족 독립 운동을 사상적으로 지지하는 데 기여했다."라고 평가했다.[138]
2. 1. 실학의 영향
실학자 홍대용(1731~1783), 정약용(1762~1836), 박지원(1737~1805), 유득공(1749~1807), 이종휘(1731~1786) 등은 중화 사상에 반대하는 역사관을 제시하였다. 홍대용은 중국이 다른 모든 국가보다 우월하다는 중화 사상의 관념을 거부하고 모든 국가가 평등하다고 주장했다.[13],[140] 정약용은 문화적으로 뛰어난 국가는 스스로를 "중심"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한국이 이미 이러한 수준의 문화 발전에 도달했기 때문에 "중심"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사서오경만 공부하는 것보다 삼국사기(12세기)와 같은 한국 고유의 텍스트를 추가적으로 교육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3]박지원은 당시 한국의 지배적인 역사학자들이 중국을 국제 시스템의 중심으로 여기는 주자(Zhu Xi)의 성리학 틀에 갇혀 있음을 비판했다.[14],[141] 그는 한국의 역사적 영토가 압록강 너머 만주까지 확장된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15],[142]
2. 2. 개항과 외세의 침략

19세기 후반,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과도한 세금 징수와 잘못된 정치로 여러 반란이 일어났고, 서구 열강뿐만 아니라 메이지 일본도 군사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개방하려 했다.[3] 1876년 일본-조선 조약을 통해 일본은 조선의 세 항구를 개방하고, 일본 상인에게 치외법권을 부여받았다.[4] 이 불평등 조약으로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 간 경쟁의 대상이 되었고, 외세의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5]
조선은 명나라(1368–1644)와 청나라(1644–1911)의 조공국이었지만, 국내 및 외교 정책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서구 열강을 좌절시키는 모호함을 만들었다.[7] 1882년 톈진 조약을 통해 중국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기로 합의했지만,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10년 후 동학 농민 운동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고종은 중국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자국 이익 보호를 구실로 더 많은 군대를 파견했다. 1894년 7월, 일본군은 조선 국왕을 장악하고 갑오개혁을 시행하도록 강요했다.[9] 며칠 후 일본의 중국군 공격으로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전쟁은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다.[10] 전쟁은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확인된 일본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중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이 중화주의에서 벗어난 것은 일본 제국의 지배를 위한 길을 열어준 것에 불과했다.[11]
3. 민족주의 역사학의 발전
일제가 한국사를 중국의 식민 지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식민사학을 강조하자, 이에 맞서 실학자들로부터 비롯된 민족사학이 등장했다. 초기 민족사학은 왕과 장수 같은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 역사관을 보였으나, 박은식이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일제의 침략 과정과 독립운동을 서술하면서 민족사학을 정립했다.[40][42][41]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을 저술하여 고대 국가에는 민족적 패기가 있었으나 중세 이후 사대주의가 심화되었다고 주장하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역사 1천년래 제1대사건'으로 평가했다.[34] 이후 정인보, 장도빈, 안재홍, 문일평 등이 박은식, 신채호의 민족사학을 계승하여 식민사관에 맞섰다.[18]
현대 한국 역사학자들은 대한 독립 운동에서 민족주의 사학의 기원을 찾고 있는데, 이는 청일 전쟁 (1894–1895)에서 일본 제국의 승리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증가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1895년부터 한국 신문들은 한국을 상상하는 새로운 방식을 장려하기 시작했고, 서재필과 윤치호는 한글로 발행된 최초의 한국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역사 교육을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려 했으나, 일본 식민 당국에 의해 검열되었다.[18]
사회 진화론적 인종 간의 투쟁에 대한 생각 또한 당시 한국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유길준과 윤치호는 1881년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방문하여 이러한 사상을 접했다. 윤치호는 ''독립신문''에서 한국 "민족"에 대한 아이디어를 언급했지만, 1905년 이전까지는 범아시아주의적 관점이 더 두드러졌다.
