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니코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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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로니코스 1세는 1182년부터 1185년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그는 마누엘 1세의 친척으로, 젊은 시절 여러 여성과의 추문으로 유명했으며, 마누엘 1세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알렉시오스 2세가 즉위한 후 정권을 장악하여 라틴인 학살을 자행하고 알렉시오스 2세를 살해한 후, 12살의 아녜스를 황후로 맞이했다. 그는 귀족의 권력을 제한하고 부패를 막으려 했으나, 공포 정치로 인해 반발을 샀고, 외세의 침입으로 인해 몰락했다. 결국 반란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그의 통치는 콤네노스 왕조의 종말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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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니코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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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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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
왕조 | 콤니노스 왕조 |
출생 | 약 1118년–1120년 |
사망 | 1185년 9월 12일 (64–67세) |
사망 장소 | 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의 이스탄불, 튀르키예) |
매장지 | 알려지지 않음 |
통치 | |
즉위 | 1183년 9월 |
퇴위 | 1185년 9월 12일 |
이전 통치자 | 알렉시오스 2세 콤니노스 |
계승자 |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
공동 황제 | 요안니스 콤니노스 |
공동 황제 유형 | 공동 황제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
어머니 | 이리니 |
배우자 | 알려지지 않은 첫 번째 아내 프랑스의 아녜스 |
자녀 | 마누엘 콤니노스 요안니스 콤니노스 마리아 콤니니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이리니 콤니니 |
이름 |
2. 어린 시절
안드로니코스는 세바스토크라토르 이사키오스의 아들이자 황제 마누일 1세 콤니노스의 친척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여러 여성들과의 추문으로 동로마 제국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마누엘의 조카딸인 에우도키아 콤네나 공주와 염문을 일으켰고, 킬리키아로 파견되었을 때는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의 동생이자 마누엘 황제의 황후 마리아의 동생인 필리파와도 연애 사건을 일으켜 마누엘과 보두앵의 분노를 샀다.[1]
1182년 안드로니코스는 군사를 일으켜 수도로 진격하여 정권을 탈취했고, 이듬해 9월 소년 황제 알렉시오스 2세 콤니노스와 함께 공동 황제에 올랐다. 두 달 후 안드로니코스는 알렉시오스 2세를 살해하고 그의 황후였던 12살의 아녜스와 결혼하여 단독 황제가 되었다.
마누엘의 소환 시도를 피해 아모리에게 의탁했으나, 그곳에서 보두앵 3세의 미망인이자 자신의 친척인 21세의 테오도라 콤네나와 사랑에 빠졌다. 마누엘의 분노를 피해 다마스쿠스의 누르 앗딘에게 의탁하여 아나톨리아 변경에서 살았다.[1]
테오도라와 두 자녀가 트라페주스 총독에게 붙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자, 안드로니코스는 마누엘에게 용서를 구했다. 마누엘은 안드로니코스를 용서하고 흑해 연안의 작은 성에서 살게 했다.[1]
3. 통치 기간
안드로니코스는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펼치고, 군사 귀족을 탄압했다. 이러한 공포정치로 그의 인기는 사라졌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헝가리 왕 벨러 3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냐와 동맹을 맺고 제국을 침략하여 베오그라드, 니시, 사르디카 등을 유린했다. 소아시아에서는 토지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키프로스에서는 이사키우스 콤네노스가 독립을 선언했다.
3. 1. 제위에 오르다
1180년 마누엘 황제가 죽고 10살짜리 아들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가 즉위하고 황후 마리아가 섭정을 시작했는데 백성들의 불만이 점점 커졌다.[1] 젊은 시절의 치정에 얽힌 유명세를 타고 있던 안드로니코스는 이를 기회로 군사를 일으켜 1182년 8월 수도로 진격했다. 그의 반란을 막으려는 군대는 없었고 서방 황후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백성들이 지지해준 덕분에 안드로니코스는 쉽게 정권을 탈취했고 이듬해 9월 소년 황제 알렉시오스와 함께 공동 황제에 올랐다. 불과 두 달 후 안드로니코스는 소년 황제마저 살해하고 소년 황제의 황후였던 12살의 아녜스를 자신의 황후로 맞이한 다음 단독 황제에 즉위했다.[1]
3. 2. 개혁 정치와 공포 정치
안드로니코스 1세는 마누엘 1세 사후 쇠퇴하던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했다.[1] 관직 매매를 금지하고, 부정부패를 적발했으며, 세금을 감면하고 빈민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다. 초기에는 이러한 개혁이 민중의 큰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귀족과 대지주들은 이러한 개혁에 반발했고, 안드로니코스는 개혁을 강압적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관료들에게 "부정을 그만두거나, 사는 것을 그만두라(처형)"고 말하거나, "내 자손에게 해가 되지 않는 상인이나 장인 등을 남겨두고 모두 죽여 버리자"라고 호통치는 등 공포 정치를 펼쳤다.[1] 이로 인해 유능한 인재들이 희생되었고, 민심 또한 등을 돌렸다.
