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브델카데르 태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브델카데르 태수는 1808년 알제리에서 태어난 인물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집안에서 성장하여 코란을 암송하고 학문적 재능을 보였다.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침략에 맞서 16년간 저항했으며, 이후 프랑스에 항복하여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정착했다. 그는 프랑스와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1860년 다마스쿠스 사건에서 기독교인을 보호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아브델카데르는 알제리 민족 운동의 아버지로 칭송받으며, 관용과 인도주의적 행보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마스카라주 출신 - 자히아 데하르
    자히아 데하르는 알제리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미성년 매춘을 시작하여 성 추문에 연루되었으나 모델과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영화와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 하심 왕조 - 아리프 알비
    아리프 알비는 파키스탄의 정치인으로, 2018년부터 2024년까지 파키스탄의 제13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치과의사이자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2018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 하심 왕조 - 후세인 빈 압둘라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와 라니아 왕비의 장남인 후세인 빈 압둘라는 하심 가문의 일원으로 2009년 왕세자에 책봉되어 섭정 역할 수행, 왕세자 재단을 통한 사업 주도, 국제 무대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브델카데르 태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65년 에티엔 카르자트가 촬영한 사진
1865년 에티엔 카르자트가 촬영
존칭 접두사에미르
이름압드 알카디르 알자자이리
로마자 표기'압드 알카디르 이븐 무히 알딘 알하사니
출생일1808년 9월 6일
출생지귀테나, 알제리 섭정
사망일1883년 5월 26일
사망지다마스쿠스, 오스만 시리아
안장지엘 알리아 묘지
별칭없음
군사 정보
소속없음
계급에미르
지휘없음
전투프랑스의 알제리 침공
마스카라 점령 (1831년)
막타 전투
시그 전투
시디-브라힘 전투
우에드 아슬라프 전투
아게딘 전투
훈장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크루아)
피우스 9세 훈장
메지디에 훈장 1등급
구세주 훈장 (그랑 크루아)
가족 정보
배우자정보 없음
친척정보 없음
기타 활동
기타 활동정보 없음

2. 초기 생애 및 교육

압델카데르는 1808년 9월 6일[3] 마스카라 인근 엘 게트나의 종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드리시 왕조를 통해 무함마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종교 지도자였다.[5] 압델카데르는 샤리프 칭호와 ''알-하사니''라는 존칭을 받았다.[4]

자위야에서 성장한 그는 코란을 암송하여 ''하피즈'' 칭호를 받았고, 오란에서 신학, 법학, 문법 등을 공부했다. 이슬람 율법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는 에세이를 발표하기도 했다.[7]

1825년 순례를 통해 이맘 샤밀을 만났고, 다마스쿠스바그다드를 여행하며 종교적 열정을 키웠다. 알제리 귀국길에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의 개혁에 감명을 받았고, 7월 왕정하의 프랑스군 도착 몇 달 전 고국에 돌아왔다.

2. 1. 가문 및 배경

압델카데르는 1808년 9월 6일[3] 마스카라 인근 엘 게트나에서 종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무히에딘(또는 "무히 알-딘") 알-하사니는 Qadiriyya 타리카와 연관된 종교 기관의 무카담이었으며, 이드리시 왕조를 통해 무함마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5] 따라서 압델카데르는 ''샤리프''였으며, ''알-하사니'' ("하산 이븐 알리의 후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이름에 덧붙일 수 있었다.[4]

그는 19세기 초 오우에드 알-함맘 강둑에 있는 번성하는 공동체의 중심지가 된 아버지의 자위야에서 자랐다.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신학, 법학, 문법에 대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다섯 살 때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고 하며, 재능 있는 학생이었던 압델카데르는 14세에 코란을 암송하여 ''하피즈'' 칭호를 받았고, 1년 후 오란으로 가서 추가 교육을 받았다.[4] 그는 훌륭한 연설가였고, 시와 종교적인 비판으로 동료들을 흥분시킬 수 있었다.[6] 그는 이슬람 율법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는 것에 관한 수많은 에세이를 발표한 것으로 유명하다.[7]

1825년, 그는 아버지와 함께 메카순례를 떠났다. 그곳에서 이맘 샤밀을 만나 다양한 주제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또한 다마스쿠스바그다드를 여행했고, 이븐 아라비와 압둘 카디르 길라니(알제리에서는 ''알-질라니''라고도 불림)와 같은 유명한 무슬림들의 무덤을 방문했다. 이 경험은 그의 종교적 열정을 굳건히 했다. 알제리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가 수행한 개혁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7월 왕정하의 프랑스 군대가 도착하기 몇 달 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2. 2. 어린 시절 및 교육

1808년 9월 6일[3], 압델카데르는 마스카라 인근 엘 게트나에서 종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무히에딘(또는 "무히 알-딘") 알-하사니는 Qadiriyya 타리카와 연관된 종교 기관 무카담이었으며, 이드리시 왕조를 통해 무함마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5] 이러한 배경으로 압델카데르는 ''샤리프''로 불렸으며, 이름에 ''알-하사니'' ("하산 이븐 알리의 후손")라는 존칭을 붙일 수 있었다.[4]

압델카데르는 아버지의 자위야에서 성장했다. 이곳은 19세기 초 오우에드 알-함맘 강둑에 자리 잡은 번성하는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그는 다른 학생들처럼 신학, 법학, 문법 등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다섯 살에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으며, 14세에 코란을 암송하여 ''하피즈'' 칭호를 받았다. 이후 오란에서 추가 교육을 받았다.[4] 그는 뛰어난 연설가로 시와 종교 비평으로 동료들을 감동시켰으며, 이슬람 율법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는 বিষয়ে 관한 여러 에세이를 발표했다.[6][7]

1825년, 그는 아버지와 메카순례를 떠났다. 그곳에서 이맘 샤밀을 만나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다마스쿠스바그다드를 여행하며 이븐 아라비, 압둘 카디르 길라니(알제리에서는 ''알-질라니''로 불림) 등 유명 무슬림의 무덤을 방문하며 종교적 열정을 다졌다. 알제리로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의 개혁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7월 왕정프랑스군 도착 몇 달 전 귀국했다.

2. 3. 순례 및 견문

1825년, 압델카데르는 아버지와 함께 메카순례를 떠났다. 그곳에서 이맘 샤밀을 만나 다양한 주제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다마스쿠스바그다드를 여행하며 이븐 아라비, 알제리에서 ''알-질라니''라고도 불리는 압둘 카디르 길라니 등 유명한 무슬림들의 무덤을 방문했다. 이 경험은 그의 종교적 열정을 굳건하게 만들었다. 알제리로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가 시행한 개혁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7월 왕정하의 프랑스 군대가 도착하기 몇 달 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3. 프랑스 침략과 저항

1830년 알제리는 프랑스에 의해 침략당했으며, 프랑스의 식민 지배는 오스만 제국과 쿨루글리의 지배를 대체했다.[6] 19세기 초, 프랑스가 도착했을 때 오스만 제국에 대한 억눌린 불만이 많았고 여러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제리인들은 처음에는 프랑스에 전혀 대항할 수 없었다.

