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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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沈)은 희(姬)성을 가진 자작 작위의 국가로, 수도는 현재 안후이성 푸양 시 린취안 현에 위치했다. 주 성왕이 숙부 담계 재를 심에 봉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주 여왕 시기에는 담계 재의 후손인 심자가 심국을 심자국으로 칭했다. 심나라는 초나라의 동맹국이었으나, 기원전 506년 채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심씨는 전국 시대에 연나라로 이주했으며, 일부는 선(冼)씨로 성을 바꾸어 중국 남부 지역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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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씨 - 담계 재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복 형인 담계 재는 주나라 초기에 심에 봉해졌고, 삼감의 난 평정 후 사공이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이 심씨를 칭하게 되었다. - 심씨 - 심윤술
심윤술은 초나라 장군으로, 오나라 침략 당시 총사령관을 맡았으나 전사했으며, 부패한 관리 제거에 기여하고 아들 심제량은 엽공으로 봉해져 심씨와 엽씨의 시조가 되었다. - 춘추 시대의 나라 - 정나라
정나라는 기원전 806년 정 환공 우가 건국하여 서주 말기부터 춘추 시대 초기에 주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전국 시대 초기 한나라에 병합되어 멸망한 나라이다. - 춘추 시대의 나라 - 예나라
예나라는 서주 말기부터 전국 시대에 걸쳐 현재의 쑤저우시 지역에 존립했던 니나라 또는 소주이며,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존립하다가 초나라의 위협으로 멸망했고, 자오좡 시에서는 예나라 고분에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심 (춘추) | |
---|---|
기본 정보 | |
국명 | 심(沈) |
국성 | 희성 심씨(姬姓 沈氏) |
작위 | 자작 |
수도 | 안후이성(安徽省) 푸양 시(阜阳市) 린취안 현(临泉县) 허난성(河南省) 저우커우 시(周口市) 선추 현(沈丘县) |
분봉자 | 성왕(成王) |
시조 | 담계 재(聃季载) |
건국 | 기원전 1042년 |
멸망 | 기원전 506년 |
멸망 원인 | 채나라에게 멸망 |
출전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열국지(列國志)》 |
역사 | |
시대 | 주나라, 춘추 시대 |
건국 시기 | 주나라 초기 |
멸망 시기 | 기원전 500년경 |
지리 | |
수도 | 심(沈), 현대의 린취안 현 |
인문 | |
공용어 | 중국어 |
종교 | 중국 민간 신앙, 조상 숭배 |
통치 | |
정치 체제 | 백작령, 후작령 |
기타 |
2. 역사
심(沈)나라는 기원전 1050년경에 생겨났으며, 춘추 시대의 주석서인 좌전에 언급되어 있다. 심나라의 역사는 이 시기를 훨씬 거슬러 올라가지만, 주 왕조 시대에 주변 지역의 평화와 질서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백작령으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심나라의 역사적 경과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상 주요 사건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좁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춘추 시대 말기까지 존속했다. 심나라와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주 문왕의 열 번째 아들이 건국자라는 증거가 있지만, 고고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기원전 506년, 오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할 때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채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2] 심(沈)은 다시 부활하지 못했고, 이후 다른 국가의 이름에도 "심(沈)"이라는 이름은 사용되지 않았다.