1945년 이후 대한민국에서 민족사학의 주요 목표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학문(일제사관)을 반박하는 "한국 독립의 새로운 민족사"를 쓰는 것이었다.[80] 카터 에커트에 따르면 19세기 이전에는 일반 사람들에게 마을, 가족, 국왕에 대한 충성이 우선이었고, 한국 엘리트들은 자신들을 "중국 중심의 국제적인 문명"의 구성원으로 여겼다.[81] 국가 체제가 동아시아에 들어서고 한국이 일본에 편입되자, 한국의 활동가들은 한국을 재정의하게 되었다. 신채호는 1908년 논문 독사신론에서 한국사를 한국 민족의 역사와 동일시하며, 묘청의 난을 "민족주의적" 반란이라고 주장했다.[82][108]
이러한 역사학은 20세기 초, 일본의 지배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민족 의식을 육성하려는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등장했다. 그 최초의 주창자는 신채호이다. 신채호는 단군을 조선 민족의 시조신으로 하는 조선의 역사를 선언했고, 민족주의 역사가는 이러한 고대 "조선" 왕국의 영토에 대한 팽창주의적 주장을 펼쳤다. 신채호나 박은식 등은 중국 중심의 유교적 역사학과 일본의 식민지 역사학을 모두 거부했다.
이기백은 민족주의 역사학이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국가로서의 자각과 민족 독립 운동을 사상적으로 지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하면서도, 과도한 민족 개념의 고유성 강조와 객관적인 타당성이 없고 주관적인 신념을 중시하는 경향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138]
3. 1. 신채호의 민족사관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을 통해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혁명적 역사관을 제시했다. 그는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 국가에 민족적 패기가 있었으나, 중세 이후 사대주의가 심화되었다고 보았다.[36]신채호는 한국 민족을 한국사 발전의 중심 주체로 설정하고,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를 민족의 전성기로 간주했다.[28] 그는 김부식의 친신라 편향성이 만주 영토에 대한 한국의 정당한 주장을 억압했다고 비판하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역사 1천년래 제1대사건'으로 높이 평가했다.[34] 이는 민족주의적 역사 해석의 중요한 사례로 제시된다.
또한, 신채호는 범아시아주의를 일본 팽창주의의 구실로 비판하고, 동아시아를 연대의 기반이 아닌 단순한 지리적 단위로 간주했다.[37] 그는 유교 역사학, 특히 김부식과 그의 친신라 편향성이 만주 영토에 대한 정당한 한국의 주장을 억압했다고 느꼈다.[34]
3. 2. 박은식의 민족혼 강조
박은식은 일제의 침략 과정을 서술한 《한국통사》와 독립운동사를 다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민족사학을 정립했다.[40][42][41] 그는 일제의 침략과 한국인의 저항을 기록하고,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자 '국혼(國魂)'을 강조하며 민족정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3. 3. 기타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 신채호를 통해 정립된 민족사학은 정인보, 장도빈, 안재홍, 문일평 등에 의해 계승되어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섰다.[18]4. 일제의 식민사관
일제는 한국을 식민 지배하기 위한 이념적 기반으로 식민사관을 구축했다. 일제는 한국사를 중국의 식민 지배에서 출발했다는 관점의 식민사학을 강조했고, 이에 민족사학자들은 실학자를 바탕으로 타율성론을 반박하며 민족사학을 내세웠다.[147]
신채호는 한국 민족을 한국 역사학의 중심으로 만든 최초의 역사가로 평가받으며, 찰스 K. 암스트롱은 그를 "현대 한국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칭했다.[27][29][28] 그는 유교적 역사관과 일본 식민주의 역사관 모두 정치적 이유로 학문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36][26] 신채호는 당시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의존으로 인해 "노예 근성"을 갖게 되었다고 믿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 민족과 국가에 대한 동일시를 강조했다.[26]