1831년 1월 프랑스 아프리카 군이 오랑에 도착했을 때, 압델카데르의 아버지에게 프랑스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이끌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6] 무히에딘은 지하드를 외쳤고, 그와 그의 아들은 도시 성벽 아래에서 벌어진 초기 공격에 연루되었다.[4]

1832년 가을 서부 부족 회의에서, 그는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거절 이후 아미르 알-무미닌(일반적으로 "에미르"로 축약)으로 선출되었다.[8] 1년 안에 압델카데르는 징벌적 습격과 신중한 정치를 결합하여 이 지역 부족들을 통합하고 안보를 재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영향력은 이제 오랑 주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4]

1834년 루이 알렉시 데미셸 장군은 데미셸 조약을 체결하여 오랑 주에 대한 거의 완전한 통제권을 압델카데르에게 양도했다.[6] 프랑스에게 이것은 압델카데르를 서부에 가두는 동시에 이 지역의 평화를 확립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공동 서명자인 베르베르족과 프랑스인들의 눈에 그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4]

이 조약을 시작으로 그는 셸리프 강, 밀리아나, 메데아 주 부족들에게 자신의 통치를 부과했다.[6] 프랑스 고위 지휘부는 데미셸 조약의 불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데미셸 장군을 소환하고 카미유 알퐁스 트레젤 장군으로 교체하여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 1834년 7월, 압델카데르의 부족 전사들은 막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예상치 못한 패배를 안겨주었다.[4]

프랑스는 군사 작전을 강화했고, 1836년 시카크 전투 등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 알제리 여론은 양분되었고, 1837년 4월 토마 로베르 뷔조 장군은 압델카데르에게 평화 제안을 하도록 유도했다.[9] 1837년 5월 30일, 오랜 협상 끝에 타프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알제리 내륙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을 압델카데르에게 부여했지만, 프랑스의 제국 주권은 인정했다. 압델카데르는 오랑 주 전체와 티테리 주 등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6]

3. 1. 프랑스의 알제리 침략

1830년 알제리는 프랑스에 의해 침략당했으며, 프랑스의 식민 지배는 오스만 제국과 쿨루글리의 지배를 대체했다.[6] 19세기 초, 프랑스가 도착했을 때 오스만 제국에 대한 억눌린 불만이 많았고 여러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제리인들은 처음에는 프랑스에 전혀 대항할 수 없었다. 1831년 1월 프랑스 아프리카 군이 오랑에 도착했을 때, 압델카데르의 아버지에게 프랑스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이끌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6] 무히에딘은 지하드를 외쳤고, 그와 그의 아들은 도시 성벽 아래에서 벌어진 초기 공격에 연루되었다.[4]

이 시점에서 압델카데르가 두각을 나타냈다. 1832년 가을 서부 부족 회의에서, 그는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거절 이후 아미르 알-무미닌(일반적으로 "에미르"로 축약)으로 선출되었다.[8] 임명은 5일 후 마스카라의 대 모스크에서 확인되었다. 1년 안에 압델카데르는 징벌적 습격과 신중한 정치를 결합하여 이 지역 부족들을 통합하고 안보를 재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영향력은 이제 오랑 주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4] 지역 프랑스 총사령관 루이 알렉시 데미셸 장군은 평화 협상 기간 동안 압델카데르를 이 지역의 주요 대표로 여겼으며, 1834년 그들은 데미셸 조약을 체결하여 오랑 주에 대한 거의 완전한 통제권을 압델카데르에게 양도했다.[6] 프랑스에게 이것은 압델카데르를 서부에 가두는 동시에 이 지역의 평화를 확립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동 서명자로서 베르베르족과 프랑스인들의 눈에 그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4]

이 조약을 시작으로 그는 셸리프 강, 밀리아나, 메데아 주 부족들에게 자신의 통치를 부과했다.[6] 프랑스 고위 지휘부는 데미셸 조약의 불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데미셸 장군을 소환하고 카미유 알퐁스 트레젤 장군으로 교체하여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 압델카데르의 부족 전사들은 1834년 7월 막타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만났고, 프랑스는 예상치 못한 패배를 겪었다.[4]

프랑스의 대응은 군사 작전을 강화하는 것이었고, 새로운 사령관 아래에서 프랑스는 1836년 시카크 전투를 포함한 몇 차례의 중요한 만남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에서 알제리에 대한 정치적 여론이 양가적으로 바뀌고 있었고, 1837년 4월 토마 로베르 뷔조 장군이 이 지역에 배치되었을 때, 그는 "압드 엘-카데르가 평화 제안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권한을 받았다".[9] 그 결과, 오랜 협상 끝에 1837년 5월 30일 타프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알제리 내부 지역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을 압델카데르에게 부여했지만, 프랑스의 제국 주권에 대한 권리를 인정했다. 따라서 압델카데르는 오랑 주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으며, 그의 영향력을 인접한 티테리 주 등으로 확대했다.[6]

1830년에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알제리를 획득하자[38], 프랑스 맞은편에 위치한 알제리는 영국에서의 인도와 마찬가지로 최중요 지역이 되어 적극적인 식민 활동이 반복되었다. 법적으로는 지리적인 요인으로 인해 식민지라기보다는 본국 영토의 연장으로 취급되어 병합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으며, 토지 수탈, 원주민의 민족성 파괴, 이슬람교 탄압, 철저한 착취, 모든 참정권 거부가 이루어졌다. 또한 정권에 대한 반대자 등의 알제리 추방도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알제리를 활동 거점으로 삼아 더욱 적극적으로 수탈에 참여했다.[39] 일체의 권리를 허용받지 못하고, 토지 소유 제도가 파괴되어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거나 수탈당하는 알제리 여러 민족은 강력하게 반발하여,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포함한 저항 활동이 발생했다. 그 때문에 최종적으로 100만 명 이상의 식민을 진행하면서도, 식민 정책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아브델카데르의 투쟁은 이러한 시대 배경에 의해 뒷받침되었다.[40]

3. 2. 압델카데르의 등장과 초기 저항

1830년 프랑스알제리 침략으로 오스만 제국과 쿨루글리의 지배는 막을 내렸다. 프랑스군이 도착했을 때, 알제리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불만이 컸고, 19세기 초 여러 반란을 일으켰지만 프랑스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1831년 1월, 프랑스 아프리카 군이 오랑에 도착하자 압델카데르의 아버지에게 저항 운동을 이끌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6] 무히에딘은 지하드를 외쳤고, 그와 그의 아들은 오랑 성벽 아래에서 벌어진 초기 공격에 참여했다.[4]