전국 시대에 심씨 왕족의 후손들은 연나라에 정착했고, 이후 백월의 영토인 중국 남부로 흩어졌다. 특히 광동, 광서 지역의 심씨 후손들은 심(沈)이 아닌 선(冼)씨를 사용하는데, 이는 심예(沈汭)가 진 황제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조타가 지배하던 남쪽으로 도망쳐 성씨를 바꿨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2. 1. 건국과 초기 역사
심(沈)은 희(姬)성을 가진 자작 작위의 나라였다. 수도는 심(沈, 현재의 안후이성 푸양 시 린취안 현)이었고, 이곳을 거점으로 현재의 선추 현 일대에 세력을 구축하였다.주 성왕이 숙부 담계 재(주 무왕의 동생)를 심(沈)에 봉한 것이 그 시작이다.[2] 주 여왕 시기에 이르러 담계 재의 후손인 심자(沈子)가 심국(沈國)을 심자국(沈子國)으로 칭하였다.[2] 심나라는 심자가(沈子嘉) 재위 시기에 인접국이며 춘추전국시대 최강국 중 하나였던 초나라의 동맹국으로서, 진(晉)나라, 진(陳)나라, 채나라와는 사이가 안 좋았다.[2] 결국, 기원전 506년에 오나라가 초나라를 칠 때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채 소후의 분노를 사 채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으며, 채 소후는 심자가를 잡아 죽였다.[2]
심나라는 기원전 1050년경에 생겨났다. 춘추 시대의 주석서인 좌전은 이 나라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심나라의 역사는 이 시기를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기록에는 주 왕조 건국 이전에 북중국에 세워진 또 다른 고대 심나라가 언급되어 있다. 이 고대 국가는 기원전 11세기에 건국된 국가와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 이 나라는 주변 지역의 평화와 질서를 확보하기 위해 주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백작령으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 나라 역사의 경과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심나라가 역사상 주요 사건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저 작은 나라였기에 당시 작가와 역사가들에게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좁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춘추 시대 말기까지 존속했다.
심나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여러 점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주 문왕의 열 번째 아들이 이 나라의 건국자라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다양한 고고학자들은 이 유물이 실제로 심나라의 산물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심나라의 건국자를 밝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북송 구양수의 「신당서」 중의 「재상세계표」에는, 심씨의 시조는 주나라 문왕의 아들 염계재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설은 확실하지 않다.
「은주금문집성」에 수록된 서주 초기의 청동기 「심자타궤」가 있으며, 그 명문의 해석은 비교적 어렵지만, 명문 중에 「주공」 두 글자가 확인되었다. 쉬줘윈 및 원팅징 등의 학자는 이 명문을 통해 심씨가 서주 초기의 주공 단의 후예이며, 염계재가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2. 2. 춘추 시대와 멸망
주 성왕이 숙부 담계 재(주 무왕의 동생)를 심(沈)에 봉한 것이 그 시작이다. 주 여왕 시기에 이르러 담계 재의 후손인 심자(沈子)가 심국(沈國)을 심자국(沈子國)으로 칭하였다. 심(沈)나라는 심자가(沈子嘉) 재위 시기에 인접국이며 춘추전국시대 최강국 중 하나였던 초나라의 동맹국으로서, 진(晉)나라, 진(陳)나라, 채나라와는 사이가 안 좋았다. 결국, 기원전 506년에 오나라가 초나라를 칠 때 도우러 오지 않았다 하여 채 소후의 분노를 사 채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으며 채 소후는 심자가를 잡아 죽였다.[2]약소국이었던 심나라는 인접 강대국 초나라의 보호를 받는 속국의 처지였으므로 당시 관례에 따라 심자가의 아들이며 심나라의 마지막 왕세자 심윤술(沈尹戌)은 이미 오래전에 초나라에 볼모로 가서 좌사마로 임관해 있었다. 초나라 소왕은 채나라가 자신의 속국 심나라를 멸망시키고 마지막 군주 심자가를 잡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노하여 채나라를 정벌하였다. 채나라는 오나라와 동맹을 맺었고, 오나라의 합려는 손무(손자)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초나라를 침공하였다. 초나라는 심윤술을 좌사마(左司馬) 겸 총사령관으로 삼아 손무를 막아내게 했으나, 영윤 낭와(자상)가 심윤술의 명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군사를 움직였다가 크게 패하였다.[3][4][5]
심(沈)의 멸망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기원전 500년경 백거 전투 이전에 채나라가 심(沈)을 격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심(沈)의 지도자들은 초나라로 피신했다.) 심(沈)은 다시 부활하지 못했고, 이후 다른 국가의 이름에도 "심(沈)"이라는 이름은 사용되지 않았다.
