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기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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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도 기사부로는 일본 제국의 군인 및 정치인으로, 사사야마 번 출신이다. 189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대만 수비대 등에서 복무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제9예비사단을 지휘했으며, 중장으로 진급하여 관동군 뤼순 요새 사령관을 역임했다. 이후 정치에 참여하여 중화민국 신민회 고문, 대정익찬회 부회장, 대일본익찬장년단 단장 등을 지냈으며, 도조 내각의 무임소 국무대신,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A급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석방되었고, 1954년 사망했다.

안도 기사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안도 기사부로
출생일1874년 2월 11일
출생지효고현
사망일1954년 5월 10일
직업육군 군인, 내무대신
군 경력
소속일본 제국
군종육군
복무 기간1899년–1939년
최종 계급중장
정치 경력
소속 정당대정익찬회
직책제59대 내무대신
내각도조 내각
임기 시작1943년 4월 20일
임기 종료1944년 7월 22일
기타
출신 학교육군사관학교
관련 링크謹話 神宮御親拜の儀を拜承し奉りて - 역사적 음원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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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및 군 경력

효고현 사사야마 번의 전직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1899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11기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 보병 장교로 임관했다. 군 복무 중 미국 파견, 뤼순 요새 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중장까지 진급했다. 1934년 예비역에 편입되었으나, 제2차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1937년 현역으로 복귀하여 사단장을 맡았고 1939년 다시 퇴역했다.

2.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효고현 사사야마 번 출신의 전직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호메이 기주쿠 교장을 지낸 안도 나오키(나이토 츄쿄의 차남)이며, 안도 기사부로는 그의 차남이다. 호메이 기주쿠 중학교를 졸업했다.

1899년 1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11기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00년 6월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01년에는 대만 수비 보병 제10대대 부속 및 제10여단에서 복무했으며, 1902년 육군 보병 중위로 진급했다. 1904년 10월에는 보병 제10연대 중대장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 육군 보병 대위로 진급했다. 1913년 8월에는 육군 보병 소령으로 진급했다.

1918년 무관으로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파견 중 육군 보병 중령으로 진급하여 귀국했다. 귀국 후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일본 육군대신의 인사국에서 근무했다. 1922년 육군 보병 대령으로 진급하여 제73보병 연대를 지휘했고, 이후 보병 제2연대 연대장을 맡았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다시 육군성 인사국에서 근무했다.

1927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1929년까지 보병 제30여단장을 지냈으며, 1929년부터 1932년까지는 제1사단 (일본 제국 육군) 참모로 배속되었다.

1932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1934년까지 관동주 뤼순 요새 사령관을 지냈다. 1934년 3월 5일 대기 명령을 받았고, 같은 달 24일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제2차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1937년 9월 현역으로 복귀하여 1939년 3월까지 유수 제9사단장(제9예비사단)을 역임했다. 이후 1939년 다시 퇴역했다.

2.2. 미국 파견 및 진급

1918년 (다이쇼 7년), 안도는 무관 신분으로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파견 기간 중 육군 보병 중좌로 진급하여 귀국했다. 귀국 후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일본 육군대신의 인사국에서 근무했다. 1922년 (다이쇼 11년)에는 육군 보병 대좌로 진급하여 보병 제73연대를 지휘했고, 이후 보병 제2연대 연대장을 맡았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는 다시 육군성 인사국으로 복귀하여 근무했다.

1927년 (쇼와 2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1929년까지 보병 제30여단장을 지냈고, 1929년부터 1932년까지는 제1사단 참모로 활동했다.

1932년 (쇼와 7년)에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1934년까지 관동주의 뤼순 요새 사령관을 맡았다. 1934년 (쇼와 9년) 3월 5일 대기 명령을 받았고, 같은 달 24일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곧이어 퇴역했으나, 1937년 제2차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1939년 (쇼와 14년) 3월까지 유수 제9사단장을 지휘했다. 그는 1939년에 다시 퇴역했다.