1832년 가을, 서부 부족 회의에서 압델카데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미르 알-무미닌(에미르)으로 선출되었다.[8] 5일 후 마스카라의 대 모스크에서 임명이 확인되었다. 1년 안에 압델카데르는 징벌적 습격과 신중한 정치를 통해 이 지역 부족들을 통합하고 안보를 재확립했다. 그의 영향력은 오랑 주 전체로 확대되었다.[4] 1834년, 프랑스 총사령관 루이 알렉시 데미셸 장군은 데미셸 조약을 체결하여 오랑 주에 대한 거의 완전한 통제권을 압델카데르에게 양도했다.[6] 이는 압델카데르를 서부에 가두는 동시에 평화를 확립하는 방법이었지만, 베르베르족과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그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4]

이 조약을 시작으로 압델카데르는 셸리프, 밀리아나, 메데아 주 부족들에게 자신의 통치를 부과했다.[6] 프랑스 고위 지휘부는 데미셸 조약의 불리한 조건에 불만을 품고 데미셸 장군을 소환, 카미유 알퐁스 트레젤 장군으로 교체하여 적대 행위를 재개했다. 1834년 7월, 압델카데르의 부족 전사들은 막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예상치 못한 패배를 안겨주었다.[4]

프랑스는 군사 작전을 강화했고, 1836년 시카크 전투 등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 알제리 여론은 양분되었고, 1837년 4월 토마 로베르 뷔조 장군은 압델카데르에게 평화 제안을 하도록 유도했다.[9] 1837년 5월 30일, 오랜 협상 끝에 타프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알제리 내륙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을 압델카데르에게 부여했지만, 프랑스의 제국 주권은 인정했다. 압델카데르는 오랑 주 전체와 티테리 주 등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6]

1831년 5월, 알제 동쪽 메종 카레 전투에서 외인 부대 병사 27명을 전사시키며 이름을 알렸다. 아브델카데르는 알제에서 오랑까지 활약했고, 그해 말 오랑 근교에서 프랑스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1832년 가을, 샤리프의 혈통을 잇는 아브델카데르는 서부 부족에게 인정받아 아미르가 되었다. 24세의 젊은 나이로 알제리 동부의 아흐마드 베이와 함께 반식민지 투쟁을 이끌었다.[43] 당시 프랑스 외인 부대는 유럽 전투에 적합한 장비를 갖추고 있어, 아브델카데르의 경쾌한 스파히(북아프리카 민병)에게 종종 패배했다. 외인 부대 사령관 스토펠 대령은 장비 갱신과 부대 개편을 시작했고, 1833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게릴라전 경험이 있는 스페인군 부대를 투입하여 아브델카데르 군대에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1834년, 프랑스는 동부의 아흐마드 베이 공격을 중시하며 아브델카데르를 회유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아브델카데르 역시 오랑 공략을 단념하고 재건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에, Louis Alexis Desmichels|루이 알렉시 데미셸프랑스어 장군과 일시적인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주권을 인정했지만, 아브델카데르를 지방 장관(베그)으로 임명하고, 화약, 무기, 유황 구매권과 알주 항구의 상업적 이용을 허용하는 등 그의 요구를 대폭 수용했다.[44] 마스카라 족장으로서 서부 알제리 전부족 지휘권을 얻은 아브델카데르는 무기, 탄약을 자체 생산하고자 유럽 기술자들을 초빙했다. 1835년, 프랑스를 약체로 판단한 그는 8,000명의 기병과 4,000명의 근대 보병을 이끌고 봉기, 라 마클라 협곡에서 프랑스군에게 500명의 사상자를 냈다.[45] 프랑스는 증원 부대를 파견하고 총독을 클로젤 장군으로 교체, 마스카라를 공격했다. 마스카라는 제압되었지만, 이 군사 행동은 오히려 부족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46] 1836년 알랑주 장군의 대패, 1837년 콘스탄틴 원정 실패(1,000명 사망)로 프랑스 식민지군 정세는 악화되었다.

3. 3. 데미셸 조약과 타프나 조약

루이 알렉시 데미셸 장군은 평화 협상 기간 동안 압델카데르를 이 지역의 주요 대표로 여겼으며, 1834년 그들은 데미셸 조약을 체결하여 오랑 주에 대한 거의 완전한 통제권을 압델카데르에게 양도했다.[6] 프랑스에게 이것은 압델카데르를 서부에 가두는 동시에 이 지역의 평화를 확립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데미셸 조약은 공동 서명자인 베르베르족과 프랑스인들의 눈에 그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4] 이 조약으로 마스카라의 족장으로 인정받아 서부 알제리의 전부족의 지휘권을 얻은 아브델카데르는, 무기 탄약을 독자적으로 생산할 계획을 세웠다. 즉시 유럽인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본격적인 무기 제조를 시작했다. 또한 이 상태를 방치하는 프랑스를 약해졌다고 판단하여, 1835년에는 알제리 전역에서 프랑스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8,000명의 기병과 4,000명의 근대적인 보병을 이끌고 봉기하여, 라 마클라 협곡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사상자 500명의 손해를 입혔다.[45]

프랑스 고위 지휘부는 데미셸 조약의 불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데미셸 장군을 소환하고 카미유 알퐁스 트레젤 장군으로 교체하여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 압델카데르의 부족 전사들은 1834년 7월 막타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만났고, 프랑스는 예상치 못한 패배를 겪었다.[4]

1837년, 프랑스는 다시 동부 원정을 위해 아브델카데르 세력권인 서부와의 평화가 필요해져, 뷔조 장군을 협상 사절로 아브델카데르에게 파견한다. 프랑스는 아브델카데르와 평화를 성립하기 위해 1834년 조약보다 더 아브델카데르에게 양보하고, 3,000정의 총화기와 화약 제공, 알제리 서부에서의 아브델카데르의 주권을 인정했다(타프나 조약[47]). 그러나 이 타프나 조약은 이행되지 않았고, 아브델카데르 역시 군을 재건하는 시간으로 활용했을 뿐이었다.

4. 새로운 국가 건설

타프나 조약 이후, 아브델카데르는 타그뎀트를 수도로 삼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술탄 칭호를 거부하고 종교적 권위에 집중하는 신정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10][11]

그는 남쪽의 사하라와 알-티자니로 군사 행동을 개시했고, 동쪽으로는 셸리프 계곡과 티테리를 향해 진출했지만 하지 아흐메드에게 저항을 받았다. 1838년 말까지 그의 통치는 동쪽으로 카빌리에, 남쪽으로 비스크라, 모로코 국경까지 확장되었다.[6]

에미르 압드 알-카데르 국가의 지도 (1836-1839)


압델카데르의 에미레이트의 최대 영토


아브델카데르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국적에 관계없이 등용했다. 유대인기독교인도 고용했는데, 레옹 로셰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6]

4. 1. 타그뎀트 수도 건설

타프나 조약 이후 평화로운 시기에 아브델카데르 에미르는 타그뎀트를 수도로 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 그는 술탄 칭호를 거부하고 자신의 정신적 권위에 집중했으며,[10] 그가 창조한 국가는 신정 정치 체제였고, 주요 직책은 종교 귀족들이 차지했다. 주요 통화 단위는 예언자의 이름을 따 '무함마디야'로 명명되었다.[11]