1876년 일본–조선 조약 이후, 일본 제국은 한국 문제에 더욱 깊이 관여했다.[22] 러일 전쟁 (1905) 이후 만주 (중국 북동부)가 일본의 식민지화에 개방되면서, 일본은 "만선사" (''만선사'' 滿鮮史)라는 개념을 장려했다.[23]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나바 이와카치가 개발한 만선사 이론에서, 한국은 정치 및 경제적으로 다양한 타율성의 힘에 종속되었고, "독립성과 독창성"이 부족했다.[22]
한국 역사가들은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이 한국 역사에서 중국, 만주, 일본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부여하는 타율성론, 한국 사회를 정체되고 봉건 이전으로 묘사하는 정체성론, 한국 정치 문화 내의 정치적 파벌을 기록하는 당파성론,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공통 조상을 주장하는 일선동조론의 네 가지 왜곡을 주장한다.[21]
4. 1. 주요 내용
일제는 한국사를 중국의 식민지배에서 출발했다는 관점의 식민사학을 강조했고, 이에 민족사학자들은 실학자를 바탕으로 타율성론을 반박하며 민족사학을 내세웠다.[147]초기 민족사학은 왕과 장수 같은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 경향을 보였으나, 박은식이 일제의 침략과정을 서술한 《한국통사》와 독립운동 사서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민족사학을 정립했다.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을 통해 '고구려 등 고대국가에는 민족적 패기가 있었으나 중세 이후 사대주의가 심화되었다'는 혁명적 역사관을 제시했고,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역사 1천년래 제1대사건'으로 평가했다.
박은식과 신채호의 민족사학은 정인보, 장도빈, 안재홍, 문일평 등에 계승되어 식민사관에 맞섰다. 현대 한국 역사학자들은 대한 독립 운동에서 민족주의 사학의 기원을 찾고 있으며, 이는 청일 전쟁 (1894–1895)에서 일본 제국의 승리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증가에 대한 대응이었다.
1876년 일본–조선 조약 이후, 일본 제국은 한국 문제에 더욱 깊이 관여했다.[22] 러일 전쟁 (1905) 이후 만주 (중국 북동부)가 일본의 식민지화에 개방되면서, 일본은 "만선사" (''만선사'' 滿鮮史)라는 개념을 장려했다.[23]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나바 이와카치가 개발한 만선사 이론에서, 한국은 정치 및 경제적으로 다양한 타율성의 힘에 종속되었고, "독립성과 독창성"이 부족했다.[22]
한국 역사가들은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이 한국 역사에서 중국, 만주, 일본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부여하는 타율성론, 한국 사회를 정체되고 봉건 이전으로 묘사하는 정체성론, 한국 정치 문화 내의 정치적 파벌을 기록하는 당파성론,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공통 조상을 주장하는 일선동조론의 네 가지 왜곡을 주장한다.[21] 이기백은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을 "정체, 비발전, 반도 특수성, 비독창성"이라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요약한다.[47]
1945년 독립 이후, 남한의 역사 서술에 비해 북한의 역사학에서 "훨씬 더 호전적인" 민족주의적 어조는 이러한 학문이 마르크스주의보다는 민족주의로 분류될 수 있게 한다.[112]
4. 2. 식민사관의 비판
한국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사관이 한국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의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식민사관이 한국사를 고대 중국의 식민 지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에 반대했다.[147]신채호는 한국 민족을 한국 역사학의 중심으로 만든 최초의 역사가로, 찰스 K. 암스트롱은 그를 "현대 한국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평가했다.[27][29][28] 그는 유교적 역사관과 일본 식민주의 역사관 모두 정치적 이유로 학문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36][26] 신채호는 당시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의존으로 인해 "노예 근성"을 갖게 되었다고 믿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 민족과 국가에 대한 동일시를 강조했다.[26]