2.3. 중장 진급 및 관동주 복무

1932년 (쇼와 7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관동주의 뤼순 요새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34년 (쇼와 9년) 3월 5일 대기 명령을 받고 같은 달 24일 예비역으로 편입될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예비역 편입 후 곧 퇴역하였으나, 1937년 제2차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같은 해 9월 현역으로 복귀하여 유수 제9사단의 사단장을 맡았다. 그는 1939년 (쇼와 14년) 3월까지 이 직책을 수행한 후 다시 퇴역하였다.

3. 정치 경력

1934년 육군 중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고, 1937년 잠시 군에 복귀하여 유수 제9사단장을 역임한 뒤 1939년 완전히 군을 떠났다.

본격적인 정치 활동은 1939년 9월 중화민국 신민회 고문을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대정익찬회 부총재, 대일본익찬장년단 단장 등 일본 제국주의 전시 체제를 뒷받침하는 주요 관변 조직의 핵심 직책을 역임했다.

1942년에는 도조 히데키의 측근으로서 도조 내각에 입각하여 무임소 국무대신을 시작으로 내무대신, 방공총본부 장관 등 요직을 거쳤다. 이는 당시 군국주의 체제 강화에 기여한 행보로 평가된다.

1944년 7월 대신직에서 물러난 뒤, 같은 달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임명되어 1945년 12월까지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인 1945년 12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으로 A급 전범 혐의를 받아 체포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1948년 석방되었으나 공직 추방 처분을 받았다.

3.1. 대정익찬회 활동

1939년 9월, 중화민국 신민회 고문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부터 1941년 10월까지 동회의 부회장을 역임했다. 1941년 10월, 대정익찬회 부총재가 되었고, 이듬해인 1942년에는 대일본익찬장년단 단장도 맡았다.

1942년, 도조 히데키의 측근으로서 도조 내각의 무임소 국무대신이 되었으며, 대일본익찬장년단 중앙 본부장도 겸임했다. 1943년, 도조 내각의 내무대신이 되었고, 더 나아가 방공총본부 장관까지 맡았다.

3.2. 도조 내각 참여

1939년 9월, 중화민국 신민회 고문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부터 1941년 10월까지 동회의 부회장을 역임했다. 1941년 10월에는 대정익찬회 부총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대일본익찬장년단 단장도 맡았다.

1942년 도조 히데키의 복심으로서 도조 내각의 무임소 국무대신이 되었다. 또한, 대일본익찬장년단 중앙 본부장도 겸임했다. 1943년에는 도조 내각내무대신으로 임명되었고, 더 나아가 방공총본부 장관도 겸했다.

1943년 9월 11일, 전날 발생한 돗토리 지진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돗토리현을 시찰했다. 1944년 1월, 제84회 제국 의회에서 육군사관학교 동기인 중의원 의원 시왕천 노리타카가 유대인에 관해 질문하자, "인종 차별의 철폐는 절대적인 평등 시각이 아니라, 안정되고 인생의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1944년 7월, 대신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달 21일, 귀족원 칙선 의원에 임명되어 1945년 12월 13일까지 재임했다.

1945년 12월 2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내무대신 경력을 가진 안도를 체포하도록 일본 정부에 명령했다 (제3차 체포자 59명 중 한 명). 같은 해 A급 전범 혐의로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948년 12월 석방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공직 추방되었다.

3.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12월 2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내무대신 경력을 가진 안도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일본 정부에 내렸다 (제3차 체포자 59명 중 1명). 같은 해, A급 전범 혐의로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공직 추방되었으며, 1948년 12월에 석방되었다.

4. 인물 및 평가

육군사관학교에서는 도조 히데키보다 6기 선배였으나, 도조 정권 하에서는 일관되게 도조의 심복이자 분신처럼 행동했다. 특히 내무대신으로 재직할 당시 반(反)도조 움직임에 대해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1943년 10월 나카노 세이고 사건에서 나카노 세이고 검거와 관련해서는 "당국으로서는 철저하게 하고 싶다. 법의 미비를 보완하는 것은 인간이다. 하물며 전시 중이다"라고 발언하며, 중의원 의원의 신분 보장을 넘어서는 강압적인 자세를 드러냈다.

5. 가족 관계

* 사위: 나카하라 시게토시 (육군 대좌)

6. 서훈

* 1944년(쇼와 19년) 7월 1일 - 정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