압델카데르는 내륙 마을에 무기고, 창고, 작업장을 설치하여 영국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기 위한 물품을 보관했다. 그는 검소한 생활(천막 생활)을 통해 백성들에게 긴축의 필요성을 가르쳤고, 교육을 통해 국가와 독립의 개념을 가르쳤다.[6]

4. 2. 영토 확장 및 통치

타프나 조약 이후의 평화로운 시기는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고, 아브델카데르 에미르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타그뎀트에 수도를 둔 새로운 기능적 국가를 공고히 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약화시키고, 여러 차례 술탄 칭호를 거부하며 자신의 정신적 권위에 집중하려 노력했다.[10] 그가 창조한 국가는 광범위하게 신정 정치적이었으며, 권위 있는 대부분의 직책은 종교 귀족 구성원들이 차지했다; 심지어 주요 통화 단위의 이름도 예언자를 따라 '무함마디야'라고 명명되었다.[11]

그의 첫 번째 군사 행동은 남쪽으로 사하라와 알-티자니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그는 셸리프 계곡과 티테리를 향해 동쪽으로 이동했지만, 콘스탄틴 주의 베이인 하지 아흐메드에게 저항을 받았다. 다른 행동으로 그는 프랑스를 지원한 주아트나의 쿨루글리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1838년 말까지 그의 통치는 동쪽으로 카빌리에, 남쪽으로 비스크라까지, 그리고 모로코 국경까지 확장되었다.[6] 그는 알-티자니와 계속 싸웠고, 그의 수도인 아인 마디를 6개월 동안 포위하여 결국 파괴했다.

압델카데르가 갓 시작한 국가를 이끄는 데 도움이 된 또 다른 측면은 국적에 관계없이 훌륭한 인재를 찾아 활용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유대인기독교인을 고용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레옹 로셰스였다.[6] 그의 군사적 접근 방식은 지역 부족의 지원을 받는 2,000명의 정규군을 두는 것이었다. 그는 내륙 마을에 무기고, 창고, 작업장을 설치하여 영국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판매할 물품을 보관했다. 검소한 생활(천막 생활)을 통해 그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긴축의 필요성을 가르쳤고, 교육을 통해 그들에게 국가와 독립과 같은 개념을 가르쳤다.[6]

4. 3. 다양한 인재 활용

타프나 조약 이후 평화로운 시기에 아브델카데르 에미르는 타그뎀트를 수도로 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권력보다는 정신적 권위에 집중하려 노력했으며, 술탄 칭호를 여러 차례 거부했다.[10] 그가 세운 국가는 신정 정치 체제였으며, 주요 직책은 종교 귀족들이 맡았다. 심지어 주요 통화 단위도 예언자의 이름을 따 '무함마디야'로 불렸다.[11]

아브델카데르는 국적에 관계없이 훌륭한 인재를 찾아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국가 건설 과정에서 유대인기독교인을 고용했는데, 그중 한 명이 레옹 로셰스였다.[6] 그는 지역 부족의 지원을 받는 2,000명의 정규군을 운영했다. 또한 내륙 마을에 무기고, 창고, 작업장을 설치하여 영국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기 위한 물품을 보관했다. 검소한 생활을 통해 백성들에게 긴축의 필요성을 가르쳤고, 교육을 통해 국가와 독립의 개념을 심어주었다.[6]

5. 저항의 종식과 항복

압델카데르는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서부 카빌리아의 카빌족을 제외한 동부 부족들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이 반란 진압에 기여했으며, 1844년 탕헤르 조약 이후 모로코의 압드 알 라흐만의 칙령으로 에미르는 그의 왕국 전체에서 불법화되었다.[11]

모로코의 압드 알 라흐만은 에미르가 모로코인들을 격파하고 투옥한 지 6개월 후 압델카데르를 공격하고 그의 보급품을 파괴하기 위해 비밀리에 병사들을 보냈다.[13] 모로코인들은 아구에딘 전투에서 또 다른 공세를 펼쳤지만, 압델카데르에게 세 번의 군사적 교전에서 모두 패배했다. 이후 압델카데르는 모로코에서 철수하여 협상을 위해 프랑스 영토로 들어가는 선택을 했다.[13]

1847년 12월 23일, 아미르 압델카데르의 항복. 오귀스탱 레지스가 그림


장-바티스트-앙제 티시에의 아미르 압델카데르 초상화, 1852년


1847년 12월 23일, 압델카데르는 알렉산드리아 또는 아크레로 갈 수 있다는 약속을 받고 루이 쥐쇼 드 라모리시에르 장군에게 항복했다.[6]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이틀 후 그의 항복은 프랑스 알제리 식민지 총독인 앙리 다르리앙 공작에게 공식화되었으며, 압델카데르는 그에게 상징적으로 그의 군마를 넘겨주었다.[11]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라모리시에르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압델카데르는 프랑스로 수송되었고, 동쪽으로 가는 것이 허용되는 대신, 결국 감금되었다.[6][11]

5. 1. 프랑스의 전면 공세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 필리프가 타프나 조약의 조건을 무시하고 철문을 돌파하는 원정대를 이끌면서 평화는 깨졌다. 1839년 10월 15일, 압드 알 카디르는 프랑스가 미티자 평원을 식민지화하는 동안 프랑스를 공격하여 침략자들을 격파했다. 이에 프랑스는 1839년 11월 18일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12] 토마 로베르 부조 장군이 1841년 2월 알제리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는데, 이번에는 총독으로 부임했다. 압델카데르는 타프나 조약을 추진했던 부조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고무되었지만, 부조의 전술은 이전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부조는 알제리 정복을 최종 목표로 삼아 전멸 작전을 펼쳤다.[6]

압델카데르는 게릴라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1842년까지 10년 동안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종종 프랑스와 전술적 휴전을 맺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권력 기반은 알제리 서부에 있었고, 그곳에서 그는 부족들을 프랑스에 대항하여 연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기사도로 유명했으며, 프랑스 포로들에게 먹일 음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석방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압델카데르는 정치적, 군사적 지도력을 보여주었고, 유능한 행정가이자 설득력 있는 웅변가로 활동했다. 이슬람 교리에 대한 그의 열렬한 믿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842년 초까지 그의 투쟁은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토마 로베르 부조 원수는 압델카데르가 사용하는 게릴라 전술에 적응하면서 저항을 진압했다. 압델카데르는 경보병으로 재빨리 공격하여 지형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기동성을 높였다. 프랑스군은 원주민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주민들이 지도자를 버리도록 굶주리게 하기 위해 시골에서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1841년까지 그의 요새는 거의 파괴되었고 그는 오랑 주 내륙을 방황해야 했다. 1842년, 그는 틀렘센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모로코와의 통신선은 효과적이지 않았다. 그는 휴식을 위해 모로코 국경을 넘을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이슬리 전투에서 모로코를 격파했다.[6] 그는 모로코를 떠났고, 시디 브라힘 전투에서 시디 브라힘을 점령함으로써 프랑스와의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6]