일제강점기 이후, 일부 한국 지식인들은 한국의 문화적 확장을 찬양하며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최남선은 조선광문회의 창립자였고, 박은식은 민족 의식을 고취하여 한국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 역사가였다.[40][42][41] 이들은 역사를 한국 독립 달성을 위한 정치적 무기로 보았다.[40][42] 신채호는 기존의 역사와 신화를 수정하고, 김부식이 사대주의적 목적으로 한국 역사를 왜곡했다고 비판했다.[108][43][44]
한국 역사가들은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이 한국 역사에서 중국, 만주, 일본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부여(''타율성론''), 한국 사회를 정체되고 심지어 봉건 이전으로 묘사(''정체성론''), 한국 정치 문화 내의 정치적 파벌을 기록(''당파성론''),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공통 조상을 주장(''일선동조론'')하는 네 가지 주요 왜곡을 했다고 주장한다.[21] 이기백은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을 "정체, 비발전, 반도 특수성, 비독창성"이라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요약한다.[47]
5. 해방 이후의 민족주의 역사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일본의 항복으로 한반도는 독립을 맞이했지만, 곧바로 북한과 남한으로 이념이 대립하는 정권으로 분단되었다. 처음에는 북한에서 계급 분석에 초점을 맞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이 역사 서술을 주도했고, 남한에서는 이승만의 강경한 반공주의 정부(1948–1960)가 '민족' 개념을 역사 서술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했다.[51] 북한에서는 한국 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 민족주의적 분석이 계급 분석을 대체했다.[52] 남한에서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몰락과 1965년 일본과의 외교 관계 정상화에 따른 반일 시위로 '민족'이 반식민주의 역사 서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통합적 틀"로서 다시 자리 잡았다.[53] 그 이후, 북한과 남한 모두에서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 연구는 "만연하고 강렬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54] 이러한 공유된 역사관은 북한-대한민국 관계의 배경이 되었으며, 2000년 6월 양국 정상은 한반도 통일이 역사적 책무라고 선언했다.[55]
이러한 종류의 역사학은 20세기 초, 일본의 지배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민족 의식을 육성하려는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등장했다. 그 최초의 주창자는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1880-1936)이다. 신채호는 1908년에 출판된 그의 논쟁적인 『독사신론』(:ko:독사신론)에서 조선의 역사는 단군을 종족적 시조신으로 하는 조선 민족의 역사이며, 단군은 한때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의 대부분도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비록 단군은 13세기에 『삼국유사』에 의해 창작된 인물이지만, 민족주의 역사가는 이러한 고대 "조선" 왕국의 영토에 대한 팽창주의적 주장을 펼쳤고, 이로 인해 민족의 현 상황이 판단되었다.
신채호, 박은식(1859-1925), 최남선(1890-1957) 등 다른 조선 지식인들은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이러한 주제를 계속 발전시켰다. 그전까지 과거의 역사에서 조선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두 가지 방법은 중국 중심의 조선 양반의 유교적 역사학과, 일본의 식민지 역사학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두 역사학 모두를 거부했다.
이러한 전전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작업은 북한과 한국 양쪽에서 전후 역사학을 형성했다. 양국의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지배적인 역사학은 1960년대 이후 민족주의적인 주제를 계속 반영해 왔으며, 이러한 공통적인 역사적 태도가 조선 통일 협상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적 학문을 거부하려는 과정에서, 조선의 민족주의 역사가는 그 전제의 많은 부분을 채택해 왔다. 그러나 신채호의 만주에 대한 잃어버린 영토 회복주의(:en:irredentism) 요구는 주류가 되지 못했다.