안드로니코스는 마누엘 1세와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던 서유럽인들을 탄압했다. 1182년 5월, 안드로니코스 지지 세력은 폭력배들과 함께 제노바인과 피사인들의 거주지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노인과 병자들이 살해되고, 가톨릭 교회가 불탔으며, 성직자들은 고문을 당했다. 구호 기사단 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로마 교황의 사절마저 살해되었고, 많은 포로들이 노예로 팔려나갔다. (라틴인 학살)[1]
3. 3. 외세의 침입과 몰락
시칠리아 왕 ''선한 왕'' 굴리엘모는 대함대를 이끌고 제국을 침공했다. 1185년 6월 시칠리아군은 두라초를 함락시켰고, 거침없이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여 8월에는 테살로니키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비잔티움 제2의 도시였던 테살로니키는 시칠리아군에 함락되어 약 7,000명의 그리스인이 학살당했다.[1] 안드로니코스는 테살로니키를 구원하기 위해 소규모 군대를 다섯 차례 파병했으나 모두 패배했다.
제국이 침략군에게 유린당하는 동안, 안드로니코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위를 강화하고 함선 100척을 동원하여 마르마라 해를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는 점차 포악하고 잔인한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다. 1185년 9월 11일, 황제의 미움을 받은 귀족 이사키오스 앙겔로스는 안드로니코스가 수도를 비운 사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시민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미 민심을 잃은 안드로니코스는 황급히 도망쳤으나, 결국 붙잡혀 오른팔이 잘리고 투옥되었다가 한쪽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다. 그는 성난 군중에게 끌려나가 비참하게 처형당했다.
마누엘 1세 치하에서 발칸 지역 동맹이 무너진 것도 안드로니코스의 잔혹한 통치 때문이었다. 헝가리 왕국의 벨라 3세는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복수를 명분으로 1183년 제국을 침공했으나 1184년에 격퇴되었다. 이 분쟁 중에 스테판 네마냐는 세르비아의 독립을 확보했다. 1184년, 안드로니코스의 사촌 이삭 콤네노스는 키프로스를 점령하여 독립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1185년, 노르만족이 발칸 반도로 침입하여 수도로 진격해 오자, 공황 상태에 빠진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과 귀족들은 분노하여 안드로니코스의 친척인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를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안드로니코스는 불과 2년 만에 폐위되었고, 수도 시민들에게 능지처참을 당했다.
4. 평가
안드로니코스 1세는 황제로서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즉위 과정의 문제점과 선대 황제로부터 물려받은 부정적인 유산, 그리고 지나치게 가혹한 통치 방식 때문에 개혁에 실패했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에게는 두 개의 병이 있는데, 하나는 선으로 가득 차 있고, 다른 하나는 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평가했다.[2]
그의 개혁 정치는 귀족 세력을 억압하고 부패를 근절하려는 시도였으나, 지나친 공포 정치는 백성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특히, 1182년에 일어난 라틴인 학살[1]은 서방 세계와의 관계를 악화시켜 훗날 제4차 십자군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 알렉시오스는 1204년 트라페준타 제국을 건국하여 콤네노스 왕조의 후계를 자처했다.
5. 가족 관계
안드로니코스 1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이름 미상)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2]
배우자 | 자녀 (이름, 출생-사망) | 비고 |
---|---|---|
첫 번째 부인 (이름 미상) | ||
프랑스의 아그네스 | 자녀 없음 |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의 황후였음. |
테오도라 콤네네 (정부) |
참조
[1]
서적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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