1837년 프랑스는 동부 원정을 위해 아브델카데르 세력권인 서부와의 평화가 필요했고, 뷔조 장군을 협상 사절로 아브델카데르에게 파견했다. 프랑스는 아브델카데르와 평화를 성립하기 위해 1834년 조약보다 더 많은 것을 양보했고, 3,000정의 총화기와 화약 제공, 알제리 서부에서의 아브델카데르의 주권을 인정했다(타프나 조약[47]). 그러나 이 타프나 조약은 이행되지 않았고, 아브델카데르 역시 군을 재건하는 시간으로 활용했을 뿐이었다. 1838년 아브델카데르는 군대 재건에 착수하여 5,000명의 보병과 1,000명의 기병, 외인 부대에서 탈주한 헝가리인을 지휘관으로, 탈주병을 중핵으로 하는 150명의 포병대를 조직했다. 각지에서 프랑스군을 농락했지만, 뷔조 장군이 알제리 총독으로 취임하자 프랑스군은 대폭 증강되어 1840년 시점에서 6만 명을 동원했다. 이 대병력에 아브델카데르는 압도당했지만, 뷔조의 군대는 1844년에는 9만, 1847년에는 에 달하게 되어 전력 차이는 확대되었다.[48]

5. 2. 모로코로의 피신과 재기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 필리프가 타프나 조약의 조건을 무시하고 철문을 돌파하는 원정대를 이끌면서 평화는 깨졌다. 1839년 10월 15일, 압드 알-카디르는 프랑스가 미티자 평원을 식민지화하는 동안 프랑스를 공격하여 침략자들을 격파했고, 프랑스는 1839년 11월 18일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12]

토마 로베르 부조 장군이 1841년 2월 알제리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압델카데르는 타프나 조약을 추진했던 부조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고무되었지만, 부조의 전술은 알제리 정복을 최종 목표로 삼아 전멸 작전을 펼치는 것으로 바뀌었다.[6] 부조 장군은 "나는 너희 산에 들어가 너희 마을과 너희 수확물을 불태우고, 너희 과일 나무를 베어 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12]

압델카데르는 게릴라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1842년까지 10년 동안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종종 프랑스와 전술적 휴전을 맺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권력 기반은 알제리 서부에 있었고, 그곳에서 그는 부족들을 프랑스에 대항하여 연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기사도로 유명했으며, 프랑스 포로들에게 먹일 음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석방하기도 했다.

1842년 초까지 그의 투쟁은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토마 로베르 부조 원수는 압델카데르가 사용하는 게릴라 전술에 적응하면서 저항을 진압했다. 프랑스군은 원주민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주민들이 지도자를 버리도록 굶주리게 하기 위해 시골에서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1841년까지 그의 요새는 거의 파괴되었고 그는 오랑 주 내륙을 방황해야 했다. 1842년, 그는 틀렘센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모로코와의 통신선은 효과적이지 않았다. 그는 휴식을 위해 모로코 국경을 넘을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이슬리 전투에서 모로코를 격파했다.[6] 그는 모로코를 떠났고, 시디 브라힘 전투에서 시디 브라힘을 점령함으로써 프랑스와의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6]

1837년 프랑스는 아브델카데르 세력권인 서부와의 평화를 위해 뷔조 장군을 협상 사절로 파견, 타프나 조약을 성립시켰다.[47] 그러나 이 조약은 이행되지 않았고, 아브델카데르는 군을 재건하는 시간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1838년 아브델카데르는 군대 재건에 착수하여, 5,000명의 보병과 1,000명의 기병, 외인 부대에서 탈주한 헝가리인을 지휘관으로, 탈주병을 중핵으로 하는 150명의 포병대를 조직했다. 뷔조 장군이 알제리 총독으로 취임하자 프랑스군은 대폭 증강되어, 1840년 시점에서 6만 명을 동원했고, 1847년에는 10만 7000명에 달하게 되어 전력 차이는 확대되었다.[48]

아브델카데르는 알제리 남부의 고원 지역으로 몰렸고, 결국 1842년 모로코로 축출되었다. 1843년에 돌아와 몇몇 부족을 모아 봉기했지만, 또다시 패배했다. 모로코로 도망친 그는 반프랑스적인 현지 술탄을 이용하여 군대 재건에 착수하여, 3년간 프랑스군 주둔지를 산발적으로 습격하며 힘을 축적해갔다. 1847년 12월, 모로코와의 국경 지대에서 외인 부대 제1연대와 교전하여 아브델카데르의 군대는 괴멸적인 손해를 입었다. 오랜 투쟁에 지쳐 있던 그에게 각 부족의 이반이 잇따랐다. 모로코에서 재기를 도모하려 했지만, 현지 무어인 간의 내분이 치명적이 되어, 그는 항복을 결심했다. 일가족이 외인 부대에게 학살당하는 것을[49] 두려워한 그는, 알제리 남부 변경 지대에서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 프랑스 정규군에 투항하여, 16년에 걸친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50]

처음에는 외인 부대가 그를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그의 투쟁심에 대해 점차 경의를 갖게 되었다.[51][52] 아브델카데르 본인에게는 광신자적인 경향은 없었고, 투쟁의 대상은 알제리 침략에 대한 것이었다. 동시대 유럽 측 문헌에는, 포로에 대해 "관대한 배려, 상냥한 동정"을 보이며, 각자의 신앙을 존중하도록 주의했다는 기술이 존재한다.[53]

5. 3. 항복과 프랑스 억류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 필리프가 타프나 조약의 조건을 무시하고 철문을 돌파하는 원정대를 이끌면서 평화가 깨졌다. 1839년 10월 15일, 압드 알 카디르는 프랑스가 미티자 평원을 식민지화하는 동안 프랑스를 공격하여 침략자들을 격파했고, 프랑스는 1839년 11월 18일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12] 토마 로베르 부조 장군이 1841년 2월 알제리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압델카데르는 타프나 조약을 추진했던 부조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고무되었지만, 부조의 전술은 알제리 정복을 최종 목표로 삼아 전멸 작전을 펼치는 것으로 바뀌었다.[6]

압델카데르는 게릴라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1842년까지 10년 동안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종종 프랑스와 전술적 휴전을 맺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권력 기반은 알제리 서부에 있었고, 그곳에서 그는 부족들을 프랑스에 대항하여 연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기사도로 유명했으며, 프랑스 포로들에게 먹일 음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석방하기도 했다.