이기백은 민족주의 역사학이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국가로서의 자각과 민족 독립 운동을 사상적으로 지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하면서도, 과도한 민족 개념의 고유성 강조, 역사적 발전 관념 결여, 주관적인 신념 중시 경향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138]
5. 1. 남한의 민족주의 역사학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민족주의 역사학이 주류를 이루며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80] 민족주의 역사학은 1890년대 후반 '민족'이라는 단어와 함께 한국어 어휘에 들어온 민족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81] 이전에는 국가로서의 '한국'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한반도 내 다른 사람들을 '한국인'으로 여기는 인식은 거의 없었다.[81] 일반 사람들에게는 마을, 가족, 국왕에 대한 충성이 우선이었고, 한국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중국 중심의 국제적인 문명의 구성원으로 여겼다.[81]국가 체제가 동아시아에 들어서고, 한국이 일본에 편입되자, 한국의 활동가들은 "내부적 동질성과 외부적 자율성"의 관점에서 한국을 재정의하게 되었다.[82] 신채호는 1908년 논문 독사신론에서 한국사(국사)를 한국 민족(민족사)의 역사와 동일시하며, 사람들이 역사 속에 항상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범주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도록 시도했다.[82] 예를 들어, 신채호는 김부식에 의해 진압된 묘청의 난(1135–1136)을 "민족주의적" 반란이라고 주장했다.[108]
민족주의 사학은 예맥을 "선사 시대 한반도의 인종, 문화, 국가의 통일"의 시작으로 간주하며, 요동 지역에 존재했던 당시의 상(上)하가점 문화(기원전 1000~600년)와 하(下)하가점 문화(기원전 2200~1600년)의 존재를 간과한다.[85] 한국 민족주의 사학은 일본 식민주의적 토착주의의 패러다임을 따라 한국 문화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한국인의 기원을 더욱 오래된 것으로 주장한다.[86] 한국인의 "인종적 기원"을 찾는 이러한 행태는 국학 연구의 일부였던 일본의 국체 개념을 반영한다.[87]
민족주의는 남한 주류 역사학에 널리 퍼져, 한자로만 한글을 표기했던 것이 학술 저널의 각주로 전락하거나 완전히 배제되었다.[89]
한국 민족주의 사학은 대한민국의 "대중 고고학"과 연결되어 있으며, 시청률 경쟁을 벌이는 텔레비전 고고학자들이 고대 한국의 경계에 대한 더욱 광범위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예를 들어, 1993년 ''한국일보''는 연세대학교의 고고학자 손보기의 몽골 울란바토르 방문을 후원했는데, 손보기는 고구려가 대흥안령맥 너머까지 확장되었음을 증명하는 새로운 고구려 석성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90] 대중 고고학자들은 한국 청동기 시대의 예술을, 예를 들어, 스키타이인의 예술과 연결하여, 한국 반도에 "우수한 북방 민족의 도래"를 증명한다고 주장한다.[91] 한국 기자들과 연구자들은 또한 한국의 "알타이 기원"을 찾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유적지를 정기적으로 여행한다.[90]
이기백은 "민족주의 역사학의 역사적 의의는 민족 개념의 발견에 있다. 민족주의 사학은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국가로서의 자각과 민족 독립 운동을 사상적으로 지지하는 데 기여했다."라고 하면서도, "민족주의 역사학의 문제는 과도한 민족 개념의 고유성 강조에 있으며, 민족주의 역사학의 선구자인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무아'의 투쟁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무비판적으로 추종할 경우, 한국은 세계로부터 고립될 위험이 있다. 민족주의 역사학의 단점은 역사적 발전이라는 관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며, 민족주의 역사학이 가진 역사적 시간적 인식은 민족 의식의 강약과 투쟁의 승패뿐이며, 객관적인 타당성이 없고, 주관적인 신념을 중시하는 경향도 현저해졌다."라고 평했다.[138]
5. 2. 북한의 주체사상과 역사학
북한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주의 역사학을 발전시켰다.[178] 1950년대에 북한에서는 민족주의적 분석이 계급 분석을 대체했다.[178] 북한 역사학은 고조선과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를 강조하고, 김일성 가문의 항일 투쟁을 부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역사관은 기자조선의 역사가 "봉건 지배 계급, 사대주의 추종자들, 그리고 대국 패권주의자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비판한다.[63]5. 3. 남북한 역사학의 공통점과 차이점
남북한 역사학은 공통적으로 민족주의적 경향을 보인다.[180]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북한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주류였으나, 한국 전쟁 이후 1950년대부터 민족주의적 분석이 이를 대체했다.[178]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 정책으로 "민족" 개념이 역사학에서 멀어졌지만,[177]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한일 기본 조약 체결에 따른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민족"이 다시 역사학의 중심으로 부상했다.[179]이러한 공통된 민족주의적 역사관은 남북 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2000년 6월 남북 정상은 통일을 역사적 의무로 언급하기도 했다.[181]
