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토클레스 (시라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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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가토클레스는 기원전 4세기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의 지배자였다. 레기움에서 태어나 시라쿠사로 이주한 그는 군 경력을 시작하여 천인대장으로 진급했다. 과두정치 세력에 반대하여 민주주의 편에 섰으며, 기원전 317년 용병 군대를 이끌고 시라쿠사를 장악, 강력한 군대와 함대를 창설하여 시칠리아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후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여 아프리카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기원전 307년 패배하여 시칠리아로 도망쳤다. 기원전 306년 카르타고와 평화 협정을 맺고, 기원전 304년 시칠리아의 왕을 칭하며 통치를 확립했다. 아가토클레스는 말년에 독살 또는 자연사했으며,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그를 "범죄를 통해 군주가 된 자"의 예시로 언급했다.
아가토클레스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잔혹함을 겸비한 인물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 군주론(1513)에서 아가토클레스를 "범죄를 통해 군주가 된 자"의 예시로 들었다.[5] 마키아벨리는 아가토클레스가 도공의 아들로 태어나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뛰어난 능력과 잔혹함을 통해 시라쿠사의 왕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2. 생애
시라쿠사로 이주한 도공의 아들로 태어나 군에 입대했다. 기원전 333년 다마스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부와 지위를 얻었다. 과두 정당 전복을 시도하다 두 번 추방되었으나, 기원전 317년 용병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여 시라쿠사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1만 명의 시민을 추방하거나 살해했다.[6]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군사적 능력을 입증했다. 히메라 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시라쿠사가 포위되는 위기에서도, 기원전 310년 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했다. 비록 최종 패배했지만, 오펠라스를 배신하고 그의 군대를 흡수하는 등 냉혹한 면모를 보였다.
기원전 306년 카르타고와 평화 협정을 맺은 후, 기원전 304년 스스로 시칠리아의 왕을 칭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할리쿠스 강(현재의 프라타니 강) 동쪽의 시칠리아를 통치하며, 노년에도 카르타고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고려할 정도로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6]
기원전 289년 사망했는데, 자연사했다는 설과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다. 죽기 전 시라쿠사의 민주주의를 회복시켰고,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말년은 건강 악화와 손자 아르카가투스와의 권력 다툼으로 얼룩졌다.[6]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아가토클레스를 "범죄를 통해 군주가 된 자"의 예시로 들며, 그의 잔혹함과 결단력을 높이 평가했다.[5]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레기움 출신인 카르키누스는 고향에서 추방당하여 테르메 히메라에로 이주하여 현지 시민 여성과 결혼했다. 시칠리아 북부에 위치한 테르메는 섬의 서쪽에 속했으며, 당시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았다. 부부는 안탄데르와 아가토클레스 두 아들을 두었다. 기원전 343년, 아가토클레스가 약 18세였을 때 가족은 시라쿠사로 이주했는데, 이는 폭군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우스 2세의 정권을 전복한 티몰레온이 내전으로 인구가 감소한 도시를 위해 새로운 시민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르키누스와 아가토클레스는 시라쿠사 시민권을 얻었다.[6] 문헌에 따르면, 카르키누스는 도공이었고 아가토클레스는 그의 직업을 따랐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가 도기 공방을 소유한 부유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6] 아가토클레스는 자신의 낮은 계급 출신을 자주 언급하며, 이를 통치자로서의 자기 표현의 일부로 사용했는데, 이는 겸손을 가장하고 스스로를 평민으로 내세우는 것이 그의 인격의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6]
아가토클레스는 티몰레온 통치 기간 동안 군 경력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병사로 복무하다가 장교가 되었고, 기원전 337년 티몰레온이 사망한 후에는 아크라가스에 대한 원정에 참여하여 그를 천인대장으로 진급시킨 장군 다마스와 관계를 맺었다. 다마스가 사망한 후, 아가토클레스는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시라쿠사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고, 이는 그가 정치적 발전을 시작하기에 좋은 기반을 제공했다.[6]
티몰레온 사후, 시라쿠사는 민주주의자와 과두정치 세력 간의 갈등에 빠졌다. 과두정치 세력은 "육백인"이라는 단체를 통해 도시를 통치했다. 이 기간 동안 아가토클레스의 형 안탄데르는 장군으로 선출되었으므로 통치 세력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아가토클레스는 민중 집회에서 발언하며 야당 민주주의자 편에 섰다. 브루티족으로부터 남부 이탈리아의 크로톤을 방어하는 데 성공한 후, 그는 자신이 획득했다고 생각한 용맹에 대한 포상을 거부당했다.[6] 그 후 그는 공개적으로 정부에 반대하며, 지도적인 과두정치 세력인 소시스트라투스와 헤라클레이데스가 폭군이 되려 한다고 비난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아가토클레스는 시라쿠사를 떠나야만 했지만, 이것이 반드시 그가 공식적으로 추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6]