1842년 초까지 그의 투쟁은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토마 로베르 부조 원수는 압델카데르가 사용하는 게릴라 전술에 적응하면서 저항을 진압했다. 프랑스군은 원주민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주민들이 지도자를 버리도록 굶주리게 하기 위해 시골에서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1841년까지 그의 요새는 거의 파괴되었고 그는 오랑 주 내륙을 방황해야 했다. 1842년, 그는 틀렘센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모로코와의 통신선은 효과적이지 않았다. 그는 휴식을 위해 모로코 국경을 넘을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이슬리 전투에서 모로코를 격파했다.[6] 그는 모로코를 떠났고, 시디 브라힘 전투에서 시디 브라힘을 점령함으로써 프랑스와의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6]

압델카데르는 결국 항복을 강요받았다. 서부 카빌리아의 카빌족을 제외하고 동부 부족들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이 반란 진압에 기여했으며, 1844년 탕헤르 조약 이후 모로코의 압드 알 라흐만의 칙령으로 에미르는 그의 왕국 전체에서 불법화되었다.[11]

모로코의 압드 알 라흐만은 에미르가 모로코인들을 격파하고 투옥한 지 6개월 후 압델카데르를 공격하고 그의 보급품을 파괴하기 위해 비밀리에 병사들을 보냈다.[13] 모로코인들은 아구에딘 전투에서 또 다른 공세를 펼쳤지만, 압델카데르에게 세 번의 군사적 교전에서 모두 패배했다. 이후 압델카데르는 모로코에서 철수하여 협상을 위해 프랑스 영토로 들어가는 선택을 했다.[13]

1847년 12월 23일, 압델카데르는 알렉산드리아 또는 아크레로 갈 수 있다는 약속을 받고 루이 쥐쇼 드 라모리시에르 장군에게 항복했다.[6]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이틀 후 그의 항복은 프랑스 알제리 식민지 총독인 앙리 다르리앙 공작에게 공식화되었으며, 압델카데르는 그에게 상징적으로 그의 군마를 넘겨주었다.[11]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라모리시에르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압델카데르는 프랑스로 수송되었고, 동쪽으로 가는 것이 허용되는 대신, 결국 감금되었다.[6][11]

앙부아즈의 묘(유폐 중에 사망한 많은 지지자들과, 아브델카데르의 아내, 형제, 두 명의 자녀가 잠든 곳)


항복 당시(1847년) 알제리 총독은 7월 왕정에서 즉위한 루이필리프 1세의 아들인 오마르 공 앙리 도를레앙이었으며, 앙리 도를레앙은 아브델카데르 등을 포로로 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54] 그러나 1848년 2월 혁명으로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성립되자 앙리 도를레앙은 아버지 루이필리프 1세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고, 후임 공화 정권은 약속을 어기고 아브델카데르를 포로로 잡았다.[55] 처음에는 아브델카데르와 그의 가족 및 25명의 지지자를 프랑스 툴롱 요새로 옮기고, 그 다음에는 성에 수감했으며, 1848년 11월부터는 앙부아즈 성에 유폐했다.

6. 석방과 시리아 망명



아브델카데르는 프랑스에 억류되어 툴롱, 포를 거쳐 1848년 11월 앙부아즈 성으로 이송되었다.[6] 이후 1852년 석방되어 튀르키예 부르사를 거쳐 1855년 다마스쿠스로 이주했다.

1860년 다마스쿠스에서 드루즈파와 마론파의 충돌로 기독교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아브델카데르는 많은 기독교인을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켜 보호했다.[12] 이 공로로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를 수여하고 연금을 15만 프랑으로 인상했다.[15] 그리스, 프랑스 메이슨 기사단, 터키, 바티칸 등에서도 훈장을 받았으며, 에이브러햄 링컨과 영국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12]

1865년 나폴레옹 3세의 초청으로 파리를 방문해 큰 환영을 받았고, 1871년 알제리 반란에 아들이 가담하자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6]

6. 1. 루이 나폴레옹의 석방

1848년 혁명으로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았다. 그는 이전 정권과 단절을 꾀하며 아브델카데르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11] 에밀 드 지라르댕, 빅토르 위고 등 저명인사들의 석방 요구와 런던데리 경의 호소 등 국제적인 압력도 작용했다.[11]

1852년 10월 16일, 아브델카데르는 알제리를 다시는 방해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연간 10만 프랑의 연금을 받았다.[15] 이후 튀르키예 부르사를 거쳐 1855년 다마스쿠스 아마라 지구로 이주하여 신학과 철학 연구,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수피즘 지식과 언어 능력으로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 이자벨 버튼 부부, 제인 딕비 등과 교류했다.[19]

6. 2. 시리아 정착과 학술 활동

아브델카데르와 그의 가족 및 추종자들은 프랑스에 억류되었으며, 처음에는 툴롱의 포트 라말그, 포를 거쳐 1848년 11월에는 앙부아즈 성으로 이송되었다.[6] 앙부아즈 성의 습한 환경은 에미르와 그의 추종자들의 건강과 사기를 악화시켰고, 그의 운명은 에밀 드 지라르댕과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여러 저명인사들의 사회적 쟁점이 되었다. 미래의 프랑스 총리인 에밀 올리비에는 그의 운명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여론 운동을 벌였고, 런던데리 경은 앙부아즈에서 아브델카데르를 방문한 후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통령에게 에미르의 석방을 호소하는 서신을 보냈다.[11]

1852년 10월 16일, 아브델카데르는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후에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석방되었고, 알제리를 다시는 방해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조건으로 연간 10만 프랑의 연금을 받았다.[15] 이후 그는 튀르키예부르사를 거쳐 1855년에는 다마스쿠스의 아마라 지구로 이주하여 신학과 철학에 다시 전념하였다. 철학 논문을 썼으며, 이 논문의 프랑스어 번역본은 1858년에는 ''Rappel à l'intelligent, avis à l'indifférent''(지적인 사람에게 드리는 알림, 무관심한 사람에게 드리는 통지)라는 제목으로, 1877년에는 ''Lettre aux Français''(프랑스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또한 아라비아 말에 관한 책을 썼다.

시리아에 머무는 동안, 아브델카데르는 프리메이슨 활동을 하며 프랑스 지식인 사회와 가까이 지냈다.[16][17] 다마스쿠스에 있는 동안, 그는 제인 딕비,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 이자벨 버튼 부부와도 친분을 쌓았다. 아브델카데르의 수피즘에 대한 지식과 언어 구사 능력은 버튼의 존경과 우정을 얻었고, 그의 아내 이자벨은 그를 "모든 면에서 술탄"이라고 묘사했다.[19]

나폴레옹 3세는 "아랍 왕국" 구상을 위해 아브델카데르에게 협력을 요청했고, 아브델카데르는 "알제리를 혼란시키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는 대신 연간 10만 프랑의 연금을 받으며 서약을 평생 지켰다.[61] 석방 후, 튀르키예부르사를 거쳐 시리아다마스쿠스Al-Amarah, Syria|아마라 지구영어로 이주했다. 이 땅에서 수피즘과 아라비아의 말에 관한 논문 등을 다국어로 집필하고 출판했다.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과 Isabel Burton|이자벨 버튼영어 부부, 제인 디그비 등 유명인들과 교류 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버턴 부부는 그의 전기에서 알카디르의 신학 지식과 어학 능력을 칭찬했다.[62]