그러나 남북한 역사학은 차이점도 존재한다. 남한은 다양한 역사 해석이 존재하는 반면 북한은 주체사상에 기반한 획일적인 역사관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6. 민족주의 역사학의 쟁점과 과제
신채호를 비롯한 초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인의 고유성과 외세 침략에 맞선 투쟁의 역사를 강조하며, 한국사를 세계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묘사했다.[45] 이러한 역사관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던 지식인들 사이에서 등장했다.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는 13세기 삼국유사에서 유래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내세우고,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 대부분을 지배했다는 주장을 펼쳤다.[45]
박은식, 최남선 등도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이러한 민족주의 역사관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중국 중심의 사관과 일본의 식민사관을 모두 비판하며, 조선 민족의 독자적인 역사를 강조했다.[28]
이러한 민족주의 역사학은 해방 이후 남북한 역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남북한의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측 모두 1960년대 이후 민족주의적 주제를 강조했으며, 이는 통일 논의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전제를 일부 수용하기도 했다. 신채호의 만주 수복 주장은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5]
이기백은 민족주의 역사학이 민족 개념을 발견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지나치게 민족 중심적인 역사 해석을 경계했다. 그는 신채호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사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 한국이 세계로부터 고립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민족주의 역사학이 역사 발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부족하고 주관적 신념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138]
6. 1. 고대사 해석 문제
민족주의 역사학은 단군 신화를 민족의 기원으로 삼고,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고대 국가들의 영토를 만주까지 확장하여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한국사(국사)를 한국 민족(민족사)의 역사와 동일시하고, 묘청의 난을 민족주의적 반란으로 규정했다.[82][108] 또한, ''조선상고사''에서는 고고학, 금석학, 비교언어학의 방법을 사용하여 1차 사료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대종교 경전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84]
민족주의 사학은 예맥을 "선사 시대 한반도의 인종, 문화, 국가의 통일"의 시작으로 간주하며,[85] 한국인의 기원을 오래된 것으로 주장한다.[86] 신채호는 한국 ''민족''이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때를 이상적인 시대로 보았다.[110]
최남선은 한국이 파르함 문화의 중심지이며, 이 문화가 중앙 아시아 깊숙이까지 뻗어 있었다고 주장했다.[92] 그는 단군이 이 초문화 내에서 보편적으로 숭배받았다고 주장했지만,[94] 이는 지리적 특징의 음운적 유사성에 근거한 이론이었다.[93]
조선 시대 중반, 역사가들은 한국의 기원을 중국 난민에서 찾았고, 기자조선과 신라는 높이 평가했지만, 고조선과 고구려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96] 그러나 1930년대에 신채호의 영향으로 단군 신화가 더 인기를 얻게 되었다.[98] 민족주의 역사학자 최남선은 일본 신화를 비판하며 단군을 옹호했다.[99]
신채호는 장백산을 한국 유산의 일부로 명명했지만,[104] 이 산은 이미 청나라의 만주족과 몽골족이 자신의 기원 신화로 주장했으며, 한족 문화에서도 신성하게 여겨졌다.[102][103] 고대 한국과의 중국 문명적 연결은 북한 역사학자들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63]
신채호는 한국 민족 역사의 범위를 만주로 재정의하고,[29] 고구려, 신라, 백제가 같은 ''민족''이며 같은 역사를 공유한다고 주장했다.[100] 그는 고구려의 멸망과 한반도 밖 영토에 대한 "한국"의 통제력 상실을 ''민족''의 쇠퇴의 시작으로 간주했다.[118] 그는 "한국 ''민족''이 만주를 얻으면 한국 ''민족''은 강성하고 번영한다"고 썼다.[119]
민족주의 역사학은 제주도, 울릉도, 독도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 해양 방어의 필요성에 부응했다.[123] 신채호는 과거의 지배를 근거로 영토 확장을 주장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관에서 미개척 영토 테마를 차용했다.[128] 그는 백제와 신라의 영토를 확장하여 해석했다.[129]
1985년 윤내현은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 이전부터 시작되어 중국 북부의 허베이에서 한국 전체로 뻗어 나가 2천 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주장했다.[126] 정약용과 성호 이익은 요동이 한국의 자연적인 강 경계에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중국에 대한 미개척 영토주의를 비판했다.[132]