아가토클레스는 시켈리아 섬의 히메라(현재의 테르미 이메레세)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343년에 시라쿠사로 이주해 온 도공의 아들로, 아버지의 일을 배웠지만 군대에 들어갔다. 기원전 333년, 다마스의 미망인과 결혼했다. 아가토클레스는 시라쿠사의 과두 정당 전복을 꾀한 것으로 두 번이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기원전 317년, 민주주의 헌법을 지키겠다는 맹세하에 용병 군대와 함께 귀환하여 약 1만 명의 시민을 추방하거나 살해하고, 시라쿠사의 지배자가 되었다.[6]
2. 2. 카르타고와의 전쟁
기원전 311년, 아가토클레스는 히메라 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시라쿠사에서 포위되었다. 기원전 310년, 그는 봉쇄를 뚫고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는 과감한 시도를 감행했다. 그는 기원전 310년 8월 본 곶에 상륙하여 카르타고 군대를 격파하고 튀니스 근처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후 동쪽으로 이동하여 네아폴리스, 하드루메툼과 같은 해안 무역 도시들을 점령하려 했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에 따르면, 이 기회에 리비아인의 왕 아이리마스와 동맹을 맺어 카르타고를 포위하고 고립시키려 했다.[1] 하드루메툼, 탑수스 등 해안 도시들을 점령한 후, 아가토클레스는 튀니지 중부에 집중했다. 이 작전 전이나 작전 중 그는 아이리마스와의 동맹을 깨고 그를 추격하여 살해했지만, 그가 만든 전차를 포함한 그의 누미디아 군대는 유지했다.[1]
기원전 309/8년, 아가토클레스는 키레네의 통치자 오펠라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펠라스는 아가토클레스의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유용한 동맹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오펠라스에게 연합군이 아프리카에서 정복하는 모든 영토를 양도하고 자신은 시칠리아만 소유하겠다고 약속하며 그의 충성을 얻으려 했다.[2] 오펠라스는 그의 아내 에우티디케(유명한 밀티아데스의 후손)의 고향인 아테네에서 강력한 군대를 모았다. 아테네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투표권을 잃은 후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오펠라스는 두 달 이상에 걸친 고되고 위험한 행군 끝에 카르타고 영토에 도착했다.[3] 그는 아가토클레스에게 환영받았고 두 군대는 서로 근처에 야영했다. 그러나 며칠 후 아가토클레스는 키레네인들의 야영지를 공격하고 오펠라스를 살해함으로써 새로운 동맹을 배신했다.[4] 지도자를 잃은 키레네 부대는 아가토클레스에게 넘어갔다.
여러 차례 승리했지만, 결국 기원전 307년에 완전히 패배하여 비밀리에 시칠리아로 도망쳤다. 기원전 306년 카르타고와 평화 협정을 맺은 후, 아가토클레스는 기원전 304년에 시칠리아의 왕이라고 칭하며 그리스 도시들에 대한 통치를 더욱 확고히 했다. 카르타고와의 평화 조약으로 그는 할리쿠스 강(현재의 프라타니 강) 동쪽의 시칠리아를 통제하게 되었다.
2. 3. 시칠리아 왕
기원전 306년 카르타고와 평화 협정을 맺은 후, 기원전 304년 아가토클레스는 시칠리아의 왕을 자칭하며 그리스 도시들에 대한 통치를 이전보다 더 확고하게 확립했다. 카르타고와의 평화 조약으로 그는 할리쿠스 강(현재의 프라타니 강) 동쪽의 시칠리아를 통제하게 되었다.[6] 노년에도 그는 변함없는 에너지를 보여주었고, 죽을 때 카르타고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2. 4. 죽음과 유산
아가토클레스는 기원전 289년에 사망했는데, 자연사했다는 설과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다.[6] 그는 죽기 전 시라쿠사의 민주주의를 회복시켰고,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5]
그의 말년은 건강 악화와 손자 아르카가투스의 권력 다툼으로 순탄치 않았다. 아르카가투스는 할아버지의 왕위를 노리고 그를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6]
아가토클레스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지도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온화하고 대중적인 "폭군"의 면모도 보였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시라쿠사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으며,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기도 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 『군주론』에서 아가토클레스를 "범죄를 통해 군주가 된 자"의 예시로 들었다.[5] 마키아벨리는 아가토클레스가 자신의 범죄를 빠르고 무자비하게 저질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아가토클레스는 카르타고인들을 격퇴하고 자신의 영토 주민들의 충성을 얻어 잔혹함만큼이나 영광을 얻었다.
3. 평가
마키아벨리는 아가토클레스가 성공한 이유를 그의 잔혹함을 빠르고 무자비하게 사용하는 능력에서 찾았다. 그는 잔혹함이 "한 번에 가해지고 자신의 안전에 필요한 것이며, 그 후에는 신민에게 이익이 될 수 없는 한 지속되지 않는다"라는 조건 하에 사용될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가토클레스는 침략해 온 카르타고인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영토 주민들의 충성을 얻음으로써 잔혹함뿐만 아니라 영광도 얻었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카르키누스 | 레기움 출신, 테르메 히메라에로 이주 |
어머니 | 불명 | 테르메 히메라에 시민 |
형 | 안탄데르 | 장군 |
첫 번째 아내 | 다마스의 미망인 | |
장남 | 아르카가토스 | 기원전 307년 사망, 아르카가토스의 아버지 |
차남 | 헤라클레이데스 | 기원전 307년 사망 |
두 번째 아내 | 알키아 | |
딸 | 라나사 | 에피루스 왕 피로스의 두 번째 아내 |
아들 | 아가토클레스 | |
세 번째 아내 | 시라쿠사의 테옥세나 |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의붓딸 |
아들 | 리비아의 아르카가토스 | |
딸 | 이집트의 테옥세나 | 아가토클레아, 이집트의 아가토클레스의 어머니 |
참조
[1]
간행물
Encyclopédie Berbère, Ailymas, G. Camps
https://journals.ope[...]
1986-07
[2]
문서
Diodorus xx. 40.1-4
[3]
문서
Diodorus xx. 41-42
[4]
문서
Diodorus xx. 42.4-5; 43.3-4
[5]
웹사이트
The Project Gutenberg eBook of The Prince, by Nicolo Machiavelli | Chapter VIII
https://www.gutenber[...]
2022-01-15
[6]
문서
Diod. Exc. Hoesch. xxi.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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