6. 3. 1860년 다마스쿠스 사건

1860년 7월, 드루즈파와 마론파 간의 갈등이 레바논 산에서 다마스쿠스까지 확산되면서, 지역 드루즈파는 기독교인 구역을 공격하여 12,000명 이상을 살해했다. 아브델카데르는 이전에 프랑스 영사와 다마스쿠스 의회에 폭력이 임박했음을 경고했으며, 폭력이 발생했을 때 여러 외국 영사관 수장들과 자비의 수녀회와 같은 종교 단체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을 그의 집으로 피신시켰다.[12] 그의 장남들은 위협받는 기독교인들에게 그의 보호 아래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거리에 파견되었고, 많은 생존자들은 아브델카데르 자신이 그들을 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폭동이 진정되면서 시리아에서 나온 보고서는 아브델카데르의 두드러진 역할을 강조했고, 상당한 국제적 인정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그의 연금을 150,000 프랑으로 인상했고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를 수여했으며,[15] 그는 또한 그리스로부터 구세주 그랑크루아를, 프랑스 메이슨 기사단으로부터 웅장한 별을, 터키로부터 메지디 훈장 1급을, 바티칸으로부터 비오 9세 훈장을 받았다.[12] 에이브러햄 링컨은 그에게 상감 권총 한 쌍(현재 알제 박물관에 전시)을, 영국은 금 상감 산탄총을 보냈다. 프랑스에서 이 사건은 19세기 전반에 프랑스의 적으로 여겨지던 인물이 박해받는 기독교인을 옹호하면서 "프랑스의 친구"가 된 놀라운 전환점의 절정이었다.[21][22][23][24][25][26][27][28]

7. 죽음과 유산

압델카데르는 1883년 5월 26일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했으며, 다마스쿠스의 위대한 수피 이븐 아라비 근처에 묻혔다.

1965년에 그의 시신이 수습되었고, 현재는 알제 엘 알리아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압드 엘-카데르는 스승인 이븐 아라비와 함께 다마스쿠스에 묻히기를 분명히 원했기에, 유해 이장은 논란이 되었다.

8. 평가 및 영향

압델카데르는 초기 경력부터 알제리 내부와 유럽 양쪽 모두에게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29][30] 특히 전쟁 포로에게 보여준 관용과 종교적 존중은 "전쟁 역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는 일"로 평가받았다.[31]

장 드 디외 술트는 1843년에 압델카데르를 샤밀,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와 함께 "당대 세 명의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꼽았다.[32]

압델카데르는 이븐 아라비의 ''메카 계시록'' (불라크 인쇄소, 1911년) 연구에 참여했으며,[33] 이 판본은 코냐 필사본을 바탕으로 한 표준 텍스트가 되었다.[33]

미국 아이오와주의 엘카데르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34] 2013년에는 올리버 스톤 감독이 그의 전기 영화 제작을 발표하기도 했다.[35] 버지니아 대학교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박사후 과정 펠로우십이 있다.[36]

2022년에는 프랑스 앙부아즈에 있는 그의 조각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37]

8. 1. 알제리 독립 운동에 끼친 영향

압델카데르는 알제리에서 프랑스 침략에 맞서 싸운 지도자로, 알제리 민족 운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71] 끈질긴 저항으로 "현대의 유구르타"라는 칭송을 받았다.[71]

그는 전쟁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하고,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보였다.[71] 1860년 다마스쿠스에서 기독교인 학살 위기가 발생했을 때, 많은 기독교인을 구출하여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71]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 원수 술트는 아브델카데르를 "현존하는 세 명의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꼽았다.[72] 파리 폐병사에는 프랑스 육군 장군들과 함께 아브델카데르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8. 2. 국제적 명성과 인도주의

1860년 7월, 드루즈파와 마론파 간의 갈등이 레바논 산에서 다마스쿠스까지 확산되었고, 지역 드루즈파는 기독교인 구역을 공격하여 12,000명 이상을 살해했다.[12] 아브델카데르는 이전에 프랑스 영사와 다마스쿠스 의회에 폭력이 임박했음을 경고했으며, 마침내 폭력이 발생했을 때 여러 외국 영사관 수장들과 자비의 수녀회와 같은 종교 단체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을 그의 집으로 피신시켰다.[12] 그의 장남들은 위협받는 기독교인들에게 그의 보호 아래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거리에 파견되었고, 많은 생존자들은 아브델카데르 자신이 그들을 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폭동이 진정되면서 시리아에서 나온 보고서는 아브델카데르의 두드러진 역할을 강조했고, 상당한 국제적 인정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그의 연금을 150,000 프랑으로 인상했고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를 수여했으며,[15] 그는 또한 그리스로부터 구세주 그랑크루아를, 프랑스 메이슨 기사단으로부터 웅장한 별을, 터키로부터 메지디 훈장 1급을, 바티칸으로부터 교황 비오 9세 훈장을 받았다.[12] 에이브러햄 링컨은 그에게 상감 권총 한 쌍(현재 알제 박물관에 전시)을, 영국은 금 상감 산탄총을 보냈다. 프랑스에서 이 사건은 19세기 전반에 프랑스의 적으로 여겨지던 인물이 박해받는 기독교인을 옹호하면서 "프랑스의 친구"가 된 놀라운 전환점의 절정이었다.[21][22][23][24][25][26][27][28]

1865년,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초청으로 파리를 방문했고, 공식 및 대중의 존경을 받았다. 아브델카데르는 그의 경력 초부터 알제리 내부는 물론 유럽인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으며,[29][30] 심지어 프랑스 군과 싸울 때도 그랬다. 그가 포로에게 보여준 "관대한 배려, 부드러운 동정심"은 "전쟁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었으며,[31] 그는 어떤 포로의 사적인 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기 위해 조심했다.

1843년 장 드 디외 술트는 압드-엘-카데르를 당시 생존한 세 명의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언했으며, 다른 두 명인 샤밀, 다게스탄의 3대 이맘과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도 무슬림이었다.[32] 알제리 내에서 프랑스 침략자에 대한 굴하지 않는 저항을 계속한 아브델카데르의 노력은 "현대의 유구르타"로 칭송받았으며, 알제리 민족 운동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다.[71] 또한 포로 및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도 칭찬받았으며, 특히 기독교도를 다수 구출한 1860년의 사건에서는 세계적으로 칭송받았다. 나폴레옹 시대의 군인인 술트 원수는 "현재의 3명의 위대한 남성" 중 한 명으로 아브델카데르를 꼽았다.[72]

8. 3. 문화적 영향

압델카데르는 초기 경력부터 알제리 내부와 유럽인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으며,[29][30] 심지어 프랑스 군과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포로에게 보여준 "관대한 배려, 부드러운 동정심"은 "전쟁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었고,[31] 그는 포로의 사적인 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1843년 장 드 디외 술트는 압드 엘 카데르를 당시 생존한 세 명의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언했는데, 다른 두 명은 샤밀, 다게스탄의 3대 이맘과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였으며, 이들 역시 무슬림이었다.[32]

압드 알 카디르는 불라크 인쇄소의 1911년 세 번째 판 이븐 아라비의 ''메카 계시록'' 연구에 참여했다.[33] 이 판은 이븐 아라비의 텍스트 수정본인 코냐 필사본을 기반으로 했으며, 이후 표준이 되었다.[33]

미국 아이오와주 엘카데르는 압델카데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마을의 설립자인 티모시 데이비스, 존 톰슨, 체스터 세이지는 프랑스 식민 권력에 맞서 싸운 그의 모습에 감명을 받아 1846년 새로운 정착지의 이름으로 그의 이름을 선택했다.[34]

2013년, 미국 영화 감독 올리버 스톤은 찰스 버넷이 연출할 영화 전기 영화 ''에미르 압드 엘-카데르''의 제작을 발표했다.[35] 현재까지 이 영화는 제작되지 않았다.