한국 민족주의 역사관은 만주를 중국의 변경으로 간주하는 현대 중국 민족주의와 충돌했다.[120] 2002년경의 고구려 논쟁은 중국과 한국 양쪽 모두에서 민족주의적 감정을 반영했다.[120]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객관적인 사료 부족과 지나친 민족주의적 열망이 반영된 결과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6. 2. 식민사관 극복의 문제
신채호, 박은식, 최남선 등 조선의 지식인들은 1910년대와 1920년대에 민족주의 역사학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중국 중심의 역사학과 일본의 식민사관을 모두 거부했다.[28] 이러한 민족주의 역사학은 해방 이후 북한과 한국 양쪽의 역사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1960년대 이후 민족주의적인 주제를 계속 반영하고 있다.[138]이기백은 민족주의 역사학이 민족 개념을 발견하고 민족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역사학이 지나치게 민족 중심적인 역사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채호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면 한국이 세계로부터 고립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138]
1945년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조선 민족주의 역사학이 주류를 이루었다.[206]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일본과 외국의 학자들이 지지하는 "식민사관"에 반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193] 예를 들어,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고려 시대의 제도 연구를 통해 고려가 정체되어 있었다는 주장에 반박한다.[173]
1970년대 이후, 일부 한국 역사학자들은 신채호의 만주에 대한 실지 회복주의적 관점을 부활시키려 했다.[197]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의 설치와 같은 최근의 정치 운동은 민족주의 역사학을 더욱 강화시켰다.[202]
그러나 이영훈과 같은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은 민족 중심의 역사에 도전하며 국가 중심의 역사를 주장하기도 한다.[204] 임지현은 "하나의 덩어리인 민족"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역사학의 "민주화"를 주장한다.[204]
식민지 독립 후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일본 통치 시대의 조선인을 협력자와 저항자로 분류하려 했다.[151]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는 1981년에 『한국 전쟁의 기원』을 통해 이러한 지배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에 도전했다.[199]
일본의 역사학적, 고고학적 발견, 특히 낙랑군 관련 발견은 제국주의적 위조로 간주되기도 한다.[252] 북한 학자들은 낙랑군 유물을 고조선이나 고구려 유적으로 재해석하며, 낙랑이 두 곳이었다고 주장한다.[238][191]
6. 3. 세계사적 보편성과 민족사의 특수성 조화
민족주의 역사학은 민족사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세계사적 보편성을 고려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기백은 민족주의 역사학이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국가적 자각과 민족 독립 운동을 사상적으로 지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역사학이 지나치게 민족 개념의 고유성을 강조하여 세계로부터 고립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138] 또한 역사 발전에 대한 관념이 부족하고, 객관적인 타당성 없이 주관적인 신념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138]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무아'의 투쟁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면 한국이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13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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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가 없었으면 경제 발전도 없다? 위험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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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의 모든 반동 결딴낸 사학계 녹두장군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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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頭 특별 인터뷰 韓國史新論의 著者 李基白 선생이 말하는 韓國史의 大勢와 正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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