2. 3. 멸망 이후
약소국이었던 심나라는 인접 강대국 초나라의 보호를 받는 속국의 처지였으므로 당시 관례에 따라 심나라 마지막 왕세자이자 심자가의 아들인 심윤술은 이미 오래전에 초나라에 볼모로 가서 좌사마로 임관해 있었다. 초나라 소왕은 채나라가 자신의 속국 심나라를 멸망시키고 마지막 군주 심자가를 잡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노하여 채나라를 정벌하였다. 채나라는 오나라와 동맹을 맺었고, 오나라의 합려는 손무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초나라를 침공하였다. 초나라는 심윤술을 좌사마(左司馬) 겸 총사령관으로 삼아 손무를 막아내게 했으나, 영윤 낭와(자상)가 심윤술의 명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군사를 움직였다가 크게 패하였다.[3][4][5]전국 시대에 심씨 왕족의 후손들은 연나라에 정착했고, 이후 백월의 영토인 중국 남부로 흩어졌다. 특히 중국 남부, 즉 광동, 광서 지역의 심씨 후손들은 성씨가 심(沈)이 아닌 선(冼)씨를 사용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심예(沈汭)가 진 황제 암살 음모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젊은 시절 친구였던 조타가 지배하던 중국 남부 지역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조타는 이후 남월 왕국을 건국했다. 심예는 현지 백월 추장과 결혼했다. 발각을 피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 위해 심예는 성씨를 선(冼)씨로 바꿨는데, 이는 심(沈)씨 성과 "먼저"를 의미하는 "선(先)"이라는 글자를 섞은 것이다. 심예가 남월에 머물 의향이 있음을 알고 조타는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오늘날의 양강시인 고량군(高凉郡)을 다스리도록 했다. 그 결과 선(冼)씨는 중국 남부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된다.
3. 역대 군주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
1 | 담계 재(聃季载) | ? ~ ? |
2 | 심자 | ? ~ ? |
3 | 심자집 | ? ~ ? |
4 | 심자정 | ? ~ ? |
5 | 심자가 | ? ~ ? |
심나라 군주는 536년간 20계대가 이어졌지만, 춘추좌씨전에서는 심자, 심자집, 심자정, 심자가 정도만 활약상을 자주 볼 수 있다.[6]
4. 문화와 유물
심(沈)나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여러 점 발견되었는데, 그중에는 주 문왕의 열 번째 아들이 이 나라의 건국자라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다양한 고고학자들은 이 유물이 실제로 심나라의 산물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심나라의 건국자를 밝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1]
5. 심(沈)씨와 선(冼)씨
전국 시대에 심씨 왕족의 후손들이 연나라에 정착했고, 이후 백월의 영토인 중국 남부로 흩어졌다. 특히 광둥, 광시 지역의 심씨 후손들은 심(沈)이 아닌 선(冼)씨를 사용한다. 전설에 따르면, 심예(沈汭)가 진 황제 암살 음모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기 때문에, 젊은 시절 친구였던 조타가 지배하던 중국 남부 지역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조타는 이후 남월을 건국했다. 심예는 현지 백월 추장과 결혼했다. 발각을 피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 위해 심예는 성씨를 선(冼)씨로 바꿨는데, 이는 심(沈)씨 성과 "먼저"를 의미하는 "선(先)"이라는 글자를 섞은 것이다. 심예가 남월에 머물 의향이 있음을 알고 조타는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오늘날의 양강시인 고량군(高凉郡)을 다스리도록 했다. 그 결과 선(冼)씨는 중국 남부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된다.
참조
[1]
문서
代 (戦国)|代
[2]
문서
춘추좌씨전 노정공 4년(鲁定公 四年)
[3]
문서
열국지
[4]
문서
손자병법
[5]
문서
명장
[6]
문서
춘추좌씨전 노희공 28년(鲁僖公 二十八年), 노성공 8년(鲁成公 八年), 노양공 27년(鲁襄公 二十七年), 노소공 4년, 5년, 23년(鲁昭公 四年, 五年、二十三年), 노정공 4년(鲁定公 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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