압드 엘 카데르 펠로우십은 버지니아 대학교 문화 심층 연구소의 박사후 과정 펠로우십이다.[36]

2022년 2월 6일, 프랑스 중부의 앙부아즈에서 압델카데르의 프랑스 조각상이 2월 5일에 훼손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이 훼손은 이민과 이슬람이 특정 후보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던 대통령 선거 운동 중에 발생했다.[37]

참조

[1] 서적 U.S. Army Area Handbook for Algeria https://books.google[...]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2024-05-21
[2] 간행물 The Amîr ʿAbd Al-Qâdir and the "Good War" in Algeria, 1832-1847 https://brill.com/vi[...] 2021-01-19
[3] 문서
[4] 서적 Emir Abd el-Kader: Hero and Saint of Islam World Wisdom 2012
[5] 문서
[6] 백과사전 Abdelkader https://archive.org/[...]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7] 서적 Encyclopedia of the Ottoman Empire
[8] 웹인용 Travels in Algeria, United Empire Loyalists https://tikhanovlibr[...] Tikhanov Library 2023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서적 The Life of Abdel Kader, Ex-sultan of the Arabs of Algeria: Written from His Own Dictation, and Comp. from Other Authentic Sources https://books.google[...] Chapman and Hall 1867
[14] 서적 Abd-el-Kader, sa vie politique et militaire https://books.google[...] Hachette
[15] 문서
[16] 서적 Historic Engagements with Occidental Cultures, Religions, Powers Palgrave Macmillan
[17] 웹사이트 Abd-el-Khader. A—Freemason. https://www.loc.gov/[...] 2023-01-11
[18] 간행물 Freemasonry in Egypt 1798-1921: A Study in Cultural and Political Encounters https://www.jstor.or[...] Taylor & Francis, Ltd. 2024-05-21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웹사이트 Commander of the Faithful: The Life and Times of Emir Abd el-Kader, A Story of True Jihad - Middle East Policy Council http://www.mepc.org/[...] 2019-06-29
[24] 서적 Commander of the Faithful, the Life and Times of Emir Abd El-Kader: A Story of True Jihad Monkfish Book Publishing Company 2008
[25] 문서
[26] 서적 Abd el-Kader, adversaire et ami de la France Pygmalion 1984
[27] 서적 France Overseas: A Study Of Modern Imperialism, 1938 https://books.google[...] Octagon Books
[28] 서적 Freemasonry in the Holy Land: or, Handmarks of Hiram's Builders https://archive.org/[...] Westphalia Press
[29] 문서
[30] 문서
[31] 서적 Life of Abd el-Kader: Ex-Sultan of the Arabs of Algeria 1887
[32] 서적 Abd-el-Kader sa vie politique et militaire Hachette 1863
[33] 웹사이트 al-Futuhat al-Makiyya Printed Editions https://ibnarabisoci[...] 2022-08-31
[34] 웹사이트 History of Elkader, IA http://www.elkader-i[...] 2014-01-22
[35] 뉴스 Oliver Stone to Executive Produce Biopic of Algerian Leader Emir Abd el-Kader http://www.thewrap.c[...] 2013-10-08
[36] 웹사이트 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 in Culture http://iasculture.or[...] 2019-06-29
[37] 뉴스 Emir Abdelkader: French sculpture of Algerian hero vandalised https://www.bbc.com/[...] 2022-02-06
[38] 문서 アージュロン(2002)
[39] 문서 松沼(2012)
[40] 문서 ストラ(2011)
[41] 서적 Emir Abd el-Kader: Hero and Saint of Islam World Wisdom 2012
[42] 서적 ミルクの歴史 株式会社原書房 2014-05-21
[43] 문서 ストラ(2011)
[44] 문서 ストラ(2011)
[45] 문서 ストラ(2011)
[46] 문서 ストラ(2011)
[47] 문서 ストラ(2011)
[48] 문서 ストラ(2011)
[49] 문서 1842年、フランス軍はオーレスの村を破壊し、洞窟に逃げ込んだリヤーフ族1,000人あまりを燻し殺す事件を起こす。この虐殺はフランス王国政府の調査委員会をして「我々が野蛮人として文明化させようとした人々を、我々は野蛮性においてはるかに凌駕した」と嘆かせた
[50] 문서 ストラ(2011)
[51] 문서 Dinesen
[52] 문서 Bouyerdene, p45-47 "scrupulous respect for the law, the foundation of which is humanity and justice"
[53] 문서 Life of Abd el-Kader: Ex-Sultan of the Arabs of Algeria 1887
[54] 문서 ストラ(2011)
[55] 문서 ストラ(2011)
[56] 문서 ストラ(2011)
[57] 문서 アージュロン(2002)
[58] 문서 ストラ(2011)
[59] 문서 ストラ(2011)
[60] 문서 平野(2002)
[61] 문서 Modern Algiera: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a Nation 2005
[62] 문서 Inner Life of Syria, Palestine and the Holy Land 1875
[63] 문서 Bouyerdene 2012, chapter 5
[64] 간행물 "Les nationalistes] refusent de reconnaitre le rôle d'ami de la France joué par l'émir à Damas sous le Second Empire. En 1860, en effet, Abd-el-Kader intervint pour protéger les chrétiens lors des massacres de Syrie, ce qui lui valut d'être fait grand-croix de la Légion d'honneur par Napoléon III" Service historique de l'Armée de terre 1998
[65] 간행물 "Notre ancien adversaire en Algérie était devenu un loyal ami de la France, et personne n'ignore que son concours nous a été précieux dans les circonstances difficiles" Amyot 1877
[66] 서적 Commander of the Faithful, the Life and Times of Emir Abd El-Kader: A Story of True Jihad Monkfish Book Publishing Company 2008
[67] 간행물 Following the Leader: A History and Evolution of the Amir ‘Abd al-Qadir al-Jazairi as Symbol 2007
[68] 서적 Abd el-Kader, adversaire et ami de la France Pygmalion 1984
[69] 간행물 France Overseas: A Study of Modern Imperialism (1938) https://books.google[...] Routledge 1967
[70] 문서 ストラ(2011)
[71] 서적 L'Algérie en 1880 https://archive.org/[...] Challamel, Paris 1880
[72] 서적 Abd-el-Kader sa vie politique et militaire Hachette 186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